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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 주느라 차비를 다 써버린 바람에, 평화시장에서 쌍문동까지 3시간을 걸었다고 했다. 나는 회식 자리에서 "살 좀 찐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버스를 고이 보내고 효자동부터 청계천변을 따라 걸었다.
땀이 흐르고 힘이 풀릴 때쯤 '전태일 다리' 부근이었다. 밑에 흐르는 시커먼 내에는 평화시장 간판의 분홍빛이 녹아들어 있었다. 40년 전 누군가가 분신한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근사한 풍경이다. 눈을 들어보니 화려한 차림의 여자아이들이 커다란 짐을 이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밤 10시경의 평화시장 주변을 무리지어 배회하는 이들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자아이들이구나. 그냥 쇼핑족도 있지만 인터넷 쇼핑몰에서 팔 물건을 떼어 오는 '사장님'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린 CEO들에게 이곳에서 일하던 고단하고 초췌한 또래들에 대해서 들어봤느냐고, 전태일을 아느냐고 묻고 싶어졌다. 아름다움만 좇느라 누군가 뒤집어 쓴 먼지나 시너를 잊은 것 같은 세상에 대한 약간의 심술이었다.
"동대문의 수많은 '패션 피플'들의 눈 속엔 이제 전태일이 없는 것 같아요" 행인을 붙잡을 용기는 없어 소심하게 트위터에 넋두리를 했다. 익명의 친구로부터 금세 '멘션(답글)'이 온다. "시대만 바뀐 것일 뿐, 그 '패션 피플'들의 이면엔 다른 모습의 전태일이 있어요". 왠지 마음이 놓여 답했다. "맞아요!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전태일이 없을 리 없죠". 그런데, 대체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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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나다 :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손아람·이창현·유희·조성주·임승수·하종강 지음, 레디앙·후마니타스·삶이보이는창·철수와영희 펴냄). ⓒ레디앙 |
그가 드물게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던가? 그는 희한하게 낙천적인 사람이다. 자기 일에 완전히 만족하는 괴짜다. (…) 하지만 그래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악마를 불러내는 주문사처럼 그의 부정적인 무의식을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봐요, 정신 차려, 당신은 노조도 없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잖아! '그래도'로 시작하는 문장을 연신 던지다가 먼저 간파 당한 건 내 쪽이었다.
"몸을 쓰는 위험한 일이고 바깥에서 보면 어떻게 이렇게 일하냐 싶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저는 노동 환경 개선이나 그런 것보다는 그냥 관리직 윗사람들의 따뜻한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아요."(<너는 나다> '전태일 열전' 중)
4개의 출판사(<레디앙>·<후마니타스>·<삶이보이는창>·<철수와영희>)가 6명의 작가(손아람·이창현·유희·조성주·임승수·하종강)와 손잡고 전태일 40주기 기념 서적을 냈다기에, 핏기 어린 투쟁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 <너는 나다 :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는 첫 장(손아람, '전태일 열전')부터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전태일 열전'은 나이도, 사는 곳도, 노동 환경도 제각각이지만 단지 전태일과 이름만 같은 다섯 명을 만나 인터뷰한 기록이다. 거기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건 거제에 사는 '더러운 청년' 전태일이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개봉과 함께 정해진 별명이란다.)
그는 올해 스물여섯, 고2때부터 노가다 판에서 잔뼈가 굵다. '뭘 해도 되는' 이름 때문에 대학에서 운동권 동아리들로부터 갖은 유혹을 받았지만 3D 노동이 그의 천직이었다. 현재는 선박 배선공이다. 어둡고 축축하고 환기도 거의 되지 않는 사우나와 비슷한 배의 지하층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못한 채 일만 한다고 한다.
"그냥 일, 밥, 일, 밥이에요. 특별할 건 없죠."
거제 전태일의 말에서 과거에 진땀 뺐던 취재 경험이 떠올랐다. 대학 졸업 전 과제로 노동조합도 없고 도제식 시스템이 강하게 남아 있는 예술 계통 직종의 노동 현실을 조사해야 했다. 그런데 소개로 만난 수습 패션 디자이너가 '좋아서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컸던 것이다.
엄청난 노동 강도나 불합리해 보이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쉽사리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름 안간힘을 썼지만 자신의 일을 '노동'으로 범주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그녀 앞에서 권리니 노조니 하는 미리 잡아둔 기사의 초점은 번번이 엇나갔다.
'거제 전태일'과 '디자이너 그녀'. 노동 환경이 전혀 다른 둘이 갑자기 겹쳐 보였던 건 손아람이 인터뷰이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그가 태일에게 캐물었던 '노동자로서의 자각'은 내가 그녀에게 끌어내려 애 쓴 것과 동일했다. 하지만 '디자이너 그녀'는 노동이란 말 자체에 갸웃거렸으며, '거제 전태일'은 "하나도 안 힘들어요"라며 시크하게 웃는다.
만약 손아람이 '나태일&전태일'(이창현 글·유희 그림)의 '형'처럼 "전태일은 말이지. 스물한 살에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주도했어. 넌 그때 뭐했냐? 항상 자기중심적인 녀석이니 뭐…"라고 혀를 찼다면, 이런 대꾸를 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난 지금 전태일보다 3년을 더 살아가는 중이야. 적어도 이 면에서는 나의 승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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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렇다. '우리 시대 전태일'이라는 테마를 달고 나왔지만 타인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기 몸에 시너를 뿌린 그 청년을 다시 찾아내려는 의도가 없다. 그 청년이 되라고 하는 요구도 없다. <너는 나다>라는 제목은 강력한 주문 같지만, 그가 꿈꿨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연대하자는 호소도 없다.
사실 무리한 요구다. '전태일 정신을 이어받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노동운동계에서조차 전태일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전태일노동상을 받은 이조차 '전태일은 닮고 싶은 사람이지만, 결코 닮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청년 구직자나 아르바이트생 등 백수/반백수로 구성된 우리나라 첫 세대별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을 다루는 장(조성주, '청춘일기')에서도 신세대 노동운동가들의 모습은 전혀 '예비 열사'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저 사람 만큼 유명해질 순 없겠구나, 그런 느낌?"('전태일 열전' 중 '전주의 전태일'의 말)이란 고백이 차라리 현실적이다.
게다가 책은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20대 세 명을 모아놓고 '20대의 욕망'을 묻다가 방향을 잃기도 하며, (임승수의 '청춘수다') 노동 일반에 관한 개념 정리에 머무르기도 한다. (하종강의 '선생님 노동이 뭐예요?') 물론 두 글을 실은 의도를 포함해 '4출판사 4색'을 보여주겠다는 전체 취지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전태일 40주기를 앞둔 다소 엉성한 기획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전은 책을 덮은 후에 아주 천천히 찾아왔다. 전태일의 삶을 재구성한 만화 <태일이>(글 박태옥, 그림 최호철, 돌베개 펴냄)를 보고 눈물 콧물 질질 짠 뒤에 부은 눈이 가라앉듯 슬며시. 그가 살아 있던 스물세 해를 좇다가, 이 이야기의 '끝'인 그의 죽음 위에 가만히 손바닥을 갖다 대 보았다. 그러자 "만약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이라는 이 책의 가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끝이 아니었다. 전태일은 살아 있었고 그 삶의 모습은 <너는 나다>에 등장하는 모두와 닮아 있었다. 내가 스쳐간 사람들과도 전부 닮아 있었다.
"우리가 고향 집에서나 공장에서 만날 구박만 받아 오다가 오빠한테 처음 사람대접 받았잖아요. 오빠도 풀빵 사 주고 자긴 안 먹었잖아요. 그땐 좋아하기만 했지 제대로 고마워할 줄도 몰랐어요. 그런 기억이 힘이 되더라고요."(<태일이> 4권 중)
계속 일하면 아르바이트생에서 매니저가 되고, 매니저로부터 극장주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꿨었다. (…) 하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극장 운영의 본질이 단지 영화가 좋아 몰려든 저임금의 아르바이트 노동력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전태일은 그 꿈을 포기했다. 그 꿈을 성취하려면 누군가를 핍박하고 누군가를 착취해야만 했다.
"그렇게 못 살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평생 살기는 인간적으로 힘들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래도 영화가 좋아서, 지금은 갈등하고 있어요. 서울 올라가서 차라리 촬영 쪽 배워서 영화 제작 일을 해볼까 하고…."('전태일 열전' 중 '부산의 전태일'의 말)
40여 년 전 전태일이 풀빵으로 보여준 '사람대접'은 2010년 '누군가를 핍박하고 착취해야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겠다'는 메아리로 돌아온다. 그들은 그저 좀 더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윗사람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는 거제의 전태일이나 '바다에나 놀러가고 싶다'고 푸념하는 만화 속 나태일도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라는 전태일의 부름으로부터 소외될 리 없다.
"한 명이 살았던 시간은 시대 뒤로 겸허히 물러나지만 삶과 노동의 조건은 순환하기 때문이다"라고 필자 중 한 명인 손아람은 말한다. "인간의 삶은 계속"되고 "이것이 윤회의 사회적 의미"라면서. 그의 이야기는 '전태일 씨, 지금 잘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됐지만, 글의 끝에서 애초에 원했던 질문을 꺼내본다.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습니까?" 수신자는 우리 모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