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한테는 이 책의 저자가 달려든 실험을 일컫는 적절한 표현이 아직 없지만, 영어로는 '에코 어드벤처(Eco Adventure)'라고 하는 모양이다. <뉴욕매거진>이 요리 평론가 매니 하워드에게 뉴욕 브루클린 도심 한복판에서 '6개월간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워 1달간 오로지 자신이 키운 먹을거리로만 먹고 살기' 실험을 제안한 것은 1999년 어느 날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로커보어(Locavore) 운동'을 알리고 평가할 목적이었다. 로커보어는 '지역'을 뜻하는 'local'과 라틴어의 '먹다'라는 뜻을 가진 'voer'를 합쳐 만든 말로서, '자신이 사는 주변 지역에서 난 먹을거리를 섭취하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의 사회운동을 '로커브리즘(Locavorism)'이라 통칭한다.
이 말의 탄생 배경에는 미국 사회에 닥친 유기 농업 실험의 실패가 깔려 있었다. 우리와 다소 시간차가 있지만 미국 역시 1990년대 초반 유기농 광풍이 몰아쳤다. 언론은 연일 식품 산업의 위기를 강조했고, 마치 식량 전쟁이 잠시 후에 일어날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 언론이 닥칠 위기를 미리 예견하는 일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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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뒷마당의 제국>(매디 하워드 지음, 남명성 옮김, 시작 펴냄). ⓒ시작 |
문제는 유기농 먹을거리가 마치 하늘이 주신 특별한 양식처럼 떠받들어지면서 거대 식품 기업이 재빨리 이 용어를 흡수했다는 데 있었다. 거의 모든 먹을거리에 '유기농'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그런 딱지가 붙여지지 않은 식품보다 비싸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국 사회가 거의 유일한 모델인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유기농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또한 조금만 제정신을 가진 이라면, 농촌은 갈수록 공동화되고 있는데, 그나마 '있던 농업'마저 죽이려드는 게 유일하고도 확고한 농업 정책인데, 시중에 차고 넘치는 상품으로서의 유기농 식품이 우선 질보다 그 양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뉴욕매거진>이 로커보어 운동을 알리고 평가할 목적으로 '특별한 모험가'를 물색한 데에는 유기농 먹을거리 운동이 거대 식품 기업의 발 빠른 선점으로 운동 자체가 붕괴된 아픔과 관련이 있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로커보어 운동이었다. 공장에서 생산한 먹을거리는 비록 유기농 식품이라 하더라도 평균 2400킬로미터를 이동해 식탁에 오르기 때문에 결국은 소비자를 망칠 것이라는 믿음이 로커보어 정신이었다.
그러나 로커보어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로커보어들이 아무리 먹을거리와 관련된 확고한 개인적인 철학으로 무장한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취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지, 생산하는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자 매니 하워드는 요리 평론가라곤 하지만 사실, 오랫동안 안정된 직업을 찾지 못한 백수건달이었다. 매니 하워드는 지은 지 106년이나 되는 브루클린 프로스펙트 공원 뒤쪽에 살고 있었는데, <뉴욕매거진>의 제안을 받기 전에는 요리 잡지에 부정기적으로 기고했으며, '마구잡이에 가까울 정도'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10여 년, 아내 리사는 기사가 딸린 자동차로 맨해튼으로 출퇴근하는 고임금의 편집자였다. 이런 아내를 출근시키고 하워드가 집에서 하는 일은 컴퓨터 앞에 앉아 습관적으로 2류 포르노를 다운 받아 보면서 "그 짓이 습관일 뿐이지 결코 동물적 충동 때문이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게 전부였다.
요컨대, 하워드는 몸은 건강했지만 자신이 살아오던 방식에 지칠 대로 지친 백수였다. 그런데 이 백수가 20분간의 협상 끝에 이 프로젝트에 달려들기로 결심한다. 달려든 이유는 우선 그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면,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고된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련된 뉴요커로 그려진 아내 리사는 하워드가 그 엉뚱한 일로 인해 '새로운 열정'을 되찾은 것 같은 모습이 보기 좋아서 반신반의하면서도 뒷마당이 농장이 되는 것을 허락한다. 이후에 벌어진 일은 가히 전쟁이라 할 만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잡지사에서는 매니 하워드 같은 사람을 물색하면서 언필칭 '로커보어 운동을 알리고 평가할 목적'이라 내걸었지만, 매니를 꼬시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한 말을 보면 로커보어들에 대한 비판과 은근한 경멸도 담겨 있었다. "그녀(<뉴욕매거진>의 편집자)는 부족할 것 없는, 자기만족에 빠져 도시 농산물 직판장을 돌아다니는 로컬보어와 맞서기를 바랐다"는 구절이 그런 대목이다.
그러나 저자 매니 하워드는 도통 잡지사의 의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확신한 것은 로커보어들이 아무리 신념에 찬 멋들어진 말을 하고 좋은 먹을거리를 뒤지고 다녀도 그들은 결국 소비자라는 점, 그러나 자신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최소한 생산자로서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로커보어들이 '불타는 사명감'에 빠져 장바구니를 들고 좋은 먹을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을 어떻게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심사숙고해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이게 로커브리즘에 대한 하워드의 평가였다. 그는 인세나 책으로 인해 얻을지도 모를 명성에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요리 평론가였기에 막연하게나마 "우리가 먹을거리와 근본적 관계를 잃었다"는 감수성만은 지니고 있었다. 6개월간의 고된 노동을 통해 그가 소망한 것은 천천히 무너진 자아의 회복이었다.
하워드에게 밭으로 허락된 땅은 약 70㎡(약 21평). 20㎡짜리 차고는 헛간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게 그에게 허락된 농장 면적의 전부였다. 그는 그러나 농장을 자신의 무기이자 전장(戰場)으로 삼는다. 마침 도시 농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한 직후였는데, 딸아이 히스라이언의 두 번째 생일이 다가왔다.
지하에 바 카운터가 설치된 휴게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키울 요량으로 그는 딸애의 생일 선물로 새를 열 마리나 구입한다. 그러나 열 마리의 새에 1100달러어치나 들였건만, '대개 공격적이고 비현실적이기 그지없던' 성격의 저자는 경험 부족으로 새들을 모두 죽이고 만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그의 눈부신 살육 행진의 첫 신호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터에도 달려가고, 온 세상을 미친 듯이 헤매는 정력가인데다, 비록 섬세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혈질인 그는 채식주의자를 선택하는 대신 기필코 '다양한 단백질이 필요하다'며 식용 물고기를 어항에 키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항에서 키운 물고기는 역시 경험 부족으로 다 죽어버렸다. 그러나 매니 하워드라는 이름의 불굴의 돈키호테는 식용 열대어 틸라피아를 키우기 위해 뒷마당의 진흙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책에서 본 대로 지름 3.6m, 깊이 90㎝의 구덩이를 파고, 수온은 섭씨 27도를 유지하면서 틸라피아 한 쌍이면 이윽고 1000마리로 늘어날 것이라고 몽상한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 단백질도 얻지 못한다. 단백질에 미친 그는 이어서 토끼를 구입한다. 그러나 토끼 역시 변변한 먹을거리가 못 된다. 다른 것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으로 구해 심은 감자는 동전만한 감자알 열 개 정도만 선사한다. 닭장을 만들고 닭을 구해 키우지만, 멍청한 하워드는 닭이 달걀을 낳는다는 생각은 미처 못 한다.
그가 아무리 원예 업자에게 구한 책자나 인터넷에서 구한 자료를 참조했다 해도 그의 농사는 대충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그는 소망대로 허리가 휘어질 만큼 노동을 한다. 그 사이에 그는 물고기도 죽이고, 토끼도 죽이고, 오리도 죽이고, 온갖 좌충우돌을 다 겪는다.
이 책에 담긴 한 사내의 '1개월 자급자족'을 위한 고군분투는 참으로 처절하고, 안타깝고, 심지어 기이하다. 우여곡절, 기상천외, 무지막지, 자승자박의 일들이 계속 터진다. 그가 도움 받아야 할 진짜 시골 사람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봐주기로 작정했건만 도가 지나치자 아내의 인내심은 결국 극에 달해서 "(집에서) 나가!"라고 외마디 비명으로 이어진다.
육식은 키워서 손수 잡아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음에 반해 채식은 뜯어먹거나 캐먹으면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의 반 이상은 동물성 단백질 확보를 위한 처절한 노력에 할애되고 있다. 그것은 그가 필경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오늘 이 행성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심각하지만 날카로운 모종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동물성 단백질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하워드의 모습은 미국인의 전형일 뿐만 아니라, 육식 문화를 버리지 않는 이 행성에 사는 모든 인간종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토끼를 잡고 닭을 잡는 시설을 갖추고, 모가지를 찌르고 피를 빼고, 내장을 꺼내는 장면은 마치 읽는 이들이 피비린내 나는 도축작업에 직접 참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마침내 사고가 난다. 닭장을 만들고자 합판을 자르는데 톱날이 오른쪽 새끼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파고들었다. 경험 많은 의사가 가능한 애를 썼지만 그의 손가락은 영원히 날아갔다. 이후, 그는 손을 다친 사실을 소년처럼 여러 사람에게 자랑해댄다. 사람들은 빙긋이 웃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상처에 대해 비로소 말한다.
그때서야 그는 알게 된다. 이 세상에 손을 다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그 다음부터는 다시는 손가락 상실을 훈장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시골에 처음 들어왔던 6년 전, 전기톱으로 장작을 자르다가 왼손 검지가 톱날 속으로 들어가 잘리기 직전의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하워드처럼 대놓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선명한 손의 상처를 얼마간 득의(得意)의 표징으로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처럼 나 또한 주변에 손을 다친 이웃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게 되었다. 이웃의 상처를 알게 된 이후에야 나는 비로소 내가 선택했고, 내게 허락된 장소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손의 상처야 보려고 들면 보이지만, 사람들 가슴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상처들은 오죽 깊을까.
그럴 줄 알았지만, 이 책은 후반부에 이를수록 감동적이다. 그의 계약 기간 도중에 토네이도가 닥친 것이다. 1899년 이래 100년 만에 뉴욕을 강타한 거대한 토네이도였다. 74번가에 상륙한 토네이도는 62번가, 6번가가 만나는 주택가 전체를 휩쓸었다. 100년 된 나무를 서른 그루나 쓰러뜨렸고, 이스트 18번가 주택지를 포함한 15㎞ 반경의 자동차를 부쉈고, 지붕을 날렸다. 토네이도는 매니 하워드의 농장에서 겨우 900m 떨어진 곳에서 소멸했지만, 그의 농장 역시 박살이 났다.
남편의 뒷마당 농장에 시종 삐딱한 시선을 지니던 아내는 태풍으로 잃어버린 농산물과 간신히 건진 농작물을 면밀하게 살피던 남편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고 느꼈던 이야기를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온통 망가진 뒷마당으로 걸어갔어. 엉망진창이 된 농장 한 가운데 멍하니 서 있다 뭐든 건지려는 듯 다시 일을 시작했지. 당신이 죽어라 열심히 가꾼 것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어. 바로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 한참 동안 창문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생각했어.
'빌어먹을 토네이도가 휩쓸고 지나갔어. 그런데 저 사람은 뭘 하는 거지? 다른 사람이라면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포기하고 잡지사에 전화해서 모든 게 끝났다고 할 텐데. 토네이도가 농장을 끝장내버렸다면서.' 하지만 아니었어. 당신은 달랐지. 당신을 이해한다는 게 아니야. 지금도 이해는 못하겠어. 하지만 그때는 이해했다고 생각했어.
처음으로 농장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말이야. 그리고 당신이 무척 자랑스러워." (302쪽).
세상에 나쁜 일은 없다. 토네이도에 굴하지 않은 그가 결국 인정하는 데 인색하기 짝이 없는 연봉 높은 엘리트 아내를 감동시킨 셈이다. 토네이도가 지나간 뒤 매니 하워드가 꼼꼼하게 작성한 피해 목록을 눈물겹다.
• 토마토 : 농장 전체에서 가장 비옥한 곳에 심은 작물. 4미터 가까운 나뭇가지에 짓눌려 온통 뭉개졌다.
• 가지(여러 종류) : 비참할 정도로 가냘픈 모습, 비에 절반은 쓰러졌다.
• 칼랄루(카리브 지방에서 나는 시금치) : 완전히 못 쓰게 되지는 않았다. 해가 너무 뜨거워지기 전에 막대를 꽂아 세우면 살릴 수 있을 것도 같다.
• 호박 : 물에 잠겼다.
• 허브(여러 종류) : 토마토에 가려 햇볕에 굶주렸다. 가망 없다.
• 콩(여러 종류) : 가망 없다.
필자가 매니 하워드에 대해 가장 깊은 동질감을 느낀 대목은 그가 어느 날 토끼를 잡고 난 뒤에 한 행동이었다. 3번 암컷 토끼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주인에게 그날 아주 거칠게 굴었다. 그를 물어 그의 몸에 상처가 났다. 처음에는 금속제 쓰레받기로 토끼의 머리통을 가볍게 때렸다. 토끼는 더욱 거칠어졌다. 결국 나중에는 호되게 때렸다.
토끼는 한참 동안 꼼짝도 안 하더니 이내 긴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는 서러운 항변과 원망이 섞인 그 기이한 토끼 울음소리를 잊지 못한다. 그런 뒤, 결국 토끼는 마비가 되어버렸다. 그는 결국 3번 암컷을 잡게 되었다. 잡고 난 뒤, 아내가 볼 수 없도록 토끼의 머리 잘린 몸통을 재활용 봉투에 담아 지하실 외딴 곳 환풍기 근처에 매달아두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흐느끼며 운다. 그 울음은 토끼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였다. 토끼는 아니지만, 나 역시 기르던 닭을 잡아보았기 때문에 그의 울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매니 하워드 농장의 짐승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는 닭이든 오리든 토끼든, 모두 번호를 붙였다. 2번 암컷, 3번 암컷, 이런 식이다.
그래서 딸애들은 "우리 오리는 이름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잡아먹을 것들이기 때문에 관계 맺기를 애당초 봉쇄한 수작이었다. 그가 설정한 최소 무게 2.3㎏이 되면 그의 농장 짐승들은 세상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잘 준비된 도축 시설에서 닭을 잡은 뒤, 피를 빼고, 조심스럽게 내장을 꺼내고, 털을 잘 뽑기 위해 온도가 44℃인 준비된 물에 담근다.
그런 건조하기 짝이 없는 단백질에 미친 사내가 그날은 3번 암컷 토끼를 잡은 뒤, 남몰래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7개월이 마침내 지났다. 6개월 이후 1개월간 그는 잡지사와의 계약대로 자신이 기르고 키운 것만 먹으며 보냈으므로 프로젝트는 성공한 셈이다. 6개월 동안 그의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 편한 셔츠에 작업복을 입고 하루 온종일 일한다. 부서진 것을 고치고 죽어가는 것을 살린다. 배고파하는 것들에게 먹이를 주고 목말라하는 것들에게 물을 준다"였다. 그 후 1개월은 그가 키운 무엇이든 잘 잡아서 아직도 입에 씹히는 고기 속에 남아 있는 '생명'을 느끼며 먹는 일이었다. 그가 말한다.
"하루하루 지나며 조금씩 목표에 다가갔다. 울타리 너머로 바쁘게 돌아가는 바깥세상이 보였다. 7개월 동안 내 삶은 겉모습뿐 아니라 움직이는 방식 자체도 달라졌다. 이제 꿈꾸는 모든 영역(아프가니스탄이나 모하비 사막 우크라이나까지)으로 인생을 확장하고 채우려 투쟁하는 식으로 살지 않았다. 내 삶은 농장과 감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내게 농장의 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장의 한계였다." (329쪽)
그의 프로젝트가 끝난 뒤, 그의 농장이었던 뒷마당의 3분의 2가 다시 잔디밭으로 덮힐 때 그는 보도블록 모양의 뗏장이 그의 밭을 덮는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외면한다. 그가 마침내 '거기'까지 간 것이다.
<뉴욕매거진>의 의도는 결국 성공했다. 책은 출간되자 곧 잡지의 표지 기사가 되었고, 2008년에는 그가 쓴 책이 제임스 비어드 재단 상을 수상했고,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주연으로 그의 경험이 곧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라니, 우리도 언젠가 이 사내의 이야기를 책뿐 아니라 영화로 만나게 될 것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빠뜨릴 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7개월 동안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의 정신을 지배하던 사상가가 있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녹색평론>을 통해 자주 소개된 웬델 베리였다. 처음에 매니 하워드가 웬델 베리를 접했을 때, 그는 "이 사람은 나랑은 너무나 다른 인간이구나", 하는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웬델 베리가 너무나 다른 사람이지만,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웬델 베리의 목소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한다. 매일같이 허리가 휘어질 정도의 고된 노동을 한 뒤에 그는 어김없이 웬델 베리를 펼쳤다. 그가 펼친 책이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삶은 기적이다>(녹색평론사 펴냄)이거나 <희망의 뿌리>(산해 펴냄) 같은 책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낮에 한 행동과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 것을 웬델 베리를 통해 확인했고, 웬델 베리에게서 얻은 에너지로 다음 날의 고된 노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급기야 웬델 베리는 그의 방(영혼) 깊숙이 들어왔고, 프로젝트가 끝날 즈음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웬델!", 하고 이름을 부른다.
대학보다 시골을 더 좋아했으며,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고된 노동을 하면서 사는 일이 왜 마땅하고 옳은 일인가를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준 사상가 웬델 베리가 말했다.
"노동은 윤리가 아니라 필수다."
뒷마당에서 얻은 달걀도 놀라운 선물이었지만, 격렬한 좌충우돌 끝에 매니 하워드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 웬델 베리의 바로, 그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