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살의 여자는 행복이란 게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은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깨달았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배운 적이 있지만 지금은다 잊어버린, 한때 알았다는 사실만 기억나는 외국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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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자 2024-10-29 00:05   좋아요 0 | URL
어제 읽기 시작하자마자 1/3인가 읽어버림ㅋㅋㅋㅋ

2024-10-29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편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사랑받는 아내‘로서의 주부상은 젊은세대에게 사랑이 있는 한 갈등도 불평등도 없는 행복한 가정만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실제로 낭만적 사랑이란 실체라기보다는 산업화와 더불어 대두된 이데올로기이며 배우자의 경제적의존성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샐스비 Salsby (1985)는 밝혀내고 있다.
한국과 같이 남녀 교제의 역사가 짧은 사회에서 낭만적 사랑의 환상에서 생기는 문제는 심각하다. 연애를 하면서 상대방 인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하는 것, 그리고 서로 연애의 상대가 되기 위해 남성은 더욱 ‘남성적‘으로, 여성은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서 스스로를 부각시키려는 것은 그들이 이룰 가족 관계 형성의 토대를 허약하게 하고 있다. 남편의 사랑에 매달리는 현상은 또한 남편의 역할 과중 내지 소시민화를 강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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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여성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취하기 쉬운 ‘객관적 비판자‘로서의 입장을 지양하고 조직에 적극 참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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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려는 그의 욕망은, 따지고 보면, 시간이 가면 극복될 작은 약점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보다 중대한 일에 몰입하게 될 것이다. 또한 성공할 것이다. 그녀는 알았다. 그는 너무나 강인해서 실패할 리가 없었다. 글쓰기만 그만둔다면 말이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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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파란 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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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의 리뷰 ( https://blog.aladin.co.kr/pourkkahier/15878021 )에서 썼던대로, 이 책에 영감을 받아 비슷한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 <마빈> (원제 : Marvin ou la belle éducation)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토니 모리슨의 첫 책 <가장 파란 눈>에 대해 글을 써 보려 한다.


주인공 마빈은 프랑스 북부의 교육적, 지역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지방의 전형적인 백인 노동자 계층 가족의 막내 아들이다. 그리고 마빈은 초등학교 나이 때 자신은 자신의 주위에서 보는 남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이인 마빈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차별과 놀림을 받다가 교장 선생님의 눈에 띄게 되고, 교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우연히 연극 동아리에서 연극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지방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후 파리에 '상경'한 마빈. 파리에서 그는 자신의 성적 소수자성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마빈과 비슷한 사람들과 친구를 사귀며 그들을 계기로 새로운 파리의 예술 세계에 몸을 담게 된다. 하지만 이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도 파리의 부르주아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늘어나게 되면서 이젠 또 다른 소수자성인 자신의 노동자 계층을 더 몸으로 느끼게 되고 그 교차하는 정체성을 몸소 통과한다. 이것이 영화 <마빈>의 내용이다.  


영화 예고편은 여기 :

https://youtu.be/fm6133Xkbkk?si=Fz_j2SI9my8Zd9Ul



영화 속에서 파리에 사는 한 게이 커플이 나온다. 이들은 갓 대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온 젊은 게이 아티스트 청년인 마빈을 자신들의 커뮤니티로 자연스럽게 이끌어준다. 영화 초중반까지는 마빈의 예술적, 사회적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게이 커플과 마빈이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영화 중반부가 넘어갈 쯤, 이들의 첫만남 장면이 나온다.


태어나고 자란 지역의 도시에 있는 대학에서 예술을 공부하던 학생이던 마빈이 어느날 학교에서 초청된 예술가의 대담화같은 자리에 가게 되는데 이 예술가가 앞에서 말한 그 마빈의 훗날 인생 선배가 될 남자인 것이다. 그가 한 참석자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확한 대사는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내 기억으로 재구성한 대사임.)


"여기에 흑인 아이 한 명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집 밖에서 인종차별을 받고 모욕을 받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 아이가 유일하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집 뿐입니다. 집에 오면 이 아이처럼 흑인인 엄마와 아빠와 그의 형제 자매가 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해받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가족들은 아이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주고 상처를 공감하고 안아줍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런 집조차 없었습니다. 제가 제 모습 그대로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가족들조차 제 존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마빈은 이 예술가가 자신이 유년시절부터 줄곧 갖고 있었던 감정을 깨닫게 되고 이 게이 남성 예술가에게 찾아가 말을 건낸다


"안녕하세요, 당신과 말할 수 있을까요? 저도 당신이었어요."

.

.

.



토니 모리슨의 <가장 파란 눈>은 작가의 이런 서문으로 시작된다. (문학동네판)


(...)무관심한 부모와 무시하는 어른, 자체의 언어와 법과 이미지로 절망을 강화하는 세상에 어린 나이라는 취약성이 더해지면 파멸로 이르는 길은 확정적이다. 그래서 내 첫 책인 이 소설은 어린 나이나 성별이나 인종으로 인해 해로운 외부 영향력에 가장 저항하기 힘들 법한 인물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기획이었다.

(...)이 소설의 첫 구상은 어릴 적 친구와 나눴던 대화에서 나왔다. (...) 친구는 자기 눈이 파란색이었으면 좋겠다고 해다. 나는 파란 눈을 가진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고, 그러나 반감이 일었다. (...) 친구가 그런 훼손을 원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그애에게 '화가 치밀었다'.

(...) <가장 파란 눈>은 그런 문제를 두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자 했던 시도다. 그애는 어째서 자신이 소유한 것을 체험하지 못했는지, 혹은 영원히 체험하지 못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 애의 욕망에는 인종적 자기혐오가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을 시작한 1962년과 이것이 한 권의 책을 이루게 된 1965년에는 그렇게 자명하지 않았다. 인종적 아름다움의 주장은 모든 집단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문화적, 인종적 약점에 대한 자조적이고 익살스러운 비판에 대한 반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부 시선에서 유래하는 절대불변의 열등함이라는 가정을 내면화하는 해로운 과정에 대한 반대였다. 따라서 나는 한 인종을 통째로 악마화하는 기괴한 현상이, 아이라는 사회의 가장 연약한 구성원이자 여자라는 가장 취약한 구성원인 인물 속에 어떻게 뿌리박게 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

페콜라의 사례가 지닌 극단성은 평균적인 흑인 가족이나 화자의 가족과 달리 구성원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력한 가족에서 기인한다.

페콜라는 가난하고 불우한 한 흑인 가정의 막내딸이다. 이 시대 미국 사회 속에서 흑인은 열등하다. 그러므로 페콜라는 열등하다. 페콜라는 여자다. 그러므로 페콜라는 더 더 열등하다. 

열등한 흑인들 중에서도 페콜라의 피부색은 유독 까맣기 때문에 페콜라는 더 더 더 열등하다

그런데 페콜라는 눈코입 생김새도 백인의 기준, 그러니까 미의 기준으로 보면 못생겼다. 너무 '흑인'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페콜라는 더 더 더 더 열등하다.


그렇게 더 더 더 더 열등한 페콜라는 집 밖에서 혐오의 대상이다. 백인에게도, 혼혈인에게도, 같은 흑인에게도. 집에 오면 페콜라처럼 못생기고 까만 엄마와 아빠가 있다. 엄마는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아빠는 근근히 밖에서 육체 노동을 하지만 고정적인 수입은 없고 항상 집에서 고주망태 상태이다. 페콜라의 엄마는 페콜라가 자신과 아빠를 쏙 빼닮았기 때문에 혐오하고, 페콜라의 아빠도 같은 이유로 페콜라를 싫어한다. 페콜라의 아빠는 술에 절어 살고, 페콜라의 엄마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정부를 하면서 돌보는 집이 마치 자신이 속한 자신의 집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산다. 거기서 돌보는 작고 귀여운 백인 아기가 마치 자신의 진짜 아이인 것처럼. 그래서 엄마를 찾아 일터로 찾아온 페콜라를 보고 엄마는 기겁을 한다.

엄마 아빠 친구 가족 학교 이웃, 이 모든 세상이 페콜라에게 못생겼다고 손가락질을 한다. 페콜라는 살기 위해서 파란 눈이 갖고 싶다. 티비에 나오는 한 백인 아이 인형이 가진 파란 눈을 선망하게 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나는 영화   장면에서의 백인 게이가  말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교를 하면 안됐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첫째두가지의 소수자성으로 고통받는다는 화자가 비교한 대상은 한가지의 소수자성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이'인데다가 '가난한 '에서 태어나기까지  나는 불행한데 그에 비해 '흑인' 낫다왜냐하면 흑인은 ‘흑인’이기만 하니까 ? 애초에 본인이 힘들었던 이유가 두가지의 소수자성이 교차하기 때문인데그러면 굳이 비교를 하고 싶다면 최소한 어떤 다른 두가지 다른 교차하는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군을 가져와서 비교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게다가 비교군 설정 자체가 틀리지 않았나사회적 계층과 퀴어성을 말하는데 거기서 인종얘기가  나와요...? 그리고그러면흑인 게이는 없나요가난한 흑인 게이는?


그리고 두번째그는  소수자성만의 절대성을 인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성은 각각 저만의 역사와 맥락이 다르고 그것이 현실에서 발현되는 차별의 양상도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다고 해서 저들도 이럴 거라고 생각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나는 집에서 이질적인 존재지만 흑인은 집에가면 집안 식구들이  같은 흑인이니까흑인들끼리 밖에서 받은 인종차별의 상처를 서로 보듬어준다저기... 흑인이세요?


내가 만약  장면 속에  강연을 듣고 있는 학생이라면  말을 듣자마자 손을 들고 토니 모리슨의 책을 읽어보았냐고 그에게 묻을 것이다. 그리고 이 , <가장 파란 > 읽어보라고 그에게 추천하고 싶다어차피 그는 분명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


페콜라는 엄마 아빠에게조차 혐오의 대상이었고  혐오의 이유는 다름 아닌 페콜라가 엄마 아빠 그들 자신을 닮았기 때문이다흑인인 페콜라 엄마와 흑인인 페콜라의 아빠는 페콜라가 본인들처럼 까만 피부를 가졌기 때문에그래서 못생겼기 때문에그래서 열등하기 때문에 혐오한다그런데 같은 흑인이라는 소수자성을 공유하고 연대하고 슬픔을 어루만져주고 유일한 세이프존이 되어주는 흑인 가정이요?  혹시 당신의 고통과 외로움을 극대화시킬 비교 장치가 필요해서 내 머릿 속의 흑인을 창조해낸 것 아닐까요?


백인 게이의 구세대와 신세대가 손을 맞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영화는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데, 자꾸만 페콜라가 눈에 아른거려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돌아갈 곳, 떠날 곳을 논하기 위해서는 일단 현재 자신이 있는 자리라는 게 있어야 한다. 혼자서 호주머니에 담긴 몇 푼 안되는 돈을 꼭 쥐고선 파란 눈에 하얀 얼굴의 소녀가 포장지에 박힌 사탕을 사러 사탕가게에 가는 페콜라에게는 돌아갈 곳도, 떠날 곳도 없다. 가족 구성원들끼리 대판 싸우다가 화난 아빠 촐리는 집에 불을 질러버렸고 페콜라의 집은 말 그대로 불에 타서 사라졌다.


감상 : 영화<마빈>은 한번쯤 볼 만하고 책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한번은 읽어봐야 하고, <가장 파란 눈>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가장 파란 눈>에서 말하고 싶은 주제가 이거 말고 하나 더 있는데, 영화 <마빈>의 감상으로부터 온 <가장 파란 눈>이기 때문에 이 글은 여기서 마치도록 한다. 언젠가 기회(와 체력과 지성)이 된다면 이 책과 함께 취향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계급화된 미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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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0-17 08: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악 너무 좋다 너무 좋다 너무 좋은 글입니다, 달자 님!
저도 저 선배가 했다는 말을 읽고 뭐야, 흑인하고 비교를 하면서 흑인이 자기보다 낫다니, 하고 거부반응이 일었는데 달자 님이 너무나 잘 적어주셨네요. 제가 보기엔 백인 게이의 자기 연민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따지면 제가 볼 때 그 백인 게이는 일단 ‘백인‘ 이며 ‘남자사람‘ 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기득권자인데요. 누구나 남의 부러진 다리보다 자기 발가락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이긴 하지만, ‘나 아파‘가 아니라 굳이 다른 아픈 사람과 비교를 해가며 내가 더 아파 하고 불행배틀 하다니, 별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달자 님도 좋고 달자 님 계신 알라딘도 좋고 그렇습니다.

달자 2024-10-17 17:22   좋아요 0 | URL
글을 쓰고 나서도 어젯밤에 홀로 생각을 좀 해봤어요. 나는 게이도 아니고, 지방에서 태어나지도, 초등학교도 못 들어간 부모 밑에서 태어났거나 기초수급자 집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생각이요. 그러면 나는 당사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면 안됐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근데 작품을 비평할 때 조차 당사자성의 유무를 운운하는 건 조금 치사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건 그저 입막음 그 이상 이하도 아니지 않나..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 여전히 이 글에 쓴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있더라구요.

전 저 선배가 겪었을 고통의 정도를 낮춘 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저 선배가 비교 대상으로 지목한 ‘한 흑인 아이‘가 저 선배보다 더 힘들었을 거라고 얘기한 적도 없구요. 그 선배는 유년시절 당연히 힘들었을 거고 그가 통과한 시간은 저로선 알 길이 없죠. 저로선 상상이 안 갈 정도로 고통스러운 유년시절이었겠죠. 그니까 게이도 가난한 노동자 계층 출신도 아닌 저는 영원히 알 길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때문에 전 언젠가 저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이 선배같은 사람을 비교 대상으로 들지 않을 것 같아요. 특히 제 고통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쟤보단 내가 더 힘들었다‘ 라는 프레임으로는 더더욱 비교를 하지 않을 것 같아요. 피드백 주셔서 감사해요 다락방님 저야말로 다락방님이 없는 알라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2024-10-18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짜 달자의 알라딘 서재 적응이 안 돼..!!!!! 근면 성실 몬데!~!~!~!

달자 2024-10-18 21:52   좋아요 0 | URL
아니 님 머냐구요 저 사찰하시냐구여~~~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10-19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자님~~ 교차성에 대한 글은 역시 달자님 서재가 맛집인 것을 제가 만방에 알리고 싶습니다! 페미니즘 운동 초기에(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요~)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사이의 갈등, 그리고 흑인 여성들 사이에서 소수자들의 위치성에 대한 부분이 떠오릅니다. 저는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읽으면서는 계급이 제일 중요한 문제라 생각했거든요. 근데 사람들 사이의 차이와 이런 구별이 겹쳐져서 올 때, 교차할 때의 고민을 달자님이 잘 풀어주셔서 백번 이해가 갔습니다.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을 여태 안 읽은 사람이 달자님의 감상을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달자 2024-10-29 22:07   좋아요 1 | URL
어머 이 댓글을 이제야 봤네여!!!! 감사합니다!! 언젠가 <가장 푸른 눈> 읽어주세요 단발머리님만의 후기도 넘 궁금한 단발머리님의 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