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에 겨운 사람들을 경멸했다. 복에 겨워 자기가 가진 특권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 사고들이 반복될 수록 내 안의 무기력함을 악에 받친 타인을 향한 증오의 땔감으로 태웠다. 하물며 인간이란 원래 남의 큰 상처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인데 여태까지 박혔던 가시 중에서도 기똥차게 굵고 뾰족한 가시가 박혔으니 세상에서 내가 가장 억울했더랬다. 작년의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극심한 슬픔과 고통에 잠겨 수장당했다. 그리고 새해가 밝았다. 작년 말 쯤에 빼꼼히 얼굴을 가까스로 물에서 꺼내든 나는 이젠 악에 받쳐 모든 저주를 2025년에 쏟아붙고 소위 '퉁치기'작전에 돌입했다. 또 불행이 찾아온다고? '또 악운이 겹친다고? 괜찮다, 어차피 아직 2025년이고 2025년은 원래 나한테 저주의 해였으니까.'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한결 나아진 마음으로 연말에도 찾아오는 불운을 그때그때 하나씩 집어 2025년이라는 쓰레기처리장으로 던져 버렸다. 찾아오는 는 그 반동을 이용해 차례 차례 집어 던져 버리는 움직임에 리듬감까지 더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2026년이 찾아왔다.

모든 불행은 2025년이라는 상자에 넣었으니 2026년은 달라져야만 한다. 2026이라는 숫자가 마치 신인 것 처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매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새해 관련 절기를 챙겼다. 새해에 둥근 달을 보며 소원을 빌며 1차로 2026년을 맞으며 2025년의 일부를 떠나 보냈고, 음력 설날에 떡국을 끓여 먹으며 2차로 2026년을 맞고 아직 남아있을 새해의 불운을 음력 새해라는 이름으로 2025년에 마지막으로 퉁 쳐 떠나보냈다. 그 다음엔 정월대보름날 커다란 보름달을 보며 집에서 부럼을 까고 잣도 태우며 2025년 떠나 보내기 최종_최종_최종 느낌으로 혹여나 아직이라도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2025년의 나쁜 기운을 와그작 와그작 박살내었다. 그리고 3월 첫째날인 내 생일에 이제 만으로도 한살 더 먹으며 비로소 2025년의 나는 소멸하였음을, 그리고 새로태어났음을, 진짜 이제 새로운 시작_최종_최종_최종_최종 이라는 걸 (혼자서) 공식 선언했다.


2026년에 달라진 게 있다면 아무래도 이제 물 밖으로 빼꼼히 코 정도는 밖으로 내밀고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이 똥누러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역시 나도 이제 코 좀 들이밀고 숨 좀 쉬게 되자마자 이전에는 절대적인 고통에 짓눌려 빠져나오지 못했던 다른 못난 감정들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불행 배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내가 제일 재수가 없고 내가 제일 힘든 것 같은 착각이 열렬한 맹신으로 바뀌면서 주위 사람들의 크고 작은 애로사항들이 다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의 고민이 무엇이든간에 그에겐 있지만 나에겐 없는 것을 기필코 찾아내서 치환해냈다. '흥칫뿡 너한텐 그래도 A는 있잖아!'는 정말이지 마법의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눈물 겨운 자기 연민으로 불행 배틀에서 승리하면 질투심이 뒤를 잇는다. '쟤는 A가 있어도 B때문에 저렇다는데 나는 왜 A도 없고 B도 없어'는 두번째로 훌륭한 마법의 문장이다. 이게 반복되다보면 이제 세번째로 신세한탄과 자기 혐오가 문을 두드린다. 하필이면 나만 되는 일이 없는 거 같고 나만 재수가 없는 거 같고 그러다 보니 이런 내 꼴이 우습고 지긋지긋하다. 자기연민-질투-신세한탄-자기혐오로 이뤄진 굴렁쇠를 굴려 2026년 3월 중순까지 달려왔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제대로 거울 앞에 서서 발가벗고 눈을 부릅 치켜뜨고 내 자신을 적나라하게 처음부터 다시 봐야한다. 불행에 돋보기를 들이대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대신에 내가 가진 복과 행운과 특권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자마자 복에 겨워 뒹굴고 있는 나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가 복에 겨운 인간 군상인데 그게 바로 나였다.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어렵고 잣이고 간에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 나에겐 다른 선택권은 없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글을 쓰는 내 모습에 취하지 말고 실제로 글을 써야 한다. 일하는 내 모습에 취하지 말고 실제로 일을 해야 한다. 두려워서 하는 '척'을 하던 버릇을 이젠 그만둬야 한다. 아프지만 인정하고 이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핑계될 2025년도 없기 때문이다. 2025년이 지옥이었다고 모든 불행을 2025년에 몰빵한다고해서 (애초에 몰빵할 수도 없거니와) 2026년에서 불행을 거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잔인한 낙관주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사람이 가난이란 역경을 이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과 같이, 갈망이 자신의 불우한 상황과 얽히게 되면, 문화 비평가 로렌 벌랜트가 말한 "잔인한 낙관주의"를 더욱 부채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처한 상황이 아무리 암울할지라도 물직적 성공을 거두고자,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안정적인 일상을 살고자 부단히 노력한다면 결국 좋은 결과를 얻게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잔인한 낙관주의다.


어떤 사람이 가난이란 역경을 이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과 같이, 갈망이 자신의 불우한 상황과 얽히게 되면, 문화 비평가 로렌 벌랜트가 말한 "잔인한 낙관주의"를 더욱 부채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처한 상황이 아무리 암울할지라도 물직적 성공을 거두고자,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안정적인 일상을 살고자 부단히 노력한다면 결국 좋은 결과를 얻게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잔인한 낙관주의다. - P8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26-03-16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자님, 우리 여기서 계속 더 자주 만나요. 그리고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달자 2026-03-17 08:0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오랜만이예요 잘 지내시죠? 앞으론 자주 놀러오고 소식도 캐치업하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여러 모습 중 반드시 하나의 모습만을 받아들일 필요 없이 거의 무한대로 자신의 모습을 재탄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상당히 독특한 존재다. - P64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특별한 과거가 없었더라면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을 이해한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더 이상 과거를 이루는 핵심 요소들을억압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과거의 다양한 모습을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기술에 녹여 냄으로써 그 과거 전체를 "소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과거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우리는 과거를 현재의 구성 요소로 바꾸어 끝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해야 한다. 과거를 없애 버릴 수는 없기에, 우리는 과거를 자신만의 독특함을 실현해 내는 데 꼭 "필요한" 무언가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고통을 특별하고개인적인 의미로 바꾸어 내는 한 가지 방법이다. 분명 이 과정은 항상 성공적일 수는 없다. 우리가 삶이라는 조직의 일부로 통합해 내는 데 실패한 고통이 닿지 않는 곳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발전할 수 있다. 고통을사라지게 할 수는 없더라도,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주도권을 고통에게 내어 주지 않음으로써 고통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모습을 결정짓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면서도, 과거가 항상 현재의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 P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이 버거운 사람들을 위한 뇌과학 - 광활한 우주를 살아가는 나와 뇌의 작은 연대기
레이첼 바 지음, 김소정 옮김 / 현암사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이 버거운데 마침 트위터에서 김명남 번역가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을 받기엔 내 삶은 너무나 버거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가 이 나라의 편집자에게 바치는 사랑과 존경의 세레나데.

꾸밈없음, 정직, 근면성실, 신중, 겸손, 느림. 이런 가치로도 직업적 성장이 충분히 가능했던 시대를 지나온 구세대가

꾸밈없음, 정직, 근면성실, 신중, 겸손, 느림. 이런 가치가 여전히 존중받고 인정되는 세 손가락에도 꼽힐까 말까 한 분야의 아주 좁은 업계에 있으면서 쓴 이야기. 만약 이 이야기가 일정 부분 이상 출판계의 분위기와 문화를 잘 반영한 거라면 이 이야기가 비출판계에 있는 사람들에겐 비현실적인 판타지 소설로 읽힌다는 사실을 이 책을 편집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까?

책도 결국 세상 '밖'에다가 파는건데 정작 그들과 바깥 세상과의 거리감과 괴리감을 그들은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독자로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자꾸만 비판적으로밖에 읽히지가 않는, 그렇지만 재밌는 소설이었다. 하루만에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가는 일은 죽음과 삶의 밀고 당기기 같은 것. 나는 죽는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사라질 것이 예정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삶을 선명하게 해줄 무엇,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줄 무엇이 절실하다. 그것을 의미라고 불러볼 수도 있다. 의미가 선명해지면 우리는 죽음을 잊는다. 죽음이 선명해지면 우리는 의미를 더꼭 붙잡는다. 의미가 희미해질수록 죽음은 선명해진다. 죽음을 부여하는 것이 신이라면 의미를 부여하는 쪽은 인간일 것이다. 그의미가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해도 우리가 의미에 온전히 속한다면, 아니 의미 자체가 될 수만 있다면 유한을 벗어나 무한을 맛볼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