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언어에 담은 페루의 현실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유럽을 거점으로 한 라틴아메리카 일련의 작가들의 상업적 성공을 일컫는 '붐(boom)'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다.

현재 바르가스 요사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학가 중 한 명이자 라틴아메리카의 우파 지식인으로 발언하고 있다. 그는 소설가로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희곡, 문학 비평, 에세이, 저널리즘에 걸쳐 매우 다양한 장르에 걸친 글쓰기를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다.

1936년 3월 28일 페루 남부의 아레키파에서 태어난 그는 외교관으로 부임한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10살 때 페루로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를 리마로 돌아와서 처음 만났고, 실상은 별거 중이던 부모님은 재결합했다. 바르가스 요사는 9살 때부터 글을 시작했고, 10대 때 이미 지역 언론의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1953년 리마의 산 마르코스 국립 대학에 입학해 법학과 문학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 장학금을 받아 스페인으로 유학, 오랜 유럽 생활을 시작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에서 공부했고,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프랑스 파리로 갔다. 하지만 파리에서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일, 언론 기사 쓰는 일 등을 병행하며 소설을 써나갔고, 영국에서 상당 기간 체류하다 1971년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대한 주제로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20세기 중반에는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엘리트 예술가들이 자신의 땅이나 그곳의 선배들을 바라보기보다는 유럽에서 답을 찾아 헤매던 시절이었다. 변방 페루에서 19세기 유럽 문학을 스승삼아 독학으로 소설을 익혀나가던 바르가스 요사에게 유럽 생활은 여러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문학의 형식에 대한 탐구가 전무했던 페루의 선배 작가와 풍속주의 문학은 바르가스 요사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19세기 프랑스, 20세기 영미 문학, 특히 플로베르와 제임스 조이스를 자신의 문학적 스승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와 작품으로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꼽았다. 5년간의 집필 과정에서 플로베르가 보여준 문학에 대한 헌신, 완벽함에 대한 집요한 추구가 그에게 깊이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런 탓인지 같은 페루 작가이지만 원주민 세계에 대한 깊은 탐구를 했던 인류학자이자 소설가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 시인 세사르 바예호에 비해 그의 작품은 페루 백인의 세계와 관점을 담고, 유럽 지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바르가스 요사는 지금까지 17개의 소설을 발표했고, 상당수가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그의 작품은 페루를 배경으로 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 자신이 페루를 벗어나 세계를 떠돌았듯 그의 소설도 점점 페루에서 라틴아메리카로, 또 세계로 시공간을 넓혀가는 것 같다.

첫 소설 <도시와 개들>(1962년)은 자신의 군사 학교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으며, <녹색의 집>(1966년)은 페루 피우라의 한 매음굴이 배경이다. <라 카테드랄 주점에서의 대화>(1969년)는 1950년대 페루의 마누엘 오드리아 독재 정권하의 사회상을 그린다.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1973년)와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1977년)는 유머가 넘치며 둘 다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인데, 특히 후자는 19세의 나이로 10년 연상의 사돈 아주머니였던 훌리아-그녀는 2010년 3월 사망했다-와 결혼했던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한 축으로 삼은 소설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세상을 두루 다니고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고민하며 19세기 브라질의 건국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세상 종말 전쟁>(1981년)을 발표했고, 31년간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치한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와 그 피폐함을 그린 작품 <염소의 축제>(2000년)를 냈다. 한편, <다른 모퉁이에 있는 천국>(2003년)은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의 이야기를, 올해 11월 출간 예정인 <켈트인의 꿈>은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인 로저 케이스먼트의 삶을 다룬다.


▲ 201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페루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그는 국내 언론에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졌지만, 1980년 이후 '우파'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lanacion.cl

좌파에서 우파로, 정치적 행보와 논란들

바르가스 요사의 동시대 라틴아메리카 지식인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 역시 쿠바 혁명을 지지하고 정치적으로 좌파였으나, 1980년대 이후 우파로 선회한 이후 지금은 서구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등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설파하는 지식인으로 변모해 상당히 적극적으로 정치 발언을 하고 있다.

그가 쿠바 혁명에 등을 돌리게 된 계기는 '파디야 사건'이었다. 그는 쿠바 혁명 이후 제정된 '카사 데 라스 아메리카스'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어 수차례 쿠바를 방문하고, 혁명 지도자들을 만나며 혁명을 지지했으나, 1971년 혁명 체제가 쿠바 시인 에베르토 파디야를 검열하고, 자아 비판하게 만들고, 동성애자들을 박해하자-최근 카스트로는 자신이 동성애자들을 차별한 것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이에 강한 반발을 느껴 점차 카스트로 체제와 라틴아메리카 좌파 흐름에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와 붐 세대를 대표하는 동료이자 친구였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도 이러한 이념 차이로 인해 사이가 멀어졌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쿠바 혁명 이후 체 게바라가 만든 <프렌사 라티나(Prensa Latina : 라틴아메리카 언론)>의 특파원을 지낸 것을 계기로 카스트로와 지금까지 50년간의 우정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 두 노벨상 수상 작가들은 36년 전 주먹다짐을 한 이후 화해하지 않은 채 지내고 있는데, 두 사람의 싸움에는 이념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의 골도 있다고 한다. 1976년 2월 멕시코시티의 한 극장 앞에서 바르가스 요사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주먹을 휘둘렀고, 그 구체적인 이유와 정황에 대해 두 사람은 지금껏 함구하고 있다. 바르가스 요사가 부인 파트리시아와 결혼 생활의 위기를 겪던 시기였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부인에게 충고를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라는 추측 정도만 나돌 뿐이다.

1970년대 말까지도 스스로를 온건한 사회주의자라 칭했던 바르가스 요사는 1980년대에 고국으로 돌아온 뒤 자유주의로 선회했다. 1983년 당시 대통령이던 벨라운데 테리에는 바르가스 요사에게 '우추라카이(Uchuraccy) 사건' 진상위원회를 맡긴다. 이는 1980년대 초부터 마오주의 게릴라 운동 '센데로 루미노소(빛나는 길)'가 이 마을을 점령해 원주민과 센데로 루미노소 사이에 갈등과 폭력이 지속되었고, 수도 리마에서 센데로 루미노소를 취재하기 위해 간 여덞 명의 기자들이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조사위원회는 원주민들이 센데로 루미노소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기자들을 센데로 루미노소로 착각하고 살해한 것이라며 이를 원주민과 센데로 루미노소의 잘못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후 이 살인 사건에는 '신치스'라고 불리는 페루 특수 경찰의 개입이 있었고, 조사위원회가 이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던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되었다.

바르가스 요사는 1987년 당시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의 은행 국유화 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앞장섰고, 1990년 페루 대통령 선거에서 강력한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선거 정책으로 내세우며 중도 우파 연합인 '민주전선'(프레데모)당의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급부상한 알베르토 후지모리 후보와 치른 2차 선거에서 패하고 말았다. 패배 이후 그는 조용히 나라를 떠났고 스페인 정부에 스페인 국적을 요청, 다시 유럽 생활을 시작했으며 정치를 떠나 글쓰기에 집중한다.

19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여러 인터뷰를 살펴보면 바르가스 요사는 소련 붕괴는 그에게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확신을 준 계기였고, 소련의 권위주의 체제는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었다고 단언한다. 저개발, 독재, 무능, 부패로 점철된 20세기 페루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에 소련식이든 쿠바식이든 좌파 정부와 혁명, 게릴라 운동은 답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펜클럽 회장직을 맡고, 유럽과 미국 대학에 적을 두며 서구에서 오래 체류한 것이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유럽 문명만이 보편성과 우월성을 갖는다고 확신하게 만든 듯 보인다.

하지만 서구적 가치의 보편성, 국경을 허무는 자유주의 경제를 찬양하는 바르가스 요사의 논리를 듣다보면 라틴아메리카의 특수성과 그로 인한 갈등 요소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무화되고, 특정 인간과 집단, 민족이 어떤 입장에서 발언하는가에 대한 상황들은 거의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랫동안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화두였던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며, 라틴아메리카가 변방이나마 서구 문명의 끄트머리에라도 위치하게 된 것이 다행이며 경제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우리도 어서 번영된 나라와 대륙을 만들어가자고 독려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라틴아메리카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해 바르가스 요사가 내리는 평가도 명백히 갈린다. 그는 칠레, 브라질, 우루과이의 '이성적이고 중도적인' 사회주의는 인정하며, 특히 신자유주의를 실천해온 칠레는 오래전부터 라틴아메리카 경제의 모범으로 칭찬해왔다. 올해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는 세바스찬 피녜라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며 언론에 그를 지지하는 많은 글을 싣고, 1월에는 칠레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델 카스트로는 악의 근원이며, 차베스는 현재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로 석유 달러로 중남미와 유럽까지 매수하는 인물이다. 베네수엘라의 달러에 '매수'된 볼리비아, 에콰도르, 니카라과 정부 역시 좋은 정부가 아니다.

2009년 5월 말 바르가스 요사는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베네수엘라의 자본주의 경제 연구소 세디세(Cedice)가 주최한 회의에 참석했는데, 차베스 대통령이 그에게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대화를 제안했다가 무산되었다. 그러자 이를 두고 중남미 독재자 원형, 즉 권위적이고 군사적 지배를 하는 카우디요(caudillo)를 떠올리게 한다며, 카우디요는 대화를 할 줄 모른다고 말하며 차베스를 비판했다. 베네수엘라에 오기 직전 그는 차베스가 석유 달러로 다른 나라를 매수한다고 비난했고, 이로 인해 베네수엘라에서 출국할 때 '외국인으로서 베네수엘라의 정치에 대해 논평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항에서 한 시간 반가량 억류되기도 했다.

한 인터뷰에서 바르가스 요사의 균형 감각을 의심하게 한 대목과 마주쳤다. 그는 이라크 전쟁 이후 12일간 이라크를 방문해 스페인 <엘 파이스>에 특집 기사를 냈고, 글과 사진을 모아 2003년 〈이라크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적이 있다. 작년 베네수엘라의 〈글로보비시온〉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실제로 이라크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들은 사담 후세인의 독재와 그의 두 아들의 폭정에 완전 지쳐있었고, 전쟁 초기에는 이라크 사람들이 독재 상황의 종결에 대한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쿠바와 베네수엘라를 비판하듯 강대국의 정책과 외교에도 그만큼 엄정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는 지, 과연 그는 어디에 서서 누구를 위한 발언을 하고 있는 지 질문하게 하는 구절이었다.


이 글은 <프레시안>에 10월 11일 발행된 기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