존 롤스의 <정의론>이 1971년에 출간되자, 철학이 비현실적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사람들이 철학자가 정치와 현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나왔을 때, 한국 사회의 독자들도 철학이 어렵지 않다거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다.

<왜 도덕인가>(안진환 이수경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역시 철학계와 일반인 모두를 독자로 삼고 쓴 현실 정치에 대한 정치철학자의 정치 비평 에세이 모음집이다. 이 책을 읽는 미국의 학생 독자들이 정치철학 교과서로 집필된 책보다 낫다는 평가를 할 만큼 현실에 대한 안목을 줄 뿐만 아니라,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 이 책을 통해서 다른 쪽을 알게 된다는 호평도 받았다.

샌델의 정치철학은 공동체주의 쪽으로 분류되곤 한다. 샌델은 1981년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초판)에서 롤스의 <정의론>이 칸트 철학의 전통에 서 있는 것을 놓고 비판을 하면서, 이른바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의 물꼬를 텄다. 그는 1998년에 이 책의 2판의 서문에서 "자신은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그는 최근에 국내에 소개된 학생들이 인터뷰를 해서 만든 책(<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에서 자신을 '시민 참여 공화주의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전히 그를 공동체주의자 진영에 포함시킨다.


▲ <왜 도덕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 이수경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한국경제신문
그렇다면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의 <왜 도덕인가>라는 책이 한국 사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책의 본래 제목은 "공공 철학(public philosophy)"이다. 애초에 샌델의 공화주의는 미국 정치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 비롯한 것이다. 시장 위주의 경제적 합리성이나 소비자로서의 권리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도덕에 대한 비평이다.

이 때문에 그는 포럼을 통한 공적 토론을 강조한다. 또 국가와 개인 사이에 놓인 중간 사이즈의 공동체, 즉 시민사회 제도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한다. 다시 말해서 도덕 교육의 장으로서의 학교와 마을, 도시 등의 가치를 존중함으로써 시민을 소비자로서만 사는 게 아니라 포럼의 주인공으로, 정치 참여의 역량을 갖춘 민주 시민으로 서게 된다는 것이다.

'시민 참여 공화주의'와 덕 윤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주장이다. 최근 그는 영국의 한 대학에서의 윤리 강좌에서도 시장에서 뭐든지 사고팔아서야 되겠느냐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런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경제 논리의 과잉과 소비 문화의 과잉, 그리고 시민들이 스스로에게 떨어지는 사회정치적 환경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있으면서 불안해하는 현실이 있다.

샌델은 자유와 자아에 대한 공화주의적 인식과 자유주의적 인식을 비교하면서, 자유주의 이전의 미국 사회에서 자유의 양은 민주 제도의 역할과 힘의 분산에 따르는 것이었는데, 국가에 힘이 집중된 이후의 시점에서 자유란 단지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권리로서만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샌델은 경제적인 삶에 치우진 근대적 삶의 형식을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조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용납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공동체의 가치나 시민의 도덕 교육, 정치 참여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가치를 외친다. 사실 시민의 정치 참여 부분이나 도덕 교육에 대한 강조는 민주주의 이론과도 직결된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정당성과 권력의 원천인 정체를 의미할 때 다수주의와 관련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자치나 자기결정의 의미를 가질 때 공화주의적 시민 참여와 관련되는 것이다.

시민의 도덕 교육과 유교 전통을 생각해보자. 법적인 권리는 최후의 보루로 남기고 가족 내에서의 도덕 교육에 대한 강조와 가족에 대한 헌신, 그리고 타인의 물질적 복지에 대한 관심, 교육에서의 능력주의 등은 유교의 중심 가치로 일컬어지는데, 이런 유교 전통으로부터 공동체주의적 가치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서구의 개인주의 과잉에 대한 우려로부터 유래한 공동체주의를 유교 전통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은 동아시아의 가치와 근대 세계에 대해 연구한 다니엘 벨이 일찍이 던졌던 질문인데 마침 지금 우리에게 적절한 문제가 아닐까?

벨은 샌델이 <민주주의의 불만>이라는 책을 통해서 근로자가 경영에 참여하고 기업 운영에 대해 공동 책임을 가지게 함으로써 시민적 역량을 키우자는 브랜다이스를 인용한 부분을 고찰하면서, 반문한다. 여러 공동체에 대한 헌신 사이의 충돌 문제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말하자면 공적인 생활에 대한 헌신은 가족 생활에 대한 헌신과 상충하는데 양쪽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일본의 직장에서의 강한 유대가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과로사를 유발하고 가족과 식탁에 앉아 저녁식사를 할 권리를 앗아갈 수도 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어떤가. 민주주의 정체를 확립하는 데에 가족주의의 결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쭉 있어 왔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가족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 사실이고, 정치인들의 정치 과정도 부패시켰는데, 시민의 공공생활에 대한 참여가 가능하지 않아, 규제를 다시 관료주의 과정에 맡기는 형국으로만 돌아간다면, 국민들의 정치적 수동성은 샌델의 시민 참여 민주주의와 멀어져만 갈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샌델이나 서구 공동체주의자들이 경제적 합리성에 치우치는 정치에 의해 시민이 정치 과정에서 소외되고 공동체의 가치는 저평가되는 데 대해, 공동체주의를 들고 나왔을 때에 유교적 전통을 가진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유교주의가 다른 가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지만, 서구 공동체주의의 가치 다원주의로부터, 다른 가치의 가능성을 일깨울 수가 있다거나, 가족에 중한 짐을 지우는 데 대해서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이 근대 세계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든지, 능력주의 임용으로 인해 생기는 시민의 정치적 배제를 다른 방식으로 가능하게 한다든지, 우리의 전통이나 습관이나 관습에 대한 재검토로부터 출발해서 샌델을 봐야 할 것이다.

이 책 <왜 도덕인가>의 에세이들을 아우르는 주제가 한눈에 부각되지는 않지만, <정의란 무엇인가>의 주제를 현대의 이슈에 적용해서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개인의 권리나 공정성, 평등이라고 하는 자유주의적인 가치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미국의 민주 사회적 기반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고, 정치적인 논란이 도덕의 문제를 직접 다룰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철학적 윤리학자들에게는 낙태나 줄기세포 문제를 종교나 정치계에서만 논의하게 놔두는 데 대해 비판하고, 정치권에 대해서는 생명윤리의 문제 등을 직접 부딪쳐 논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계와 학계와 사회를 향해 자신의 논리를 일관되게 꾸준히 주장하는 모습을 배울 수 있다.

샌델의 비판대로 자유주의의 한계는 명백하다. 사적 합리성의 추구가 공적 합리성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제도적 공리주의나 게임이론 등의 이론으로 현실을 보면서 공적 합리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만족스러운 정책 결정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주의만의 한계가 아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연속 종합 1위를 달리는 와중에 김순덕 논설위원이 <동아일보>에 쓴 칼럼('모두를 미소 짓게 하는 정의는 없다')에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오히려 자유주의 쪽 입장을 더 관심 있게 들여다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아마르티아 센이라고 하는 정치철학자도 주목하자고 주장했다.

아주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센은 개발경제학자이지만 경제와 윤리, 민주주의와 정체성, 인류보편의 가치 등을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의 통찰에서도 배울 게 많다. 그는 센댈과 다르게 오히려 정체성(개인의 인격적 정체성에서부터 종교나 국가 정체성에 이르기까지)이 도덕과 평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참에 롤스에게서 정치적 자유의 평등과 최저 수혜자에 대한 관심, 샌델에게서 다수주의에 대한 우려와 시민의 공적 토론의 중요성과 이를 고취하는 교육에 대한 강조, 센에게서 구체적인 복지의 내용에 대한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공부하는 분위기가 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말하지만, 롤스, 샌델, 센 등의 이론은 그들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사유에서 나온 것이다. 다른 사회의 경험과 정치 비평에서 배우고 우리 사회의 관습과 의식과 제도를 지탱하는 전제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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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들까. 교양은, 이것이라 딱 꼬집어 말하기도 쉽지 않지만 어쨌거나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은 아니다. 때문에 문자든 언어든 '교양'을 접하게 되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겁다거나 젠체하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일 터다.

그러니 <교양노트>(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석중 옮김, 마음산책 펴냄)를 척 보는 순간 만만치 않은 책이라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이거 출판사에선 '인문서'로 분류하지만, 그리고 교양을 표방했지만 주눅들 것 없다. 에세이집이다. 물론 에세이라 해서 모두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쉽고 재미있다.

이유가 여럿이다. 우선 지은이가 만만하다. 2006년 난소암으로 56세에 세상을 떠난 요네하라는 체코에서 교육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 어 동시 통역사를 했는데 문화 간의 미묘한 차이를 포착해 내는 솜씨가 뛰어났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석학도 아닌 외국 저자로선 드물게 에세이집이 이미 10권이나 나왔다. 글이 지닌 매력 없이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여기에 <교양노트>는 번역서 제목이다. 원제는 <한낮의 별하늘>이다. 지은이가 소녀 시절 읽은 러시아 시인 올가 베르골츠의 '낮별'에서 착안한 것이다. 한낮의 태양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늘 떠있는 별처럼, 현실에 존재하는데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의미다. 원저 제목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출판사에서 번역서 제목을 '고상하게' 바꾼 것이다. (첫 편에 원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교양 노트>(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석중 옮김,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무엇보다 <요미우리신문>에 3년 가까이 연재했던 글 중에 80편을 가려 묶은 것이다. 평범한 독자를 대상으로 한 글이란 뜻이다. 신문 칼럼이란 학술적 깊이를 자랑하는 글이 아니다. 시사 이슈에 대해 목청을 높이는 수준이다. 게다가 요네하라의 글은 일요일 판에 실렸다. 주말 판 신문들은 화제와 재미를 좇게 마련이다.

그러니 골치 아픈 문제들에 대해 고담준론을 펼칠 일이 없다. '고령화와 저출산'처럼 사회 문제를 언급한 글도 있지만 대부분 일상을 소재로 스케치하듯 쓴 글이다. 그것이 저자 특유의 명랑한 사고와 경쾌한 문체에 힘입어 읽으면 스노보드를 타고 설원을 미끄러지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러시아와 관련된 화제가 많지만 문화의 이면에 감춰진 의미를 들춰내는 눈길이 예리한 덕분이다.

요네하라는 디즈니랜드가 무섭다고 봤다. (물론 도쿄 디즈니랜드를 본 소감이다.) 유령의 집, 모조 코끼리와 악어 등이 배회하는 열대 정글, 해적이 날뛰는 카리브 해 등 매혹적인 볼거리, 즐길 거리가 즐비하지만 그는 거기서 자본주의의 기본 구조를 본 탓이다. 놀이 시설에 들어가면 최소한의 능동적 힘으로 싸움도, 모험도 즐길 수 있어 방문객은 눈과 귀만 필요한 방관자가 된다.

요네하라는 이 풍경을 '모든 것을 돈벌이 도구로 보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결국 인간의 능동적 힘을 상품화한 것'으로 읽었다. 그러면서 "신상품 개발은 인간의 능동적 힘을 끝없이 깎아내리는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말 한마디로 넘어가는 세태를 꼬집는 대목에선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불상사의 책임을 져야 할 정치가도, 성적이 부진한 야구 감독도, 스캔들의 중심에 선 탤런트도 "열심히 하겠습니다"란 한마디로 면죄부를 받고 호감이 가는 인물로 인정받는 현실을 못마땅해 한다. 지은이는 "잘못된 방법으로 열심히 하다가 다치면 곤란하고, 비리를 저지른 의원이 그 분야에서 더 열심히 매진해서야 되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어떤 식으로 열심히 하느냐다. 이상한 일을 열심히 하면 주변에 폐가 될 뿐"이라 일깨운다.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지.

물론 요네하라의 글은 인문적 깊이로 빛이 난다. TV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삼각관계'를 파고든 글이 그렇다. 이것을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모두 '트라이앵글'이라고 쓰는데, 이는 19세기 말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작품 '헤다 가블러' 2막 1장에 처음 쓰였단다. 남부 유럽과 중남미 각국의 낮잠 풍습을 뜻하는 '시에스타'란 말이, 고대 로마 사람들이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시간을 사등분해서 정오부터 오후 3시쯤까지를 시에스타(제6)라 부른 데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요네하라 특유의 유머 감각이 책 읽는 재미를 돋운다. "이상적 인간이란, 영국인처럼 요리를 잘하고, 프랑스인처럼 외국인을 존경하고, 독일인처럼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이탈리아인처럼 성실하고, 미국인처럼 외국어가 능숙하고, 러시아인처럼 술을 자제하고, 일본인처럼 개성이 넘치는 사람"이란 러시아 재담을 어디서 만날까.(이건 모두 뒤집어 읽어야 한다.)

그루지야의 한 선술집 게시판에서 봤다는 '음주가 종교보다 바람직한 8가지 이유'는 어떤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사람은 아직 없다, 마시는 술의 상표를 바꿨다는 이유로 배신자 취급을 당하지 않는다" 등인데 백미는 마지막 두 가지. "술을 많이 팔기 위해 속임수를 쓰면 법에 따라 확실히 처벌 받는다" "술을 실제로 마시고 있다는 것은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다"에는 자못 날카로움마저 느껴진다.

좋은 에세이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그 기준이 각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정보, 고개를 주억거릴 통찰력, 곱씹어 보고 싶은 글맛이란 세 박자를 갖춰야 한다고 본다. 요네하라의 글은 이 중 두 가지를 갖췄다. 동시 통역사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했고 이를 특유의 호기심으로 요리해낸 덕분에 이야기가 풍성하다.

"만인이 법적으로 평등한 사회는 동시에 만물이 돈의 위력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 어떤 권위나 신비도 돈으로 환산되고 평가되면서 그 베일이 벗겨진다"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학살하고 수천만 명을 도탄에 빠뜨리면서까지 달성하려 했던 (인종 획일화) 대사업을, 스탈린이 적대시했던 시장 원리의 메커니즘이 훨씬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강제력 따위는 느껴지지 않게, 심지어 훨씬 대규모로, 요컨대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완수했다"같은 대목에선 사유의 깊이가 느껴진다.

단 글맛은 특별히 뛰어나진 않다. 번역서임을 감안하더라도 글 자체는 아름답다거나 글맛이 빼어나다고 하기는 힘들다. 형용사와 부사, 추상명사로 범벅이 된 감상적 에세이를 즐기는 독자라면 혹 실망할 수도 있겠다. 대신 견실한 문체가 알찬 정보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간간이 웃으면서 시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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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 주느라 차비를 다 써버린 바람에, 평화시장에서 쌍문동까지 3시간을 걸었다고 했다. 나는 회식 자리에서 "살 좀 찐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버스를 고이 보내고 효자동부터 청계천변을 따라 걸었다.

땀이 흐르고 힘이 풀릴 때쯤 '전태일 다리' 부근이었다. 밑에 흐르는 시커먼 내에는 평화시장 간판의 분홍빛이 녹아들어 있었다. 40년 전 누군가가 분신한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근사한 풍경이다. 눈을 들어보니 화려한 차림의 여자아이들이 커다란 짐을 이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밤 10시경의 평화시장 주변을 무리지어 배회하는 이들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자아이들이구나. 그냥 쇼핑족도 있지만 인터넷 쇼핑몰에서 팔 물건을 떼어 오는 '사장님'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린 CEO들에게 이곳에서 일하던 고단하고 초췌한 또래들에 대해서 들어봤느냐고, 전태일을 아느냐고 묻고 싶어졌다. 아름다움만 좇느라 누군가 뒤집어 쓴 먼지나 시너를 잊은 것 같은 세상에 대한 약간의 심술이었다.

"동대문의 수많은 '패션 피플'들의 눈 속엔 이제 전태일이 없는 것 같아요" 행인을 붙잡을 용기는 없어 소심하게 트위터에 넋두리를 했다. 익명의 친구로부터 금세 '멘션(답글)'이 온다. "시대만 바뀐 것일 뿐, 그 '패션 피플'들의 이면엔 다른 모습의 전태일이 있어요". 왠지 마음이 놓여 답했다. "맞아요!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전태일이 없을 리 없죠". 그런데,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2

▲ <너는 나다 :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손아람·이창현·유희·조성주·임승수·하종강 지음, 레디앙·후마니타스·삶이보이는창·철수와영희 펴냄). ⓒ레디앙

그가 드물게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던가? 그는 희한하게 낙천적인 사람이다. 자기 일에 완전히 만족하는 괴짜다. (…) 하지만 그래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악마를 불러내는 주문사처럼 그의 부정적인 무의식을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봐요, 정신 차려, 당신은 노조도 없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잖아! '그래도'로 시작하는 문장을 연신 던지다가 먼저 간파 당한 건 내 쪽이었다.

"몸을 쓰는 위험한 일이고 바깥에서 보면 어떻게 이렇게 일하냐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저는 노동 환경 개선이나 그런 것보다는 그냥 관리직 윗사람들의 따뜻한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아요."(<너는 나다> '전태일 열전' 중)

4개의 출판사(<레디앙>·<후마니타스>·<삶이보이는창>·<철수와영희>)가 6명의 작가(손아람·이창현·유희·조성주·임승수·하종강)와 손잡고 전태일 40주기 기념 서적을 냈다기에, 핏기 어린 투쟁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 <너는 나다 :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는 첫 장(손아람, '전태일 열전')부터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전태일 열전'은 나이도, 사는 곳도, 노동 환경도 제각각이지만 단지 전태일과 이름만 같은 다섯 명을 만나 인터뷰한 기록이다. 거기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건 거제에 사는 '더러운 청년' 전태일이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개봉과 함께 정해진 별명이란다.)

그는 올해 스물여섯, 고2때부터 노가다 판에서 잔뼈가 굵다. '뭘 해도 되는' 이름 때문에 대학에서 운동권 동아리들로부터 갖은 유혹을 받았지만 3D 노동이 그의 천직이었다. 현재는 선박 배선공이다. 어둡고 축축하고 환기도 거의 되지 않는 사우나와 비슷한 배의 지하층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한 채 일만 한다고 한다.

"그냥 일, 밥, 일, 밥이에요. 특별할 건 없죠."

거제 전태일의 말에서 과거에 진땀 뺐던 취재 경험이 떠올랐다. 대학 졸업 전 과제로 노동조합도 없고 도제식 시스템이 강하게 남아 있는 예술 계통 직종의 노동 현실을 조사해야 했다. 그런데 소개로 만난 수습 패션 디자이너가 '좋아서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컸던 것이다.

엄청난 노동 강도나 불합리해 보이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쉽사리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름 안간힘을 썼지만 자신의 일을 '노동'으로 범주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그녀 앞에서 권리니 노조니 하는 미리 잡아둔 기사의 초점은 번번이 엇나갔다.

'거제 전태일'과 '디자이너 그녀'. 노동 환경이 전혀 다른 둘이 갑자기 겹쳐 보였던 건 손아람이 인터뷰이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그가 태일에게 캐물었던 '노동자로서의 자각'은 내가 그녀에게 끌어내려 애 쓴 것과 동일했다. 하지만 '디자이너 그녀'는 노동이란 말 자체에 갸웃거렸으며, '거제 전태일'은 "하나도 안 힘들어요"라며 시크하게 웃는다.

만약 손아람이 '나태일&전태일'(이창현 글·유희 그림)의 '형'처럼 "전태일은 말이지. 스물한 살에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주도했어. 넌 그때 뭐했냐? 항상 자기중심적인 녀석이니 뭐…"라고 혀를 찼다면, 이런 대꾸를 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난 지금 전태일보다 3년을 더 살아가는 중이야. 적어도 이 면에서는 나의 승리지!"

3

이 책, 이렇다. '우리 시대 전태일'이라는 테마를 달고 나왔지만 타인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기 몸에 시너를 뿌린 그 청년을 다시 찾아내려는 의도가 없다. 그 청년이 되라고 하는 요구도 없다. <너는 나다>라는 제목은 강력한 주문 같지만, 그가 꿈꿨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연대하자는 호소도 없다.

사실 무리한 요구다. '전태일 정신을 이어받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노동운동계에서조차 전태일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전태일노동상을 받은 이조차 '전태일은 닮고 싶은 사람이지만, 결코 닮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청년 구직자나 아르바이트생 등 백수/반백수로 구성된 우리나라 첫 세대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을 다루는 장(조성주, '청춘일기')에서도 신세대 노동운동가들의 모습은 전혀 '예비 열사'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저 사람 만큼 유명해질 순 없겠구나, 그런 느낌?"('전태일 열전' 중 '전주의 전태일'의 말)이란 고백이 차라리 현실적이다.

게다가 책은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20대 세 명을 모아놓고 '20대의 욕망'을 묻다가 방향을 잃기도 하며, (임승수의 '청춘수다') 노동 일반에 관한 개념 정리에 머무르기도 한다. (하종강의 '선생님 노동이 뭐예요?') 물론 두 글을 실은 의도를 포함해 '4출판사 4색'을 보여주겠다는 전체 취지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전태일 40주기를 앞둔 다소 엉성한 기획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전은 책을 덮은 후에 아주 천천히 찾아왔다. 전태일의 삶을 재구성한 만화 <태일이>(글 박태옥, 그림 최호철, 돌베개 펴냄)를 보고 눈물 콧물 질질 짠 뒤에 부은 눈이 가라앉듯 슬며시. 그가 살아 있던 스물세 해를 좇다가, 이 이야기의 '끝'인 그의 죽음 위에 가만히 손바닥을 갖다 대 보았다. 그러자 "만약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이라는 이 책의 가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끝이 아니었다. 전태일은 살아 있었고 그 삶의 모습은 <너는 나다>에 등장하는 모두와 닮아 있었다. 내가 스쳐간 사람들과도 전부 닮아 있었다.

"우리가 고향 집에서나 공장에서 만날 구박만 받아 오다가 오빠한테 처음 사람대접 받았잖아요. 오빠도 풀빵 사 주고 자긴 안 먹었잖아요. 그땐 좋아하기만 했지 제대로 고마워할 줄도 몰랐어요. 그런 기억이 힘이 되더라고요."(<태일이> 4권 중)

계속 일하면 아르바이트생에서 매니저가 되고, 매니저로부터 극장주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꿨었다. (…) 하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극장 운영의 본질이 단지 영화가 좋아 몰려든 저임금의 아르바이트 노동력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전태일은 그 꿈을 포기했다. 그 꿈을 성취하려면 누군가를 핍박하고 누군가를 착취해야만 했다.

"그렇게 못 살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평생 살기는 인간적으로 힘들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래도 영화가 좋아서, 지금은 갈등하고 있어요. 서울 올라가서 차라리 촬영 쪽 배워서 영화 제작 일을 해볼까 하고…."('전태일 열전' 중 '부산의 전태일'의 말)

40여 년 전 전태일이 풀빵으로 보여준 '사람대접'은 2010년 '누군가를 핍박하고 착취해야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겠다'는 메아리로 돌아온다. 그들은 그저 좀 더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윗사람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는 거제의 전태일이나 '바다에나 놀러가고 싶다'고 푸념하는 만화 속 나태일도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라는 전태일의 부름으로부터 소외될 리 없다.

"한 명이 살았던 시간은 시대 뒤로 겸허히 물러나지만 삶과 노동의 조건은 순환하기 때문이다"라고 필자 중 한 명인 손아람은 말한다. "인간의 삶은 계속"되고 "이것이 윤회의 사회적 의미"라면서. 그의 이야기는 '전태일 씨, 지금 잘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됐지만, 글의 끝에서 애초에 원했던 질문을 꺼내본다.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습니까?" 수신자는 우리 모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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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가는데 휴대전화에 문자가 떴다. 몇 자 되지 않은 문자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윤기 선생님이 돌아가셨대요." 갑작스러웠다. 해맑게 웃으며 농담을 하다가도 술자리에서는 구성지게 노래를 하던 멋쟁이 이윤기 형이 가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이윤기 형과 지나온 세월의 장면들이 두서없이 단편적으로 왔다가 물러가곤 했다.

우리의 만남은 처음부터 그리스 신화로 시작되었다. 우리가 아직도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 누군가가 그리스의 대문호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번역한 신화의 대가가 있으니 만나보지 않겠느냐며 윤기 형을 소개했다. 그날 우리는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또 술과 신화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지고 싶지 않다는 객기에 빠져 엄청나게 많이 마셨다.

그리스 신화뿐만이 아니라 켈트 신화, 게르만 신화, 인도 신화, 아스테카 신화, 한국 신화까지 어지러울 정도로 우리는 신화 속의 수많은 이름들을 주워 삼켰다. 또 <조르바 이야기>와 당시 윤기 형이 번역하고 있었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까지 싸우는 듯이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제 윤기 형이 떠났으니 우리가 나누던 신화, 문학과 인생 이야기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 이윤기(1947~2010년). ⓒ뉴시스

이윤기 형은 끝까지 신화적인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귀가 좀 안 들린다고 해서 걱정을 했지 건강에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부고는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어떡하랴? 모든 영웅의 최후는 모두 허망하게 마련이다. 한 영웅이 다른 영웅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그는 영웅이 아니다.

또 영웅이 오래오래 천수를 누리다 간다면 영웅답지 못하다. 아직 더 활동할 여지가 있는 영웅이 갑작스레 사라져 아쉬움이 남을 때 사람들은 그를 더 오래 기억한다. 신화 전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삶과 죽음이다. 이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이윤기 형이다. 그러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떠남은 아쉽지만 어쩌면 이윤기답다고 할 수 있다.

병원 문턱을 넘는 것을 커다란 수치로 여기고 항상 호기 있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다간 사람, 아침에 숙취로 고생하면서 "이봐, 유 교수 오늘 저녁에는 절대로 술 먹지 말자." 하고 다짐하다가도 해질 무렵이면 "술 한 잔 없나?" 하고 바람을 잡던 사람, "아니 오늘은 술 거르자며?" 하고 되물으면 "이 사람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면서 능청을 떨던 사람, 그러고는 어디서인가 용케도 술을 구해 오던 사람, 그런 멋쟁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벌써 우리들이 나이를 상당히 먹은 지금,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난다 한들 옛날 같겠는가? 다 부질없는 일이다. 간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들은 조금씩 잊힐 뿐이다.

이윤기 형 자신은 그 수많은 신화 속의 영웅 가운데 누구와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남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함께 길을 떠나는 것을 몹시 즐겼던 형은 아마도 50명의 영웅들과 함께 황금 양털을 찾아 떠났던 아르고스 원정대의 대장 이아손을 가장 좋아했을 것 같다. 평소에 자신을 둘러싼 열렬 팬들의 모임을 '아르고나우타이'라고 이름 붙였기에 이런 짐작은 더욱 그럴듯하게 보인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이윤기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함께하는 모험, 어울림이 있고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각자가 자신의 주특기로 위기를 극복하면서 서로를 돕는 삶을 바랐던 것이 이윤기 형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모험과 극복을 신화로 멋지게 풀어 보이며 으쓱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기에 형이 간 지 달포 만에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마지막 권이자 다섯 번째 책인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이 유작으로 출판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까지 느껴진다. 형이 미처 끝내지 못했던 책의 마무리는 형의 딸 이다희가 맡아서 했다. 이다희는 맺음말에서 다시는 못 볼 아버지를 기리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윤기에게 신화는 세상에 대해 알아가고, 인간에 대해 알아가고, 곧 나에 대해 알아가기 위한 도구였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윤기가 알게 된 것을 우리도 알 수 있게끔 도와주는 통로였다. (…) 결국 아버지는 지식을 나와 타인,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삼을 때 그 삶이 얼마나 따듯할 것인지 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다. 신화를 단순히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신화처럼 살다 간 사람이 바로 이윤기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제1권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제2권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 제3권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 제4권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제5권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의 다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윤기 형이 평생을 바쳐 공부하고, 그 결과물을 남들과 나누고자 열심히 쓴 그리스 로마 신화는 독창적이고 '한국적'이다. 곳곳에 드러나는 작가만의 독특한 해학과 해박함 그리고 구수한 입담, 또 형만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으로 신화를 풀어내는 솜씨가 어우러진 매력이 넘친다. 그러기에 남들이 힘들다는 그리스 신화가 그의 손을 거치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솔솔 풀려 나간다.

이윤기 형은 아르고 원정대를 이끄는 이아손처럼 앞장서서 독자들을 신화라는 미궁으로 인도하여 온갖 모험과 신기한 것들을 보여 주고 난관에 부딪히게 한 뒤, 독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순간에 다시 나타나 솜씨 좋게 이들을 구해 준다. 그리고 의기양양하여 그 자신의 특유한 '폼'을 꽉 잡는다. 그 자신이 바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인 셈이다. 바로 저자의 이런 깊은 내공이 21세기를 시작하는 바로 그 해에 우리나라에 선풍적인 신화 붐을 일으킨 원동력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바탕이 된 작품은 벌핀치(1796~1867년)의 <그리스 로마 신화>다. 그리고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오비디우스(기원전 43~기원후 17년)의 <변신 이야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이윤기 형은 심심치 않게 아폴로도로스(기원전 180-?)의 그리스 신화도 인용한다. 다시 말해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로마 시대 때에 집대성된 작품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나와 이윤기 형 사이에 의견이 조금 갈렸었다. 나는 기원전 4~5세기 때 아테네의 지식인들, 즉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비극 작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주고받던 그 시대의 그리스 신화를 밝혀내어 이를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에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윤기 형은 그런 의욕은 학자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일반 독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높은 이상이라고 나를 윽박질렀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합의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신화에 대한 사랑과 정렬만큼은 서로 아끼면서 설가 서로에게 가장 많이 용기를 북돋아 주곤 했었다.

아직 어리광을 더 부려도 괜찮을 나이에 이윤기 형은 훌쩍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아직도 해 줄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 너무 아쉽다. 그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끄집어내어 읽어 본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행간에서 들리는 낄낄거리며 흐뭇해하는 그의 웃음소리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단숨에 번역해 내고는 그 작품 내용에 스스로 감동해서 혼자서 엉엉 울었다는 윤기 형의 목소리와 표정이 떠오른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여름에 떠난 형이 그립다. 소주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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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합정동, 주택가 한 가운데 공장이 우두커니 서 있다. 잘못 찾아온 건가 두리번거리자니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가 손짓을 한다. 험악하게 생긴 커피기계들 사이로 콩 볶는 냄새가 따뜻하게 새어나오는 희한한 곳이다. 이름마저 순박하고 무뚝뚝한 '커피 공장 앤트러사이트(anthracite·무연탄)'다.

11일 이곳에서 열린 '어쿠스틱 인문학'에서도 날 것의 냄새가 났다. 어쿠스틱 인문학은 KT&G 상상마당아카데미와 <프레시안>이 11월부터 매월 둘째 주 목요일 저녁에 마련하는 '저자와의 만남' 행사다. 손님들은 소파에 아무렇게나 둘러앉아 좋아하는 책의 저자와 가공되지 않은 대화를 나눈다.


▲ <설계자들>(김언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이날 첫 회에는 소설 <설계자들>(문학동네 펴냄)의 '설계자'인 김언수 씨가 초대됐다. 진행자는 <책 읽기의 달인 : 호모부커스>(그린비 펴냄)로 유명한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다. 두 사람은 마침 같은 대학의 같은 과 선후배 사이라고. 같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비슷한 곳에서 술을 마시며 성장한 탓인지 분위기도 살짝 닮았다.

둘 다 음악을 별로 듣지 않는다. 책을 읽는 이유는 "달리 즐길 매체가 없어서"(이권우) 혹은 "오로지 심심하기 때문에"(김언수). 술에 대해선 의견이 좀 다르다. 김언수 씨는 책이나 여자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술"이 좋다지만 이권우는 "책 60%, 술 30%, 여자 10%"라는 모범적(?) 답을 내놓는다.

사전 인터뷰와 서로 나눈 문자 메시지가 슬라이드 영상을 통해 벽에 비춰지는 동안 진행자·저자·독자는 만남의 워밍업을 끝낸다.

내가 모르는 내 삶, 설계된 세계

<설계자들>은 2010년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시점, 서울의 위성 도시쯤으로 보이는 '푸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킬러들의 이야기다. 문장은 액션 영화처럼 흥미진진하지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핵심은 총을 쏜 자가 아니라, 총을 쏜 자 '뒤에'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

죽음은 암살자의 의지대로가 아니라 세상을 계획하는 더 큰 설계자들에 의한 것이다. 주인공 '래생(來生)'은 '밀렵꾼이 놓은 덫에 걸려 숨을 헐떡이는 멧돼지가 있다면 죽일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를 묻는 노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누가 죽이건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21쪽)

<설계자들>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권우 씨가 묻자 김언수 씨는 이렇게 답한다.

"어느 날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내 마음대로 좌회전, 우회전도 못하고 길을 설계한 사람들의 의도에 의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잘못되기 이전에 누군가 이 세계를 설계해왔고, 그래서 내 몸에 맞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 거구나.' 아주 단순한 것조차 내가 다 아는 게 아닌 거예요. 이게 살아오면서 안 유일한 진실입니다."

이권우 씨는 "이 소설은 '우리 삶이 구조의 산물인지, 의지의 결과인지' 묻는 철학적 주제와 맞닿아 있다"고 덧붙였다.

매 순간이 설계돼 있는 거라면 '설거지들'에겐 이날 자리가 최고의 설계가 아니었을까. '설거지들'은 <설계자들>이 출판사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될 당시 꼼꼼히 읽고 댓글을 달던 광신도들을 일컫는다. 작가 자신도 독자들 의견에 적극적으로 답했고, 연재가 끝날 때까지 2만2383개의 댓글이 오갔다.


▲ 소설가 김언수 씨(왼쪽),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내 소설은 댓글 오가는 잔치판"

이권우 씨, 김언수 씨 두 대담자의 어린 시절에는 신문의 연재소설이 인기가 많았다. 독자들은 작가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요즘은 신문이 맡았던 소설 연재의 기능이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각종 문화 예술 사이트로 넘어갔다. 마침 이권우 씨가 김언수 씨에게 그 얘기를 물었다. '설거지들'은 귀를 기울인다.

이권우 : 반응도 실시간 댓글로 오지 않아요? 5개월간 '주 5일제' 근무를 하면서 2만 개 넘는 댓글을 받았다는데, 댓글이 작품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요?

김언수 : 좋은 제안이 있으면 잘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물론 안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늙은 개 '산타'를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죽였어요. 왜 죽였냐고 난리가 났습니다. (웃음) 댓글의 영향은 긍정적인 일입니다. 댓글을 스펀지처럼 잘 흡수할 수 있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이고, 댓글이 잘 스며들지 못한다면 나쁜 이야기를 쓰는 셈입니다.

서른두 살이 되기 전까지 저는 소설이라는 게 내 이야기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소설이 아니었어요. 김언수가 느낀 게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나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나 같으면 이러지 않았을까' 하고 동일시하는 얘기가 되지 않으면요.

소설은 누구나 떠들 수 있는 광장이나 마당, 잔치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쓰는 건 판을 벌린다는 의미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작가의 인식 < 이야기"

하지만 작가의 고유한 세계관, 애초에 그어놓은 윤곽선마저 댓글로 어그러지고 마는 실패의 경우를 우리는 적잖이 보아왔다. 특히 가장 저렴한 판타지인 TV 드라마의 경우 어느 때보다 커진 시청자의 목소리의 힘은 절대적이다. 매일 연재된 <설계자들>에도 그런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원래는 제목처럼 작가 머릿속에 완벽히 '설계'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많은 이들이 소설을 전부 장악하려고 합니다. 전지적 관점, 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움켜쥐고 인물들을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죠. 물론 저도 키보드 하나로 천둥이나 해일을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높은 위치에서 독자에게 무언가를 던져준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어요. 짬뽕을 30년 만든 사람만이 겨우 짬뽕에 대해서 하나의 관점을 보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전 지금도 제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소설은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반영하는 진실은 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 김언수 씨. ⓒ프레시안(최형락)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른다' 말하면 소설은 대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일단 공간을 만들어 놓고 (내가 구상한) 인물들을 그 공간으로 한 번 던져 보고, 어디로 흘러가나 보는 겁니다. 사회도 이질적인 것들이 유기적으로 의미를 찾아가는 것처럼, 이야기도 조금씩 걷고 흔들리면서 의미를 가져갑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작가가 뭔가를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어떤 메시지를 반드시 전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라는 틀을 빌려오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제가 판단할 부분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야기가 작가의 인식이나 주장보다 훨씬 큰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언수 안에는 새로운 것도, 가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김언수가 만든 이야기는 김언수보다 대단할 수 있습니다. 미워하고 증오해서 실제 삶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같이 놀 수 있는 것처럼."

<설계자들>과 리얼리티

이야기는 작품 얘기로 흘러갔다. <설계자들>을 관통하는 모티프는 암살이다. 이권우 씨가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 이권우 씨. ⓒ프레시안(최형락)
이권우 : 우리 현대사 중요 분수령마다 암살이 있었습니다. 현대사의 역사가 곧 암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정치적인 암살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일제 시대 이래 가장 강력한 암살 청부 집단이었던 너구리 영감의 '개들의 도서관'이 민주화와 함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한자의 '기업형' 보안 회사와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경제적 목적을 둔 음흉한 암살 얘기는 이제까지 볼 수 없던 것입니다. 정치에서 경제로 헤게모니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나온 정치적 우화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김언수 : 소위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 아닙니다. <설계자들>은 실제 사건들이 모티프가 된 것도 아니고 어떤 고발을 위해 쓰인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사실 누군가가 (암살로) 사라진다고 해도 거대한 관료제가, 이 세계가 뒤집어 질 수 없고요.

마침 소설의 리얼리티와 관련해 재미있는 문제 제기가 하나 있었다. 소설가 장정일 씨가 '프레시안 books'에 쓴 <설계자들> 서평에서 "원래 총이 나오는 한국 영화(소설)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못한다"며 총으로 이뤄지는 암살에 대한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물론 그 판단 기준은 '현실의 승인'이 아니라 '작품 내적인 핍진성'이다.

후자를 위해서도 총은 등장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이권우 씨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부산 서구 암남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바로 앞에 영도가 있었습니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동넵니다. 해방 전 큰 항구가 있었는데 지금 인천항에서 하고 있는 밀수를 거기서 하고 있었어요. 집 근처에 부산 3대 빈민가 중 한 곳이 있었는데 세 집 걸러 한 집에 범죄자가 살았습니다.

글쎄요, 저희 동네엔 총도 마약도 흔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러시아 산 총이 85만 원 했어요. (웃음) 총이 등장하는 건 그것이 칼보다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이 밑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저 위'의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소설가는 모두의 사연을 들어주는 직업"

소설 속에는 설계를 전복하려는 계획이 등장한다. 현실 세계로 말하자면 저항 세력이다. 전복 계획이 실패하는 결말은 작가의 현실 세계에 대한 비관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미토(소설 속에서 전복 계획을 세운 등장인물의 이름)의 세계가 옳은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저는 운동하는 사람들, 어려운 자리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훌륭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가 옳은지 아닌지가 아니라, 어떤 일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학교에 아는 형이 있었습니다. 이기적이고 어디서 아부도 잘 하고 그래서 엄청 욕을 먹는 사람이었어요. 모든 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본인도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그 형이 여섯 살 난 딸을 목마 태우고 벚꽃 사이로 걸어오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날 일기에 '내가 당당한 것은 나보다 고귀한 누군가를 위해 뒤로 물러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썼습니다. 뻔뻔하고 이기심 넘쳤던 그 형이 그렇게 복잡해 보일 수 없었습니다.

소설가는 흰 고양이가 옳은가 검은 고양이가 옳은가를 말해주는 직업이 아니고 흰 고양이도 사연이 있구나 하는 얘기를 해주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악함과 비열함과 추함의 얼굴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하는 일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밀도 있는 시간'을 위하여

김언수 씨는 1년에 몇 달은 소설을 쓰기 위해 숲에 처박힌다. 도시에서 아내와 있는 시간에는 소설을 전혀 읽지 않는다고 한다. 재차 '심심해야지만 소설을 읽는다'고 강조한다. 과거 '부루마블 게임'에 광분해 있었던 1년 동안은 소설을 전혀 읽지 않다가 그것이 지겨워지자 비로소 책을 들었다는 역사도 있다.

이권우 : 독자로서는 김언수를 심심하게 만들어야겠네요?

김언수 : 사실 소설가는 대부분의 직업보다 편해요. 창작의 고통이라고 얘기하는데 짬뽕 만드는 데에도 대단한 고통이 소요됩니다. 소설가는 출근 시간도 없고 아무도 터치를 안 하니까 하염없이 게을러질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아무 것도 없는 숲으로 처박혀 글을 씁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내기 위해선 TV나 인터넷, 술자리처럼 즐거운 것들을 멀리하는 기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한국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이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고유한 자기 삶을 위해 자신을 심심하게 만드는 재주는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숲 속에 있으면 밖에선 생각나지 않았던 이들 다 생각나고, 아내도 한없이 사랑스럽고, 울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전 이 시간을 '밀도 있는 시간'이라고 표현합니다. 음…. 뭐라고 잘 표현이 안 되는데….


ⓒ프레시안(최형락)

"여기 계신 분들이 평생 제 목소리를 이렇게 기억하면 안 되는데…."

김언수 씨는 대화를 시작할 때 이렇게 걱정했다. 얼마 전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실제로 목소리는 작고 희미해 잘 들리지 않을 때도 많았다.

실제로 많은 독자들에게 김언수는 애석하게도(!) 그 희미함으로 기억될 것 같다. '너는 어떤 색이냐'를 따져 묻기 좋아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이제 선과 악의 구분을, 명확한 정의와 분명한 진실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단색으로 만들어진 세상을, 이분법을, 칼날처럼 날카로운 비판과 명쾌한 아포리즘을 믿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완벽한 악인으로 만드는 모든 구호들을 경계한다." (<설계자들> '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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