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한테는 이 책의 저자가 달려든 실험을 일컫는 적절한 표현이 아직 없지만, 영어로는 '에코 어드벤처(Eco Adventure)'라고 하는 모양이다. <뉴욕매거진>이 요리 평론가 매니 하워드에게 뉴욕 브루클린 도심 한복판에서 '6개월간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워 1달간 오로지 자신이 키운 먹을거리로만 먹고 살기' 실험을 제안한 것은 1999년 어느 날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로커보어(Locavore) 운동'을 알리고 평가할 목적이었다. 로커보어는 '지역'을 뜻하는 'local'과 라틴어의 '먹다'라는 뜻을 가진 'voer'를 합쳐 만든 말로서, '자신이 사는 주변 지역에서 난 먹을거리를 섭취하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의 사회운동을 '로커브리즘(Locavorism)'이라 통칭한다.

이 말의 탄생 배경에는 미국 사회에 닥친 유기 농업 실험의 실패가 깔려 있었다. 우리와 다소 시간차가 있지만 미국 역시 1990년대 초반 유기농 광풍이 몰아쳤다. 언론은 연일 식품 산업의 위기를 강조했고, 마치 식량 전쟁이 잠시 후에 일어날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 언론이 닥칠 위기를 미리 예견하는 일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 <내 뒷마당의 제국>(매디 하워드 지음, 남명성 옮김, 시작 펴냄). ⓒ시작
문제는 유기농 먹을거리가 마치 하늘이 주신 특별한 양식처럼 떠받들어지면서 거대 식품 기업이 재빨리 이 용어를 흡수했다는 데 있었다. 거의 모든 먹을거리에 '유기농'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그런 딱지가 붙여지지 않은 식품보다 비싸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국 사회가 거의 유일한 모델인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유기농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또한 조금만 제정신을 가진 이라면, 농촌은 갈수록 공동화되고 있는데, 그나마 '있던 농업'마저 죽이려드는 게 유일하고도 확고한 농업 정책인데, 시중에 차고 넘치는 상품으로서의 유기농 식품이 우선 질보다 그 양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뉴욕매거진>이 로커보어 운동을 알리고 평가할 목적으로 '특별한 모험가'를 물색한 데에는 유기농 먹을거리 운동이 거대 식품 기업의 발 빠른 선점으로 운동 자체가 붕괴된 아픔과 관련이 있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로커보어 운동이었다. 공장에서 생산한 먹을거리는 비록 유기농 식품이라 하더라도 평균 2400킬로미터를 이동해 식탁에 오르기 때문에 결국은 소비자를 망칠 것이라는 믿음이 로커보어 정신이었다.

그러나 로커보어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로커보어들이 아무리 먹을거리와 관련된 확고한 개인적인 철학으로 무장한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취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지, 생산하는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자 매니 하워드는 요리 평론가라곤 하지만 사실, 오랫동안 안정된 직업을 찾지 못한 백수건달이었다. 매니 하워드는 지은 지 106년이나 되는 브루클린 프로스펙트 공원 뒤쪽에 살고 있었는데, <뉴욕매거진>의 제안을 받기 전에는 요리 잡지에 부정기적으로 기고했으며, '마구잡이에 가까울 정도'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10여 년, 아내 리사는 기사가 딸린 자동차로 맨해튼으로 출퇴근하는 고임금의 편집자였다. 이런 아내를 출근시키고 하워드가 집에서 하는 일은 컴퓨터 앞에 앉아 습관적으로 2류 포르노를 다운 받아 보면서 "그 짓이 습관일 뿐이지 결코 동물적 충동 때문이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게 전부였다.

요컨대, 하워드는 몸은 건강했지만 자신이 살아오던 방식에 지칠 대로 지친 백수였다. 그런데 이 백수가 20분간의 협상 끝에 이 프로젝트에 달려들기로 결심한다. 달려든 이유는 우선 그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면,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고된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련된 뉴요커로 그려진 아내 리사는 하워드가 그 엉뚱한 일로 인해 '새로운 열정'을 되찾은 것 같은 모습이 보기 좋아서 반신반의하면서도 뒷마당이 농장이 되는 것을 허락한다. 이후에 벌어진 일은 가히 전쟁이라 할 만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잡지사에서는 매니 하워드 같은 사람을 물색하면서 언필칭 '로커보어 운동을 알리고 평가할 목적'이라 내걸었지만, 매니를 꼬시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한 말을 보면 로커보어들에 대한 비판과 은근한 경멸도 담겨 있었다. "그녀(<뉴욕매거진>의 편집자)는 부족할 것 없는, 자기만족에 빠져 도시 농산물 직판장을 돌아다니는 로컬보어와 맞서기를 바랐다"는 구절이 그런 대목이다.

그러나 저자 매니 하워드는 도통 잡지사의 의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확신한 것은 로커보어들이 아무리 신념에 찬 멋들어진 말을 하고 좋은 먹을거리를 뒤지고 다녀도 그들은 결국 소비자라는 점, 그러나 자신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최소한 생산자로서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로커보어들이 '불타는 사명감'에 빠져 장바구니를 들고 좋은 먹을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을 어떻게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심사숙고해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이게 로커브리즘에 대한 하워드의 평가였다. 그는 인세나 책으로 인해 얻을지도 모를 명성에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요리 평론가였기에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먹을거리와 근본적 관계를 잃었다"는 감수성만은 지니고 있었다. 6개월간의 고된 노동을 통해 그가 소망한 것은 천천히 무너진 자아의 회복이었다.

하워드에게 밭으로 허락된 땅은 약 70㎡(약 21평). 20㎡짜리 차고는 헛간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게 그에게 허락된 농장 면적의 전부였다. 그는 그러나 농장을 자신의 무기이자 전장(戰場)으로 삼는다. 마침 도시 농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한 직후였는데, 딸아이 히스라이언의 두 번째 생일이 다가왔다.

지하에 바 카운터가 설치된 휴게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키울 요량으로 그는 딸애의 생일 선물로 새를 열 마리나 구입한다. 그러나 열 마리의 새에 1100달러어치나 들였건만, '대개 공격적이고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던' 성격의 저자는 경험 부족으로 새들을 모두 죽이고 만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눈부신 살육 행진의 첫 신호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터에도 달려가고, 온 세상을 미친 듯이 헤매는 정력가인데다, 비록 섬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혈질인 그는 채식주의자를 선택하는 대신 기필코 '다양한 단백질이 필요하다'며 식용 물고기를 어항에 키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항에서 키운 물고기는 역시 경험 부족으로 다 죽어버렸다. 그러나 매니 하워드라는 이름의 불굴의 돈키호테는 식용 열대어 틸라피아를 키우기 위해 뒷마당의 진흙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책에서 본 대로 지름 3.6m, 깊이 90㎝의 구덩이를 파고, 수온은 섭씨 27도를 유지하면서 틸라피아 한 쌍이면 이윽고 1000마리로 늘어날 것이라고 몽상한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 단백질도 얻지 못한다. 단백질에 미친 그는 이어서 토끼를 구입한다. 그러나 토끼 역시 변변한 먹을거리가 못 된다. 다른 것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으로 구해 심은 감자는 동전만한 감자알 열 개 정도만 선사한다. 닭장을 만들고 닭을 구해 키우지만, 멍청한 하워드는 닭이 달걀을 낳는다는 생각은 미처 못 한다.

그가 아무리 원예 업자에게 구한 책자나 인터넷에서 구한 자료를 참조했다 해도 그의 농사는 대충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그는 소망대로 허리가 휘어질 만큼 노동을 한다. 그 사이에 그는 물고기도 죽이고, 토끼도 죽이고, 오리도 죽이고, 온갖 좌충우돌을 다 겪는다.

이 책에 담긴 한 사내의 '1개월 자급자족'을 위한 고군분투는 참으로 처절하고, 안타깝고, 심지어 기이하다. 우여곡절, 기상천외, 무지막지, 자승자박의 일들이 계속 터진다. 그가 도움 받아야 할 진짜 시골 사람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봐주기로 작정했건만 도가 지나치자 아내의 인내심은 결국 극에 달해서 "(집에서) 나가!"라고 외마디 비명으로 이어진다.

육식은 키워서 손수 잡아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음에 반해 채식은 뜯어먹거나 캐먹으면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의 반 이상은 동물성 단백질 확보를 위한 처절한 노력에 할애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필경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오늘 이 행성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심각하지만 날카로운 모종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동물성 단백질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하워드의 모습은 미국인의 전형일 뿐만 아니라, 육식 문화를 버리지 않는 이 행성에 사는 모든 인간종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토끼를 잡고 닭을 잡는 시설을 갖추고, 모가지를 찌르고 피를 빼고, 내장을 꺼내는 장면은 마치 읽는 이들이 피비린내 나는 도축작업에 직접 참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마침내 사고가 난다. 닭장을 만들고자 합판을 자르는데 톱날이 오른쪽 새끼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파고들었다. 경험 많은 의사가 가능한 애를 썼지만 그의 손가락은 영원히 날아갔다. 이후, 그는 손을 다친 사실을 소년처럼 여러 사람에게 자랑해댄다. 사람들은 빙긋이 웃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상처에 대해 비로소 말한다.

그때서야 그는 알게 된다. 이 세상에 손을 다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손가락 상실을 훈장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시골에 처음 들어왔던 6년 전, 전기톱으로 장작을 자르다가 왼손 검지가 톱날 속으로 들어가 잘리기 직전의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하워드처럼 대놓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선명한 손의 상처를 얼마간 득의(得意)의 표징으로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처럼 나 또한 주변에 손을 다친 이웃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게 되었다. 이웃의 상처를 알게 된 이후에야 나는 비로소 내가 선택했고, 내게 허락된 장소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손의 상처야 보려고 들면 보이지만, 사람들 가슴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상처들은 오죽 깊을까.

그럴 줄 알았지만, 이 책은 후반부에 이를수록 감동적이다. 그의 계약 기간 도중에 토네이도가 닥친 것이다. 1899년 이래 100년 만에 뉴욕을 강타한 거대한 토네이도였다. 74번가에 상륙한 토네이도는 62번가, 6번가가 만나는 주택가 전체를 휩쓸었다. 100년 된 나무를 서른 그루나 쓰러뜨렸고, 이스트 18번가 주택지를 포함한 15㎞ 반경의 자동차를 부쉈고, 지붕을 날렸다. 토네이도는 매니 하워드의 농장에서 겨우 900m 떨어진 곳에서 소멸했지만, 그의 농장 역시 박살이 났다.

남편의 뒷마당 농장에 시종 삐딱한 시선을 지니던 아내는 태풍으로 잃어버린 농산물과 간신히 건진 농작물을 면밀하게 살피던 남편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고 느꼈던 이야기를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온통 망가진 뒷마당으로 걸어갔어. 엉망진창이 된 농장 한 가운데 멍하니 서 있다 뭐든 건지려는 듯 다시 일을 시작했지. 당신이 죽어라 열심히 가꾼 것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어. 바로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 한참 동안 창문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생각했어.

'빌어먹을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갔어. 그런데 저 사람은 뭘 하는 거지? 다른 사람이라면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포기하고 잡지사에 전화해서 모든 게 끝났다고 할 텐데. 토네이도가 농장을 끝장내버렸다면서.' 하지만 아니었어. 당신은 달랐지. 당신을 이해한다는 게 아니야. 지금도 이해는 못하겠어. 하지만 그때는 이해했다고 생각했어.

처음으로 농장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말이야. 그리고 당신이 무척 자랑스러워." (302쪽).

세상에 나쁜 일은 없다. 토네이도에 굴하지 않은 그가 결국 인정하는 데 인색하기 짝이 없는 연봉 높은 엘리트 아내를 감동시킨 셈이다. 토네이도가 지나간 뒤 매니 하워드가 꼼꼼하게 작성한 피해 목록을 눈물겹다.

• 토마토 : 농장 전체에서 가장 비옥한 곳에 심은 작물. 4미터 가까운 나뭇가지에 짓눌려 온통 뭉개졌다.
• 가지(여러 종류) : 비참할 정도로 가냘픈 모습, 비에 절반은 쓰러졌다.
• 칼랄루(카리브 지방에서 나는 시금치) : 완전히 못 쓰게 되지는 않았다. 해가 너무 뜨거워지기 전에 막대를 꽂아 세우면 살릴 수 있을 것도 같다.
• 호박 : 물에 잠겼다.
• 허브(여러 종류) : 토마토에 가려 햇볕에 굶주렸다. 가망 없다.
• 콩(여러 종류) : 가망 없다.

필자가 매니 하워드에 대해 가장 깊은 동질감을 느낀 대목은 그가 어느 날 토끼를 잡고 난 뒤에 한 행동이었다. 3번 암컷 토끼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주인에게 그날 아주 거칠게 굴었다. 그를 물어 그의 몸에 상처가 났다. 처음에는 금속제 쓰레받기로 토끼의 머리통을 가볍게 때렸다. 토끼는 더욱 거칠어졌다. 결국 나중에는 호되게 때렸다.

토끼는 한참 동안 꼼짝도 안 하더니 이내 긴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는 서러운 항변과 원망이 섞인 그 기이한 토끼 울음소리를 잊지 못한다. 그런 뒤, 결국 토끼는 마비가 되어버렸다. 그는 결국 3번 암컷을 잡게 되었다. 잡고 난 뒤, 아내가 볼 수 없도록 토끼의 머리 잘린 몸통을 재활용 봉투에 담아 지하실 외딴 곳 환풍기 근처에 매달아두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흐느끼며 운다. 그 울음은 토끼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였다. 토끼는 아니지만, 나 역시 기르던 닭을 잡아보았기 때문에 그의 울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매니 하워드 농장의 짐승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는 닭이든 오리든 토끼든, 모두 번호를 붙였다. 2번 암컷, 3번 암컷, 이런 식이다.

그래서 딸애들은 "우리 오리는 이름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잡아먹을 것들이기 때문에 관계 맺기를 애당초 봉쇄한 수작이었다. 그가 설정한 최소 무게 2.3㎏이 되면 그의 농장 짐승들은 세상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잘 준비된 도축 시설에서 닭을 잡은 뒤, 피를 빼고, 조심스럽게 내장을 꺼내고, 털을 잘 뽑기 위해 온도가 44℃인 준비된 물에 담근다.

그런 건조하기 짝이 없는 단백질에 미친 사내가 그날은 3번 암컷 토끼를 잡은 뒤, 남몰래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7개월이 마침내 지났다. 6개월 이후 1개월간 그는 잡지사와의 계약대로 자신이 기르고 키운 것만 먹으며 보냈으므로 프로젝트는 성공한 셈이다. 6개월 동안 그의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 편한 셔츠에 작업복을 입고 하루 온종일 일한다. 부서진 것을 고치고 죽어가는 것을 살린다. 배고파하는 것들에게 먹이를 주고 목말라하는 것들에게 물을 준다"였다. 그 후 1개월은 그가 키운 무엇이든 잘 잡아서 아직도 입에 씹히는 고기 속에 남아 있는 '생명'을 느끼며 먹는 일이었다. 그가 말한다.

"하루하루 지나며 조금씩 목표에 다가갔다. 울타리 너머로 바쁘게 돌아가는 바깥세상이 보였다. 7개월 동안 내 삶은 겉모습뿐 아니라 움직이는 방식 자체도 달라졌다. 이제 꿈꾸는 모든 영역(아프가니스탄이나 모하비 사막 우크라이나까지)으로 인생을 확장하고 채우려 투쟁하는 식으로 살지 않았다. 내 삶은 농장과 감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내게 농장의 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장의 한계였다." (329쪽)

그의 프로젝트가 끝난 뒤, 그의 농장이었던 뒷마당의 3분의 2가 다시 잔디밭으로 덮힐 때 그는 보도블록 모양의 뗏장이 그의 밭을 덮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외면한다. 그가 마침내 '거기'까지 간 것이다.

<뉴욕매거진>의 의도는 결국 성공했다. 책은 출간되자 곧 잡지의 표지 기사가 되었고, 2008년에는 그가 쓴 책이 제임스 비어드 재단 상을 수상했고,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주연으로 그의 경험이 곧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라니, 우리도 언젠가 이 사내의 이야기를 책뿐 아니라 영화로 만나게 될 것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빠뜨릴 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7개월 동안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의 정신을 지배하던 사상가가 있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녹색평론>을 통해 자주 소개된 웬델 베리였다. 처음에 매니 하워드가 웬델 베리를 접했을 때, 그는 "이 사람은 나랑은 너무나 다른 인간이구나", 하는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웬델 베리가 너무나 다른 사람이지만,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웬델 베리의 목소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한다. 매일같이 허리가 휘어질 정도의 고된 노동을 한 뒤에 그는 어김없이 웬델 베리를 펼쳤다. 그가 펼친 책이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삶은 기적이다>(녹색평론사 펴냄)이거나 <희망의 뿌리>(산해 펴냄) 같은 책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낮에 한 행동과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 것을 웬델 베리를 통해 확인했고, 웬델 베리에게서 얻은 에너지로 다음 날의 고된 노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급기야 웬델 베리는 그의 방(영혼) 깊숙이 들어왔고,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웬델!", 하고 이름을 부른다.

대학보다 시골을 더 좋아했으며,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고된 노동을 하면서 사는 일이 왜 마땅하고 옳은 일인가를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준 사상가 웬델 베리가 말했다.

"노동은 윤리가 아니라 필수다."

뒷마당에서 얻은 달걀도 놀라운 선물이었지만, 격렬한 좌충우돌 끝에 매니 하워드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 웬델 베리의 바로, 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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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너무 밝아서 슬픈 곳, 그 어느 곳보다 나의 감정을 사로잡지만 동시에 불안을 안겨주는 곳, 쿠바. 나는 그 황홀함에 사로잡힌 대가를 치러야 한다네."

<또 하나의 혁명, 쿠바의 일차 의료>(린다 화이트포드·로렌스 브랜치 지음, 최영철 외 옮김, 메이데이 펴냄) 저자는 책의 서문부터 피코 아이어의 글을 인용하면서 "쿠바의 모순이 지닌 매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들이 쿠바의 1차 의료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 '모순덩어리' 쿠바다.

체 게바라의 나라. 쿠바는 많은 사람에게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의 턱밑에서 "사회주의"를 여전히 국가 운영의 원칙으로 고수하는 나라이고, 수십 년간의 경제 봉쇄 속에서 1인당 소득이 9700달러로 세계 109위에 머물러 있는 중미의 빈국이면서도 미국보다 낮은 영아 사망률(CIA의 발표를 보면, 미국은 10만 명당 6.14 쿠바는 5.72다.)을 자랑하며 한국과 비슷한 평균수명을 가진 나라([표 1] ). 또 생태 지향적인 농업을 운영하는 나라가 쿠바다.


[표 1] 국가 간 기대수명 비교. ⓒ프레시안
그러나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가 수십 년동안 1인 통치를 해왔고 이제는 그의 동생 라울이 지도자 자리를 이어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것은 물론이며 수십만 명의 난민이 미국으로 탈출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나라가 동시에 베네수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 의사를 '무상으로' 수출하고 전세계에서 의대 교육을 원하는 학생을 의과대학에 받아 '무상 교육'을 시킨다.

이러한 미스터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놓고 저자들은 그 대답을 쿠바 혁명과 동시에 진행된 "쿠바의 1차 의료"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한국어로 나온 쿠바에 대한 책이나 글이 많은 부분 인상기에 머물렀다면 이 책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분량의 책 치고는 쿠바 의료에 대해 상당히 많은 자료를 근거로 나름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교과서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또 순서도 상당히 교과서적이다. 쿠바의 역사와 보건의료의 역사를 설명하고(1장, 2장), 1차 의료 개념을 이야기하며(3장) 모자 보건(4장), 전염병(5장), 만성 질환(6장), 공공 보건의 의미(7장), 쿠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8장)을 다룬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쿠바에 대한 일방적 선전물이라는 염려는 안 해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쿠바 의료가 가지는 결점이나 모순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하고 또 변호한다. 예를 들어 쿠바의 HIV/AIDS 감염인이나 환자에 대한 강제 격리 조치의 문제라든가, 의약품의 부족이라든가, 동구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 시기의 어려움(쿠바에서는 이 시기를 '특별한 시기'라고 부른다고 한다)이라든가 문제를 충분히 다룬다. 매춘 문제등과 같은 쿠바의 치부도 다룬다. 또 개인의 자유 또는 사생활과 국가의 집단적 동원 간의 갈등이나 모순을 지속적으로 다룬다.

오히려 이 책은 저자들이 미국인이라는 또 플로리다를 직업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공보건이나 지역 참여의 문제를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자유와 충돌하는 무엇인가로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고 정부가 개인의 건강에 간섭하는 제도는 미국에서는 매우 낯설겠지만 주치의 제도가 당연하고 무상 의료가 일상화된 유럽에서는 공공성과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충돌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할지 의문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문제의식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이들에게 기본적인 교육과 건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충분한 위생 시설을 공급하는데 드는 비용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24명의 재산의 4%에 불과하다"는 글에서 그들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드러난다.

이들은 1993년 세계은행이 <세계개발보고서 : 건강에 대한 투자>를 펴낸 후 세계은행과 IMF 등은 "사회 불평등을 줄이고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관점으로부터 멀어져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값싸고 효과적인 최소한의 개입만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질병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따라서 사회의 포괄적인 건강 형평성이라는 관점보다는 특정 질병에 대한 의료 서비스의 제공이라는 관점으로 변화한 것이 세계의 불평등을 증대시키고 인간의 건강을 퇴보시켰다는 지적이다.

쿠바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보건의료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저자들의 답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쿠바를 베낄 수는 없지만 훌륭한 참고서는 된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사실 소아마비, 말라리아, 뎅기열 등을 사실상 퇴치한 것은 다른 중남미 국가에 비교해 볼 때 월등한 것이며 HIV/AIDS 감염에 대한 예방은 미국보다도 낫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혁명수호위원회, 여성연맹, 전국소농연합 등의 '운동권' 이름의 단체들이 지역 주민들의 참여와 역능화(dmpowerment)라는 지점에서 다루어진다는 점이 한국의 시민사회에서는 생소할 수 있고 또 정부가 이를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생소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적극적 주민 참여를 통해 쿠바가 실제로 보건의료 분야에서 높은 '성적표'를 올린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인구의 15%나 되는 고혈압 환자를 주로 식이요법이나 운동으로 치료한다는 방침이나 암에 대해서도 예방이나 건강 증진이 기본 방침이라는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혹시 이 나라는 약도 없는 것 아닌가? <열한 번째 테제로 살아가기>(박미영·신영전·전혜진 옮김, 한울 펴냄)이라는 책의 저자로 한국에서 알려진 리처드 레빈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쿠바는 천국이 아니다.

"어디에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과에 대한 통계들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 체계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고 현재도 문제 개선을 통해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의약품 부족 같은 문제는 분명한 사실이다. 무역 봉쇄 조치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 현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필요한 의약품이 1000이라면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것은 겨우 5~600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쿠바가 의료 기술이 뒤지거나 약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쿠바는 의료 관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나라다. 아바나의 많은 병원들이 10%의 병상을 의료 관광을 위해 내놓고 이 재원으로 무상 의료를 시행한다. 또 중남미의 많은 의사들이 암 수술을 위해 환자를 쿠바로 보낸다. 쿠바의 병원(이른바 2, 3차 의료)은 상당한 의료 수준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의료 관광은 있을 수 없다. 또 모든 의약품을 자체 생산하지는 않지만 쿠바가 당뇨병 환자나 고혈압 환자를 약도 없이 운동이나 식이요법만 시키는 나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쿠바가 교조적일 정도로 예방과 건강 증진이라는 원칙적인 방침을 밀고나갈 수 있는 것은 저자들이 잘 지적하듯이 1차 의료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1차 의료를 한국에서처럼 동네의원 정도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쿠바의 의사 숫자는 1000명당 5.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2배 정도다. 그리고 더 많은 숫자의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이 주민들과 함께 산다.

의사 한 사람당 120~150가구가 맡겨지고 1층에는 병원, 2층에는 의사의 집이 있다. 오전에는 진료를 하고 오후에는 방문 진료를 한다. 필자처럼 엉터리 의사라도 한 동네에서 5년 정도만 진료를 하게 되면 단골 환자 집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떤 생활 습관이 문제인지를 알게 되기 마련인데 아예 한동네에서 살고 왕진을 이렇게 자주 간다?

고혈압, 당뇨는 물론, 암이라도 예방이나 건강 증진을 기본 방침으로 삼는 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지역 주민단체들(혹은 지역의 '완장'? 혹은 마당발들? 무어라 부르던)이 돕고 정부 지원까지 꾸준하다면 말이다. 하여튼 이러한 만성 질환 관리에서도 쿠바는 결과를 놓고 볼 때는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 평균 수명이 이를 보여준다.

물론 관료주의의 문제가 있을 것이고 개인의 자유 문제가 당연히 있다. 쿠바의 1차 의료는 많은 사람들이 한 동네에서 수십 년을 사는 쿠바의 봉쇄 경제 하에서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 책의 저자도 밝히고 있다. 폴 파머의 <권력의 병리학>(김주연·리병도 옮김, 건강과대안 기획, 후마니타스 펴냄)에서도 쿠바의 이런 문제를 다룬다. 쿠바는 HIV/에이즈 환자들을 강제 격리 조치 시켰다. 이는 당연히 상당한 비판을 불러왔다.

그러나 군사 시설에 환자들을 가두었다는 미국 측의 비판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폴 파머가 밝히는데 이는 초기 몇 년간의 일이었고 (초기의 환자들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쿠바 병사들이었다는 점은 <또 하나의 혁명, 쿠바의 일차 의료> 이 책에서 밝혀진다) 1994년 이후에는 환자들이 격리된 마을에서 살지 말지를 본인이 결정하도록 했다는 것이 폴 파머가 직접 격리 마을을 찾아가 본 다음의 결론이다.

더욱이 폴 파머는 미국 측의 비판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쿠바의 '자유스러운' 격리 마을과 미국으로 피난 온 아이티 난민을 격리 조치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를 비교함으로서 그 차이점을 역겨울 정도로 생생히 드러낸다. 여기까지 오면 쿠바의 '관료주의'와 '개인의 자유의 억압'이라는 것이 어디까지가 미국과 서방 측의 악선전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 <또 하나의 혁명 쿠바 일차 의료>(린다 화이트포드 로렌스·브랜치 지음, 최영철·김승섭·김재영·오주환 옮김, 메이데이 펴냄). ⓒ메이데이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시사적인 부분은 "공공보건의 공공성을 다시 생각해 보다"라는 7장일 것이다. 저자들은 두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 등이 신봉하는 것"으로 "특정 질환이나 특정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생명공학의 역할을 중시하는 모델"이다.

다른 하나는 쿠바와 같은 모델이고 "포괄적 서비스를 특징"으로 하고 "형평성을 목표로 하고 낮은 기술에 의존하며 인적 자원을 중시하는 모델"이다. 저자들은 이 게이츠 모델이 현재 세계적이거나 지역적인 "공공보건 프로그램의 정책을 결정하거나 재원을 분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세계은행, 록펠러그룹, 게이츠재단 및 몇몇 제약회사들이 결정정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어떤가? 또 어떤 모델을 좇아가야 할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일 것이다. 한국의 현재 상황은 시장 지향적인 의료가 횡행하는 가운데 국민건강보험이 그나마 형평성을 겨우 최소한으로 지켜주는 상황이고 이것조차 무너뜨리기 위한 여러 의료 민영화 조처가 광풍처럼 들이닥칠 태세다.

한국은 도시의 경우 연간 거주 이동이 인구의 30%에 가깝다. 한국의 의사는 1000명당 1.7명에 불과하여 OECD의 반 정도이고 쿠바에 비하면 30%도 안된다. 그리고 의대를 졸업하려면 연 1000~2000만 원의 등록금이 든다. 웬만한 집이 아니면 마이너스 통장을 가져야만 한다. 한국의 대안이 쿠바일 수 있을까? 당연히 쿠바는 우리의 대안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쉬울 것이다. 또 한국에서의 쿠바는 여러모로 북한과 겹쳐 보인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건대 한국 의료의 상황은 상상력을 가지지 않으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 한국과 같이 쿠바보다 3~4배는 잘 사는 나라가 쿠바만큼의 평등한 보건의료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쿠바보다 민주적이면서도 쿠바보다 훨씬 첨단 의료기술을 잘 활용하는 의료 체계를 우리는 가질 자격이 없는 국민일까?

왜 정부는 국립의과대학만이라도 학생들을 무상 교육을 시키고 의무적으로 공립의료기관에 배치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우리보다 국민 소득이 낮았을 때 유럽 국가들이 이루어 낸 무상 의료 체계를 우리는 아직 못 만들어 낸 것일까? 왜 모든 유럽에 있는 주치의제도가 한국에는 없는 것일까?

쿠바는 우리의 대안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쿠바의 의료 체계는 우리에게 '심지어' 쿠바처럼 가난한 나라에서조차도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면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쿠바에서는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쿠바의 보건의료 체계는 우리에게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보건의료 체계와 사회 체제가 지금과 같은 모든 것이 상품이고 돈인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의료 체계는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이 이 책이 보여주는 미덕일 것이다.

사족 : 이 책에 실린 정호현 독립영화감독의 추천 글. 쿠바에서 연애하고 결혼하여 쿠바를 삶의 터전으로 살게 된 이의 이 글은 매혹적이다. 이 글만으로라도 책값의 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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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자녀를 둔 부모라면, 덧셈이라도 가르쳐서 학교에 보낼 요량으로 애를 책상 앞에 앉혀놓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이리저리 가르쳐보다가, 결국 아이에게 화를 버럭 내거나, 연필로 책상을 치면서 답답해하거나, 밤에 맥주캔을 따면서 한숨을 쉬어본 경험이 한번쯤 있으리라. 나는 "저 나이 때 안 저랬는데" 푸념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착각 마시라. 당신도 '자신의 판박이' 아이마냥 저랬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은 숫자를 따분해하고, 수학을 어려워하며, 연산은 도통 뭔 얘기를 하는지 낯설어 한다. 도대체 아이들은 왜 수학을 어려워하는 걸까? 연산을 하는 동안, 아이들의 뇌에선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것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반가운 책이 출간됐다.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교실의 안승철 교수가 쓴 <아이들은 왜 수학을 어려워할까?>(궁리 펴냄)가 바로 그 책이다. 그가 번역해 2004년에 나온 <우리 아이 머리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궁리 펴냄)는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뇌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 하는 세상의 모든 부모가 읽어야할, 발달신경생물학을 체계적으로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그런 점에서 <십대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바버라 스트로치 지음, 해나무 펴냄) 역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아이들은 왜 수학을 어려워할까?>(안승철 지음, 궁리 펴냄). ⓒ궁리
그런, 안승철 교수가 이번엔 직접 집필에 나섰다. 그가 관심을 가진 주제는 아이들의 수학 지능. 아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숫자를 이해하고, 사칙연산의 개념을 터득하는지, 사교육 시장의 문제집과 대한민국의 학교 교육은 아이들의 인지 발달 과정에 잘 맞춰져 있는지 집중적으로 검토한 책이다. 우리 아이가 수학을 잘하길 바란다면, 그래서 아이에게 수학을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다면, '그들이 어떻게 수를 받아들이고, 연산을 배우는지'를 부모가 잘 알아야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얼마나 유익할까? 이 책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글쎄…. '소름끼치게 잘 쓴 책은 아니지만 나름 분명한 성과와 한계를 가진 책, 부모보다는 교사에게 더 유용할 책'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과연 이 책의 성과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일까?

이 책의 앞부분은 아이들이 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를 검토하고 있는데, '초등 수학 교육의 권위자' 이안 톰슨의 편저 <Teaching and Learning Early Number>(Open University Press, 1997)와 이 책에 인용된 참고 문헌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2008년에 개정판이 나오기도 한 이안 톰슨의 편저 <Teaching and Learning Early Number>는 초등학생의 수학 교육을 위한 발달심리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모은 책으로, 그 동안 어린이 수학 교육의 이론적 틀을 제공해온 '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을 비판하고 수학 교육의 대안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책이다. 유아들에게 바람직한 수학 교육의 방향과 실제적인 교수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쓰인 책으로, 우리나라에선 정민사에서 2002년에 <어린이 수학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으나, 널리 알려지진 않은 책이다.

피아제의 이론에 따르면, 아이들이 수 개념을 갖기 시작하는 것은 7세 이후. 따라서 그 전에 수학을 가르치려 시도한다면, 아이들이 왜곡된 수 개념을 갖게 되거나 흥미를 잃을 수 있어, 7세 이후에 교육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발달심리학자의 정교한 실험에 따르면, 아이들은 3~4세 무렵 이미 3 이하의 수에 대한 개념을 선험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며, 그 무렵 이미 실생활에서 적용한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안 톰슨과 그 동료들은 7세 이전에 수에 대한 개념과 추상적 상징 체계를 적절하게 가르치면, 오히려 유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안 교수는 책의 앞부분에서 톰슨 그룹의 주장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마지막 결론 부분에선 이것이 선행 학습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이 책에서 앞부분의 미덕이라면, 저자가 톰슨의 책을 바탕으로 신경심리학 실험 내용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어서 '아이들의 수 개념 이해'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교사에게 각별히 유익할 것이다.

이 책에서 아마 학문적으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아이들이 사칙연산을 어떻게 하고 받아들이는가를 다룬 3장과, 현재 아이들이 풀고 있는 문제집은 적절하게 구성돼 있는가를 고찰한 5장일 것이다. 앞부분과는 달리, 이 부분은 대개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학문적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론 꽤 그럴듯하게 들리며, 자신의 주장을 (아이를 둔 아버지답게)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과학적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독자들이 과학적 사실과 저자의 주장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혼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이들의 사칙연산 처리 과정을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은 일견 타당하나 아쉬움이 크다. 실제로 수학 연산을 담당한다고 알려진 뇌의 다양한 영역, 이를테면 앞중심이랑(precentral gyrus)이나 마루엽(parietal lobe), 각이랑(angular gyrus), 그리고 배측전전두엽(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 등이 연산 과정에서 어떻게 기여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더라면 부모나 교사 모두에게 더 유익했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의 매력은 거스트만증후군(계산 불능(acalculia)을 보이는 손가락실인증 환자)을 포함해 수학적 사고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나, 남녀의 수학 능력의 차이, 동물도 숫자 개념이 있는가 등 수학과 관련된 흥미로운 주제를 폭넓게 탐색하고 있어, 자녀가 없는 일반 독자라도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이다. 물론, '수학 영재들의 사고 과정'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또 하나, 이 책에서 아쉬운 대목은 거창하게 '아이들이 수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말해줄 것처럼 시작했으나, 결국 사칙연산에만 그 논의를 국한해 설명했다는 점이다. 공간 지각 능력을 바탕으로 한 '공간과 도형'(그러니까 말하자면 기하학)이라든가, 패턴 인식, 추론과 문제 해결 등 수학적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한 지적 능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 크게 실망스럽다.

'사고 공간 안에 위치한 도형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나, '대뇌가 특징적인 수학 패턴을 어떻게 찾아내는가'의 문제, '대뇌가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인과율을 처리하는가'의 문제, '문제 해결을 위한 추론 과정은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 '그 과정에서 두정엽과 전전두엽의 역할은 각각 무엇인가'의 문제 등은 최근 신경과학 분야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인데, 이런 부분들이 논의가 돼 있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정작 이 책은 "아이들이 왜 수학을 어려워할까?"라는 야심찬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왜 아이들이 수학을 어려워하는지, 어떤 아이들은 수학을 잘 하는데 뒤떨어지는 아이는 무엇이 다른 것인지 등 우리가 정말 알고 싶은 문제들에 대해선 해답을 들려주지 않은 채 마지막 책장이 덮힌다.

글쎄…, '연산 개념도 없는 애들 데리고 너무 일찍 가르치려 하지 마라' 정도? 이 책은 부모에게 '서두르지 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물론 그 말은 백번 옳은 말이다) 기다린다고 해서 애들이 누구나 저절로 수학을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답답할 노릇이다. <아이들은 어떻게 수를 배우는가?>가 이 책에 합당한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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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의 대출 고객 가운데 한 명이 아파트 가격이 떨어지고 결국 그 집이 경매에 넘어가 자살했습니다."

얼마 전 트위터 상에서 이뤄진 주택 문제에 관한 집단 간담회를 진행했을 때, 한 금융기관 중견 간부는 상당히 충격적인 증언을 내놓았다. 그는 계속된 증언에서 "주택 담보 대출 연체율이 사상 최저 수준이지만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면 아파트 가격의 70% 이상이 대출인 채무자는 극단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수도권에는 이미 비참한 '하우스 푸어'들이 많다"며 "이걸 언론에서 숨기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 같은 그의 발언은 이미 하우스 푸어(house poor) 문제가 이미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런 가운데 이미 하우스 푸어들이 넘쳐나는 실태를 적나라하게 소개한 책이 출간됐다. 바로 문화방송(MBC) <PD수첩>의 김재영 PD가 최근 출간한 책 <하우스 푸어 :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더팩트 펴냄)이다.

김재영 PD는 지난해 '판교, 그 욕망의 땅', '강남 재건축의 그늘', '재건축 늪에 빠진 사람들', '2010, 아파트의 그늘', '인천은 세일 중' 등 주택 시장의 적나라한 실태와 사회경제적 문제점을 심층 취재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같은 심층 취재를 통해 부동산 문제에 대해 상당한 전문 역량을 축적한 PD이기도 하다. 김 PD의 공력 덕분인지 <하우스 푸어>는 출간 직후부터 단기간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이들의 실태를 다룬 언론 보도가 잇따르는 등 세간의 화제를 낳고 있다.


▲ <하우스 푸어 :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김재영 지음, 더팩트 펴냄). ⓒ더팩트
사실 김재영 PD의 고발이 아니더라도 이미 수도권 곳곳에는 '집 가진 빈자'들인 이른바 하우스 푸어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양산되고 있다. 다들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 속을 끙끙 앓고 있는 이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사실 하우스 푸어라는 말은 우리에게 낯설다. 결혼할 때 집 장만하는 것이 '능력'의 표상이고, '돈 생기면 집부터 사라'는 것이 한국 재테크의 불문율 1조 1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일 수도 있다. 그만큼 국내에서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중산층이 된다는 표상이었고, 경제적 안정의 징표였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집을 어느 곳에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신분이 구분되는 2000년대를 통과해왔다. 이런 사회에서 '집 가진 빈자'는 형용모순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하우스 푸어는 점점 냉엄한 현실이 돼가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분당, 용인, 평촌, 일산, 파주, 김포, 인천 청라와 송도뿐만 아니라 서울 강남 3구를 비롯한 각종 뉴타운 및 재개발 재건축 단지 곳곳에서 비슷한 사례를 접할 수 있다.

필자가 김재영 PD의 요청으로 하우스 푸어의 숫자를 추정해본 결과 기존 주택과 신규 분양물량 매입을 통해 발생한 하우스 푸어만 수도권에서 95만 가구, 전국적으로는 198만 가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수치는 매우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다.

왜 그럴까. 우선 앞의 수치에는 수도권 고점 가격인 2006년 이후 주택 매입자만 포함돼 있다. 지방의 경우 이미 2004~2005년경에 주택 가격 상승을 멈춘 지역이 많아 실제로는 하우스 푸어 상태에 들어가 있는 가구 비율이 수도권보다 더 많을 것이다. 또 이 수치에는 아파트가 아닌 단독과 연립주택 매매 거래를 통해 하우스 푸어 상태가 된 사람들도 제외돼 있다.

더구나 향후 하우스 푸어는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주택 시장을 둘러싼 거시경제 흐름상 주택 가격이 대세 하락 흐름으로 가게 될 것임은 이제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고 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주택 가격 하락으로 하우스 푸어들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특히 주택의 자산 가치가 떨어지는 가운데 주택 담보 대출 거치 기간이 돌아오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한국은행 보고서를 보면, 원금 상환이 시작될 경우 추가 대출 없이 첫해에 즉시 부동산을 처분해야 하는 가구가 전체 부채 가구의 14.9%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주택 담보 대출의 거치 기간 만기가 2008~2009년에 도래하게 돼 있었으나 정부의 조치로 만기가 연장됐다.

하지만 필자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12년 하반기에 이르면 분기별로 25조 원 이상의 만기 상환 연장 물량이 쏟아지게 된다. 주택 가격이 하락하는 가운데 그 정도 만기 물량이 도래할 경우 금융권이 계속 만기를 연장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기를 더 이상 연기해줄 수 없을 때 이들 하우스 푸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소유한 집을 처분하고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애초부터 그들이 모두 소득이 적은 사람도 아니었다. 무리하게 집을 사지 않았으면, 저축을 하며 충분히 중산층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집 없는 중산층에서 집 가진 하류층으로 전락한 것이다. 돈 덩이인 줄 알았던 집은 이제 빚 덩이였고, 자신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족쇄가 돼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하우스 푸어 문제는 앞으로 갈수록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2000년대 부동산 거품기의 후반에, 그리고 지난해 막차에 올라탄 사람들 대다수는 소득 여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무리하게 빚내서 집을 산 경우들이어서 집값 하락에 따른 충격이 더욱 클 것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하우스 푸어로 전락할 것을 생각하면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해 내내 '부동산 막차에 올라타지 말라'고 그토록 경고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김재영 PD의 책 <하우스 푸어>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직면하게 될 문제를 예리한 감각으로 포착해낸 '발로 뛴 저널리즘'의 훌륭한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시장경제에서 모든 투자는 자기 책임 하에 이뤄지는 것이다. 집값이 오를 때는 투기 차익을 몽땅 차지하고, 집값이 내릴 때는 손실을 사회에 전가하는 것을 무작정 용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하우스 푸어 문제에 대해서도 다소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광기의 투기 거품 시대를 지나 정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부동산 투기 잘 하는 사람이 더 인정받고, 집 있는 사람이 집 없는 사람을 괄시하고, '집값 떨어진다'고 주장하면 집 없어서 배 아파하는 사람 취급하고, 아이에게 아이 친구 부모가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 물어봐야 하고, 집값 올리려고 외국어고등학교와 같은 특수 목적 고등학교 유치에 목숨을 걸고, 집값 떨어진다고 임대 주택이나 장애인 시설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도 임대 주택 아파트는 담장으로 막고, 아파트 부녀회에서 집 있는 아줌마만 모여 집값 담합 반상회를 하고, 우리 동네 집값이 저평가돼 있으니 더 올려 받아야 한다고 악다구니를 쓰고, 집값이 올라야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토건 개발 사업에 찬성하고, 집값이 올라야 하기에 집값 올려줄 것 같은 저질 정치인을 국민의 대표로 뽑고…이제는 이런 비정상을 끝내야 하는 시기가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우스 푸어 한 사람 한 사람은 결국 우리의 이웃이요, 가족이다. 2000년대 부동산 투기 광풍 시대를 살아온 우리 사회의 어느 누가 이 부동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결국 하우스 푸어는 부동산 투기 광풍 시대가 남긴 상흔이자, 우울한 자화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우울한 풍경을 만들어낸 책임은 부동산 기득권 세력들에게 있다. 정부와 정치권의 거듭된 정책 실패, 건설 업체와 부동산 광고에 목을 매 선동 보도에 열을 올렸던 언론, 그리고 부동산 투기 선동에 열을 올렸던 부동산 정보 업체와 엉터리 전문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우스 푸어는 이들 부동산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만든 부동산 거품이라는 덫에 걸려든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로서는 그런 잠재적 하우스 푸어들이 더 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제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가계 부채 다이어트를 유도해야 한다. 그런데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부동산 버블이 없다'며 일반 가계를 현혹하기 바빴던 부동산 광고에 목을 맨 상당수 신문들이 다급해지자 이제는 부동산 거품 붕괴로 당장이라도 한국 경제가 무너질 것처럼 과장하며 DTI규제를 풀어서라도 부동산 거품을 떠받치라고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지금도 가계 가처분 소득 대비 가계 부채 규모가 140%를 상회해 세계 최고 수준인 상태에서 부동산 거품을 유지하기 위해 가계 대출을 더 늘리라고 촉구하는 행태는 어처구니가 없다.

부동산 광고에 목 맨 상당수 언론은 "집값 떨어진 지금이 집을 살 타이밍"이라며 물귀신처럼 멀쩡한 가계를 하우스 푸어의 행렬로 끌어들이는 선동 보도에 여념이 없다. 정부 또한 부동산 거래 활성화라는 명목 아래 거품 잔뜩 묻은 아파트 폭탄을 받아줄 '잠재적 하우스 푸어'를 계속 양산하려 하고 있다.

일반 가계는 이들 부동산 기득권 세력의 마지막 선동에 넘어가지 말기를 바란다. 이들의 선동에 넘어가는 순간 '잠재적 하우스 푸어'가 될 초청장을 받아든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재영 PD의 책 <하우스 푸어>는 국민에게 빚을 권하는 부동산 기득권 세력의 덫에 걸려들어 선량한 국민들이 '하우스 푸어'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훌륭한 백신 역할을 하는 책이다. 부동산 시장이 대세 하락기에 접어든 지금도 '부동산 불패 신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부동산 시장 주변을 맴돌고 있는 분들께 <하우스 푸어>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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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여럿이 함께 공유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금서' 목록에 올린 책을 몰래 구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었던 적도 있었다. 출판사가 정식으로 찍지 못한 책을 제본해서 돌려 읽으면서 희열을 느끼던 적도 있었다. 그 때의 책은 '해방의 도구'였다.

시집 한 권, 소설 한 편이 세상을 들썩거리게 하던 때가 있었다. 서정시를 암송하는 일은 젊은이의 특권이었다. 짧은 단편소설 혹은 긴 대하소설은 늘 화제의 중심에 놓였다. 설사 책을 읽지 않는 이라도 신문에 나오는 책 기사에는 잠시 눈을 뒀었다. 그 때의 책은 '교양의 척도'였다.

오늘날 책에 '해방의 도구', '교양의 척도'와 같은 권위를 부여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한때 해방의 도구였던 인문·사회과학 책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한때 교양의 척도였던 문학 책도 '위기'와 '몰락'이 얘기된 지 10년도 넘었다. 대화에서 책이 차지했던 자리를 드라마, 영화 그리고 연예인의 가십이 대체한 지도 꽤 되었다.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이야기, 특히 '서평'을 찾아볼 수 있는 공간도 크게 줄었다. 언론은 더 이상 예전처럼 서평에 신경을 쓰지 않고, 독자도 굳이 서평을 찾지 않는다. 인터넷 공간에 서평은 넘치지만 그것의 옥석을 가리는 일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프레시안>이 다시 '책'을 얘기한다.

오는 7월 31일 <프레시안>이 수개월에 걸쳐 준비한 서평 웹진 '프레시안 books'가 독자를 찾아간다. 좋은 책에 딱 맞춤한 최고의 필자들이 공들여 쓴 신간, 구간을 다룬 권위 있는 서평을 중심으로, 독자·필자·출판사·도서관 등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말 그대로 열린 '책 세상'을 꿈꾸는 공간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책이 뒷전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책으로 세상 보기'가 필요할 때라고 믿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오늘날이야말로 책이 온전하게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books'는 미처 이런 책의 힘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못했던 독자까지도 책 세상으로 끌어들이고자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이런 '프레시안 books'의 계획을 미리 듣고서 세 사람의 책 동네 인사가 모였다. 강맑실 사계절 대표,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한승동 한겨레신문사 기자가 출판사 대표, 언론사 기자 등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바람직한 서평의 본보기를 놓고 두 시간에 걸쳐서 의견을 나눴다. 사회는 '프레시안 books'의 상임서평위원인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가 맡았다.

다음은 지난 7월 19일 오후 종로구 청운동 근처 카페에서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좌담 전문.


▲ 왼쪽부터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이권우 '프레시안 books' 상임서평위원, 강맑실 사계절 대표, 한승동 한겨레신문사 기자. ⓒ프레시안(손문상)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권우 : 오는 7월 31일 새로운 서평 웹진 '프레시안 books'가 선을 보인다. 기존의 언론 서평 섹션과 다른 점을 여럿 내세우고 있지만, 그동안 '실종'되었던 서평을 통한 다양한 담론 제기라는 점에 특별히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런 정신을 내세운 '프레시안 books'를 준비하면서 서평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이 질문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한승동 : 서평은 무엇보다 우선 독자를 위한 것이다. 일단 내가 <한겨레>에 쓰는 기사를 서평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그것을 쓰면서 염두에 두는 원칙부터 얘기해 보겠다. 내가 서평을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게 하자', 바로 이것이다.

즉, 내가 쓴 서평을 보고 한 사람이라도 더 책을 찾게 된다면, 그것은 성공한 서평이다. 물론 가능한 한 좋은 책이어야 한다는 건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쓴 서평을 지면에 배치하는 편집을 할 때도 무엇보다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맑실 : 서평이 독자를 위한 것이라는 데는 다들 동의한다. 그런데 그 독자는 누구인가? 매체의 성격에 따라서 독자의 상이 다를 수 있다. 오늘은 주로 언론 서평을 얘기하겠지만, 실제로 서평이 실리는 매체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프레시안>에 실리는 서평과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펴내는 <서평문화>의 그것은 상정하는 독자가 다르지 않을까?

어떤 독자를 위한 서평인가, 이것이 명확하지 않으면 서평의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책의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그 사이를 매개해주는 전달자, 좀 더 풀어서 얘기를 해보면 저자와 출판사, 독자, 또 서점과 도서관 등 독서를 운동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에 두루 영향을 줄 수 있는 권위 있는 서평이 있었으면 좋겠다.

강성민 :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찾으면 자연스럽게 해당 서평뿐만 아니라, 그 서평이 실리는 매체의 성격도 생각해볼 수 있다. <프레시안>에서 서평 웹진을 새로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좀 더 도발적인 서평을 많이 볼 수 있겠구나, 이런 기대를 했었다. 서평의 비평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평의 성격이 강한 서평의 1차 독자는 저자와 출판사 그리고 책이라는 매체를 우선순위에 놓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의 눈길을 잡는 서평이 많이 실린다면 '프레시안 books'가 짧은 시간에 강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프레시안>의 기존의 정체성에도 맞고.

책 소개에만 머무르는 서평, 곤란하다

이권우 : 방금 강성민 대표가 '프레시안 books'에 실릴 서평이 타깃으로 삼아야 할 독자의 상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떠한지?

한승동 : 강맑실, 강성민 대표의 얘기를 들으면서 <한겨레>에 실리는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이런 생각을 했다. 일단 누구를 위한 것이면 안 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있다. 먼저 서평이 출판사, 출판 산업 자체의 이해를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매체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어서도 곤란하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역시 남는 게 아까 말한 바로 그 독자다. 서평이 생산자 쪽인 작가나 출판사, 출판 산업 또 매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우선이라는 얘기고, 좀 다른 맥락이지만, 서평의 효과로 독자층이 넓어지면 결과적으로 작가, 출판사, 출판 산업, 작가 등 생산자 쪽도 발전시킬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독자 우선이다.

그런데 문제는 독자에는 정말로 다양한 성격, 다양한 계층,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누구를 주독자로 상정할 것인가?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주일에 수백 권이 나오는 책 중에서 몇 권을 골라낼 때는 분명히 어떤 공감대가 있다는 것이다.

책을 고를 때는 당연히 책 자체의 가치를 먼저 보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자세를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개인의 가치 지향이나 선호가 자연스레 영향을 끼친다. 말하자면 개인 주관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건 사람인 이상 애초에 불가능하다. 마치 역사책이 역사가의 사료 선택 단계에서부터 주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책 선정에서의 주관성이나 가치 지향의 개입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면 차라리 그 바탕 위에서 자기 정체성에 맞게 솔직하고, 그리고 성실하게 임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한겨레>다운 책이라고나 할까? 좀 거칠게 얘기하자면 예컨대 유한 계층에게나 호소력이 있을 법한 책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사회를 좀 더 나은 쪽으로 바꾸려는 의지, 고민 등이 배어 있는 책에 자연스럽게 손이 더 간다. 그런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동력이 되리라는 바람이 들어 있다고나 할까?

이권우 : 한승동 기자가 서평의 주된 독자로 책을 소비하는 사람에게 방점을 찍는다면, 강맑실 대표나 강성민 대표는 서평이 책을 생산하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줘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 얘기를 좀 더 해보자.

강맑실 : 물론 서평이 실리는 매체가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느냐에 따라서 서평의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술 잡지에 실리는 서평의 독자는 일반 독자가 아니다. 저자나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극을 받도록, 그래서 학술 활동에 도움이 되는 서평이어야 한다.

그러나 <프레시안>이나 <한겨레>와 같은 언론의 서평은 불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방금 한승동 기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암묵적으로 특정한 성향의 독자를 염두에 둔다. 이처럼 언론마다 최소한의 서평 독자에 대한 범주는 정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그 독자 범주에 따라 책의 선정도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또 서평의 역할과도 관계되는 것인데 다분히 서평이 책 소개에 머물러서 독자 확산에만 목적을 두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바람직한 출판문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와 출판사에 대한 자극제와 각성제로서의 역할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또 책을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상호 소통하는 기회가 많아질 때, 저자나 출판사와 독자가 서로 활발히 교류할 때, 비로소 책을 둘러싼 바람직한 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 서평은 바로 이런 문화를 고무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아까 얘기한 것처럼 양쪽에 두루 정신이 바짝 들 수 있는 자극을 줄 수 있는 서평이 나와야 한다.


▲ 강맑실 사계절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블로거 마케팅' 과연 바람직한가?

강성민 : 아까 비평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서평을 주문하긴 했는데…. 출판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성격이든 간에 책을 소개하는 공간이 많아지면 좋겠다. 지난 2년 새 신문에서 책을 소개하는 지면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프레시안 books'의 시작은 대환영이다. (웃음)

이권우 : 강성민 대표의 얘기를 받아서 그간 서평이 출판문화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 살펴보자. 시장에 미친 영향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상을 해냈는지 현장에 계신 분들의 평가가 궁금하다.

강맑실 : 시대별로 달랐다. 2000년대 초까지 언론 서평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웃음) 종합 일간지 서평 섹션의 머리기사로 실리면 한 달 만에 2쇄에 들어가는 책이 많았을 정도니까. 그때는 언론 서평 외에는 책에 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독자도 언론 서평을 통해서 책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욕구가 강했다.

또 언론도 서평에 그만큼 신경을 썼다. 일본과 같은 나라와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종합 일간지에서 서평에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활자 문화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신문과 책이 서로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했고, 또한 한 신문이 독서 문화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한 사회에서 그 신문이 담당하는 문화 인프라로서의 역할을 가늠하는 독자들의 인식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또 그 때는 <출판저널>이라고 하는 여론 주도층에게 영향력이 컸던 서평 전문 잡지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신문 서평의 영향력은 어떤가?

한승동 : 사실 언론의 서평 기사야말로 한국의 출판문화가 이 정도까지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국 사회의 변화, 인터넷의 등장 등 매체 환경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언론 특히 신문의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서평 매체가 다양해지다 보니, 독자도 더 이상 책에 대한 정보를 언론 서평에만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 수요 변화는 서평의 영향도 있겠지만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강하게 반영하는 면도 있다. 1980년대에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이 폭발적으로 읽혔던 것은 그 시대의 대중적 욕구, 곧 군사 정권의 억압 체제에 저항하면서 한국 사회의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변화를 희구했던 사람들의 갈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특히 지금의 20~30대는 한 세대 전의 그들 연령대만큼 책을 읽지 않는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지난 시절 책은 세상을 바꾸는 수단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워졌다.

강맑실 : 20대는 책뿐만 아니라 신문도 읽지 않기 때문에 신문 서평의 영향력이 더욱 축소되고 있는 게 아닐까. 또 언론이 변화하는 출판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다. 2000년대 들어서 어린이, 청소년 책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그런데 언론에서 이런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어린이, 청소년 책은 쏟아지는데 언론이 그것을 외면하니 독자나 출판사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 청소년 책을 추천하는 전문가의 네트워크가 등장하고 독자의 큰 호응을 얻은 것도 이 때부터다. 또 출판사에서 자체적으로 서평 매체를 창간하는 등 언론과 통하지 않고 독자와 만나려고 노력을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고. 여기에다 다양한 정보 전달자로서의 인터넷 환경이 덧붙여지면서 신문 서평의 영향력도 축소되어간 게 아닐까.

이권우 : 인터넷 공간에서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올린 서평의 영향력도 무시 못 할 정도로 커졌다. 강성민 대표가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해왔을 터니, 먼저 말해주면 좋겠다.

강성민 : 그런 서평은 영향력이 클 뿐만 아니라 지난 1, 2년 사이에 출판 시장에서 사실상 제도화되었다. 예를 들면, 이른바 '파워 블로거'라고 불리는 이들 중 몇몇은 출판 홍보 대행 회사의 홍보 목록에 이름을 올릴 정도다. 출판사가 언론과 대등한 자격으로 놓고 신경을 쓸 정도로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가, 이런 질문을 해본다면 아직은 유보적이다. 인터넷 공간의 서평이라는 게 수준차가 천차만별일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출판사 마케팅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는데…. 인터넷에서 그런 서평이 대세가 되면 오히려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아질 것 같아서 걱정이다.

독자들이 언론에서 주목을 받지 못한 좋은 책을 발굴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이 읽도록 퍼뜨리는 일, 이런 긍정적인 일보다는 내용이 부실한 책인데 출판사의 이른바 '블로거 마케팅' 때문에 살아남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도 이런 일이 없다고는 말 못하고….

이권우 : 기자 처지에서 이런 인터넷의 서평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한승동 : 내가 하는 일만으로도 버거워선지 사실 다른 매체들 서평을 찬찬히 살필 여유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최근에 인터넷 커뮤니티 '비평고원'의 온라인에서의 작업을 묶은 책(<비평고원 10>)을 소개했다. 대단하더라. 나름의 힘과 활기를 느꼈다. 일부 코너의 고담준론들 중엔 내 식견 정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더라. (웃음)

비평고원은 상당한 깊이의 지식인이 교류하는 일종의 공동체로 자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들만 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그런 것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라캉이나 들뢰즈, 하버마스나 아도르노 등 유럽 지식인의 책이나 담론에 관한 수준 높은 의견을 주고받는 것은 그것대로 필요하겠고 우리의 사유 수준 향상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면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 겉돌기만 하는 자기과시적인 독백에 그칠 가능성은 없겠는가,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다.

여기 우리 현실이나 생활과의 연관 관계 또는 우리 전통의 사유에 대한 수준 높은 천착 쪽으로도 눈을 돌려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앞으로 이 공간이 어떻게 지금의 한계를 극복하는지 지켜봐야 할 듯하다.


▲ 한승동 한겨레신문사 기자. ⓒ프레시안(손문상)

전문가의 함량미달 서평, 대안은?

이권우 : 비평고원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누리꾼이지만 사실상 전문가로 봐야 한다. 방금 한승동 기자가 언급했으니, 자연스럽게 전문가 서평의 문제점을 짚어보자. '프레시안 books'는 가능하면 해당 책을 가장 잘 소화해서 독자에게 평해 줄 수 있는 맞춤한 필자에게 서평을 맡겨볼 예정이다. 사실 이런 서평 문화는 한국에서는 낯설다. 왜 그럴까?

강성민 : '프레시안 books'의 그런 계획이 성공하려면 우선 글을 잘 쓰는 전문가를 발굴해야 할 텐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통의 문제가 제일 클 듯하다. 전문가, 보통 교수들이 쓴 서평은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고 도저히 읽을 수 없을 때도 있다. 전문가답지 않게 책의 주장에 휘말려들거나 단순히 요약 제시하는 글도 상당히 많아 실망할 때도 있다.

책의 특정 개념이나 오류를 물고 늘어지는 공격적인 글은 객관적인 평을 원하는 독자들을 배반한다. 이것은 가장 먼저 글쓰기의 문제일 수 있다. 두꺼운 책을 읽고 그 '소감'과 '평가'와 '가이드'를 원고지 10매 내외로 써내려면 말의 경제성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글의 구조에 대한 명확한 설계도가 필요한데 그런 것에 능숙한 필자들이 많지 않다. 특히 논문처럼 긴 호흡의 글에 익숙한 사람들일수록 말이다.

더구나 서평은 글을 잘 쓰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르네상스형 지식인만이 제대로 된 서평을 쓸 수 있다. 책이 다루는 주제에 대한 폭넓은 식견이 있어야 책에서 서평자 자신의 개성적인 논점을 추려낼 수 있고, 이를 통해 명확한 사고와 표현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보통 내공이 아니고서는 이런 좋은 서평을 쓸 수 없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어떤 책에 대한 가장 맞춤한 평자가 꼭 그 책이 다루는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다. 오히려 폭넓은 교양을 갖춘 이가 더 자격이 있을 수도 있다. 일본의 <아사히신문>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로 치면 '철도공사 직원'이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를 읽고 평한다든지, 각계에서 전문서적을 읽고 자유롭게 논하는 문화가 있다. 그런 서평 문화가 한국에서도 등장해야 한다.

강맑실 : 일단 언론에 실린 서평만 놓고 본다면, 전문가의 글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기자가 소화하기 어려운 책을 전문가에게 맡길 때는 크게 두 가지를 기대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십자형 서평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수직적으로는 그 책이 해당 분야에서 놓인 학문적 맥락을 설명해줘야 하고 수평적으로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견해나 비판이 곁들여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거기에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글쓰기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 세 가지 점을 다 소화할 수 있는 전문가가 과연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 따져보면 생각만큼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한승동 : 전문가 서평, 언론에서 담당하다 보면 정말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사실 전문적인 내용을 담은 서적들 중엔 기자들이 소화하기에 벅찬 것들도 적지 않고 또 그럴 만한 여유도 없다. 그래서 외부의 전문가, 즉 주로 대학 교수들을 찾게 되는데…. 내 경험만 보면 만족스러운 경우도 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앞에서 강맑실, 강성민 대표가 얘기하는 것처럼 전문가들이 대중을 상대로 한 글쓰기 훈련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언론사의 시스템도 문제다. 전문가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지금의 언론사 시스템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다. 예를 들어서 수백 쪽 되는 책을 내일, 모레까지 몇 매 정도 써 달라, 전문가에게 이런 요구를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각 매체가 경쟁 관계에 있다 보니까,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러니,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적인 식견이 뒷받침된 대중과 소통하는 좋은 글을 고심해서 쓰기 어렵다.

사실 이것은 전문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조차도 불과 이틀, 사흘 만에 책을 소화해서 읽고서 서평을 써내는 게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서평을 써서 내보낸 적이 있다. 당연히 그런 서평이 독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리 없다.

출판 예고제, 왜 한국은 안 되나?

이권우 : 그런 문제 때문에 '프레시안 books'에서는 아예 속보 경쟁은 지양하기로 했다. 다른 언론에서 소개한 지 두세 주가 된 책이라도 좋은 책이라면 독자에게 좋은 서평으로 소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을 정하면서 왜 우리나라는 이른바 '출판 예고제'가 정착되지 못할까, 이런 아쉬움이 들었다.

미국, 일본에서는 출판을 미리 예고하는 시스템이 정착해 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같은 언론은 최소한 출간 두 달 전에 원고를 출판사로부터 미리 확보해서, 평자가 충분히 책을 검토하고 숙고할 시간을 준다. 일본의 언론도 한 달 정도 미리 검토할 시간을 확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왜 그런 시스템이 정착이 안 되는 것일까?

강맑실 : 시도를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예전에 한 언론에서 출판 예고제를 하겠다, 이렇게 공언을 한 적이 있다. 몇 군데 출판사에서는 자발적으로 협조도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언론 간의 속보 경쟁이 문제였다. 해당 언론을 믿고서 중요한 책의 원고를 미리 공유하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언론에서 소개하기 전에 기사가 나갔다.

그 언론에서 그렇게 써버리면 다른 언론에서는 책의 중요성과 상관없이 무시하고…. 언론이 책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 이런 선의가 오히려 피해로 돌아온 것이다. 이런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언론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결국 출판 예고제가 정착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사실 사계절은 자체적으로 출판 예고제를 한 적도 있다. 한 때 출간 예정인 책의 원고를 미리 보낼 수 있으니 요청하라, 이렇게 언론에 협조를 구했다. 그랬는데 원고를 미리 보고 싶다고 하는 기자도 별로 없더라. (웃음) 당연히 그 시도도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한승동 : 방금 강맑실 대표가 얘기한 한국 언론의 보도 관행은 정말로 큰 문제다. 특종 개념 자체가 잘못돼 있다. 아무리 함량 미달이라도 남보다 먼저 기사만 내면 특종이라는 생각이 지배하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동시에 내더라도 혹은 한걸음 늦더라도 다른 기사가 담지 못한 정보와 시각을 담았다면 그것이야말로 특종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정말 중요한 문제도 누군가 먼저 써버리면 다른 데서는 안 쓰거나 아예 문제 자체를 사장시킨다. 방금 강맑실 대표가 얘기한 사례는 그런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보도 관행이 서평에서 드러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관행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출판 예고제는 결국 선의의 피해자만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이권우 : 그렇다면, 출판계는 출판 예고제를 할 준비가 돼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인데 말이다.

강맑실 : 출판사는 어느 정도 준비가 돼 있다. 예를 들면, 사계절의 경우에는 내부 인트라넷에 각 팀이 모든 원고를 공개한다. 언론과의 신뢰 관계만 마련된다면 그런 내부 인트라넷에 실린 원고 중 일부를 책이 나오기 한 달 전쯤에 언론에서 미리 검토할 수 있도록 보내줄 수 있다. 강조하지만, 출판 예고제의 가장 큰 전제는 출판계와 언론계의 상호 신뢰다.

물론 책만큼 마지막까지 여러 변수가 많은 문화 상품도 없다. 예를 들어서, 책을 낼 모든 준비가 돼 있는데 저자가 제목을 거부해서 또는 특정한 표기법이나 개념을 놓고 이견이 있어서 발행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런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더라도 조금만 노력한다면 한 달 전쯤에 출판 예고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

강성민 : 동감한다. 만약 언론에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다면, 출판사는 충분히 출판 예고제를 할 만한 준비가 돼 있다. 한 달 전쯤에는 출간 일정이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윤곽이 잡히기 때문에 가제본한 원고를 모든 언론에 보내서 검토를 요청하는 일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강맑실 : 솔직히 출판사 입장에서도 출판 예고제가 정착되면 긍정적인 점이 많다. 책마다 궁합이 맞는 언론이 있다. 요즘엔 언론 서평이 다양화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더 두드러진다. <한겨레>가 좋아하는 책 또 다른 언론이 선호하는 책 등…. 만약 출판 예고제가 정착되면, 보도는 같은 시점에 되더라도 관심 있는 언론에서 훨씬 짜임새 있고 심도 깊은 서평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언론 입장에서도 책의 내용을 미리 검토할 수 있다면, 꼭 서평이 아니더라도 그 책을 다른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사회적 의제를 던지거나 시사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책은 언론에서 굳이 서평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다룰 수 있다. 새로운 시각, 새로운 정보가 곧바로 취재에 도움이 될 테니까.

한승동 : 언론에서는 거의 신간만 서평으로 다룬다, 이런 편견도 깰 필요가 있다. 구간 중에서도 좋은 책이 얼마나 많나. 주목받지 못한 좋은 구간을 적극적으로 발굴해서 독자에게 알리는 일도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구조적인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계가 취약하다 보니 새로 나온 책이 언론에 더 많이 노출되기를 바란다. 이런 요구에 맞서서 언론이 뚝심 있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언론계도 출판계만큼이나 취약하다 보니 자기 원칙을 가지고 밀어붙이는데 한계가 있다. '프레시안 books'는 애초에 속보 경쟁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니, 이런 구간을 적극적으로 발굴해서 소개하는 데도 신경을 쓰면 좋겠다.


▲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생산적인 논쟁이 부재한 이유는…

이권우 : 앞에서도 잠시 얘기가 나왔지만, 좋은 서평은 세상에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서평이 '압박'이 되어야,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평 서평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데, 역시 현실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다. 강성민 대표는 <교수신문>에 있으면서 비평 서평을 시도했는데, 결과는 어땠나?

강성민 : <교수신문>은 독자 자체가 일단 대학의 구성원, 즉 학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서평의 비평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한다, 이런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때 안팎으로 호응이 많았다. 평자에게 의도적으로 비판적인 서평을 주문했고, 그런 서평이 생산적인 논란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했다.

서평에 의한 담론 창출, 이런 목적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예를 들면, 고종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둘러싸고 비교적 생산적인 논의가 서평을 통해서 가능했다. 그런데 여전히 종합적으로 평가를 해보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권우 : 서평지를 꾸려가는 사람이라면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 비판적인 서평이다. 우리의 논쟁 문화가 한 단계 성숙하는 데 큰 이바지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장애 때문에 의지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나?

강성민 : 서평을 통한 담론 창출, 이게 제대로 되려면 우선 비평의 기본이 담보되어야 한다. 우선 평자가 필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필자의 의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평자의 비판을 수용할 필자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비평에 대한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한승동 : 참 어렵다. 논쟁이 제대로 되려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상당한 지적 훈련이 된 상태여야 한다. 이런 훈련이 제대로 안 돼 있어서인지 대개 비평을 통한 논쟁은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풍토 속에서 비평 서평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냥 좋은 말을 해주거나, 침묵하는 게 서로 속 편하니까.

강성민 : 더군다나 서평을 계기로 언론에서 논쟁을 하기는 더욱더 쉽지 않다. 사실상 불특정다수 앞에서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낼지 모르는 논쟁에 뛰어들 용기가 있는 지식인을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교수신문>에서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을 담은 책의 서평을 쓸 필자를 찾느라 스무 명에게 청탁을 했는데 다 거절하더라.

그나마 거절의 이유를 밝힌 몇몇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이랬다. 그 책의 주장을 염두에 두면 논쟁적인 서평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 이후의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논쟁을 하다 보면, 감정이 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진면목이 들어날 수도 있는데,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승동 : 한국의 논쟁 문화를 보면 그럴 만하다. 논쟁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양측의 장점과 단점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런 논쟁을 성찰의 기회로 삼으면 족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마치 논쟁으로 승패를 갈라서, 승자는 칭송하고 패자는 죽인다. 이런 것도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는 풍토와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런 풍토 속에서 누가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낼 논쟁에 뛰어들겠는가? 논쟁을 반드시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 서로 한 수 배우는 과정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수가 모자라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상대의 강점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고 전체를 위해서도 좋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기면 독식하고 지면 죽는다는 유아적 발상이 만연한 우승열패의 사회 풍조를 환골탈태해야 한다.

강맑실 : 그런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논쟁의 장과 경험을 늘여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편집자의 역량이 중요하다. 논쟁의 주제 설정과 발굴이야말로 편집자의 역할 아닐까. 편집자는 논쟁에 성냥을 긋는 자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뭐하지만 사실 논쟁은 성질이 나야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야 또 불같은 논쟁으로 이어지고. 다만 이것이 소모적인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또한 편집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프레시안 books'에서 우리 시대 기억에 남을 빛나는 논쟁들을 자주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권우 '프레시안 books' 상임서평위원. ⓒ프레시안(손문상)

'권위' 있는 책 세상의 등장을 기대하며…

이권우 : 앞에서 예고했던 대로 오는 7월 31일 '프레시안 books'가 시작한다. 앞에서도 몇 가지 바람이 나왔는데, 의례적인 이야기라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한 번 더 당부의 얘기를 한다면….

한승동 : 지금까지 얘기한 언론 서평의 여러 문제만 피해가면 잘 될 것 같다. (웃음) 사실 나는 굉장히 반갑다. 온라인 매체든, 오프라인 매체든 <한겨레>가 추구하는 가치를 큰 맥락에서 공유하면서도 그간 <한겨레>가 시도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언론이 등장하면 나로서는 대환영이다.

그런 시도가 <한겨레>를 비롯한 기존의 언론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다 보면 전반적으로 언론 서평 전체가 나아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레시안 books'가 계획한 여러 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서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기를 바란다.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한겨레>와 같은 오프라인 매체는 지면의 제한 때문에 서평의 길이가 200자 원고지 8~12매, 한 면을 다 채워도 20매를 넘지 못한다. 긴장감 없이 늘어지는 위험만 피한다면, 독자가 읽는 맛이 있는 서평을 선보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기대해보겠다.

강맑실 : 앞에서 이런 얘기를 나눴다.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프레시안 books'에 실리는 서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프레시안> 독자부터 출발하자. <프레시안>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질 좋고 권위 있는 서평으로 알리고, 또 그들이 책을 매개로 다양하게 소통하는 놀이터로 '프레시안 books'가 자리를 잡는다면 일단 대성공이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온라인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저자, 독자, 출판사가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간으로 발전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한승동 기자가 형식의 변화를 얘기했는데, 온라인 매체의 장점을 살려서 실시간 영상과 같은 다양한 형식까지 소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강성민 : 강맑실 대표, 한승동 기자는 소통에 방점을 찍었다. 소통도 중요하지만 서평은 권위가 있어야 한다. 정말 제대로 된 서평을 꾸준히 축적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의미에서 영향력이 커져야 많은 이들이 스스로 찾아와 자연스럽게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books'는 <프레시안>이라는 언론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좀 다른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중국의 왕후이가 세계적인 잡지로 키워놓은 <독서(讀書)>의 사례를 보면 정말 부럽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이 잡지 30년치를 모두 소장하고 있다. 서평지를 소장하는 이유는 그것에 책의 가이드를 넘는 특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지면과 시간의 제약'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우니, '자본과 필자의 제약'을 극복하고 한 편의 글이 실리더라도 영향력이 큰 그런 공간으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이권우 : 긴 시간, 함께 해줘 고맙다. 현장 경험에서 비롯된 도움말이 이제 고고성을 울릴 '프레시안 books'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른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나 더 있는 서평지가 아니라, 자기만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내는 하나만 있는 서평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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