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에는 담론이 없다. 교육 때문에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근거와 논리를 정식화한 담론이 없다니. 담론이 없으니 토론이 없고, 토론이 없으니 푸념만 있다. 그러므로 실천도 반복 속에서 지쳐간다.

거대 담론도 필요하고 미시 담론도 필요하다. 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진보적 교육 전문지 월간 <우리교육>은 언필칭 진보적 노동조합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지도부의 묵인 속에 진행된 구조 조정을 견디지 못한 기자들이 전원 퇴직함으로써 주저앉고 말았다. 만날 이명박을 욕하면서도 제 자식들은 사교육으로 뺑뺑이 돌리는 '우리 안의 이명박'을 준열하게 꾸짖는 칼럼은 인기리에 읽히는 것 같은데, 학원비를 대기 위해 살림하던 어머니까지 마트 계산대로 내모는 사회·경제적 심리 구조를 해부하는 담론은 없다.

작년 여름 방학 무렵, 나는 딴에는 뭘 한번 정리해보겠다고 일제고사 관련한 자료를 긁어모아 놓고 공부를 했다. 2008년 한겨울, 일제고사 반대 체험 학습을 안내한 선생님들에게 자행된 이른바 '교육 대학살'에 충격을 받았고, 실제로 일제고사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순식간에 20년 전 상황으로 되돌려 놓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제고사에 관한 별다른 연구 자료가 없었다. 우리나라에 성취도 평가가 도입된 것도 10년이 넘었고, 이미 미국과 영국에서 일제고사가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의 중핵으로 공교육을 뒤흔들었던 국제적인 흐름이 있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의 사례를 연구한 이병곤·성열관 두 학자의 노작을 제외하고는 참고할 만한 연구 자료가 거의 전무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핀란드 교육 바람이 불어올 때도 그랬다. 핀란드 교육이 이야기된 것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는데, 알려진 자료라고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와 기행문들이 전부였다. 국내에 소개된 몇몇 연구자의 글도 <핀란드 교실 혁명>(박재원·윤지은 옮김, 비아북 펴냄)의 저자인 일본인 교육학자 후쿠다 세이지와 핀란드 교육장관으로 22년간 재직한 에르키 아호의 연구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고 있었다. 감탄과 환호가 범벅이 된 기행문은 넘쳐났지만, 핀란드와 한국 교육의 거리를 냉정하게 재는 글은 몇 편 없었다.


▲ <자율주의와 진보 교육>(조엘 스프링 지음, 심성보 편역, 살림터 펴냄). ⓒ살림터
이제는 다시 '아나키즘' 바람이 불고 있는 모양이다. 한때는 '코뮌주의'가 이야기 되더니 이제는 아나키즘으로 넘어 온 모양이다. <자율주의와 진보 교육>(조엘 스프링 지음, 심성보 편역, 살림터 펴냄)에 대한 신간 소개를 보았을 때 그래도 나는 몹시 반가웠다. 이제 교육에서도 아나키즘이 이야기되는구나 싶어서였다. 사실 말이지만, 한국 교육에서는 아나키즘이라는 거울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아나키즘은, 아이들을 순종과 체념이 체질화된 인간으로 노예화시키는 근대 교육이 근원적인 데서부터 뒤틀린 것임을 밝혀주는 사상이라고 나는 믿어왔다. 내가 현장에서 체득한 믿음 또한 교육이란 100가지 문제에 대하여 100가지 답을 가진, 근원적으로 무정부적인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육 현장에 강요되는 몇 개의 정답은 국가와 기업, 그리고 교사와 부모가 이미 정해놓고 있을 뿐, 아이들의 자리는 지금 그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실제로, 이 책의 2부만큼은 이러한 기대에 값할 만하다. 특히 1970년대에 '탈학교 사회'를 주창하여 이미 우리나라의 대안 교육 운동에도 큰 영감을 준 이반 일리치 외에도 슈티르너, 페레, 라이히, 닐의 교육 사상은 한국 교육에서 심도 깊게 논의되어야 할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마르크스·엥겔스 시대, 청년 헤겔학파의 일원이었던 교사 슈티르너는 어른들이 심어주려고 하는 그 어떤 것이든 '머릿속의 톱니바퀴'가 되어 아동을 노예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 복지'란 의미 없는 관념에 불과하다고 믿었으며, 개인의 연방으로 성립된 국가를 꿈꾸었다.

페레는 20세기 초, 스페인에서 부유층 남자 아이들만 다니던 학교들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모던 스쿨'의 설립자이자 열정적인 사회운동가였다. 모던 스쿨은 노동계급의 자녀가 다니는 남녀공학이었고, 성공에 대한 보상도 실패에 대한 처벌도 시험도 일체 없는 학교였다. 가톨릭교회가 강요하는 일체의 교조가 거세된 교재를 찾다보니 도서관에 비치할 단 한 권의 책도 찾지 못해 빈 도서관으로 개교하게 했던 철저한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결국 바르셀로나 폭동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쓰고 1909년 처형당했다.

유럽의 파시즘 시대를 예견한 라이히와 '서머힐'의 창시자 닐은 한국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사상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가정 교육이 전체주의의 바탕이 된다고 보았다. 부모로부터 주입된 통념, 금기, 권위들로 인해 에로스가 억압당한 아이들은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되고, 징벌과 배제에 대한 공포로써 스스로를 구속하게 된다. 이는 결국 전체주의를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가정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그래서 닐은 그 유명한 서머힐 실험 학교를 설립했고, 라이히는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성 생활의 기쁨을 향유하도록 국가가 '비상 주택'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 아나키즘 교육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은, 교육이란 다른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바로 아이들 자신의 삶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믿음이다.

이 책의 혼란과 허술함

그러나 이 책은 많은 부분 혼란스럽고 허술하다. 서평에서 이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이 혼란과 허술함이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주의집중과 사색을 끊임없이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우리 교육 담론의 안일한 흐름과도 관련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우선, 옮긴이 서문을 보다가 의아했다. 옮긴이는 이 책이 이미 25년 전에 번역되어 출판된 것을 다시 엮어 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었다. 묵은 책이라고 해서 현재성이 없는 게 아니고, 아나키즘은 지금 더더욱 빛을 발할 문제의식이기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크게 괘념치 않았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서평을 쓰기 위해 밑줄 긋고 메모한 부분을 옮겨 적어도 이 책에서 소개한 수많은 사상가들의 '차이'와 그들이 제기한 '논점'들이 분명히 잡히지 않았다. 이 책은 조엘 스프링의 저작들에서 아나키즘 교육 사상과 관련된 부분을 뽑아내어 옮긴 1부, 2부와 옮긴이 심성보가 쓴 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여덟 명의 아나키즘 교육 사상가들의 교육론을 담은 언술들이 많게는 서너 번씩 반복된다. 옮긴이 심성보의 보론에서는 한국 교육과 아나키즘 교육론을 연결 짓는 내용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1부, 2부를 요약해 놓고 거기에 한국 교육에 대한 자신의 짧은 소감을 덧붙인 수준이다. 이럴 거라면 왜 100쪽이 넘는 보론을 굳이 수록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 책은 사상가들의 교육론에 대한 서술은 대단히 자세한데, 이들이 실제 적용된 사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드물게, 파울로 프레이리가 1989년 브라질 상파울루의 교육감이 되어 자신의 교육론을 직접 적용할 기회를 얻어 여러 가지 일들을 의욕적으로 벌였다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교육감 직을 사임하면서 그 작업이 중단되고 말았다며 그쳐버리고는 그 경과와 의의에 대한 별다른 서술이 없다(284쪽).

저자 조엘 스프링은 자신의 결론에서 오늘날 아나키즘 교육론의 입장에서 내걸 수 있는 주요한 슬로건으로 '의무 교육의 폐지'를 들었다. 그런데, 편역자인 심성보는 자신이 쓴 보론의 결론에서 한국 교육에서는 '의무 교육의 내실화와, 고등학교까지의 무상 의무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저자의 결론을 뒤집고는 그 이유와 맥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아나키즘 교육론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애국주의에 대한 분명한 거절인데, 심성보는 보론의 결론에서 '민주적 애국심, 정의로운 애국심이 요청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가장 '고생한' 사상가는 아마도 이반 일리치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일리히'로 시종일관 불린다. 그는 독일인이 아니었고, 스스로를 소개할 때 '이반 일리치'로 발음했으며, 또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랐다는 분명한 언급이 있다(<이반 일리치와의 대화>(데이비드 케일리, 권루시안 옮김, 물레 펴냄, 7쪽). 그런데, 이 책을 포함하여 한국에서 출판된 이반 일리치의 저작들은 대부분 그를 '이반 일리히'라고 집요하게 부르고 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리치가 멕시코 쿠에르나바카에 설립한 연구 및 자료 기관인 CIDOC(Centro Intercultural de Documentación)는 이 책에서 몇 차례나 '국제문화회관'이 되었다가 '국제문화조사센터'로 오락가락한다. 그는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 부총장을 역임한 것으로 나오다가도 다른 대목에서는 또 그 대학의 고문이 되어 있다.

페레가 설립한 '모던 스쿨'은 이 책에서 '모던 스쿨'로 표기되다가도 또 수없이 '근대 학교'로 표기되어 읽는 이를 헷갈리게 한다. 241쪽 각주에는 미국의 아나키스트 에마 골드만이 1923년에 <러시아에 대한 나의 환멸>이라는 책을 써서 소련의 공교육 체제를 비판했다고 나오는데, 248쪽에서는 그 책이 느닷없이 1909년에 죽은 페레의 저작으로 적혀 있다.

이렇게 어지러운 책을 다 읽고 나면, 새삼 한국 교육 담론이 위치한 안타까운 자리가 보인다. 자식 키우는 부모들의 술자리에서는 열이면 열, 다들 교육 걱정이 빠지지를 않는데, 이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하는지를 모색하는 담론은 이렇게 허약하고, 읽고 밑줄 치며 공부할 만한 책조차 드물다. 답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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