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에는 담론이 없다. 교육 때문에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근거와 논리를 정식화한 담론이 없다니. 담론이 없으니 토론이 없고, 토론이 없으니 푸념만 있다. 그러므로 실천도 반복 속에서 지쳐간다.

거대 담론도 필요하고 미시 담론도 필요하다. 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진보적 교육 전문지 월간 <우리교육>은 언필칭 진보적 노동조합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지도부의 묵인 속에 진행된 구조 조정을 견디지 못한 기자들이 전원 퇴직함으로써 주저앉고 말았다. 만날 이명박을 욕하면서도 제 자식들은 사교육으로 뺑뺑이 돌리는 '우리 안의 이명박'을 준열하게 꾸짖는 칼럼은 인기리에 읽히는 것 같은데, 학원비를 대기 위해 살림하던 어머니까지 마트 계산대로 내모는 사회·경제적 심리 구조를 해부하는 담론은 없다.

작년 여름 방학 무렵, 나는 딴에는 뭘 한번 정리해보겠다고 일제고사 관련한 자료를 긁어모아 놓고 공부를 했다. 2008년 한겨울, 일제고사 반대 체험 학습을 안내한 선생님들에게 자행된 이른바 '교육 대학살'에 충격을 받았고, 실제로 일제고사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순식간에 20년 전 상황으로 되돌려 놓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제고사에 관한 별다른 연구 자료가 없었다. 우리나라에 성취도 평가가 도입된 것도 10년이 넘었고, 이미 미국과 영국에서 일제고사가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의 중핵으로 공교육을 뒤흔들었던 국제적인 흐름이 있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의 사례를 연구한 이병곤·성열관 두 학자의 노작을 제외하고는 참고할 만한 연구 자료가 거의 전무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핀란드 교육 바람이 불어올 때도 그랬다. 핀란드 교육이 이야기된 것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는데, 알려진 자료라고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와 기행문들이 전부였다. 국내에 소개된 몇몇 연구자의 글도 <핀란드 교실 혁명>(박재원·윤지은 옮김, 비아북 펴냄)의 저자인 일본인 교육학자 후쿠다 세이지와 핀란드 교육장관으로 22년간 재직한 에르키 아호의 연구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고 있었다. 감탄과 환호가 범벅이 된 기행문은 넘쳐났지만, 핀란드와 한국 교육의 거리를 냉정하게 재는 글은 몇 편 없었다.


▲ <자율주의와 진보 교육>(조엘 스프링 지음, 심성보 편역, 살림터 펴냄). ⓒ살림터
이제는 다시 '아나키즘' 바람이 불고 있는 모양이다. 한때는 '코뮌주의'가 이야기 되더니 이제는 아나키즘으로 넘어 온 모양이다. <자율주의와 진보 교육>(조엘 스프링 지음, 심성보 편역, 살림터 펴냄)에 대한 신간 소개를 보았을 때 그래도 나는 몹시 반가웠다. 이제 교육에서도 아나키즘이 이야기되는구나 싶어서였다. 사실 말이지만, 한국 교육에서는 아나키즘이라는 거울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아나키즘은, 아이들을 순종과 체념이 체질화된 인간으로 노예화시키는 근대 교육이 근원적인 데서부터 뒤틀린 것임을 밝혀주는 사상이라고 나는 믿어왔다. 내가 현장에서 체득한 믿음 또한 교육이란 100가지 문제에 대하여 100가지 답을 가진, 근원적으로 무정부적인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육 현장에 강요되는 몇 개의 정답은 국가와 기업, 그리고 교사와 부모가 이미 정해놓고 있을 뿐, 아이들의 자리는 지금 그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실제로, 이 책의 2부만큼은 이러한 기대에 값할 만하다. 특히 1970년대에 '탈학교 사회'를 주창하여 이미 우리나라의 대안 교육 운동에도 큰 영감을 준 이반 일리치 외에도 슈티르너, 페레, 라이히, 닐의 교육 사상은 한국 교육에서 심도 깊게 논의되어야 할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마르크스·엥겔스 시대, 청년 헤겔학파의 일원이었던 교사 슈티르너는 어른들이 심어주려고 하는 그 어떤 것이든 '머릿속의 톱니바퀴'가 되어 아동을 노예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 복지'란 의미 없는 관념에 불과하다고 믿었으며, 개인의 연방으로 성립된 국가를 꿈꾸었다.

페레는 20세기 초, 스페인에서 부유층 남자 아이들만 다니던 학교들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모던 스쿨'의 설립자이자 열정적인 사회운동가였다. 모던 스쿨은 노동계급의 자녀가 다니는 남녀공학이었고, 성공에 대한 보상도 실패에 대한 처벌도 시험도 일체 없는 학교였다. 가톨릭교회가 강요하는 일체의 교조가 거세된 교재를 찾다보니 도서관에 비치할 단 한 권의 책도 찾지 못해 빈 도서관으로 개교하게 했던 철저한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결국 바르셀로나 폭동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쓰고 1909년 처형당했다.

유럽의 파시즘 시대를 예견한 라이히와 '서머힐'의 창시자 닐은 한국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사상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가정 교육이 전체주의의 바탕이 된다고 보았다. 부모로부터 주입된 통념, 금기, 권위들로 인해 에로스가 억압당한 아이들은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되고, 징벌과 배제에 대한 공포로써 스스로를 구속하게 된다. 이는 결국 전체주의를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가정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그래서 닐은 그 유명한 서머힐 실험 학교를 설립했고, 라이히는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성 생활의 기쁨을 향유하도록 국가가 '비상 주택'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 아나키즘 교육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은, 교육이란 다른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바로 아이들 자신의 삶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믿음이다.

이 책의 혼란과 허술함

그러나 이 책은 많은 부분 혼란스럽고 허술하다. 서평에서 이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이 혼란과 허술함이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주의집중과 사색을 끊임없이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우리 교육 담론의 안일한 흐름과도 관련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우선, 옮긴이 서문을 보다가 의아했다. 옮긴이는 이 책이 이미 25년 전에 번역되어 출판된 것을 다시 엮어 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었다. 묵은 책이라고 해서 현재성이 없는 게 아니고, 아나키즘은 지금 더더욱 빛을 발할 문제의식이기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크게 괘념치 않았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서평을 쓰기 위해 밑줄 긋고 메모한 부분을 옮겨 적어도 이 책에서 소개한 수많은 사상가들의 '차이'와 그들이 제기한 '논점'들이 분명히 잡히지 않았다. 이 책은 조엘 스프링의 저작들에서 아나키즘 교육 사상과 관련된 부분을 뽑아내어 옮긴 1부, 2부와 옮긴이 심성보가 쓴 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여덟 명의 아나키즘 교육 사상가들의 교육론을 담은 언술들이 많게는 서너 번씩 반복된다. 옮긴이 심성보의 보론에서는 한국 교육과 아나키즘 교육론을 연결 짓는 내용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1부, 2부를 요약해 놓고 거기에 한국 교육에 대한 자신의 짧은 소감을 덧붙인 수준이다. 이럴 거라면 왜 100쪽이 넘는 보론을 굳이 수록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 책은 사상가들의 교육론에 대한 서술은 대단히 자세한데, 이들이 실제 적용된 사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드물게, 파울로 프레이리가 1989년 브라질 상파울루의 교육감이 되어 자신의 교육론을 직접 적용할 기회를 얻어 여러 가지 일들을 의욕적으로 벌였다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교육감 직을 사임하면서 그 작업이 중단되고 말았다며 그쳐버리고는 그 경과와 의의에 대한 별다른 서술이 없다(284쪽).

저자 조엘 스프링은 자신의 결론에서 오늘날 아나키즘 교육론의 입장에서 내걸 수 있는 주요한 슬로건으로 '의무 교육의 폐지'를 들었다. 그런데, 편역자인 심성보는 자신이 쓴 보론의 결론에서 한국 교육에서는 '의무 교육의 내실화와, 고등학교까지의 무상 의무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저자의 결론을 뒤집고는 그 이유와 맥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아나키즘 교육론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애국주의에 대한 분명한 거절인데, 심성보는 보론의 결론에서 '민주적 애국심, 정의로운 애국심이 요청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가장 '고생한' 사상가는 아마도 이반 일리치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일리히'로 시종일관 불린다. 그는 독일인이 아니었고, 스스로를 소개할 때 '이반 일리치'로 발음했으며, 또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랐다는 분명한 언급이 있다(<이반 일리치와의 대화>(데이비드 케일리, 권루시안 옮김, 물레 펴냄, 7쪽). 그런데, 이 책을 포함하여 한국에서 출판된 이반 일리치의 저작들은 대부분 그를 '이반 일리히'라고 집요하게 부르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리치가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설립한 연구 및 자료 기관인 CIDOC(Centro Intercultural de Documentación)는 이 책에서 몇 차례나 '국제문화회관'이 되었다가 '국제문화조사센터'로 오락가락한다. 그는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 부총장을 역임한 것으로 나오다가도 다른 대목에서는 또 그 대학의 고문이 되어 있다.

페레가 설립한 '모던 스쿨'은 이 책에서 '모던 스쿨'로 표기되다가도 또 수없이 '근대 학교'로 표기되어 읽는 이를 헷갈리게 한다. 241쪽 각주에는 미국의 아나키스트 에마 골드만이 1923년에 <러시아에 대한 나의 환멸>이라는 책을 써서 소련의 공교육 체제를 비판했다고 나오는데, 248쪽에서는 그 책이 느닷없이 1909년에 죽은 페레의 저작으로 적혀 있다.

이렇게 어지러운 책을 다 읽고 나면, 새삼 한국 교육 담론이 위치한 안타까운 자리가 보인다. 자식 키우는 부모들의 술자리에서는 열이면 열, 다들 교육 걱정이 빠지지를 않는데, 이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하는지를 모색하는 담론은 이렇게 허약하고, 읽고 밑줄 치며 공부할 만한 책조차 드물다. 답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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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의 하나가 '자기 계발/(자기) 경영' 관련 서적이다. 독자들의 식지 않는 호응 덕분에 대형 베스트셀러가 계속 이어지는 분야다. 하지만 인기에 비하면 이상하리만치 이런 책들에 대한 비평은 드물다. 학자건, 서평가건, 출판 담당 기자건 진지하게 따지려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인데, 아무래도 자기 계발서 비판이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은 탓이 아닐까 싶다.

자기 계발서를 비판하기 어려운 건 이런 책들이 철저히 '대중의 상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계발/(자기) 경영' 서적들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개인의 습관, 행동 유형, 심리 개조를 통해 성공의 길을 제시하려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성공(또는 변화)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대전제로 삼기 마련이다. 둘째 유형은 조직 문제를 다루는 책들이며 '조직이 바뀌면 모든 게 바뀐다'는 '상식'을 철저히 신봉한다. 리더십을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셋째는 첨단 기술 활용에서 성공을 모색하는 책들인데, 이런 책들의 전제는 '기술이 혁신을 부른다'는 또 다른 '상식'이다.

자기 계발서가 피하는 골치 아픈 질문

따로따로 보면 모두 맞는 말 같지만, 세 가지 주장을 나란히 세워놓으면 양상이 달라진다. "변화의 원동력은 1)개인인가 2)조직인가 3)기술인가?"라고 물어보자.

이는 사회과학, 특히 커뮤니케이션학 같은 분야에서 전형적으로 제기하는 질문이다. '행위자-(사회) 구조-과학기술의 상관관계'를 따지는 것인데, 내로라하는 대가들도 명쾌한 답을 내지 못한다. 그만큼 복잡한 문제다. 하지만 '자기 계발/(자기) 경영' 서적들은 이 문제를 살짝 피해간다. 세 가지 요소의 관계 따위는 싹 잊고 하나에 몰두하는 게 전형적인 수법이다. 입맛에 맞는 사례들을 양념으로 쳐가면서 말이다.


▲ <초이스>(엘리 골드랫·에프랏 골드랫-아쉬라그 지음, 최원준 옮김, 웅진윙스 펴냄). ⓒ웅진윙스
물론 이런 분류법에 딱 들어맞지 않는 책들도 꽤 있다. 최근 번역되어 나온 <초이스>(최원준 옮김, 웅진윙스 펴냄)도 그렇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물리학의 법칙이 개인 간 문제나 경영 문제를 푸는 데도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자기 계발/(자기) 경영' 서적과 꽤 다른 이야긴데, 그만큼 더 논란이 될 만한 주장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books' 편집자가 서평 대상으로 꼽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자연과학의 법칙이 과연 인간사 또는 사회 문제를 풀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서평을 써달라는 게 편집자의 주문이었다.

이 책의 독특함은 저자의 이력에서 비롯된다. 저자 엘리 골드랫은 이스라엘 물리학자인데, 1980년대 '제약 이론'(TOC·Theory of Constraints)이라는 것을 제시하면서 경영 이론가로 이름을 얻었다. 제약 이론을 풀어쓴 소설 <더 골>은 전 세계에서 80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그리고 <초이스>는 이 이론의 밑바탕이 된 사고방식을 심리학자인 자신의 딸과의 대화 형식으로 다룬 책이다. 둘의 대화는 아버지가 작성한 기업 경영 개선 보고서 몇 개를 소재로 삼아 진행되며, 대화가 이어질수록 딸은 '명쾌하게 생각하는 방법'에 다가간다.

엘리 골드랫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세상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2)이 단순함은 원인-결과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 3)핵심 원인-결과를 파악하려면 자연과학적 논리로 무장해야 한다. 4)핵심 원인-결과를 파악하면 조화로운 해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자연은 극히 단순하고 또한 스스로 조화를 이룬다"는 영국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의 말이다.(83쪽) 다만 엘리 골드랫은 뉴턴의 '자연'을 '세상'으로 확장한다. 복잡한 인간관계나 기업 경영도 뉴턴의 '자연'과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을 '세상'으로 확장하는 건 논리적으로 명백한 오류다. 자연이 단순하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이는 '자연적 사실'일뿐이다. 여기서 인간관계도 단순하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도출될 수는 없다. 하지만 논리학보다 더 호소력이 강한 게 역시 '상식'이다. 말을 살짝 비틀어 '(자연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작동하듯) 인간관계나 기업 경영의 문제 또한 어떤 원인의 결과다'라고 말하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 세상만사에는 모두 근본 원인이 있다는 말을 누가 감히 헛소리라고 할 수 있겠나?

인간-사회 구조-자연의 상호 작용

하지만 이 주장 또한 위에 거론했던 사회과학적 질문 곧 인간-사회 구조-기술의 관계 관점에서 따지는 순간 흔들리기 시작한다. 기업 경영 문제의 근본 원인이 사람 문제일 경우 그걸 해결하면 조직의 문제점이나 기술적 한계도 해소되는가? 아니면 기업 조직의 문제나 기술적 한계의 원인을 해결하면 사람 문제는 장애가 안 되는가? 이렇게 물으면 골드랫은 "순환 논리는 명확하게 생각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244쪽)고 반박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순환 논리가 아니다. '모든 문제에는 핵심 원인이 있다'는 말이 상식적이라면, '기업의 문제는 보통 인력, 조직 구조, 기술적 문제가 얽히고설키면서 생긴다'는 말 또한 상식적이다. 이렇게 말하면 골드랫은 "가장 큰 걸림돌은 사람들이 현실을 복잡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32쪽)라고 개탄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복잡하다는 소리를 하자는 게 아니다. 세상사는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는, 좀 더 엄밀하게 표현하면 '인간 주체,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 과학의 영역인 자연·환경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된다는 이야기다. 복잡한 게 아니라 상호 작용에 따라 여러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소리다.

여기까지 말하면 다른 자연과학자들까지 들고일어날지 모르겠다. 반과학주의나 과학에 대한 인문학 우위론 따위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그런데 이는 인문학적 접근인 동시에 자연과학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17~18세기 물리학자 뉴턴이 아니라 20세기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한테 의지한 주장이다. 두 학자는 <앎의 나무>(최호영 옮김, 갈무리 펴냄)라는 책에서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세계에서 접촉과 관계의 의미를 아래 인용문처럼 강조한다.

"유기체의 다양성이 여실히 보여주듯이 생명체란 다양한 구조적 경로를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것이지, 어떤 한 가지 관계나 한 가지 가치의 최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133쪽)

"의식과 정신은 사회적 접속의 영역에 속하며, 그 영역에서 의식과 정신의 역동성이 작용한다."(262쪽)

"우리가 이 책에서 말한 모든 것에는 피할 수 없는 윤리가 담겨 있다. 이 윤리의 준거는 인간의 생물학적·사회적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다."(275쪽)

"우리가 가진 세계란 오직 타인과 함께 산출하는 세계뿐이다."(278쪽)

이들의 과학이 '우리의 상식'에도 훨씬 더 부합하지 않는가?

덧붙임

1. 책에 등장하는 기업 경영 개선 보고서는 모두 유통과 관련된 것이며, 골드랫의 해법은 '적기 공급 생산'(JIT)과 비슷한 방식을 납품-생산-도매-소매에 최대한 적용하자는 게 핵심이다. 이 방식의 장단점은 유연 생산 체제로 유명한 일본 자동차 업체 도요타의 사례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2. 위키피디아를 보면 골드랫의 '제약 이론'(TOC)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 이스라엘 경영학자 댄 트리치(Dan Trietsch)의 논문 '제약에 의한 경영에서 임계(臨界)에 의한 경영으로(From Management by Constraints to Management by Criticalities)' (☞바로 보기)
2) 그의 또 다른 논문 '결함 있는 '제약 이론'에서 위계 구조적으로 균형을 잡아가는 임계로(From the flawed "Theory of Constraints" to Hierarchically balancing Criticalities)' (☞바로 보기)
3) 브라질 학자 알레샨드리 리냐리스(Alexandre Linhares)의 논문 '제약 이론과 제품 배합 결정의 조합적 복잡성(Theory of constraints and the combinatorial complexity of the product-mix decision)' (☞바로 보기)

3. 골드랫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치밀하고 논리적인 추론과 검증 태도는 본받을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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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의 <합★체>(사계절 펴냄)는 <내 귀는 짝짝이>(히도 반 헤네흐텐 글·그림, 웅진주니어 펴냄)와 <얼굴 빨개지는 아이>(장 자끄 상뻬 글·그림, 별천지 펴냄)처럼 누구나 한번쯤은 깊이 앓아본 적 있는 '신체 콤플렉스'의 고민을 익살과 재치, 상식을 뒤엎는 기발함으로 가볍고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책을 읽는 동안 무거운 머리를 내려놓고 작가의 손끝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쇼쟁이 난쟁이 아버지의 키 작은 일란성 쌍둥이 아들 '합'과 '체'가 그들의 적들(키가 작다 하여 '난쟁이'니 '둘을 더해야 일인분'이니 하며 놀려대는 사람들)을 상대로 펼치는 열혈 코믹 투쟁사를 함께 즐기며 그냥 신나게 킥킥거리기만 해도 된다. 그만큼 가볍고 재밌다.

그러나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면 한 번 더 읽어도 좋다. 그때는 맨 앞장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작가가 던지고 있는 질문을 뚫어져라 쳐다볼 필요가 있다.

'오래 전, 한 난쟁이 아버지가 하늘로 작은 공을 쏘아 올렸다. 그 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 <합★체>(박지리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1970~80년대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울린 한 난쟁이가 있었다. 달동네 낙원구 행복동에 철거 계고장이 날아들던 때, 남편을 제 몸처럼 생각하는 착한 부인과 '노동자도 인간이다'라고 대들려 했다가 바로 공장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용감한 두 아들과 아빠와 엄마, 두 오빠도 지켜내지 못한 자기네 집 재개발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 알몸으로 적지에 뛰어든 가슴 아픈 딸을 지상에 남겨둔 채 달나라를 가겠다며 쇠공처럼 몸을 날려 굴뚝에서 떨어져 죽은 난쟁이. 그는 키 큰 사람들에게 옆구리를 걷어차이고 온몸을 짓밟힘 당하면서도 수도를 고치고 펌프를 설치하고 칼을 갈고 고층 건물 유리를 닦으며 가족들과 오순도순하게 살아갈 날을 꿈꾸었지만 끝내, 사랑하는 가족들을 슬프디 슬프게 남겨둔 채 그렇게 무참히 떨어져 죽고 만 것이다.

이후 한동안 아무도 난쟁이나 그가 하늘로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우리의 불쌍한 십대 청소년 아이들은 입시를 위해 적어도 한두 번씩은 '난쏘공'을 읽어야 했고 몇 번이고 "1970년대의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근거지가 철거 위기에 놓인 도시 빈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현실 참여성이 짙은 조세희의 소설은 무엇인가?" 내지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난장이'의 의미는?", "'작은 공'의 의미는?"등과 같은 문제들을 풀어대야 했지만, 그게 어떻게 진정한 관심일 수 있겠는가. 그건 문제를 내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뜨거웠던 1970~80년대 학창 시절을 돌이키며 이따금 '난쏘공'을 들먹이는 사람들이라 해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을 터.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젊은 작가가 뜻밖의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지 않는가! 어디 물음뿐인가. 수없이 고쳐 쓰고 또 고쳐 쓸 만큼 문제의 바닥까지 몇 번씩을 왔다갔다 했을 만큼 생각도 깊고 아픔과 한숨도 많았으련만, 정작 그 답은 너무도 경쾌하고 유쾌하고 통쾌하게 합, 체, 합, 체, 합체, 합★체라니! 합체할 때마다 괴력을 발휘하는 변신 로봇처럼 그렇게 통쾌하게 작가 박지리는 우리에게 '합체'라는 답을 내놓고 있다!

근래 10여년 새 눈에 띄게 슬픈 풍경 하나. 유아도 종종걸음, 십대 아이들도 종종걸음, 이십대 청년들도 종종걸음,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육십대, 칠십대도 종종걸음. 하루 종일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헐레벌떡 앞만 보며 뛰고 있는 무수한 사람과 사람들. 그 수많은 사람들은 행여 옆 사람이 손이라도 내밀세라 뒷사람이 등이라도 붙잡을세라 몸을 바짝 움츠린 채 혼자서 부지런히 앞만 보며 헐떡댄다. 이때 우리 모두는 쇼쟁이 난쟁이 아버지의 일란성 쌍둥이 아들 '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난쟁이가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부터였던가, 우리의 십대와 이십대에게 '88만 원 세대'라는 딱지가 붙게 된 때로부터였던가? 우리의 젊은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깨가 움츠러들고 목이 쑥 들어가고 팔놀림도 둔해지더니 모두 난쟁이 형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부모 세대 역시 같이 움츠러드는 것 또한 불가항력일 터. 이제 70~80년대 난장이로 상징되었던 '도시빈민'은 멀쩡한 도심 한가운데에도 우리 집 널찍한 대문 안에도 바글거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각개전투하며 '나만은 결코 난쟁이가 될 리 없어!'라고 믿고 싶어 하며 헐레벌떡 숨만 할딱거린다.

우석훈과 박권일 두 경제학자는 '연대'를 얘기했더랬다.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이 살 길은 연대밖에 없느니라, 연대하여 바리게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라!" 그러나 이미 옛말이 되고 금기가 되어가는 '연대'라는 이 말이 아직도 누군가의 심금을 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젊은 작가는 이 지점을 수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연대가 아닌 합체를, 무거운 쇠공이 아닌 딱 하늘로 쏘아 올리기 좋은 가볍고 탄력적인 공을 선택했으리라. 가네시로 가즈키(<GO>, <레벌루션>의 작가)와 박민규만큼이나 참신하고 슬기로운 작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던가?

처음 읽는 동안에는 너무 가볍고 어수룩해 이런 작품에게 '사계절문학상 대상'은 좀 과분한 것 아닐까? 라는 반문이 살짝 일어나기도 했던 작품. 한 아이의 지적처럼 "첫 장을 펴니 농구에서 지는 장면이 나와 마지막 장을 봤더니 역시 농구에서 이겨 식상했어요"라는 평을 들을 만큼 단조로운 구성과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결말, 뒷맛을 떨떠름하게 만드는 상투적인 에필로그 등, 마음에 꽉꽉 들어찰 만큼 완벽한 작품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한 번 읽고 두 번을 읽으며, 작가가 던진 예사롭지 않은 질문과 그 무거운 질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져 결국 자신만의 가볍고 경쾌한 방식으로 답을 풀어나가는 것에 그만 눈물이 날 만큼 감동을 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 작품은, 여기저기서 튕겨 나오는 적들에 맞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합'과 '체'의 박진감 넘치는 열혈 투쟁과 '키 커지고 싶어 안달이 난' 체에게 '키 커지는 비기'를 가르쳐 준다면서 합과 함께 33일간을 계룡산 동굴 속에 숨어 들어가 "합체, 합체" 를 목청껏 외치며 수련을 쌓으라고 꼬드긴 계도사의 황당무계한 코믹 행동과 그 사이사이로 흘러나오는 예지에 넘치는 번득이는 말들이 묘한 흡인력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꽉 움켜잡고 놓아주질 않아, 읽는 내내 참 재미가 있다.

신체 콤플렉스로 고민을 해본 적이 있거나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 자신이 어쩐지 자꾸만 쪼그라드는 것 같은 사람, 때때로 어디 재미있는 책이 없을까 두리번거려지는 사람, 어쩌다 한번은 게임이나 TV 시청에서 물러나 앉고 싶은 사람, 여러 일들에서 실패의 경험이 있거나 앞으로도 언젠가 실패의 경험을 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한번쯤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그리고 한번 읽는 것으로 양이 차지 않거들랑 다시 또 한 번 천천히 정독하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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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선택인 시대, 싱글들은?

"결혼 하지 않고 그냥 혼자 살 수도 있겠다 싶어."
"나이에 쫓겨 결혼하긴 싫어, 결혼할 만큼 좋은 남자를 아직 만나지 못했어."
"결혼은 하기 싫은데 아이는 있었으면 좋겠어."

예쁘고 똑똑하고, 유능하고 성격까지 좋은 여자 싱글들과 만나면 이런 얘기를 한 번쯤 듣는다. 그녀들의 나이는 대개 서른이 넘었고 가끔 남자친구가 있는 경우도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고, 아이도 낳아야 한다는 통념이 지배하던 때 20대를 보내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과한 필자는, 그녀들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하지 못한다. 그러나 되도록 빨리 결혼해서 애도 빨리 낳는 게 남는 거라고, 싱글 남자들에게는 확신을 가지고 얘기한다.

결혼이란 아직도 여자에게 훨씬 더 불리한 제도이고, 독립적으로 자기 일을 잘하는 그녀들이 결혼과 그에 따른 잡다한 책임 속에서 얼마나 절망적인 순간을 겪어내야 할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변의 젊은 남자들은 점점 더 미숙해져 가는 것처럼 보여 (매사에 서툰 아들만 둔 엄마라는 필자의 입장이 작용했다는 점을 고백한다) 어서 결혼해서 좀 더 완전한 인간(?)에 가까워지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평생 같이 살고 싶었지만…


▲ <결혼해도 괜찮아>(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노진선 옮김, 솟을북 펴냄). ⓒ솟을북
결혼해도 괜찮을까, 고민하는 여자 후배에게 책 한 권을 권하라면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결혼해도 괜찮아>(노진선 옮김, 솟을북 펴냄)를 선택하고 싶다.

이 책은 최근에 개봉한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의 원작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두 번째 자전적 이야기다. 베스트셀러인 전작은 '불같이 사랑'한 남자와 20대에 결혼한 30대 여성이 '지독한 이혼'을 경험하고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내용을 담았다.

전작을 읽은 이라면,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만난 '완벽한 사랑' 펠리페를 기억할 것이다. 미국 여자 엘리자베스와 브라질 남자 펠리페는 사랑에 빠지고, 서로에게 영원한 정절도 맹세한다. 하지만 둘은 절대로 법적 결혼은 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각각 힘든 이혼 과정을 겪으면서 사랑과 결혼이라는 달콤함 뒤에 숨은 대재앙을 경험한 탓이다.

수입을 철저히 분리 관리하는 등 결혼을 경계하며 2년간의 연애 관계를 지속하던 이들의 행복은 미국의 국토안보부가 개입하면서 풍비박산이 난다. 엘리자베스를 만나러 미국을 오가던 펠리페가 어느날 미국 입국을 거부당한 것이다. 결혼을 해서 합법적인 비자를 받지 않으면 미국에 영원히 입국할 수 없게 된 펠리페. 이 책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결혼'이라는 괴물에게 결론을 얻기까지…

<결혼해도 괜찮아>는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국토안보부로부터 남자친구가 결혼을 위한 이민 승인을 받기까지의 10개월 동안의 이야기다. 이 기간 동안 저자는 '결혼해도 괜찮아' 이렇게 자신을 설득하고 또 위로하는 긴 탐구에 들어간다. 미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펠리페와 같이 혹은 따로….

이런 식이다. 그는 베트남에 가서 몽 족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어떤 남편이었는지 묻는다. ("좋은 남편도 나쁜 남편도 아냐, 그냥 남편이야!") 결혼의 역사에 대한 책을 잔뜩 읽으면서 그간 몰랐던 사실도 안다. 예를 들자면, 결혼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어떻게 변해왔나? (초기 1000년 동안 기독교는 가능한 한 결혼을 자제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할 것을 권장했다!).

미국 결혼의 역사에서 황당한 사실도 발견한다. 남북전쟁 전에 남부의 노예들은 결혼 자체가 금지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58년, 개명천지 미국의 15개 주에서는 타 인종 간의 결혼이 불법이었다. 현대 미국에서도 기혼 여성은 미혼 여성보다 평균수명이 짧고 연봉도 7%나 줄어든다.

이미 결혼한 주변 사람도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다. 대공황 시대 농촌에서 7명의 자녀를 낳은 외할머니를 인터뷰하고, ("설마 좋은 남자를 만났다고 해서 바로 결혼하고, 아이 낳고, 글 쓰는 일을 그만 둘 생각은 아니겠지?") 두 명의 아이를 위해 직업을 포기한 어머니도 인터뷰한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너희들이 다 자라 집을 떠나면서부터 시작되었어!")

결혼한 혹은 미혼의 친구들에게 결혼하고 싶은 이유도 묻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서구의 결혼이 다행히 좋은 방향으로 변화한 사실을 확인한다. 결혼은 아주 느리지만 꾸준하게 좀 더 공정하고,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결혼은 정부를 전복하는 행위?

그래도, 결혼해도 괜찮아, 이런 답을 얻기는 부족했는지 저자는 페르디난트 마운트의 <전복을 꾀하는 가족>의 주장을 되새긴다. 이 책은 "모든 결혼은 자동적으로 정부를 전복하려는 행위"라고 말한다. 언뜻 황당하게 들리는 이런 주장을 자세하게 살펴보자. 엘리자베스의 해석이다.

"자유의사로 결혼한 연인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함께 살기를 결심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연인들은 둘만의 결합 안에서 아주 은밀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태생적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권위주의적인 세력의 우선적인 목표는 강요, 교화, 위협, 혹은 선전을 통해 대중을 통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늘 함께 자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가장 은밀하고도 친밀한 행위는 결코 통제하거나 감시할 수 없다. (…) 어둠 속에 누워 있는 연인들 간의 대화야말로 '프라이버시'의 정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프라이버시는 섹스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전복적인 일면, 즉 '친밀함'을 뜻한다."

그는 이런 마운트의 관점을 접하고 나서부터, 결혼이 평온하게 느껴졌고 거대 권력에 대한 개인 혁명으로까지 여겨졌다. 이렇게 10개월에 걸쳐 자신을 설득한 그는 펠리페가 미국에 입국하고 닷새가 되기 전에 기르던 개를 포함해서 약 10명의 하객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의 결혼을 놓고 온전히 10개월을 고민할 수 있을까? 10개월을 연구하고 고민한 이 결혼이 100일 만에 홀린 듯 해치운 결혼보다 훨씬 더 행복할까? 이 책을 읽고서, 다시 한 번 결혼해도 괜찮을까, 하는 선택의 순간을 맞을 수 있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까, 자문했다.

지금이라면 결혼을 할까 말까, 아이를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진지한 고민이 특별한 한 사람과 친밀감을 만들고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결혼은 마음의 자유를 대표한다"는 저자의 견해를 믿고 싶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 책은 결혼을 망설이는 싱글뿐 아니라 이혼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더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결혼 동화를 쓰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부드러운 가을 햇살 아래 <결혼해도 괜찮아>를 펴들고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진지하지만 달콤한 고민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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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의 <설계자들>(문학동네 펴냄)은 건축사나 건축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행여 오해하고 덤빌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작가는 소설의 첫머리를 충분히 관습화되고 약호화된 장면으로 시작한다.

노인이 마당으로 나왔다.
래생(來生)은 망원렌즈의 초점을 다시 맞추고 노리쇠를 뒤로 당겼다. 실탄이 장전되는 소리가 아주 컸다. (7쪽)

견고한 모든 장르는 자본과 상품이라는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 순수한 추리 소설, 순수한 과학 소설, 순수한 역사 소설……순수한 판타지 소설은 물론이고, 시대가 바뀐 사실도 모른 채 동정과 처녀성을 고집하는 순수(?) 문학가들의 '순수(본격) 소설'마저도, 이제는 순수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꽤 또렷이 자신의 장르를 호명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나오거나 형사가 주인공이 아니면서, 총이 나오는 한국 영화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못한다. 대중 오락물이라고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영화도 그럴진대, 소설이 그렇다면 더욱 '개무시'하는 편이다. 이런 사람은, 꽉 막힌 상상력의 소유자가 아닐까?

총이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범죄나 추리 소설이 환영받지 못하다니, 작가들에겐 답답한 노릇이다. 그런데 태도를 약간 고쳐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껏 전쟁을 잠시 멈춘 상태일 뿐인 최장기 휴전 국가이고, 군대를 갔다 온 한국 남자들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1년에 한 두 번씩 총을 만진다. 예상과 달리 총은 우리 사회의 신물(神物)이 아닌 것이다.


▲ <설계자들>(김언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그런데다가 문학은 자신의 사실성을 외부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자족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쥘 베른은 핵 잠수함이 없던 시절에 <해저 2만리>(1869년)를 썼고, 카렐 차페크는 로봇이 없을 때 <로봇>(1920년)을 썼지만 거기에 리얼리티 유무로 토를 단 사란은 없었다. 게다가 로봇과 핵 잠수함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지 않았나? 첨언하자면, 핵 잠수함이나 로봇은 아니지만, 김언수는 등단작인 <캐비닛>(문학동네 펴냄)에서 현실에 있음직하지 않은 무수한 '심토머(symptomer)'를 창조했다.

영화든 소설에서든 총기류의 사용은 현실의 승인이 필요한 게 아니고, 작품 내적 핍진성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설계자들>의 경우, 직업적인 킬러(당연히 총을 애용한다)의 등장은 이렇게 설명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재 시절과 군부 시절이 끝나면서 암살 사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군부 시절의 암살 사업은 소수의 설계자들, 기관과 군대에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암살자들, 그리고 경험 많고 신뢰할 만한 청부업자가 은밀하게 움직이는 비밀공작 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사업이라고 부를 만한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 군인들은 대체로 설계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눈엣가시 같은 사람들을 온 가족이 보는 가운데 지프차에 실어간 뒤, 남산 지하실에 가둬놓고 반병신이 될 때까지 두들겨서 돌려보내도 아무도 찍소리 못했던 무탈하고도 무지한 시절이었다. 그들에게 고급 설계자들이 필요할 리 없었다.

암살 사업의 팽창을 가속화시킨 것은 자신의 정부를 도덕적으로 포장하고 싶은 새로운 권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은 "여러분, 안심하세요. 우리는 군인이 아닙니다"라는 표어를 이마에 붙임으로써 국민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 도덕적 포장을 하고 싶은 이 권력이 맞닥뜨린 한 가지 문제는 예전 시대처럼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얄미운 놈들을 두들겨 패기 위해 남산 지하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민과 언론의 시선으로부터, 기관의 복잡한 명령 체계와 집행 흔적으로부터, 그리고 훗날 자신들에게 닥칠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청부업자와 거래를 시작했다. 이른바 암살의 아웃소싱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80~81쪽)

긴 인용이었던 만큼, 작가가 왜 하필 '킬러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와 <설계자들>에 총이 사용되는 이유는 밝혀졌다. 인용된 대목에 약간의 근거를 보태자면, 정치 이론이나 사회학에서 익히 말해지는 '사회계약설'은 영주(領主)·씨족·개인이 행사해 왔던 사적(私的) 폭력의 권리를 국가에게 헌납한다는 뜻이다. 그 계약에 따라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상시적 불안이 폭력을 독점한 국가 이성(법이라도 좋다)에 의해 종식되고, 사회는 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국가가 시장에 권력을 넘겨주는 이 시대에 이르러, 국가가 배타적으로 독점했던 폭력 또한 시장으로 넘어간다. 구소련의 전직 KGB 요원들과 특수 부대원들이 마피아와 결탁하여 각종 범죄와 암살을 저지르는 러시아나, 일개의 민간 용역 회사가 이라크 전쟁의 많은 부분을 떠맡고 있는 오늘의 미국은 위의 사정을 뒷받침 하고 있다.

<설계자들>의 무대는 남한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도 서울도 아닌, 서울의 위성 도시로 보이는 '푸주'라는 가상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시간적 배경만큼은 가상 공간에 맞춤한 먼 미래가 아닌 현재다. 그렇게 읽어주기를 바라는 작가의 희망은 주물 공장에 취직하고자 이력서를 낸 래생에게 관리계장이 "인문계 고등학교 다녔으면서 대학은 왜 안 갔어? 운동권이나 뭐 그런 거 아냐?"(160쪽)라고 묻는 장면에 노골적이다.

재미삼아 작중에 찔끔찔끔 제공된 정보를 끌어 모아 보면, 작가는 이 책이 출간된 2010년을 작중의 시간적 배경으로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근거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재 시절과 군부 시절이 끝나면서 암살 사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저 위의 인용이 실마리인데, 박정희 이후 전두환에 이르는 긴 군부 독재가 마침표를 찍은 때는 1987년이다. 거기에 "모자에 두 개의 번쩍이는 별을 단 장군은 빙긋 웃으면서 래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20년도 넘은 일이다."(48쪽)의 "20년도 더 전"을 제대로 가늠하기 힘들긴 하지만, 그 시기를 최대한 미루든 당기든 오차 범위는 수 년 밖에 되지 않는 2010년 어름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작중 설정처럼 살인 청부업이 활개를 치고 있진 않다. 하지만 2008년 용산 사태 때 일개 민간 철거 용역 회사가 경찰과 나란히 진압 작전에 한몫했던 사례가 보여주듯이, '공권력의 민영화'랄지 '폭력의 시장 자유화'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중이다. 작가가 꽈배기처럼 꼬아 놓은 가상 공간과 현실 시간 사이의 불일치가 작품과 현실 간의 유비를 방해하지만 <설계자들>에 번성하는 살인 청부업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문제는 작가의 과욕이다. "개들의 도서관이 지난 90년 동안 벌여놓은 참담한 역사"라는 121쪽과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인재들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제국주의 관료들 틈바구니에서 절름발이에다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않은 너구리 영감이 어떻게 주임이 되고 또 도서관장이 되었는지 잘 모른다"는 135쪽을 보면, 래생이 킬러로 소속되어 있는 '개들의 도서관'이 만들어 진 때는 1920년 부근이다(2010-90=1920).

모르긴 해도 암살의 역사는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었을 것이고, 일제 강점기라고 해서 암살을 도맡는 청부업자가 없었을 리 없다. 실제로 명성황후 살해에 동원된 것은, 일본 군인들도 있었지만 작중의 '개들의 도서관'과 같은 일본 우익 낭인 단체가 합세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수상쩍은 비밀 결사에 90년 전통을 부여함으로써 역사에서 비밀 결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기형적으로 극대화한 반면, 그 외의 역사적 동력을 죄다 축소시키고 단순화 시키게 된다. 저 대목엔 세계를 음모론적으로 해석해보고자 하는 작가 나름의 시도도 투여되어 있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90년 전통'이라는 실없는 과장으로, 작가는 군사 독재 이후 '시장에 의해 사회계약이 허물어져가고 있다'는 예민한 주제를 스스로 무화시켜버렸다. 작가의 의도가 살려면 '개들의 도서관'은 최근에 만들어진 거라야 더 효과적이다.

킬러들이 나오는 범죄 소설은 세 싸움을 피해갈 수 없고, 그 업계의 큰 손은 신흥 세력에 잠식된다. 유구한 전통을 가졌지만 정도를 지키고자 하는 '개들의 도서관'은 무자비한 기업형 조직인 한자의 도전에 무기력하다. 또 이런 장르에서는 15~20년씩 근속했던 추나 래생같은 킬러들은 상부의 견제를 받거나 스스로 회의를 느끼고 조직을 들이받게 된다. 이런 사항들은 <설계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이 장르의 공식이다.

약간 다른 게 있다면, 래생이 속한 살인 청부 회사가 도서관으로 위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도서관은 물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그랬던 것처럼 음모가 벌어지는 장소로 곧잘 애용되기에 딱히 독창적이진 않지만, <설계자들>의 작가인 김언수에겐 어쩔 수 없이 도서관을 무대로 삼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점은 후술키로 하고, 우선 용법이 같지 않다는 걸 지적하자.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책이나 도서관은 신의 위치마저 위협하는 드높은 권력(가치)으로 나타나지만, 하릴없이 백과사전에 코를 박고 사는 래생의 고용인이자 '개들의 도서관' 관장인 너구리 영감은 기업형 살인 청부업자인 한자에게 속수무책이다. 과부하(過負荷)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장미의 이름>과의 이런 차이는 문자 문화의 몰락을 상징한다(그런데 백과사전을 읽는 게 취미인 너구리 영감에게서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도서관의 독학자'를 연상한 독자는 혹 없었는지?)

또한 범죄물 속의 주인공들은 권태의 해결책이나 회심의 계기를 요부(femme fatale)로부터 얻는다. 추의 파멸도 그랬고, 래생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차이점이 있다. 남자를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요부는 거의가 신비를 간직한 명품녀들이다. 그런데 래생을 유혹하는 미토는 수다꾼에다가, 시장통에서 순대와 소주를 즐기는 굉장히 서민적(?)인 요부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이 서민적 요부는 서양의 범죄물에 기원이 있는 요부가 아니라, 1980년대를 지나온 맹렬 운동권 여성을 모사한 것이다. 실제로 미토가 나오면서 이 소설은 '후일담 소설'을 닮는다. (그런데 또, 미토에게서 배두나가 연기했던 <복수는 나의 것>의 여주인공을 떠올린 사람은 나뿐일까?)

<설계자들>은 작가의 야망을 세부가 따르지 못한다. 작가가 제시한 애초의 문제의식은 더 이상 드러내 놓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비밀 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정치 권력이 공권력 대신 살인 청부업자의 손을 더럽힌다는 것인데, 그런 용도에 맞는 청탁 살인은 첫 장면에 나온 권 노인의 경우에만 해당한다. 나머지 두 경우는 국회의원 K의 청탁으로 그와 함께 잤던 콜걸을 죽이는 거였고, 또 다른 경우도 국회의원 B가 아들의 성기를 물어뜯은 여자를 죽여 달라는 사주였다. 두 사례 모두 극히 사적인 주간지적 사건이었지, 권력 암투나 공권력이 연루된 게 아니다.

래생보다 먼저 환멸을 느끼고 조직을 들이받기로 결심한 추에게 래생은 "설계자들도 우리 같은 하수인들일 뿐이야. 의뢰가 들어오면 설계를 하지. 그 위에는 설계자를 설계하는 놈이 있겠지. 그 위에는 그놈을 설계하는 또 다른 설계자가 있을 거고. 그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아무 것도 없어. 맨 위에 있는 것은 그냥 텅 빈 의자뿐이야"(93쪽)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선험적으로 공표되기보다, 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의 결격 사유가 양파 껍질이 까지듯 한 꺼풀씩 벗겨지는 것처럼, 서사 속에 드러나야 했다. 소설은 아직 300여 쪽도 더 넘었는데, 래생은 세계의 비밀을 일찌감치 발설해 놓고, 더 이상 진도를 내지 않는다.

그건 권력의 비밀을 선험적으로 알아채버린 작가 김언수가 "자넨 칼을 들고 올라가서 맨 꼭대기에 있는 놈을 찌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 그곳에 있는 것은 텅 빈 의자뿐이니까"(94쪽)라며, 래생을 세뇌해 놓은 결과다. 거기에 비하면 오히려 작가의 또 다른 목소리이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 같은 소리하고 있네"(299쪽)라고 래생을 타박하는, 씩씩한 운동권 여장부인 미토가 더 소설의 주인공답다. "괴물을 잡으러 갔다가 자신도 괴물이 되어버리는 슬픈 이야기"(323쪽)라는 한계로부터 자력으로 벗어날 공력이 없는, 구시대적이고 상투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그녀가 얼핏 본 자유와 거부야말로 진지한 독자들이 진지한 소설로부터 기대하는 것이다.

"래생은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아니라면, 쓰레기통에서 태어났거나"(35쪽)라는 설명에서 보듯이, 이 소설은 부모 없는 소설이다. 부모 없는 주인공 또는 부모 없는 소설은, 가상의 부모를 만들고 부모 부재를 메울 무의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도서관은 그래서 필요했다. 도서관은 부모 없이 자라난 래생에게 부모를 대신하는 콤플렉스이자 무의식이고 현실이다. 도서관이 래생의 부모라는 것은, 불성실한 양부였던 너구리 영감이 래생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글을 깨우친 일로 증명된다. 아홉 살 생일을 맞은 래생이 혼자서 <호머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한 너구리 영감은 성난 얼굴로 다그쳤다. "누가 너에게 글을 가르쳤지?"(36쪽)

마치 래생에게 글을 가르쳐준 사람을 잡아서 어떻게 하기라도 할 것처럼 너구리 영감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무서웠다. 래생은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도 나에게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 래생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정말로 그림책을 보며 혼자서 글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37쪽)

젖을 먹는 게 어린아이의 본능이듯, 래생에게 글은 부재한 어머니의 젖이었고, 도서관은 그의 아버지였다. 래생이 읽는 산더미 같은 책은 부모가 선사하지 못한 그의 무의식이 되었고, 더불어 책과 문자는 그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당신은 <매독의 역사>·<푸른 늑대>·<만물의 유래사>·<불임의 정복>·<결혼, 여름>·<페스트>·<자살>·<나무 위의 남자>·<한낮의 우울>·<악령>·<의아한 북극곰>……을 쉬지 않고 읽어 댈 뿐더러, 자신이 키우는 두 마리의 고양이에게 '독서대'와 '스탠드'라는 이름을 붙인 킬러가 상상되는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도서명은 창작되었거나,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터넷에서 검색하지 마시오!)

책과 문자가 래생의 부모이긴 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부모였을 뿐이므로, 래생은 제대로 된 거세 위기를 거쳐, 아동의 세계로부터 성인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너구리 영감이 고아인 래생에게 문자를 배워주지 않으려 했던 이유도 그가 부모 대신 책에 물성애를 느끼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으로, 젖을 떼지 못한 아이처럼 서른두 살이 되기까지 문자를 게걸스럽게 탐닉해 온 래생이 문약한 회의주의자가 된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실전시의 래생의 능력은 이발사와의 진검(眞實) 승부에서 보았듯이 변변치 못하며(고수가 못되며), 권력과 부딪쳐 피 흘려 본 일이 없으면서도 함부로 '맨 위에 있는 것은 텅 빈 의자'라고 체념하고 단언하는 것이다.

1인 혁명가가 된 래생이 너구리 영감 아래서 형제처럼 같이 자랐던 한자와 한바탕 격전을 벌이고 파멸하는 설정 역시,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긴 무수한 거리의 의형제들이 반목과 대결 끝에 공멸로 이어지는 범죄물의 공식을 보여준다. 범죄물의 서두가 독자를 흡입하기 위한 긴장된 '액션'으로 시작한다면, 안티 히어로들의 경연장인 이 장르의 대미는 항상 이완된 '가오'로 막을 내린다.

래생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오랜 전매특허처럼 허공을 향해 피식 웃었다. (417 쪽)

서평은 해당 도서를 소개하고 분석하는 일에 그치는 게 아니라, 누가 "<설계자들> 어때? 읽을 만해?"라고 물을 때, 거기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의 운을 떼며 나는 '총이 나오는 장르는 질색'이라고 솔직히 밝혔다. 먼저 그걸 감안하고 들어 주시기 바란다. 이 소설은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오락물이다. 주제는 1964년 최희준이 불렀던 <회전의자>의 가사에 머물렀고, 그나마 어디서 본 듯한 인물과 일화가 짜깁기 되어 재미도 없다. 그런 대목 가운데 특히 M 우시장에 있는 희수 영감의 반짝 등장은, 어쩌면 앞으로 이 작가의 고질이 될지도 모르겠다.

래생은 자신에게 킬러 기술을 배워준 훈련관과 친구 정안 그리고 추를 죽인 이발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먼저 M 우시장에 있는 희수 영감을 찾아 간다. 명목은 이발사의 거처를 알기 위해서인데, 굳이 그 때문에 새로운 인물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정인이 죽으면서 남겨 놓은 메모 정도로도 가능했다고 본다. 소설이 집필 단계부터 자원을 절약해야 하는 희곡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물을 남발할 것도 아니다. 게다가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이발사의 거처를 알고 있는 이 인물이 일회용으로 기용되고 말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기이한 영감"으로 소개된 희수 영감은 마약상, 갱들, 장기 밀매업자, 사기꾼, 청부 브로커, 장물애비, 포주 등 "푸주에 일하는 모든 업자들은 희수 영감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돈" 바쳐야 할 뿐 아니라 "한자와 너구리 영감" 조차도 세금(?)을 바쳐야 하는 "푸주의 왕"(313쪽)이다. 소설의 전체 구도를 뒤흔들 정도가 되고도 남는 희수 영감이 이발사의 거처를 수소문하기 위해 래생이 그를 찾아가기 전까지는 한 번도 언급 되지 않은데다가, 이후로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이런 부실한 구성은 어떻게 설명된다는 말인가?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 나오는 삼선교 도축장의 오무성(이기영)에게 바치는 오마주(hommage)였던가?

김언수의 등단작이자 전작(前作)이었던 장편소설 <캐비닛>은 더도 덜도 아닌 이상한 사람들의 일화 모음집이다. 이를테면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와 같은 소설집이 되었어야 할 <캐비닛>을 전체적인 플롯이 유지되는 무리한 장편소설로 만들었다면, 이번의 장편소설은 그와 반대로 작가가 <캐비닛>의 방법론을 잊지 못하고 전체적인 플롯에 기여하지 못하고 튀는 인물들을 버릇처럼 삽입하는 폐단을 보인다. 푸주의 왕 희수 영감이 대표적인 예였고, 입안에 넣고 사탕처럼 굴리며 돌의 맛을 구별하는 게 취미여서 지질학과를 지망했다는 래생의 친구 정안의 일화도 이번 소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설계자들>은 또 한 권의 '심토머 백과'가 아니어야 한다.

이 소설이 품격 있다고 믿거나 이 소설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문학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소설이 품격 있다거나, 나를 사로잡았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킬러도 설계자도 푸주도 작가의 입담이나 유머도, 모두 그랬다. 이 작품에서 내가 발견한 가치가 있다면 그런 드러난 주제나 스타일보다는, 이 소설의 제1장에 붙은 '환대에 대하여'란 소제목과 거기 따른 은유일 것이다.

소설의 서두는 이 글의 앞머리에 나오는 최초의 인용대로다. 그런데 래생은 노인을 쏘지 못하고 회의하다가, 매복 중에 잠이 들었다. 그러다 잠이 깼을 때, 암살자가 온 것을 간파한 노인에게 발각된다. 그날 저녁, 노인은 래생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식사와 술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다음날 아침 래생은 노인에게 아침을 대접받고, 집을 나설 때는 삶은 감자까지 선물로 받는다. 그는 뜻하지 않게 노인의 환대를 받았지만, 숲으로 돌아간 래생은 그날 낮에 노인을 저격한다.

이 소설에서 환대는 숨어있는 중요한 동기다. 래생은 미토의 여동생인 미사에게 턱없는 환대를 받으며, 푸주의 왕 희수 영감도 술과 안주로 래생을 환대한다. 그 뿐 아니다. 놀랍게도 래생은 대결을 하기 위해 처음 찾아간 이발사에게조차 환대 받았다! 동서양의 모든 신화나 민담은 환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손님을 제대로 환대하지 않거나 환대한 주인의 선의를 악으로 갚은 자는 큰 벌을 받았고, <구약성서>에서는 거의 율법 외의 율법에 해당했다. 그런데 래생은 자신을 따뜻하게 환대해준 노인과 이발사를 죽인다.

'환대를 악으로 갚는 현상'이 비록 <설계자들>의 주제는 아니지만, 나는 이것이 작가가 피상적으로 제시하고 더는 세심하게 천착하지 못했던 '시장에 의해 사회계약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현상보다, 가슴 아프다. 운 좋게도 '환대를 악으로 갚았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신화 시대에 허다하고 융숭했던 환대가 이 시대에도 존재하는 거냐고 따진다면, 너나없이 말문이 막히고 부끄럽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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