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언어에 담은 페루의 현실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유럽을 거점으로 한 라틴아메리카 일련의 작가들의 상업적 성공을 일컫는 '붐(boom)'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다.

현재 바르가스 요사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학가 중 한 명이자 라틴아메리카의 우파 지식인으로 발언하고 있다. 그는 소설가로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희곡, 문학 비평, 에세이, 저널리즘에 걸쳐 매우 다양한 장르에 걸친 글쓰기를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다.

1936년 3월 28일 페루 남부의 아레키파에서 태어난 그는 외교관으로 부임한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10살 때 페루로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를 리마로 돌아와서 처음 만났고, 실상은 별거 중이던 부모님은 재결합했다. 바르가스 요사는 9살 때부터 글을 시작했고, 10대 때 이미 지역 언론의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1953년 리마의 산 마르코스 국립 대학에 입학해 법학과 문학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 장학금을 받아 스페인으로 유학, 오랜 유럽 생활을 시작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에서 공부했고,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프랑스 파리로 갔다. 하지만 파리에서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일, 언론 기사 쓰는 일 등을 병행하며 소설을 써나갔고, 영국에서 상당 기간 체류하다 1971년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대한 주제로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20세기 중반에는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엘리트 예술가들이 자신의 땅이나 그곳의 선배들을 바라보기보다는 유럽에서 답을 찾아 헤매던 시절이었다. 변방 페루에서 19세기 유럽 문학을 스승삼아 독학으로 소설을 익혀나가던 바르가스 요사에게 유럽 생활은 여러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문학의 형식에 대한 탐구가 전무했던 페루의 선배 작가와 풍속주의 문학은 바르가스 요사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19세기 프랑스, 20세기 영미 문학, 특히 플로베르와 제임스 조이스를 자신의 문학적 스승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와 작품으로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꼽았다. 5년간의 집필 과정에서 플로베르가 보여준 문학에 대한 헌신, 완벽함에 대한 집요한 추구가 그에게 깊이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런 탓인지 같은 페루 작가이지만 원주민 세계에 대한 깊은 탐구를 했던 인류학자이자 소설가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 시인 세사르 바예호에 비해 그의 작품은 페루 백인의 세계와 관점을 담고, 유럽 지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바르가스 요사는 지금까지 17개의 소설을 발표했고, 상당수가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그의 작품은 페루를 배경으로 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 자신이 페루를 벗어나 세계를 떠돌았듯 그의 소설도 점점 페루에서 라틴아메리카로, 또 세계로 시공간을 넓혀가는 것 같다.

첫 소설 <도시와 개들>(1962년)은 자신의 군사 학교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으며, <녹색의 집>(1966년)은 페루 피우라의 한 매음굴이 배경이다. <라 카테드랄 주점에서의 대화>(1969년)는 1950년대 페루의 마누엘 오드리아 독재 정권하의 사회상을 그린다.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1973년)와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1977년)는 유머가 넘치며 둘 다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인데, 특히 후자는 19세의 나이로 10년 연상의 사돈 아주머니였던 훌리아-그녀는 2010년 3월 사망했다-와 결혼했던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한 축으로 삼은 소설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세상을 두루 다니고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고민하며 19세기 브라질의 건국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세상 종말 전쟁>(1981년)을 발표했고, 31년간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치한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와 그 피폐함을 그린 작품 <염소의 축제>(2000년)를 냈다. 한편, <다른 모퉁이에 있는 천국>(2003년)은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의 이야기를, 올해 11월 출간 예정인 <켈트인의 꿈>은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인 로저 케이스먼트의 삶을 다룬다.


▲ 201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페루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그는 국내 언론에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졌지만, 1980년 이후 '우파'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lanacion.cl

좌파에서 우파로, 정치적 행보와 논란들

바르가스 요사의 동시대 라틴아메리카 지식인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 역시 쿠바 혁명을 지지하고 정치적으로 좌파였으나, 1980년대 이후 우파로 선회한 이후 지금은 서구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등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설파하는 지식인으로 변모해 상당히 적극적으로 정치 발언을 하고 있다.

그가 쿠바 혁명에 등을 돌리게 된 계기는 '파디야 사건'이었다. 그는 쿠바 혁명 이후 제정된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어 수차례 쿠바를 방문하고, 혁명 지도자들을 만나며 혁명을 지지했으나, 1971년 혁명 체제가 쿠바 시인 에베르토 파디야를 검열하고, 자아 비판하게 만들고, 동성애자들을 박해하자-최근 카스트로는 자신이 동성애자들을 차별한 것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이에 강한 반발을 느껴 점차 카스트로 체제와 라틴아메리카 좌파 흐름에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와 붐 세대를 대표하는 동료이자 친구였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도 이러한 이념 차이로 인해 사이가 멀어졌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쿠바 혁명 이후 체 게바라가 만든 <프렌사 라티나(Prensa Latina : 라틴아메리카 언론)>의 특파원을 지낸 것을 계기로 카스트로와 지금까지 50년간의 우정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 두 노벨상 수상 작가들은 36년 전 주먹다짐을 한 이후 화해하지 않은 채 지내고 있는데, 두 사람의 싸움에는 이념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의 골도 있다고 한다. 1976년 2월 멕시코시티의 한 극장 앞에서 바르가스 요사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주먹을 휘둘렀고, 그 구체적인 이유와 정황에 대해 두 사람은 지금껏 함구하고 있다. 바르가스 요사가 부인 파트리시아와 결혼 생활의 위기를 겪던 시기였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부인에게 충고를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라는 추측 정도만 나돌 뿐이다.

1970년대 말까지도 스스로를 온건한 사회주의자라 칭했던 바르가스 요사는 1980년대에 고국으로 돌아온 뒤 자유주의로 선회했다. 1983년 당시 대통령이던 벨라운데 테리에는 바르가스 요사에게 '우추라카이(Uchuraccy) 사건' 진상위원회를 맡긴다. 이는 1980년대 초부터 마오주의 게릴라 운동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가 이 마을을 점령해 원주민과 센데로 루미노소 사이에 갈등과 폭력이 지속되었고, 수도 리마에서 센데로 루미노소를 취재하기 위해 간 여덞 명의 기자들이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조사위원회는 원주민들이 센데로 루미노소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기자들을 센데로 루미노소로 착각하고 살해한 것이라며 이를 원주민과 센데로 루미노소의 잘못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후 이 살인 사건에는 '신치스'라고 불리는 페루 특수 경찰의 개입이 있었고, 조사위원회가 이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던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되었다.

바르가스 요사는 1987년 당시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의 은행 국유화 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앞장섰고, 1990년 페루 대통령 선거에서 강력한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선거 정책으로 내세우며 중도 우파 연합인 '민주전선'(프레데모)당의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급부상한 알베르토 후지모리 후보와 치른 2차 선거에서 패하고 말았다. 패배 이후 그는 조용히 나라를 떠났고 스페인 정부에 스페인 국적을 요청, 다시 유럽 생활을 시작했으며 정치를 떠나 글쓰기에 집중한다.

19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여러 인터뷰를 살펴보면 바르가스 요사는 소련 붕괴는 그에게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확신을 준 계기였고, 소련의 권위주의 체제는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었다고 단언한다. 저개발, 독재, 무능, 부패로 점철된 20세기 페루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에 소련식이든 쿠바식이든 좌파 정부와 혁명, 게릴라 운동은 답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펜클럽 회장직을 맡고, 유럽과 미국 대학에 적을 두며 서구에서 오래 체류한 것이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유럽 문명만이 보편성과 우월성을 갖는다고 확신하게 만든 듯 보인다.

하지만 서구적 가치의 보편성, 국경을 허무는 자유주의 경제를 찬양하는 바르가스 요사의 논리를 듣다보면 라틴아메리카의 특수성과 그로 인한 갈등 요소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무화되고, 특정 인간과 집단, 민족이 어떤 입장에서 발언하는가에 대한 상황들은 거의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랫동안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화두였던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며, 라틴아메리카가 변방이나마 서구 문명의 끄트머리에라도 위치하게 된 것이 다행이며 경제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우리도 어서 번영된 나라와 대륙을 만들어가자고 독려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라틴아메리카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해 바르가스 요사가 내리는 평가도 명백히 갈린다. 그는 칠레, 브라질, 우루과이의 '이성적이고 중도적인' 사회주의는 인정하며, 특히 신자유주의를 실천해온 칠레는 오래전부터 라틴아메리카 경제의 모범으로 칭찬해왔다. 올해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는 세바스찬 피녜라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며 언론에 그를 지지하는 많은 글을 싣고, 1월에는 칠레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델 카스트로는 악의 근원이며, 차베스는 현재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로 석유 달러로 중남미와 유럽까지 매수하는 인물이다. 베네수엘라의 달러에 '매수'된 볼리비아, 에콰도르, 니카라과 정부 역시 좋은 정부가 아니다.

2009년 5월 말 바르가스 요사는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베네수엘라의 자본주의 경제 연구소 세디세(Cedice)가 주최한 회의에 참석했는데, 차베스 대통령이 그에게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대화를 제안했다가 무산되었다. 그러자 이를 두고 중남미 독재자 원형, 즉 권위적이고 군사적 지배를 하는 카우디요(caudillo)를 떠올리게 한다며, 카우디요는 대화를 할 줄 모른다고 말하며 차베스를 비판했다. 베네수엘라에 오기 직전 그는 차베스가 석유 달러로 다른 나라를 매수한다고 비난했고, 이로 인해 베네수엘라에서 출국할 때 '외국인으로서 베네수엘라의 정치에 대해 논평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항에서 한 시간 반가량 억류되기도 했다.

한 인터뷰에서 바르가스 요사의 균형 감각을 의심하게 한 대목과 마주쳤다. 그는 이라크 전쟁 이후 12일간 이라크를 방문해 스페인 <엘 파이스>에 특집 기사를 냈고, 글과 사진을 모아 2003년 〈이라크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적이 있다. 작년 베네수엘라의 〈글로보비시온〉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실제로 이라크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들은 사담 후세인의 독재와 그의 두 아들의 폭정에 완전 지쳐있었고, 전쟁 초기에는 이라크 사람들이 독재 상황의 종결에 대한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쿠바와 베네수엘라를 비판하듯 강대국의 정책과 외교에도 그만큼 엄정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는 지, 과연 그는 어디에 서서 누구를 위한 발언을 하고 있는 지 질문하게 하는 구절이었다.


이 글은 <프레시안>에 10월 11일 발행된 기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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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 관한 한국인의 생각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독도는 우리 땅',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기에 새삼 설명이나 근거, 논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너무도 당연한 한국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이 밉고, 이런 일본을 믿어주는 일부 선진국이 야속하다. 하지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단 한 마디 주장만으로 세계 여론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을까?

지난 10여 년간 독도 문제를 연구해온 일본계 한국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독도의 실효 지배에 만족하면서 세계를 향한 일본의 여론전을 방치한다면 지난 2008년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의 주권국가로 표기되어 온 '한국'을 '미지정'으로 일시적으로 바꿔 버린 사건과 같은 불행한 사태를 또 맞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호사카 교수는 독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와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면서 지금부터라도 세계 여론을 향해 독도 문제에 관한 여론전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2009년 전작 <우리 역사 독도>에 이어서 최근 후속작 <대한민국 독도>(책문 펴냄)를 펴낸 호사카 교수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는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앞으로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국의 논리와 근거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특히 그는 일부 한국인이 일본의 독도 문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우려하는 데 대해 이 문제는 지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사실상 독도 문제의 해결 방법에서 제외됐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선전전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일본 도쿄대학교 공학부 출신으로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알고 나서, 1988년 한국으로 유학 온 호사카 교수는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지난 2003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지금은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일본학)로 재직하며 2009년 5월, 같은 학교에서 창립한 독도종합연구소에서 소장을 맡고 있다.

지난 11일 호사카 교수를 세종대학교 내 연구실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지난 해 <우리 역사 독도>를 낸 데 이어 이번에는 <대한민국 독도>를 펴냈다. <우리 역사 독도>가 고대부터 19세기 초까지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일 간의 대응을 다룬 책이라면 이번 책 <대한민국 독도>는 19세기 초부터 현재까지의 대응을 다루고 있다. 이번 책의 발간으로 독도 영유권 논쟁에 관한 역사를 총정리 한 셈인데, 우선 그간의 노력에 경의와 함께 축하를 드리고 싶다.

독도 연구는 언제 시작했으며 그 계기는 무엇인가?

호사카 : 독도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어쩌면 단순한 이유이다. 1990년대 말부터 한국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때 한국에서 제일 '뜨거운 이슈'가 바로 독도 문제였다. 지금은 한국인으로 귀화했지만, 당시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일본인인) 선생님은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한국 것이네, 일본 것이네 하고 쉽게 대답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양쪽 자료와 주장을 모두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독도에 대한 논문을 주로 쓰다가 독도에 관한 역사적 자료나 법적인 자료 등을 망라한 책을 정리해서 한 번 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주장을 압도적으로 능가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레시안 : 10년 이상 독도 연구에 매달려 왔는데, 10년 공부의 결론은 무엇인가? 독도는 어느 나라 땅인가, 일본인가 한국인가?

호사카 : 독도는 의심할 바 없는 한국의 영토다. 이것이 10여년에 걸친 내 연구의 결론이다. 단,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보여주는 많은 역사적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프레시안 : 독도 문제에 관해서 한국인들 사이에는 일종의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면 우리가 불리하다'든가 '이미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마당에 독도 문제를 놓고 쓸데없는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겠는가', 또는 '독도 문제에 관한 논쟁에 뛰어드는 것은 일본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므로 무대응이 상책'이라는 의견도 있다.

예컨대 시마네현의 독도 병합 100주년 기념행사로 한국이 시끄러웠던 2005년 삼일절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내 옆에 있는 여자가 내 부인인 줄 모두가 알고 있는데 굳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 여자가 내 부인이요'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독도 영유권에 관해 적극적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실효 지배를 강화하는 편이 낫다는 취지였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이런 생각과 대응 방법에 동의하는가?

호사카 : 그렇지 않다. 한국 사람에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기에 새삼 무슨 근거와 논쟁이 필요하겠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한국 사람만의 생각이다. 국제 사회에서는 치밀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설득시켜야만 한다. 세계 여론에 대한 홍보전이라는 측면에서 누가 앞서 있는가를 냉정하게 말한다면 유감스럽게도 일본이 한국에 앞서 있다. 지난 2008년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의 주권을 '미지정'이라고 표기한 적도 있었지만, 영국과 독일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도 일본 측의 논리가 훨씬 더 잘 먹혀들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지난해 한양대학교에서 유럽 각국의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사 25명을 대상으로 독도 문제에 관한 2시간짜리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수많은 질문 공세 때문에 강의를 진행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들 질문의 대부분은 일본 측 논리에 따른 것이었고 이를 일일이 반박하느라 애를 먹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일본의 홍보전은 치밀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국의 논리와 근거가 부실하거나 박약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일본 측의 주장에 적극 대응한다면 한국이 밀릴 이유가 전혀 없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독도 영유권에 관한 역사적 사례들을 하나씩 짚어보았으면 한다. 먼저 일본 최초의 근대정부라고 할 수 있는 메이지정부에서 1877년 발표한 '태정관 지령문'에 관해서 알아보자. 이 태정관 지령문은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한국 측에 매우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가?

호사카 : '태정관'은 메이지정부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쉽게 말하면 일본 내각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태정관이 1877년 동해 내 '다케시마(竹島) 외 일도(外 一島)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며,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을 문서로 정리했다. 그것이 '태정관 지령문'이다. (여기에서 다케시마는 울릉도를, 외 일도는 독도를 가리킨다. 당시에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로 불렀던 것이다.) 즉,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 한국 영토라는 사실을 일본 정부가 공식 인정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 문서를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본 학자들도 태정관이 독도를 '일본 영토 외'로 인정한 공식 문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절대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일부러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태정관 지령문의 내용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

호사카 : 태정관은 1885년에 폐지되었지만 태정관이 발한 법령 등은 1889년에 공포된 '대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 등에 의해 법적 효력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메이지헌법에는 위헌이 아닌 한 태정관이 내린 법령은 모두 유효하다는 취지의 명문 규정이 들어있다. 또 1946년 시행된 일본국헌법에는 이에 대한 명문 규정이 없으나 메이지헌법에서 명령 사항으로 돼있던 것들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명령의 효력이 있다고 해석되고 있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2006년 9월 <연합뉴스>와 나는 '태정관 지령문' 복사본을 일본 정부와 자민당, 민주당, 공명당, 사민당, 공산당 등에 보내면서 메이지정부가 '독도는 일본 영토 바깥에 있다'고 결정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공산당만이 호의적인 답을 보내왔다.

공산당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전제 하에 "다케시마가 일본에 편입되었던 1905년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긴 메일을 보내왔다. 자민당에서는 답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직접 전화를 걸었더니 자민당 측 담당자는 "그 문서는 독도가 일본 바깥에 있다고 했을 뿐, 조선 땅이라고는 하지 않았다"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일본 정부는 두 달 이상 회답을 미루다가 2006년 11월 초순 쯤 '태정관 지령문의 존재는 알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 조사 중이며 현 시점에서는 답변할 수 없다'는 궁색한 답변을 보내왔다.

2009년 1월에는 일본 국회에서 아소 타로 당시 총리에게 '태정관 지령문'에 대한 질의가 있었다. 이에 대해 아소 총리는 "이 문제는 영토 문제이므로 답변할 수 없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그만큼 '태정관 지령문'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치명적인 약점인 것이다. 현재 일본은 '태정관 지령문'이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이 문서의 자유 열람을 사실상 금지시키고 있다.

프레시안 :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에 독도를 편입시켰다. 일본은 당시 조선 정부가 이에 항의를 하지 않았으며 이는 시마네현 편입을 국제법상 묵인한 것이므로 이 조치가 유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독도 영유권 주장의 주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호사카 : 일본 내각은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이름도 없고(無名) 주인도 없으며(無主地) 사람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규정하고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했다. 인근 오키섬의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가 1903년부터 독도로 이주해 2년간 강치잡이를 하면서 독도를 경영했기 때문에 '무주지 선점(先占)'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독도를 원래 울릉도의 일본 이름이었던 다케시마로 명명한 뒤에(당시까지 독도의 일본이름은 마츠시마였다) 시마네현에 편입한다고 결정했고, 2월 22일 편입 조치가 취해졌다. 일본 정부는 독도가 일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태정관 지령문을 통해 알고 있으면서 마치 지도 상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섬인 양 무영, 무주지, 무인도라고 하면서 '무주지 선점' 원칙을 내세워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지금까지 한국은 다음과 같이 반박해 왔다.

첫째, 대한제국이 1900년의 칙령 41호로 독도를 석도(石島)라는 이름으로 울도군(울릉도) 관할로 명기했으므로 독도는 무주지가 아니었다. 둘째, 나카이 요자부로는 독도로 이주한 게 아니라 1년에 두세 차례 2주 정도 머물렀을 뿐으로 이를 실효 지배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 셋째, 1906년 3월 울도 군수 심흥택이 독도가 일본 땅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본 군(울도군) 소속 독도'라고 하면서 독도가 울릉도 소속임을 명백히 기록에 남겼다. 넷째, 독도는 카이로 선언에 언급된 것처럼 '탐욕과 폭력으로 약취된 땅'이므로 한국에 반환되어야 한다. 다섯째, 1905년 당시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 한국이 일본의 조치에 항의할 수 없었다.

특히 마지막, 독도의 시마네현 편입은 일본의 한국 침략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그 당시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일본에 항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렇게 말한다.

"을사조약은 대한제국이 다른 나라하고 조약을 맺을 때 일본이 개입한다는 뜻이고, 한국이 일본하고 대화를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항상 일본과 대한제국은 대화할 수 있었다. 독도 문제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있었던 문제이기 때문에 항의할 시간이 적어도 4년간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한국은 절대 일본에 항의할 수 없었다. 고종은 일본에 직접 항의를 못했기 때문에 밀사와 밀서를 통해 일본의 침략 행위를 고발했다. 1907년 6월에 열린 헤이그 평화 회의에서 일본의 야욕을 우회적으로 규탄한 것이 그렇다. 일본이 아무리 대화할 수 있었다고 주장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못 했다는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증거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논리적 깊이가 약하다. 그런 내용도 이번 책에 담았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일본이 주장하는 "1905년에 시마네현이 독도를 강제 편입한 부분에서 대한제국이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우리 것이다"라는 논리가 현재 국제 사회에 통용돼 있는 것인가?

호사카 : 현재까지는 그랬지만 세세하게 반박을 하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세세한 반박을 실제로 안 해왔다. 일본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논리적 대응 자체도 안이했다는 걸로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독도 영유권에 관한 국제법적 근거라는 측면에서 일본과의 평화 조약인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은 한국에게 매우 불리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조약에서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점을 인정받지 못했을 뿐더러 미국은 독도(다케시마)가 일본 영토라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호사카 : 맞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일본 외무성은 '다케시마 문제'라는 웹사이트에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라는 팸플릿을 올려 이 점을 크게 홍보하고 있다. 10가지 포인트 중 제7항을 보면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기초 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 다케시마(독도)를 포함시키도록 요구했습니다만, 미국은 다케시마(독도)가 일본의 관할 하에 있다고 해서 이 요구를 거부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비장의 무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이른바 '러스크 서한'이다. 이 문서는 1951년 8월 10일 미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가 한국 정부에 보낸 것으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도 또는 다케시마 내지 리앙쿠르암(岩)으로 알려진 섬에 관해서는, 통상 무인(無人)인 이 바위섬은 우리들의 정보에 의하면 조선 일부로 취급된 적이 결코 없으며,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마네현 오키섬 지청의 관할에 있다…."

한마디로 미국은 독도가 일본 관할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로 미국이 일본과의 평화 조약 작성 과정에서 일본 편을 들어준 것이다. 이 러스크 서한은 독도 문제의 진정한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까지 이에 대해 명료한 반박을 내놓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세계 사람들은 "독도가 역사적으로는 한국 것일지 몰라도 국제 조약이라는 측면에서는 일본 것이 맞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현재 상황이다. 여기에 대해 확고한 대응책을 세우지 않으면 세계의 논리는 계속 일본 편으로 갈 것이다. 논리라는 것이 무서워서 무력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완벽히 극복하여야 한다. 그렇게 때문에 더욱더 이 책을 쓴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초안 작성 과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연합국을 대표해 평화 조약 초안을 작성하는데 1차부터 5차 초안까지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 명시되었다. 하지만, 6차 초안에서는 독도가 갑자기 정반대로 일본 영토로 기재됐다가 7차에서는 다른 연합국의 반발로 다시 한국 영토로, 8~9차에서는 다시 일본 영토가 되는 등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은 미국에게만 평화 조약 초안 작성을 맡길 수 없다고 하여 독자적인 영국 초안을 작성해 1951년 4월에 그 초안을 공개했는데 이 영국 초안에는 독도가 명백히 한국의 영토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51년 6월 14일 '2차 영미 합동 초안'이 마련되는데 한국 영토 조항은 이것으로 최종 확정된다.

그 내용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權原),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것으로 독도는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나 독도가 한국 영토 초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영미 양국은 '너무 명료하게 해버리면 일본인에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 때문'이라고 연합국 회의에서 설명했다.

즉, 독도가 일본영토가 되었다는 말은 영국이나 미국 측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때까지의 흐름으로 볼 때 연합국은 압도적으로 독도는 한국 영토로 주장했고 미국만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결국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의견이 세계의 대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줄곧 한국 영토로 인정받았던 독도가 대일 평화 조약 6차 초안부터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미국 정부의 일본 정치고문관이었던 '윌리엄 제이 시볼드'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지일파로 일본 여성과 결혼도 했다. 그 후 제이 시볼드는 독도가 일본 영토로 기재되도록 미국 정부에 대해 끈질기게 요구했다. 결국, 일본 편에 선 제이 시볼드로 인해 독도 영유권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한편, 평화 조약 당사자가 아니었던 한국은 초안 작성 과정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초 한국 영토로 명기되었던 독도가 최종안에서 빠진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한국 정부는 당시 주미 한국 대사였던 양유찬 대사를 통해 1951년 7월 19일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평화 조약 초안에 명시해 달라고 미국 국무성에 요청하도록 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대사관에서 독도의 위치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미국 국무성 고문이었던 덜레스 대사가 "독도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위치를 물었을 때 한국 대사관의 서기관은 "울릉도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애매하게 답했다. 당시 주미 한국 대사관은 다케시마가 독도의 일본 이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미국이나 연합국 입장에서는 독도라는 이름 자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것도 알 길이 없었다. 한국 대사관의 서투른 조치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섬에 대해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평화 조약에 관한 연합국 극동위원회 회의가 열린 1951년 8월 7일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은 덜레스 대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지리학자뿐만 아니라 한국 대사관에서도 독도의 위치를 확인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섬에 대한 한국 주권을 확실히 해달라는 한국의 요구를 고려하기 어렵다"고 밝혔고, 사흘 뒤인 8월 10일 러스크 서한이 한국 정부에 전달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 독도 조항이 포함되지 않은 반면, 미국 정부의 고위 관리가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취지의 서한을 한국 정부에 보냈다, 이것이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결정적 무기가 된 셈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이 그토록 맹신하는 '러스크 서한'에도 치명적 결함이 있다.

이 서한의 내용은 미국 한 나라만의 의견으로 국제적 합의나 공인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합국들의 토론은 1951년 6월 1일자로 끝났고, 그 결과 '2차 영미 합동 초안'은 6월 14일 작성됐다. 독도를 한국 영토 조항에 포함시켜달라는 한국의 요구가 제기된 7월 19일 이후 연합국들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했다는 흔적은 없다. 결국 '러스크 서한'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일 뿐, 연합국 모두가 합의한 사항도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국제법적 효력이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게다가 미국은 이 서한을 한국 정부에만 비밀리에 전달했다. 즉, 당시에는 국제 사회가 미국 정부의 이러한 입장을 알지도 못했으며, 유일하게 알고 있는 한국 정부가 이러한 미국 정부의 입장을 수용했다는 증거도 없다.

예컨대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로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를 순방한 밴 플리트 대사는 귀국 보고서에서 "이 섬(독도)에 대한 합중국의 입장은 대한민국에 비밀리에 통보되었지만 우리의 입장은 아직 공표된 바가 없다"고 밝혔다. 또 이보다 앞서 1953년 7월 22일 작성된 미국 국무부 문서(버매스터 각서)에는 "이 입장(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미국 입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전달된 적이 없다"면서 만일 독도 문제로 한일 양국이 분쟁에 돌입했을 때 "합중국은 최대한 이 분쟁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며 일본이 미국 정부에 대해 중재를 요청할 경우 "이를 거절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결론적으로 '러스크 서한'은 독도가 일본 땅임을 다른 연합국과 합의한 문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평화 조약상 국제적으로 공인된 문서로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한편, 당시 미국은 독도 문제가 영토 분쟁으로 비화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비공식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하지만 국내에서는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갈 경우 우리에게 매우 불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자신들이 국제사법재판소 행을 제안했으나 한국이 응하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선전전을 펼치고 있는데….

호사카 :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는 방안은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 기본 조약에서 사실상 포기됐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기본 조약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양국 간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 그 해결 방법을 합의한 '분쟁 처리에 관한 교환 공문 의정서'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우선 독도라는 명칭이 도중에서 삭제되었을 뿐더러, 어떤 분쟁이 일어나도 양국 간의 외교 노력, 또는 (제3국에 의한) 조정으로 해결하기로 되어 있다.

당시 일본은 중재에 의한 해결도 제안했으나 이는 한국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재는 다수결에 의한 결정을 분쟁 당사자가 받아들여야만 하지만 조정은 분쟁 당사자의 재량에 달려 있으므로 구속력이 없는 것이다. 결국 조정이라는 해결책에는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한 해결책이 포함돼 있지 않으므로 '분쟁 처리에 관한 교환 공문 의정서' 체결을 통해 일본은 사실상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독도 문제의 해결책에서 제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체적 내용은 이번 책 <대한민국 독도>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될 당시 일본에서는 이 조약 체결로 독도를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의 대표적 신문인 <아사히신문>은 1965년 6월 22일자 '다케시마(독도) 문제, 마감에 쫓겨 양보'라는 부제 하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그만큼 제한 시간이 우선시되어 그것에 맞추기 위해 일본 측이 상당히 무리를 한 면이 많다. 다케시마(독도)는 그 예다. 일본 측은 그동안 '여러 현안 일괄 해결'이라는 기본적 입장에 서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을 주장했지만, 한국 측이 전면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제3국 알선, 조정으로 태도를 바꿔 더욱 그것을 완화하여 '그 전 단계로 외교 교섭을 둔다'는 데까지 양보했다. (…) 이것으로는 한국 측이 다케시마(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한, 실제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전망은 극히 적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는 일본의 요구는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사실상 소멸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은 '독도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면 한국이 이길 수 있을까' 하고 불필요한 걱정을 하고 있다. 마치 일본 정부가 아직도 국제사법재판소행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체결 후에 일본이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행을 한국 정부에 공식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제안을 하면 한일 기본 조약 위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일본 학자나 시민들이 국제사법재판소 행을 주장하고 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만일 한국 정부가 한일 기본 조약 체결 과정을 면밀히 분석했다면 국제사법재판소 행에 대한 불필요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프레시안 : 한일 기본 조약 체결로 일본이 사실상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한 독도 문제 해결을 포기했고, 나아가 독도 자체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를 했는데, 하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호사카 : 1965년 한일 수교 이전까지 일본은 매년 '한국이 독도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의 항의를 보냈으나 한일 기본 조약 체결 이후 몇 년간은 항의서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야당의 공세에 밀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200해리 영해 시대가 시작돼 독도의 경제적 가치가 커지면서 다시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나선 것이다.

프레시안 :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며, 어떻게 풀려나갈 것으로 보는가?

호사카 : 외교통상부를 비롯해 동북아역사재단과 같은 공신력 있는 사이트에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한국의 구체적 논거들을 계속 올려야 한다. 필요한 부분은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야 한다. 현재 독도 문제에 관한 양국의 공식 인터넷 웹사이트를 비교해보면 일본 측의 근거와 논리가 한국 측에 비해 훨씬 치밀하다.

예를 들자면, 일본은 자국에 불리한 사항 중 태정관 지령문과 시마네현 편입(일제 침략 행위) 등 2개항에 대해서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반면 한국은 '러스크 서한'이라든가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문제' '밴 플리트 귀국보고서' 등 무려 7개 항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외부인의 눈에 한국이 밀리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냉정하게 말해 한국 측 논리보다 일본 측 논리를 받아들이는 세계인들이 훨씬 많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결국, 한국 측 논리가 일본 측 논리보다 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 주장이 확실히 국가전략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목표는 독도를 기점으로 하는 배타적 경제 수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현재 일본 민주당 정부에서는 독도 문제가 크게 문제 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이 약하다는 게 문제다. 앞으로 더 보수적인 정권이 들어선다면 독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더 증폭될 수도 있다. 또, 민주당 정권 아래에서도 역시 독도 문제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런 것에 대비해 최소한의 문서 작업 등을 해나가야 한다. 논거를 정리하고 확보하는 것이다. 왜 이런 기초 작업들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감정적으로 대항한 측면이 있다. 전략적인 고려를 해야 할 때이다.

일부에서는 홍보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쪽의 무기를 그쪽에 보여주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다 내놓을 필요도 없지만, 일본 측 논리를 반박할 정도의 논리는 내야 한다. 세계 국가들은 자료를 보면서 판단하는 것이다. 한국에선 "우리만 독도가 우리 땅으로 알고 지켜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건 너무 안이한 생각이다. 세계에 독도가 한국 것이라고 알아줘야 한다. 아주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보면 '독도는 일본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 점령하고 있다'고 많은 나라들이 알고 있다.

프레시안 : 호사카 교수는 지금은 한국으로 귀화했지만 원래는 일본인이었다. 독도 연구와 같은 작업에 대해 일본에서 비판은 없는가?

호사카 : 내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일본 사이트에 넣어보면 비판 글이 아주 많다. 하지만, 그 안에서 또 평가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내 논거가 일면 타당하다고 생각해 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논리적 접근을 해 나가야 한다.

프레시안 : 앞으로의 계획은?

호사카 : 지난해 <우리 역사 독도>와 올해 <대한민국 독도> 발간으로 독도에 대한 큰 이론(grand theory)은 일단 마무리됐다고 본다. 앞으로는 1998년 한일 신어업 협정 등 독도와 관련된 구체적 사항들을 더 면밀히 추적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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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신이 만든 어떤 단어가 미디어를 통해 연일 오르내리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물론 보람도 있고 기분도 좋은 일이겠지만, 좀 불편하거나 심지어 섬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어가 사람들에게 확산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변형들이 일어날 수 있고, 심지어 원래 의미와는 상관없는 맥락에서 오히려 더 널리 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5년 전, 역자들의 숙고에 의해 탄생한 '통섭(統攝)'이라는 용어는 그와 유사하게 진화해왔다. 포털사이트 검색 엔진에 이 단어를 입력해보라. 뉴스 항목에서만 매일 한두 건의 관련 기사가 검색될 정도다. '디지로그', '하이브리드', '노마드', '퓨전', '컨버전스'처럼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과 비교해보면, 통섭은 지난 수 년 동안 국내에서 벌어진 단어들의 생존 경쟁에서 가장 인상적인 성공을 거둔 용어다.

생존 경쟁에 내던져지는 것은 단어만이 아니다.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이 들고 나오는 가방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인기 '걸그룹'의 춤은, 심각한 변형이 일어나긴 하지만, 멀리 철책 군부대까지도 전달된다. 어떤 전자 제품은 빨리 구입하려고 매장 앞에서 진을 친 소비자를 기다리는가 하면, 다른 제품은 소리 소문 없이 시장에서 사라진다. 어떤 신을 믿는 이들은 새벽마다 특정 장소에 모여 큰 소리로 어딘가를 향해 부르짖고, 어떤 이들은 가부좌를 틀고 침묵의 시간을 즐긴다. 우리는 평생 헌신할 수 있는 가치를 찾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방황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투신한다. 이러한 인간의 행동과 우리가 만들어낸 인공물의 궤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 <밈>(수전 블랙모어 지음, 김명남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수전 블랙모어의 <밈>(김명남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문화의 진화에 대한 매우 독특한 이야기다. 영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며 과학저술가인 수전 블랙모어는 이 책에서 밈의 관점에서 인간과 문화의 진화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여기서 '밈'이란 모방을 통해 전달되는 '무언가'를 뜻한다. 가령, 우리가 누군가를 모방하면 그 사람으로부터 내게로 '무언가'가 전달된다. 그 '무언가'는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고, 거기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될 수 있다. 이렇게 계속 전달되면서 저만의 생명을 지니는 것을 그녀는 '밈'이라 불렀다. 즉, 밈이란 모방이라는 비유전적 방법을 통해 전달되는 문화의 요소를 뜻한다.

저자는 인간의 마음 자체가 밈들이 뇌를 재편해서 자신들에게 더 나은 서식처로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난 인공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커다란 뇌는 모방의 산물로서 다른 영장류의 그것들과 구별된다. 우리의 언어도 밈이 더 많은 자신의 복제를 퍼뜨리기 위해 진화시킨 것이며, 밈은 자신의 경험과 소유물을 물려주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섹스)를 통해 자신을 맘껏 확산시킨다. 또 저자는 이타성과 종교와 같이 그동안 진화심리학적으로 설명되어온 인간의 본성도 밈 이론의 관점에서 재편한다. 예컨대 이타성의 경우, 이타적인 사람은 인기가 있고 따라서 그(그녀)의 행위는 모방되기 더 쉽고, 결국 그(그녀)의 밈이 다른 사람보다 더 널리 퍼진다. 종교적 밈의 경우에는 두려움과 이타성을 통해 자신의 밈을 더 널리 전파한다. 이때 종교적 밈의 확산은 세상에 대한 진실성과는 관련이 없다.

사실, '밈'이라는 밈은 원래 블랙모어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11장에서 인간의 문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유전자가 아닌 새로운 복제자(replicator)를 다음과 같이 도입한다.

"나는 새로운 종류의 복제자가 지구상에 최근에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눈앞에 있다. 아직은 유아기에 있으며 원시 스프 속에서 서투르게 해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낡은 유전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화적 변화를 겪고 있다. 이 새로운 스프는 인간 문화의 스프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복제자의 이름이 필요한데, 그것은 문화 전달의 단위, 혹은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표현해줘야 한다 (…) 이것은 meme이다." (192쪽)

도킨스는 밈의 사례로 선율, 아이디어, 캐치프레이즈, 패션, 주전자 만드는 방법, 문 만드는 기술 등을 들었고, 신념과 종교 등을 복제자의 관점에서 설명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오직 우리 인간만이 밈이라는 새로운 복제자를 진화시켰으며 그 밈들을 통해 유전자의 독재로부터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때문인지 그는 그 지점에서 밈에 대한 이야기를 멈춰버렸다. 블랙모어는 도킨스가 멈춰버린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하여 밈과 밈학(memetics)에 대한 한 권의 책을 완성했고, 추천사에서 도킨스는 밈에 대한 소박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일깨워준 그녀를 높이 평가해줬다. 그리고 여기서 도킨스는 밈 이론에 대해 유보적인 것처럼 보였던 자신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줄곧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이기적 유전자라기보다는 이기적 복제자였고, 유전자와 더불어 밈도 복제자라는 점이다.

이 책의 진정한 도발은 도킨스의 이런 뒤늦은(?) 인증에 있지 않다. 되레 그것은 밈 이론을 인간의 인지와 문화의 진화에 끝까지 적용해보려는 저자의 철저함과 진정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녀는 대담하게도 우리의 자아가 서로 다른 밈들의 복합체(memeplex)일 뿐이고, 밈을 전달하는 모방 능력 때문에 우리가 다른 동물과 뚜렷이 구분되며, 우리는 결국 '밈 머신(meme machine)'-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유전자가 우리의 배후에 있다는 것도 불편한데 우리의 본성을 틀 짓는 또 하나의 복제자가 있다고 하니, 또 한 번 자존심이 상할 노릇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나 블랙모어의 <밈>은 모두 유전자와 밈을 동시에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들에게 인간은 각각 유전자 기계와 밈 기계이다.

블랙모어의 밈 이론은 문화 진화에 대한 여러 자연주의적 접근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문화 진화에 대해서는 그동안 사회생물학, 이중 대물림(dual inheritance) 이론, 진화심리학, 생각 전염학(epidemiology of idea)과 같은 접근들이 있었는데, 밈학은 복제자의 관점에서 문화의 기원과 전달을 설명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이론들은 미묘한 차이를 갖는다. 가령, 사회생물학에서 문화는 인간 개체의 유전적 적응도를 높이는 '행동'의 결과물이고, 진화심리학자에게 문화는 개체의 유전적 적응도를 높이기 위한 '정신 메커니즘'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적 적응도와 상관이 없거나 오히려 그 적응도를 낮추면서까지 종(세대로 이어지는 수직적 대물림)과 횡(동세대의 다른 개체들에게 전파되는 수평적 대물림)으로 전파되는 문화 아이템들을, 그들처럼, 단지 부적응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문화에 대한 충실한 설명이 아니다.

한편, 성인의 젖당 소화 능력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유전자(젖당 소화 유전자)와 문화(가령, 낙농 문화)의 공진화 모형을 발전시킨 이중 대물림 이론가들은 문화적 적응도가 유전적 적응도를 때로 능가할 수도 있음을 보였다. 하지만 이 또한 유전자의 고삐에서 풀려 자율성을 획득한 문화에 대해서만큼은 침묵한다.

밈 이론은 유전자와 밈을 모두 동등한 자격의 복제자로 간주하고, 양쪽 모두를 통해서 문화가 생겨나고 전달된다는 주장이다. 또 생각 전염학자들은 문화가 복제 과정보다는 변형 과정을 통해 전파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문화를 인지 적응이나 인지 부산물에 묶어 놓는다. 따라서 밈학을 제외한 다른 문화 진화 이론들은 죄다 유전자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문화만을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블랙모어의 이 책은 언젠가 유전자의 사슬을 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게 된 새로운 복제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복제자의 실체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적극적인 해명의 글이기도 하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인간 본성과 문화의 진화에 대한 책들은 주로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쓰인 것들이었다. 이제 밈학의 바이블에 해당되는 이 책도 출간되었으니, 서가에 책이 꽉 찬 느낌이다. 진화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금방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진화학도만이 독자는 아니다.

모방이나 문화 전달에 관한 이 책의 도발적인 내용은, 어떤 생각이 다른 생각들에 비해 더 널리 퍼지는가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의 두뇌를 뜨겁게 달굴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통섭'이 우리 사회에 화두가 된 이유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뭔가를 따라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것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김명남 씨의 번역 또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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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명문대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진 한 가수에 대한 학력 위조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급기야 공영 방송과 경찰이 검증에 나서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방송 후 사실관계를 확인하고서도 개운치 않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사건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객관적 사실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사실이 일단 우리의 의식에 자리 잡은 다음에는 그 근거를 흔드는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난 2006년 이른바 '황우석 사태'에서 체세포 핵 이식이라는 원천 기술과 황 박사의 능력을 믿었던 많은 사람은 그 실험이 조작된 것임이,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이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난자를 채취 당했음이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그와 그의 기술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미지가 상품인 연예인에게 그것을 손상시킬 수 있는 주장이 유통된다는 건 그 자체로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건전한 회의주의에 바탕을 둔 검증이 생명인 과학에서 실험 결과를 조작한다는 건 과학자 사회 전체에 대한 모독이며 파문의 정당한 사유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학력이든 과학적 검증이든 일단 믿기로 작정한 사실을 폐기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유리한 것들만 취사선택해 주요 증거로 삼아 축적하고 광범위하게 유통시키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사실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문제는 사실 여부보다 담론의 유통 구조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학 관계 또는 문화적 맥락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회 구성주의가 유행하기도 한다. 1998년 물리학자인 오세정 교수와 과학사회학자인 김환석 교수가 <교수신문> 지면을 통해 벌인 지상 논쟁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2001년에는 이 논쟁에 자극받은 과학계의 원로 송상용 교수가 1박2일간의 토론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 진영이 한 자리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반복할 기회를 가졌던 것 말고는 별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통의 논점을 중심으로 서로의 주장을 비판하고 옹호하는 논쟁이 아니라 각자의 주장을 늘어놓는 병렬식 발표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과학 담론은 과학적 사실의 가치중립과 자연이라는 최종 심판자의 권위를 믿는 현장 과학자, 그리고 과학을 대상화하고 사회문화적 가치로 평가하는 과학사회학자의 입장으로 양분되고 그 논쟁은 과학 '전쟁'이라 불린다.

이처럼 과학과 인문학 또는 사회과학이 높은 벽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동안 둘 사이를 연결시킬 통섭이란 화두가 떠올라 크게 유행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차례 지적되었듯이 최재천 교수의 통섭은 '사물에 널리 통함' 또는 '서로 내왕함'(通涉)이 아닌 '전체를 도맡아 다스림'(統攝)이다. 도정일 교수의 지적처럼 그의 통섭은 생물학을 모든 학문의 주인으로 삼는 생물학 제국주의 또는 모든 사회 현상을 생물학적 원리를 적용해 설명하는 생물학적 환원론의 혐의가 짙다. 그런데도 대중은 그가 유행시킨 통섭이 과학과 인문학이 소통할 진정한 수단이라고 믿는다. 발음이 같은 두 단어를 교묘히 섞어 유통에서는 소통의 뜻을 활용하고 내용에서는 다스림의 담론을 확산시킨 것이다.

2009년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200주년을 맞아 벌어진 사회생물학 논쟁에서도 이 문제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생물학이 사회 현상을 설명할 자격이 있는지, 있다면 그 한계는 없는지 조목조목 따지기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또는 비전문가의 직관적 인식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친 느낌이다. 역설적이게도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입장의 차이를 확인하고 가능한 공약수를 찾는 통섭(統攝)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학자가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서로 내왕하는 통섭(通涉)에 그쳤기 때문이다.


▲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최종덕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2010년에는 과학철학자 최종덕, 생물학자 전방욱, 동양철학자 김시천, 역사학자 임지현 교수와 인문의학자인 필자가 참여하여 진행한 대담집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최종덕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가 출간되었는데 진화생물학이 전문인 과학철학자 장대익 교수가 비판적 서평을 쓰고 최종덕 교수가 다시 반론을 제기하는 작은 논쟁이 있었다. 서평은 몇몇 사실관계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 대한 지나친 해석과 비판 그리고 편향을 문제 삼는다. 사회생물학과 가까운 도킨스와 윌슨을 한편에 몰아세워놓고 거기에 비판적인 르원틴과 굴드의 편에 서서 일방적으로 공격을 하는데 그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국내의 진화 관련 논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불만도 덧붙인다.

여기서 장대익 교수의 지적에 변명을 늘어놓거나 반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의 비판에는 수용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충분히 논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다만 이 책이 진화 이론에 대한 전문서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그의 지적처럼 진화와 관련된 논쟁은 흔히 이념 논쟁으로 번지곤 하는데 그는 이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문제는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 은연중에 특정 이념을 고취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대익 교수의 지적처럼 사회생물학은 인간 사회가 침팬지 사회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모든 것이 적응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사회생물학자임을 자처하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역시 인간이 유전자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의 뇌리에 강력한 이념적 상흔을 남겨 극단적 찬성과 반대의 주장을 일삼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것이 바로 <통섭>과 <이기적 유전자>의 성공 뒤에 감춰진 숨은 그림이다. 여기서는 과학적 정확성보다는 담론의 유통 과정이 더 큰 문제고 그 책임은 '한국에서 진화론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사회생물학의 반대자들과 달리 최재천 교수, 장대익 교수와 같은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편향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반대자들을 이념적으로 비판하는 데 있어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은 가치중립이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의사이고 면역학자이며 철학자인 알프레드 토버의 말처럼 과학은 '사실과 가치의 관계가 진화하는 양상'이다. 실제로 과학은 우리의 일상을 크게 좌우하며 부지불식간에 특정 가치를 주입한다. 사실 속에 특정 가치가 숨어들어가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은근히 경쟁을 부추기는 논리가 숨어있다. 일단 공론화에 성공하면 반대자들의 비판 속에서도 그 논리는 점점 더 확대 재생산된다. 대중의 인지 구조 중 특정 회로를 활성화시켜 고착시키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정치인이 이슈를 선점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최근 광고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뉴로마케팅(neuromarketing)도 소비자의 뇌 속 특정 회로를 활성화시켜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구조다. 타블로의 학력이나 황 박사의 원천 기술에 대한 맹목적 믿음도 그렇게 활성화된 인지 구조 때문일 수 있다.

이처럼 최근 새로운 통섭(痛涉)의 장(場)으로 여겨지고 있는 인지과학은 사회생물학이 숨겨둔 그림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씩 열어주고 있다. 사회생물학의 화두가 생존과 생식이라면 인지과학의 화두는 소통과 공감(empathy) 그리고 창발(emergence)이다. 물론 여기도 환원적이고 물리적인 설명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지만,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보다 포괄적인 구조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분야에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위계적 구조의 통섭(統攝)이 아닌 수평적 구조의 신경계와 유사한 통섭(通涉)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진화에 비추어보지 않는다면 생물학의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도브잔스키의 경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생물학의 대상이 공감과 소통의 능력을 진화시켜 왔고 그 속에서 이전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속성을 창발해온 인간이라면, 그래서 사실과 가치의 새로운 관계를 진화시키고 있는 중이라면, 사회생물학이 아닌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 지금으로선 숨은 그림 찾기에 능한 인지과학이 가장 강력한 후보다.


이 글은 지난 8월 27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5호에 실린 장대익 서울대학교 교수(자유전공학부)의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서평에 대한 논평이다. (☞관련 기사 : 진화론 '제자백가'…다윈의 선택은?)

앞서 지난 9월 3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6호에는 최종덕 상지대학교 교수의 반론이 실렸다. (☞관련 기사 : 장대익의 서평에 답한다…다윈이 지식 권력의 수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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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을 헤집어 실패로 끝났다고 평가되는 역사적 실험을 추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추적자 자신이 직접적인 '연루자'였던 경우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그 역사적 실험이 삶의 모든 것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꿈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뼈저린 고통'마저 따를 것이다.

객관적이고 균형감있는 접근의 시도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의 생성과 성장 그리고 붕괴(혹은 변질)를 다룬 제임스 밀러의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김만권 옮김, 개마고원 펴냄)는 바로 그러한 아픔을 동반했음직한 책이다.

이는 저자 스스로 그 운동의 참여자였으면서도 "겉보기에는 굉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실패"했다는 평가와 "내 젊은 날의 순진함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 아주 오랫동안 (…)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책을 시작하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을 '누추한 것' 혹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운동이 "정치적 자유의 한계를 시험"했다면서, "환상적인 것"이긴 했으나 "진정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적극적 '의미 짓기'는 비판적 평가에 더불어 책의 매 장에 걸쳐 반복된다. 나름 객관적이고 균형감있게 접근코자 했던 것이다.

주체 요인에 대한 과도한 강조


▲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 미국 신좌파 운동과 참여민주주의>(제임스 밀러 지음, 김만권 옮김,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하지만 이 운동의 실패 요인 분석과 긍정적 유산에 대한 조망이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운동 실패의 요인이-젊었고, 어렸고, 미숙했고 등으로 표현되는-주체 위상의 허약함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적 환경의 제약에 대한 분석의 미미함 속에 너무나 쉽게 주체 역량의-가령 운동의 이념과 전략의 모호함이라는-한계에서 찾아지고 있다.

'두 케네디'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개혁 세력마저 '손쉽게' 제거되었던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급진적 학생운동의 성패가 이념과 전략의 명확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을까? 긍정적 유산에 대한 언급은 매우 추상적이고 선언적이다. 이 운동이 실제 1970년대 이후의 미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표의 제시를 찾아보기 힘들다.

밀러는 운동이 끼친 영향의 '역설적 징표'로서 뉴라이트 세력의 등장과 그것에 바탕을 둔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이라는 우파의 '대항 혁명'을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긍정적 유산이라고 보기도 어려운데다가 그것이 어떠한 동학 속에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인물, 이념, 전략으로 이루어진 역사극

이 책은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을 '민주사회학생연맹'이라는 조직과 1962년 포트휴런 선언에서 1968년 민주당 시카고 전당 대회 때까지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 있다. 이때 이 책은 알란 하버, 톰 헤이든, 리처드 플랙스, 샤론 제프리, 폴 부스 등과 같은 운동 지도자와 주요 활동가에 대한 전기(biographical) 형태의 서술 방식을 띠고 있다. 이 때문에 책의 전개가 마치 '역사극'을 보는 듯한 흥미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말과 글에 대한 풍부한 인용은 이 운동에 대한 보다 생생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특히 밀러는 운동의 이념과 전략 그리고 조직 구조, 운동 방식의 문제 등에 주목한다. 운동의 실패 요인을 이념과 전략의 모호함 등에서 찾게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즉 포트휴런 선언을 통해 그들의 이념으로 표방된 참여민주주의는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이로부터 전략의 설정과 조직 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분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참여민주주의는 행동(톰 헤이든) 혹은 의사 결정에의 관여(샤론 제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고,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리처드 플랙스)으로 정의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그냥 '듣기 좋은 말'(스티브 맥스)로만 수용되기도 했다. 전략의 경우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봉기의 정치'(톰 헤이든)와 기존 정치 질서의 변화-특히 민주당 내부의 개혁-를 중시하는 '재편성 전략'(스티브 맥스), 그리고 '대안적 공동체 형성'(스워스모어 지부) 등으로 갈렸다.

조직 운영 방식은 위임 체계를 구조화할 것이냐 등과 같은 내부 민주주의 문제를 둘러싼 신구 회원의 갈등으로 외화되었다. 신진 회원들은 고참 회원들을 '늙은 수호자'라고 하면서, 조직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위임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폴 부스)는 입장에 강하게 반대했다(제프리 셰로).

한편, 운동의 실패를 가져온 또 다른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폭력화'인데, 이 역시 이념과 전략의 모호함 속에 운동 주체들이 "자신들을 대표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의 일부분이 되어" "자신들이 변혁시키고자 했던 '대중사회'의 일부분이 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참여민주주의라는 이념의 구체적 실천 양식으로 제시되었던 직접 행동의 의미가 파괴적인 폭력의 행사로 이해되어버렸던 것이다.

마치 저자의 '핵심 주장'처럼 보이는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바로 그러한 폭력의 길로 운동이 빠져 들어가던 시기, 톰 헤이든이 민주당 시카고 전당대회를 앞두고 제출했던 강령의 소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이 시기 즈음 베트남의 게릴라 전술에서 영감을 받아 '강경 투쟁'을 주장하고 있었다.

저자가 헤이든의 그러한 노선에 동조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책의 제목을 그렇게 땄던 것은 그들의 운동이 참여민주주의라는 이념적 기치 하에 '제도 밖의 정치'를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그들의 정체(성)가 대중들에게 극적으로 인지되었던 것은 '거리에서' 반전 운동을 격렬히 전개해나갔던 1960년대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 관점의 부재

그런데 이념과 전략 등을 둘러싼 문제가 비단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에만 국한된 것이었까? 즉, 비슷한 시기 급진적 학생운동이 발흥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와 일본 등에서도 나타난 문제 아니었을까? 밀러는 이에 대해 별다른 물음과 답변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런 가운데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의 '특화'가 비교적 관점의 확보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화의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마르크스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등과 같은 구좌파 이념과의 '단절', 미국의 '토착 이론가'인 밀스에의 의존, 반공주의의 전략적 수용과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관계 설정,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높은 비판 의식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 자체로 특수한 것은 아니다. 구좌파와 (제도화된) 노동운동 세력 그리고 자유주의 혹은 기존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태도는 이 시기 급진적 학생운동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구체적 상황과 맥락의 차이'인데, 비교 연구가 아니긴 하지만, 그것들 간의 대비가 어떤 형태로든 간에 제시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겹쳐 보기

이 책을 읽으면서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이 겹쳐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공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변혁 지향적이고 급진적 학생운동의 생성과 성장, 소멸이라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고 규명되어야할 물음들이 있다.

왜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은 하필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주체사상과 같은 '구좌파' 이념의 수용을 통해 급진화되었던 것일까? 단지 억압적 국가 권력의 작동과 제도화된 노동운동의 부재, 분단과 북한의 존재와 같은 요인으로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2010년 지금까지도, 왜 신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이념과 전략을 내세우는 급진적 학생운동은 등장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 미국의 1960년대는 한국에선 결코 오지 않는 미래인가? 아니면 1980년대의 그것으로 이미 끝나버린 과거인 것인가? 이제 더 이상 한국의 대학에서 변혁 지향적인 집합적 주체의 형성은 불가능한 것인가?

결국 제임스 밀러의 이 책은 1980년대 한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에 대한, 그리고 2010년 지금의 한국 대학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깊고 풍부한지 다시금 돌아보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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