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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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다시 랜드 앤 프리덤을 비디오방에서 빌려 보았다. 전투가 끝난 뒤 죽은 동지를 묻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에서 눈밑가가 축축해졌다. 여전한 나의 이 감흥이 일말의 신파가 아니기를.

문득 몇 년 전 이 영화가 개봉하던 때가 생각났다. 스페인 내전에 관해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켄 로치는 도둑같이 다가와선 나를 울려버렸다. 군대가기 며칠 전이었다. 그리고 이 소식들을 들은 한 지인이 내게 조지 오웰을 권했다. '조지 오웰? 그 동물 농장인가 그거 쓴 반공작가? 무슨 시덥잖은 소리야.' 조금만 더 세심했더라면. 그 때에도 까탈루냐 찬가는 번역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그가 어떻게 읽혀져 왔는지 오웰이 알았다면, 아마 저승에서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이건 우리나라만의 문제라고만 볼 수도 없다. 오웰의 대표작들이 냉전시기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뒤늦게 나마 까탈루냐 찬가를 통해 오웰을 재발견하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가 견지했던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더라도, 생전에 그는 어느 체제도 편들지 않았으나 동시에 어떤 예술도 정치적이라 확신하며 침묵을 미덕으로 삼지도 않았다.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면 흔히 빠지게 되는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적극적 내지 암묵적 동의라는 그 당시 조류에 휩쓸리지 않았던 것은 그와 비슷한 동년배 작가군 몇몇들만 보더라도 신기한 일이다.('1984'에서의 섬뜩한 통찰력 등을 미리 경험했더라도 말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작자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이 스페인 까딸루냐 지방에서의 참전경험에 기반한다. 그는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체험하였는가. 그리고 이 때문에 훌륭한 르뽀문학을 망쳐버렸다는 시중의 평을 듣고도 왜 트로츠키파라는 저주받은 이단종파의 멍에를 진 무리를 옹호하는 기나긴 장을 덧붙였는가. 이 책을 읽어가면 맨 얼굴의 오웰이 당신에게 때로는 나른하게 때로는 짖궃게 때로는 침을 튀기며 말할 것이다. 르뽀문학의 모든 요소를 갖춘 걸작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양 체제와는 다른 시각으로 인해 상반된 방향에서 왜곡된 이해를 강요받았던 오웰,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탄생 100주년이 지난 오늘에서도 여전히 난제이다. 오웰이 자기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읽어달라는 말 쯤은 이 찬가를 읽다보면 곳곳의 행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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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항구
올리비에 롤랭 지음, 우종길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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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연히 내 손에 건네져온 책이다. 프랑스 소설이라곤 많이 읽히는 베르베르조차 낯설어하는 나로선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통속적 시대를 등지고 유배를 자청한 68세대 두 남자의 이야기라는 설명에 내 방 어디엔가 던져져 있던 이 책을 꺼내 먼지를 털고 펼쳐보았다.

나이가 들수록 좀더 경쾌한 읽을거리만을 찾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일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러하다. 게다가 후일담문학의 위선적인 지리함에는 이미 이골이 난 지경이어서 한 때 우리 문학계를 휩쓸었던 '우린 젊을 때 이렇게 살았어, 그 땐 정말 순수하게 모든 걸 다 바쳤다구, 지금시대는 너무 경박해, 세상도 사람도,' 라는 식의 레파토리를 가진 책들의 하나같이 갑빠를 내세운 중얼거림은 몇 년동안 소설이라는 장르를 멀리 할 정도의 후유증을 내게 안겨주었다.

배경이 프랑스이고 역사적 사건이 68혁명이며 작가가 프랑스인이라고 해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세련되게 표현되고 있지만, 작가는 소설의 나와 구분되지 않으며, 특유의 냉소적 태도로 짐짓 객관적 입지를 독자에게 각인시키려고 하나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우리를 내려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배반'에 대한 적나라한 통찰로 빛이 난다. 이별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서로의 배반이라는 래디컬한 작가의 서술을 읽다가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숨이 막혔다. 결국은 그러한 것인가. 그렇더라도 그녀의 경박함을 탓하는 것은 그 세대의 벽인 것 같다.

부분이 전체를 책임져주는 책. 그러나 중얼거리는 자는 결국 순응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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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1 - 개정판, 종합편,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예리한 질문과 놀라운 답변들 휴머니스트 교양을 읽는다 3
최병권.이정옥 엮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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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교양을 읽는다>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을 선뜻 구입한 것은 말로만 듣던 바깔로레아 논술고사가 대체 무엇인가 라는 순수한 호기심과 더불어 대입논술을 가르치기 위한 기초자료수집이라는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인간 / 인문학 / 예술 / 과학 / 정치와 권리 / 윤리 등 6개 영역의 철학적 논제들과 그에 대한 모범답안들로 이루어진 본문의 내용은 문답식의 딱딱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대학입학 논술고사라는 용도에 비추어 내용이 주는 충격은 기대이상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읽기에 속도감이 붙어 어렵지 않게 책을 덮었다. 더구나 나와 같이 실용적인 이유에서 책을 구입하였다면 몇 가지 써먹을 만한 중요한 소스를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최근 7차 교육과정에 들어가면서 개선된 부분이 여럿 존재하지만 여전히 공교육은 비효율의 극치이며 비대화된 사교육 역시 학생들에겐 또 하나의 억압기제일 뿐이다. 이것이 예전의 비책들이 그러했듯이 향후 몇 년 동안 개선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만약 우리나라 대학의 논술고사가 갑자기 바깔로레아 수준이 된다면 결국 또 하나의 고급 사교육 시장을 만들어 계급 재생산 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프랑스를 부러워해야 함은 바깔로레아와 같은 시험이 아니라 그러한 시험을 가능하게 한 프랑스의 탄탄한 공교육 구조, 그리고 그 저변의 공평에 근거한 교육이념과 성숙한 사회의식 등에 맞추어져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책의 편집의도를 짐작하게 할 머리말의 몇 부분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황스럽다. '무국경의 세계화', '지식경쟁의 시대', '이 시대 승자클럽', '새 시대의 하인이 아니라 주인이 될 높은 자질의 국민' 운운하는 신자유주의와 국가주의의 절묘한 고리타분함의 배합이란. 바깔로레아에 나타난 이른바 당신들이 말하는 교양이라는 것이 과연 그러한 것에 써먹는 것인가? 제발 품위있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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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3-3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도님!
마지막 구절 "제발 품위있게 살자"를 읽고는 추천 안 누를 수가 없군요, 흐흐.
그런데 언제 옷 입으실 건데요? 흐흐,

도도 2004-05-18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쿄쿄~ 몸만 벗은거지.. 맘까지 벗은건 아니요..(어디서 많이 들어본..??)
 
김수영 전집 2 - 산문 김수영 전집 2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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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에 대한 나의 기억은 세가지 정도의 강렬함으로 남아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를 아껴주던 교생선생님이 건네주었던 책('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 라는 제목이었을 것이다.)에서 김수영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이것이 시인의 얼굴이다!라고 감탄했던 것 (덩달아 나도 감탄했다.). 또한 고등학교 문학회라면 거치게 될 순수-참여 논쟁에 단골로 등장하던 60년대 김수영과 이어령 논쟁을 그대로 경험했던 것. (당시 김수영의 폭포가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풀이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었음에도 김수영을 옹호한 나는 지도교사에게 위험한 발상이라는 훈계를 들어야 했으며, 또한 이어령을 옹호하던 그녀들이 후에 잠시나마 나보다 더 급진적인 길을 걸었다는 괴상한 경험을 해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최근 김규항의 글을 통해 김수영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규항이 본 김수영은 대개의 우리가 소심하고 겁 많고 이기적이지만 그런 소심함과 겁 많음과 이기심을 숨기거나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세계와 맞섬으로써 '자기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 자기'와의 숙명적인 거리를 최대한 좁혀 보인 사람이다. 때문에 자기가 지향하는 바가 저만치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실제 자기가 지향하는 바와 일치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의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도덕적 위압감 같은 것은 없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머리맡에 두고 읽더라도 거리낌이 없을 정도이다. (단지 개정판은 양장본으로 나왔기 때문에 현실적인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의 산문집에는 익히 잘 알려진 '시여 침을 뱉어라','반시론'등의 문예이론, 월간 시평과 서평, 시작 후기 등에서부터 라디오 방송극 등에 대한 미디어 비평과 사회 비평, '토끼', '양계 변명'등 일상 다반사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얼핏 산문 모음집으로 보이는 데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그 기저에 흐르는 근본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솔직함과 위선에 대한 강한 경멸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서글픈 것은 그가 글쓰기의 대상으로 삼는 질료들은 이미 옛 것이 되었으나 그의 몇몇 문제제기는 오히려 지금에 이르러서도 두려울 정도로 신선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김수영의 글이 아직 고전이 되기에는 이른 이유인가 보다. 평생 자유를 시적 주제로 삼았던 수영. 최근 자유주의가 범람하는 가운데에서도 자유주의자의 사표를 발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수영의 절규하는 자유를 그들에게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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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세트 - 전10권
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왕훙시 그림 / 창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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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황석영과 삼국지. 이 둘의 배합은 둘 중의 하나에게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강렬한 호기심을 가져봄직하다. 나는 삼국지(정확히는 삼국지통속연의)의 매니아는 아니다. 오히려 심심풀이로 읽어봄직하다고 여기는 편이다. 중학교 때 어린이 삼국지 (출판사는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세 권을 읽었을 때의 흥미진진함은 대학에 올라와 이문열 삼국지를 읽고 나서 잃어버렸다. 사실 과문한 탓인지 고전을 대하다 보면 그 작품의 시대적 한계만이 눈에 들어와 몇 장 넘기다 접는 형편이니 굳이 삼국지만 그렇다고 할 것은 아니다.

반면에 나는 황석영의 매니아이다. 이 시대의 몇 안되는 이야기꾼으로서 황석영의 자리는 빛난다. 때문에 황석영이 삼국지를 번역한다고 하였을 때 특유의 민중적 썰풀기(?)가 삼국지에는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라는 기대와 동시에 그 대상이 한족정통론과 영웅사관의 혐의를 벗어내기 힘든 삼국지라는 점. 게다가 창작물이 아니라 번역물이라는 한계 등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유명 작가가 삼국지를 다시 낸다는 것은 맛이 가고 있다는 증거라는 지인의 말은 나를 가슴 아프게 하였다.)

3일동안 9권까지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황석영'의 '삼국지'에서 강조점은 뒤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황석영을 기대하면서 이 전집을 읽는다면 낭패를 볼 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문열 삼국지처럼 이야기를 서술하다가 잠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형식 같은 것은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가 서두에서 강조하였다시피 원본에 충실한 번역을 우선시하여 스스로의 역량을 펼 공간을 줄여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석영이 재해석한' 삼국지를 기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이 시리즈는 기대이하일 것이다.

그러나 '원전에 충실하게 제대로 번역한' 삼국지를 기대하는 대개의 사람들의 기대치는 충분히 만족시킬 만 하다. 조조를 높이 부각시키는 일본의 경향( 내 경우에는 만화 '창천항로'정도를 겪어보았지만 일본의 주류 경향이라고 들었다.)과 그에 은근히 동조하는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등 최근 일련의 흐름은 그 재미여부를 떠나 현실세계의 힘을 추구하는 가치관과 오버랩되어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유비의 촉한계승론은 지금에 와서 보면 당연히 역사의 반동이다. (황석영도 이 점은 냉정하게 잘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義를 추구하였지만 현실에서 실패하고 좌절했던 영웅을 기리는 민중들의 풍조가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원본의 관점과 흐름이 최근의 이른바 현대적 해석보다 적극 수용되어야 한다고 보는 황석영의 시각은 수긍할 만하다.

원전에 충실한 번역은 흔히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에 방해된다하여 소홀히 다루어졌던 유비 사후의 삼국지를 재미의 반감을 무릅쓰고 3권 분량에 걸쳐 그대로 복원하여 놓은 것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작가가 하고 싶은 평석을 둘러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요컨대 제대로 해석된 삼국지가 나온 것은 다행이지만 그것이 황석영의 소임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번 번역작업에 황석영의 작가적 역량이 많이 소진되지 않았기를 빈다.

-- 덧붙여 중국고대인물화 부문의 대가라는 왕훙시의 150장에 걸친 삽화는 정말 오려내고 싶을 정도의 수준작들이었다.(특별히 보는 안목이 있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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