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가는데 휴대전화에 문자가 떴다. 몇 자 되지 않은 문자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윤기 선생님이 돌아가셨대요." 갑작스러웠다. 해맑게 웃으며 농담을 하다가도 술자리에서는 구성지게 노래를 하던 멋쟁이 이윤기 형이 가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이윤기 형과 지나온 세월의 장면들이 두서없이 단편적으로 왔다가 물러가곤 했다.
우리의 만남은 처음부터 그리스 신화로 시작되었다. 우리가 아직도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 누군가가 그리스의 대문호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번역한 신화의 대가가 있으니 만나보지 않겠느냐며 윤기 형을 소개했다. 그날 우리는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또 술과 신화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지고 싶지 않다는 객기에 빠져 엄청나게 많이 마셨다.
그리스 신화뿐만이 아니라 켈트 신화, 게르만 신화, 인도 신화, 아스테카 신화, 한국 신화까지 어지러울 정도로 우리는 신화 속의 수많은 이름들을 주워 삼켰다. 또 <조르바 이야기>와 당시 윤기 형이 번역하고 있었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까지 싸우는 듯이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제 윤기 형이 떠났으니 우리가 나누던 신화, 문학과 인생 이야기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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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기(1947~2010년). ⓒ뉴시스 |
이윤기 형은 끝까지 신화적인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귀가 좀 안 들린다고 해서 걱정을 했지 건강에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부고는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어떡하랴? 모든 영웅의 최후는 모두 허망하게 마련이다. 한 영웅이 다른 영웅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그는 영웅이 아니다.
또 영웅이 오래오래 천수를 누리다 간다면 영웅답지 못하다. 아직 더 활동할 여지가 있는 영웅이 갑작스레 사라져 아쉬움이 남을 때 사람들은 그를 더 오래 기억한다. 신화 전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삶과 죽음이다. 이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이윤기 형이다. 그러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떠남은 아쉽지만 어쩌면 이윤기답다고 할 수 있다.
병원 문턱을 넘는 것을 커다란 수치로 여기고 항상 호기 있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다간 사람, 아침에 숙취로 고생하면서 "이봐, 유 교수 오늘 저녁에는 절대로 술 먹지 말자." 하고 다짐하다가도 해질 무렵이면 "술 한 잔 없나?" 하고 바람을 잡던 사람, "아니 오늘은 술 거르자며?" 하고 되물으면 "이 사람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면서 능청을 떨던 사람, 그러고는 어디서인가 용케도 술을 구해 오던 사람, 그런 멋쟁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벌써 우리들이 나이를 상당히 먹은 지금,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난다 한들 옛날 같겠는가? 다 부질없는 일이다. 간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들은 조금씩 잊힐 뿐이다.
이윤기 형 자신은 그 수많은 신화 속의 영웅 가운데 누구와 가장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남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함께 길을 떠나는 것을 몹시 즐겼던 형은 아마도 50명의 영웅들과 함께 황금 양털을 찾아 떠났던 아르고스 원정대의 대장 이아손을 가장 좋아했을 것 같다. 평소에 자신을 둘러싼 열렬 팬들의 모임을 '아르고나우타이'라고 이름 붙였기에 이런 짐작은 더욱 그럴듯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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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이윤기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함께하는 모험, 어울림이 있고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각자가 자신의 주특기로 위기를 극복하면서 서로를 돕는 삶을 바랐던 것이 이윤기 형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모험과 극복을 신화로 멋지게 풀어 보이며 으쓱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기에 형이 간 지 달포 만에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마지막 권이자 다섯 번째 책인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이 유작으로 출판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까지 느껴진다. 형이 미처 끝내지 못했던 책의 마무리는 형의 딸 이다희가 맡아서 했다. 이다희는 맺음말에서 다시는 못 볼 아버지를 기리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윤기에게 신화는 세상에 대해 알아가고, 인간에 대해 알아가고, 곧 나에 대해 알아가기 위한 도구였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윤기가 알게 된 것을 우리도 알 수 있게끔 도와주는 통로였다. (…) 결국 아버지는 지식을 나와 타인,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삼을 때 그 삶이 얼마나 따듯할 것인지 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다. 신화를 단순히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신화처럼 살다 간 사람이 바로 이윤기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제1권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제2권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 제3권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 제4권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제5권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의 다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윤기 형이 평생을 바쳐 공부하고, 그 결과물을 남들과 나누고자 열심히 쓴 그리스 로마 신화는 독창적이고 '한국적'이다. 곳곳에 드러나는 작가만의 독특한 해학과 해박함 그리고 구수한 입담, 또 형만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으로 신화를 풀어내는 솜씨가 어우러진 매력이 넘친다. 그러기에 남들이 힘들다는 그리스 신화가 그의 손을 거치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솔솔 풀려 나간다.
이윤기 형은 아르고 원정대를 이끄는 이아손처럼 앞장서서 독자들을 신화라는 미궁으로 인도하여 온갖 모험과 신기한 것들을 보여 주고 난관에 부딪히게 한 뒤, 독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순간에 다시 나타나 솜씨 좋게 이들을 구해 준다. 그리고 의기양양하여 그 자신의 특유한 '폼'을 꽉 잡는다. 그 자신이 바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인 셈이다. 바로 저자의 이런 깊은 내공이 21세기를 시작하는 바로 그 해에 우리나라에 선풍적인 신화 붐을 일으킨 원동력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바탕이 된 작품은 벌핀치(1796~1867년)의 <그리스 로마 신화>다. 그리고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오비디우스(기원전 43~기원후 17년)의 <변신 이야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이윤기 형은 심심치 않게 아폴로도로스(기원전 180-?)의 그리스 신화도 인용한다. 다시 말해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로마 시대 때에 집대성된 작품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나와 이윤기 형 사이에 의견이 조금 갈렸었다. 나는 기원전 4~5세기 때 아테네의 지식인들, 즉 헤로도토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비극 작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주고받던 그 시대의 그리스 신화를 밝혀내어 이를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에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윤기 형은 그런 의욕은 학자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일반 독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높은 이상이라고 나를 윽박질렀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합의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신화에 대한 사랑과 정렬만큼은 서로 아끼면서 설가 서로에게 가장 많이 용기를 북돋아 주곤 했었다.
아직 어리광을 더 부려도 괜찮을 나이에 이윤기 형은 훌쩍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아직도 해 줄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 너무 아쉽다. 그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시 끄집어내어 읽어 본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행간에서 들리는 낄낄거리며 흐뭇해하는 그의 웃음소리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단숨에 번역해 내고는 그 작품 내용에 스스로 감동해서 혼자서 엉엉 울었다는 윤기 형의 목소리와 표정이 떠오른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여름에 떠난 형이 그립다. 소주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