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을 헤집어 실패로 끝났다고 평가되는 역사적 실험을 추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추적자 자신이 직접적인 '연루자'였던 경우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그 역사적 실험이 삶의 모든 것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꿈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뼈저린 고통'마저 따를 것이다.
객관적이고 균형감있는 접근의 시도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의 생성과 성장 그리고 붕괴(혹은 변질)를 다룬 제임스 밀러의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김만권 옮김, 개마고원 펴냄)는 바로 그러한 아픔을 동반했음직한 책이다.
이는 저자 스스로 그 운동의 참여자였으면서도 "겉보기에는 굉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실패"했다는 평가와 "내 젊은 날의 순진함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 아주 오랫동안 (…)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책을 시작하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을 '누추한 것' 혹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운동이 "정치적 자유의 한계를 시험"했다면서, "환상적인 것"이긴 했으나 "진정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적극적 '의미 짓기'는 비판적 평가에 더불어 책의 매 장에 걸쳐 반복된다. 나름 객관적이고 균형감있게 접근코자 했던 것이다.
주체 요인에 대한 과도한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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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 미국 신좌파 운동과 참여민주주의>(제임스 밀러 지음, 김만권 옮김,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
하지만 이 운동의 실패 요인 분석과 긍정적 유산에 대한 조망이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운동 실패의 요인이-젊었고, 어렸고, 미숙했고 등으로 표현되는-주체 위상의 허약함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적 환경의 제약에 대한 분석의 미미함 속에 너무나 쉽게 주체 역량의-가령 운동의 이념과 전략의 모호함이라는-한계에서 찾아지고 있다.
'두 케네디'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개혁 세력마저 '손쉽게' 제거되었던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급진적 학생운동의 성패가 이념과 전략의 명확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을까? 긍정적 유산에 대한 언급은 매우 추상적이고 선언적이다. 이 운동이 실제 1970년대 이후의 미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표의 제시를 찾아보기 힘들다.
밀러는 운동이 끼친 영향의 '역설적 징표'로서 뉴라이트 세력의 등장과 그것에 바탕을 둔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이라는 우파의 '대항 혁명'을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긍정적 유산이라고 보기도 어려운데다가 그것이 어떠한 동학 속에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인물, 이념, 전략으로 이루어진 역사극
이 책은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을 '민주사회학생연맹'이라는 조직과 1962년 포트휴런 선언에서 1968년 민주당 시카고 전당 대회 때까지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 있다. 이때 이 책은 알란 하버, 톰 헤이든, 리처드 플랙스, 샤론 제프리, 폴 부스 등과 같은 운동 지도자와 주요 활동가에 대한 전기(biographical) 형태의 서술 방식을 띠고 있다. 이 때문에 책의 전개가 마치 '역사극'을 보는 듯한 흥미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말과 글에 대한 풍부한 인용은 이 운동에 대한 보다 생생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특히 밀러는 운동의 이념과 전략 그리고 조직 구조, 운동 방식의 문제 등에 주목한다. 운동의 실패 요인을 이념과 전략의 모호함 등에서 찾게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즉 포트휴런 선언을 통해 그들의 이념으로 표방된 참여민주주의는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이로부터 전략의 설정과 조직 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분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참여민주주의는 행동(톰 헤이든) 혹은 의사 결정에의 관여(샤론 제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고,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리처드 플랙스)으로 정의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그냥 '듣기 좋은 말'(스티브 맥스)로만 수용되기도 했다. 전략의 경우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봉기의 정치'(톰 헤이든)와 기존 정치 질서의 변화-특히 민주당 내부의 개혁-를 중시하는 '재편성 전략'(스티브 맥스), 그리고 '대안적 공동체 형성'(스워스모어 지부) 등으로 갈렸다.
조직 운영 방식은 위임 체계를 구조화할 것이냐 등과 같은 내부 민주주의 문제를 둘러싼 신구 회원의 갈등으로 외화되었다. 신진 회원들은 고참 회원들을 '늙은 수호자'라고 하면서, 조직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위임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폴 부스)는 입장에 강하게 반대했다(제프리 셰로).
한편, 운동의 실패를 가져온 또 다른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폭력화'인데, 이 역시 이념과 전략의 모호함 속에 운동 주체들이 "자신들을 대표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의 일부분이 되어" "자신들이 변혁시키고자 했던 '대중사회'의 일부분이 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참여민주주의라는 이념의 구체적 실천 양식으로 제시되었던 직접 행동의 의미가 파괴적인 폭력의 행사로 이해되어버렸던 것이다.
마치 저자의 '핵심 주장'처럼 보이는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바로 그러한 폭력의 길로 운동이 빠져 들어가던 시기, 톰 헤이든이 민주당 시카고 전당대회를 앞두고 제출했던 강령의 소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이 시기 즈음 베트남의 게릴라 전술에서 영감을 받아 '강경 투쟁'을 주장하고 있었다.
저자가 헤이든의 그러한 노선에 동조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책의 제목을 그렇게 땄던 것은 그들의 운동이 참여민주주의라는 이념적 기치 하에 '제도 밖의 정치'를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그들의 정체(성)가 대중들에게 극적으로 인지되었던 것은 '거리에서' 반전 운동을 격렬히 전개해나갔던 1960년대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 관점의 부재
그런데 이념과 전략 등을 둘러싼 문제가 비단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에만 국한된 것이었까? 즉, 비슷한 시기 급진적 학생운동이 발흥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와 일본 등에서도 나타난 문제 아니었을까? 밀러는 이에 대해 별다른 물음과 답변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런 가운데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의 '특화'가 비교적 관점의 확보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화의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마르크스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등과 같은 구좌파 이념과의 '단절', 미국의 '토착 이론가'인 밀스에의 의존, 반공주의의 전략적 수용과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관계 설정,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높은 비판 의식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 자체로 특수한 것은 아니다. 구좌파와 (제도화된) 노동운동 세력 그리고 자유주의 혹은 기존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태도는 이 시기 급진적 학생운동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구체적 상황과 맥락의 차이'인데, 비교 연구가 아니긴 하지만, 그것들 간의 대비가 어떤 형태로든 간에 제시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겹쳐 보기
이 책을 읽으면서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이 겹쳐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공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변혁 지향적이고 급진적 학생운동의 생성과 성장, 소멸이라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고 규명되어야할 물음들이 있다.
왜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은 하필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주체사상과 같은 '구좌파' 이념의 수용을 통해 급진화되었던 것일까? 단지 억압적 국가 권력의 작동과 제도화된 노동운동의 부재, 분단과 북한의 존재와 같은 요인으로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2010년 지금까지도, 왜 신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이념과 전략을 내세우는 급진적 학생운동은 등장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 미국의 1960년대는 한국에선 결코 오지 않는 미래인가? 아니면 1980년대의 그것으로 이미 끝나버린 과거인 것인가? 이제 더 이상 한국의 대학에서 변혁 지향적인 집합적 주체의 형성은 불가능한 것인가?
결국 제임스 밀러의 이 책은 1980년대 한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에 대한, 그리고 2010년 지금의 한국 대학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깊고 풍부한지 다시금 돌아보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