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온갖 잡종(雜種, hybrid)을 좋아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지금까지의 내 삶이 잡(雜)스러웠다는 것일 게다. 돌이켜보면 대학때는 자연과학·인문학·사회과학의 겉을 핥으면서 결국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졸업을 했고, 대학원 에서 과학사를 전공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에는 나름대로 학문과 사회운동을 결합한다고 애를 썼지만 그 결과는 스스로 꾸며도 어디 내놓을 정도가 못 되었던 것 같다. 이후에도 내 잡스러운 삶은 계속되었는데, 한국의 박사과정에 적을 두고 외국에서 외국 교수의 지도하에 되지도 않는 영어로 논문을 썼고, 한국 대학의 졸업장을 가지고 외국 대학의 교수 공채에 응모를 했으며, 그 결 과 현재 100가지도 넘는 인종과 150가지 언어가 쓰인다는 토론토에서 상당히 다양한 인종·전공의 학생들을 (말하자면 잡종 같 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전공하는 과학사는 좋은 말로 하면 20세기에 성공한 대표적인 ‘간(間)학문’(interdisci plinary field)이요, 막말로 하면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제자리를 찾으려 버둥대는 잡종 같은 존재이다.
이러다보니 내 학문적인 관심도 점차 잡종이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분야로 옮아갔다. 한국에서부터 내 관심은 과학과 기 술의 상호작용에 있었고, 논문의 연구주제도 19세기말~20세기초 전기공학의 성립을 중심으로 물리학과 기술의 관계를 조명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논문을 위해서도 나는 과학사만이 아니라 기술사의 최근 연구 방법과 성과까지 공부할 필요가 있었는데 , 아뿔싸 이것이 이후 화근이 될 줄은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 논문을 마치고 한국 대학의 명예를 걸고 북미에서 직장을 잡겠다고 버둥대던 시절, 한번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기술사 하는 사람을 뽑는 경쟁에 최종 후보까지 간 적이 있는데, 결국엔 기술사를 한다기보단 과학사학자라는 이유 때문에 나를 뽑지 않았다는 참담한 얘기를 듣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몇달 후 다른 경우엔 정반 대의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때는 나를 기술사학자라고 의심하는 심사위원들 앞에 내가 기술사학자가 아니라 과학사학자라는 사실 을 입증하기 위해 땀깨나 흘려야만 했다. 처음 과학사와 기술사에 한다리씩 걸칠 때에는, 나중에 과학사나 기술사를 원하는 경우 에 모두 응모할 수 있도록 내 자신의 시장성을 높인다는 계산이 있었지만, 북미의 과학사와 기술사 사이에 존재하는 높은 제도적 장벽은 나의 시장성을 높이기보다는, 나를 마치 양쪽 세계에서 다 배척당하는 박쥐 같은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잡종에 대한 나의 시각은 넓어졌고, 또 잡종에 대한 애정도 깊어졌다. 예를 들어, 외국에 있는 한국 교포 1.5세, 2세들이 나와는 다른 형태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잡종적인 존재조건들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됨으로써, 그들의 삶과 고민이 내게 더욱 따뜻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관심은 점차 나의 학문적인 관심에 포용되었다. 나는 과 학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잡종 과학자들, 잡종 학문분야들이 존재했음을 볼 수 있었으며, 과학의 발전에 대한 이들의 기여가 무 척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또 나는 이러한 잡종적인 존재들이 순종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창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 다. 더 나아가서 나의 관심은 잡종학문의 출현과, 어떤 경우에 이것이 기존의 학문체계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는가로 이동 했다. 최근에 나는 잡종을 이해하고 창조적인 잡종을 만드는 문제가 과학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20세기 후반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아니 아마도 우리의 삶의 양식의 중요한 일부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글은 나의 잡 종철학(?)을 간략히 소개하려는 목적에서 씌어졌다.
박쥐, ‘짬뽕’, 회색분자, 그리고 주변인
잡종이란 말이 주는 어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사람들은 잡종을 천한 것으로, 되어서는 안될 것으로 여겨왔다. 길짐승과 날짐승 의 세계를 넘나들다가 결국 양쪽 모두에서 배척받은 박쥐의 이야기가 잡종의 부도덕성과 그로 인한 몰락을 잘 암시하고 있다. 우 리가 사용하는 말에서도, 이것저것 섞는다는 의미의 ‘짬뽕’이나, 우리가 어릴 때 얼굴색이 조금 검은 애들이나 머리가 꼬불꼬 불한 애들에게 늘 붙여졌던 별명인 ‘튀기’ 같은 말들이 잡종을 좋게 안 보는 우리의 심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잡종의 존재조건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집단은 혼혈아들인데, 미국 사회학자들은 한때 미국의 혼혈아들이 흑, 백 어느 인종에도 소속감을 갖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이들을 사회를 불안하게 할 소지가 있는 ‘주변인들’(marginalized social group)로 규정한 적이 있다. 원래 짬뽕과 같은 미국사회에서 잡종에 대한 인식이 이러했으니, 단일민족과 단일문화를 자랑하는 우리의 역사적 전 통에 비추어볼 때 잡종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차라리 이해할 만하다고 하겠다.
박쥐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박쥐는 물론 잡종이 아니다. 박쥐는 알이 아닌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이는 포 유류이다. 이 박쥐가 길짐승의 집단에 속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새처럼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원래 이야기에선 박쥐가 길짐승과 날짐승의 세계를 이간질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야기를 조금 바꿔서 길짐승들과 날짐승들이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어떤 상황에 직면했고, 이런 상태에서 일촉즉발의 전쟁상황까지 이르렀으며, 누군가가 싸움을 막기 위해서 두 집단을 중재해야 한다고 가정 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최적의 중재자는 두 집단의 언어와 문화를 다 이해할 수 있는 존재, 두 집단의 성향을 반반씩 섞어서 가 지고 있는 존재, 즉 바로 박쥐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집단이 다른 집단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많은 크고작은 갈등과 싸움이 유 발되고 있다. 50년이 넘게 서로 자신의 이념과 체제가 더 바람직하다고 하는 남한과 북한을 비롯, 서구 문화와 비서구 문화, 제 국과 식민지, 제1세계와 제3세계, 중심과 주변, 자본가와 노동자, 남성과 여성, 기성세대와 신세대, 맑스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이성연애자와 동성연애자, 낙태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구조주의자와 해체주의자, IQ가 유전된다고 믿는 과학자와 이에 반대하는 과학자, 역사에 법칙이 있다고 믿는 사학자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학자, 사회과학이 자연과학화(수학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과학자와 이에 반대하는 사람…… 이러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에서 기인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한 사회나 집단의 이론과 문화가 다른 대상에 비해 더 우월하다는 합의를 만들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둘 사 이의 위계를 세우는 방법이요, 두번째는 이 대립하는 공간들의 경계선에 서로의 얘기가 뚫고 들어갈 구멍을 내거나 둘을 매개하 는 새로운 잡종 공간을 만들어 이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대립을 완화하는 방법이다. 첫번째 방법은 두 집단 사이의 지배 와 피지배, 그리고 그것의 헤겔식의 역전으로 대별되는 변증법적 다이너믹스를 낳고, 두번째 방법은 두 집단의 잡종을 매개로 한 두 집단의 공생과 점진적 공동진화(co-evolution)를 낳는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애기하자면, 첫째 방법은 전쟁·혁명 ·투쟁을 필연으로 하는 근대적인(modern) 방법이고, 두번째 방법은 대화·번역(translation)·공생을 가정으로 하는 탈근대 (postmodern)의 기본이다.
따라서 잡종의 문제가 지니는 함의는 근대적 세계와 탈근대적 세계에서 엄청나게 달라진다. 최인훈의 『광장』의 주인공 명준 은 그의 경험과 삶의 궤적 때문에 자본주의 남한사회에도, 사회주의 북한사회에도 뿌리박고 살 수 없는 잡종 같은 지식인이었다. 결국 그는 제3국을 택하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의 잡종적 존재조건이 더 심화되면 되었지 완화될 수 없다는 상황에 회의를 품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는 이질적인 남북을 섞는 방법이 혁명전쟁(북의 시각으로)이나 멸공통일(남의 시각으로)밖에 없는 사회에서 살았고, 이런 사회에서는 제도적·사회적으로 확립된 경계를 흐리는 ‘회색분자’이자 ‘이방인’은 환영받을 수 없었다. 헤겔 철학에서도 주인과 노예가 뒤바뀌는 역전은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중재하는 중간적 존재, 또는 주인과 노예를 반반 씩 섞어놓은 존재는 없으며, 맑스의 사회철학에서도 중간계층은 마치 박쥐 같은 쁘띠부르즈와로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거대 한 투쟁의 수레바퀴 속에서 동요하면서 역사의 발전에 어떤 중요한 역할도 담당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잡종의 역동성과 양분된 세계
우리 시대에 잡종적 존재들이 소멸하는가, 아니면 점점 더 번성하고 있는가?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짐 에 따라, 역사와 사회의 발전을 기술하면서 수많은 잡종적 범주, 또는 잡종적인 개념틀이 필요함을 우리가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 이다. 우리는 사회계급이 자본가와 노동자로 양극화된다는 명제가 얼마나 많은 단순화를 바탕으로만 성립하는 것인지를 알았고, 중세 봉건제에서 근대 자본제로의 이행에서 이 두 체제가 오랫동안 공존했던 잡종적인 시기가 있음을 보았다. 우리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현명하게’ 공존하는 경우 안정적인 복지사회가 가능함을 북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보고 있다. 생산직 육체 노동자도, 관리 자본가도 아닌 사무직 노동자, 지식 노동자, 과학기술 노동자와 같은 잡종적 사회계층이 노동 운동과 사회운동의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한 것도 요즘의 일이다. 한국과 같은 신흥공업개발국들(NICs)의 지속적인 발전이 중심 과 주변,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의 잡종공간을 형성하면서, 종속이론가들과 서구사회 예찬론자들 모두에게 골치아픈 숙제를 던 진 것도 최근의 일인 것이다.
이러한 잡종 범주, 잡종 개념틀의 필요를 인식하게 된 과정은, 18~19세기 생물학에서 잡종들의 발견이 고정된 종의 분류체계( fixed taxonomical system of species)에 끊임없이 수정을 요구했던 역사적 과정과 흡사하다. 잡종을 ‘신이 창조한’ 고정된 종의 분류체계에 끼워넣어서 이해하려 했던 생물학자들의 노력은 결국 실패했고, 보잘것없던 잡종은 결국 종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생존경쟁을 통해 진화한다는 인류 과학사상 가장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었다. 이처럼 진 화론을 잉태한 잡종은 더이상 천덕꾸러기가 아닌,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를 매개하는 전이적 존재로 탈바꿈했다. 동시에 순종 은 진화의 법칙에 따라 언제든지 잡종으로 변할 수 있다는, 그 순간성이 부각되었다. 결국 순종과 잡종의 차이마저도 진화의 다 이너믹스 속에선 그 경계가 불투명해져버린 것이다. 이렇게 잡종은 잡종과 순종의 경계마저도 희석시키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잠재성은 최근 과학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브루노 라투어(Bruno Latour)가 근대과학이 걸어온 ‘잡종화’의 인식을 통 해 제시한 “우리가 근대였던 적은 없었다”(We have never been modern!--이는 라투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는 결론과 그 맥 이 닿아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두 범주·존재 사이에 잡종 범주, 잡종 존재를 상정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잡종을 배척하는 세계관의 많 은 부분이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분법적 사고나 이것이 발전한 철학적 체계로서의 이원론은 동서고금 을 막론하고 체계적·분석적 사유의 기초가 되었다. 중국 철학의 음(陰)/양(陽)이나, 서양 철학의 형식/물질, 존재/생성, 정신/육체, 연역/귀납, 분석/종합, 서양 과학의 생물/무생물, 음전기/양전기, 북극/남극, 학문 방법론의 자연과학적/해 석학적(hermenutics) 방법 등이 흔히 볼 수 있는 이분법적 사고범주들이다. 이러한 범주들의 기원은, 음/양이나 고대 그리스 철학의 더움(hot)/차가움(cold), 마름(dry)/축축함(wet)의 범주처럼 우리의 일상경험에 있었거나, 또는 남성/여성의 범주처럼 자연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분류체계에 있었으며, 동시에 대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 이성의 기본적 메커 니즘과 관련이 있었다. 자연철학에서 자연의 극성(polarity)을 강조하는 경향은 18세기 후반 독일의 자연철학자들에 의해 부활 되었는데, 이들은 17세기 과학혁명의 뉴튼과학의 기계적 세계관에 반대해서 자연계의 조화와 다양한 자연현상의 통일성을 강조했 고, 극성을 이러한 자연의 통일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성질로 인식했다. 자연현상이 대립적인 두 극성의 발현을 통해 나타난다는 생각은 사회와 역사가 상반된 두 계급의 투쟁을 통해 발전한다는 맑스주의 사회사상의 발전과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 며, 이는 이후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의 중요 개념이 되기도 했다.
이분법은 때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 둘을 또 둘로 쪼개면 넷, 넷 각각을 둘로 쪼개서 8진법, 넷 을 셋으로 쪼개서 12진법이 만들어졌다. 세계는 보이고 만져져야 하기 때문에 불과 흙이 있어야 하고, 이 두 원소의 산술 평균을 둘 잡아서 이를 공기와 물이라 한 것이 플라톤의 기하학적 4원소 이론이었다. 이 4원소를 천상계와 지상계의 두 세계에 배열하 고, 4원소와 더움/참, 마름/축축함의 4형질의 결합으로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세계는 운동과 물질 로 구성되어 있으며, 운동과 물질은 물질세계를 구성하지만 이 물질세계와는 또다른 정신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원론으로 중첩된 세계관을 체계화시킨 철학자이자 과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데까르뜨였다. 1800년 허셸(F. W. Hersche l)이 빛의 붉은색 스펙트럼 밖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 스펙트럼을 발견한 후 독일의 빌헬름 리터(Wilhelm Ritter)는 자 연에는 반드시 +와 -의 두 극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붉은색 밖에 적외선이 있다면 보라색 밖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스펙트럼이 존 재한다고 믿었고, 결국 많은 실험을 통해 자외선의 존재를 확인했다. 모든 정보를 0과 1만의 2진법의 조합(binary combination )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20세기 정보이론의 철학적 기반도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결실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흑백논리의 폐해’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이분법적 사고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 남성성과 여성성의 확연한 구분은 동성연애자는 물론이고, 여성 같은 남자나 남성 같은 여자들을 되어서는 안될 인간형으로 몰 아왔다. 이분법이 서구 철학의 억압적인, 또는 백인남성 우월주의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해체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하진 않 더라도, 나는 이분법적인 분류체계와 이에 근거한 사유가 실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현상이나 사건을 설명하는 데 한 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20세기말 우리가 부딪치는 많은 문제가 ‘순종문제’라기보단 ‘잡종문제’(hybrid p roblem)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잡종문제들
몇가지 예를 생각해보자. 사람이 실험실에서 만든 박테리아나 특수한 생명체에 특허를 신청할 수 있는가? 유전공학으로 만든 생명체는 과학자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유전자를 조작해서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인공물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생 명체에는 특허를 줄 수 없다는 특허의 대원칙에 위배된다. 그리고 컴퓨터 쏘프트웨어는 텍스트(text)인가 기술(technology) 인가? 쏘프트웨어는 프로그래머가 ‘써서’ 만드는 것이고 복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텍스트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또 이것이 컴퓨터 기술의 일부이고 컴퓨터를 통해서 생산·사무와 같은 유용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기술이다. 이는 쏘프트웨어를 텍스트라 하면 판권(copyright)이 적용되고 기술이라 하면 특허(patent)가 적용된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문제인데, 서구 사회 에서 지난 수백년 동안 별 문제 없이 사용하던 지적소유권(intellectual property)의 두 중요 범주인 특허와 판권의 경계를 흐 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잡종문제 중 하나이다. 또 싸이버스페이스(cyberspace)는 출판매체인가 방송매체인가? 이것 은 최근 싸이버스페이스를 방송처럼 규제하길 원하는 정부와 싸이버스페이스를 개개인이 무엇이든 자유롭게 출판할 수 있는 출판 공간으로 발전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이다.
잡종문제는 첨단 과학기술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시의 교통문제는 또다른 잡종문제이다.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 해 도로를 늘려서 교통이 조금이라도 원활해지면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차를 갖길 원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출퇴근 시간에 이웃과 차를 공유하길 권하고 있지만, 이는 많은 사람들이 차를 사는 이유가 차라는 공간이 주는 개인적인 프라이버씨의 영역을 즐기기 위함이라는 사실과 모순된다. 차는 단순히 출퇴근 수단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주의 사회로 이 전함을 드러내는 상징적 표상이다.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시교통공학·심리학·사회학·경제학·철학의 잡종을 필요로 하고 있다. 환경문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니 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과 사회과 학의 잡종을, 학문과 사회운동과 정책의 잡종을, 도시와 시골의 잡종을, 인간이 건설한 문명과 자연의 잡종을, 그리고 시화호와 브라질의 원시림을 섞은 잡종을, 이런 잡종범주로 사고하고 분석할 수 있는 잡종 인간들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잡종문제들은 새롭게 생겨난 것도 있고, 그전부터 있어왔던 문제들의 잡종적인 성격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부각된 것 도 있다. 나는 이러한 잡종문제들이 양산된 이유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미 조금 언급했듯이) 인식론적으로 20세기 후반부에 많은 분야에서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이론들이 설자리를 점차 잃었고, 이에 따라 전 같으면 무시했거나 하나 의 범주에 강제로 귀속시켰을 것들이 잡종범주로 인정되면서 새로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환경문제는 처음 엔 단순히 환경기술을 발전시키고 이의 장착을 의무화함으로써 해결되리라고, 즉 기술적·법적 문제라고 믿어졌다. 이것이 기술 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계급의 문제, 개발/저개발의 문제, 의사결정의 문제, 국지적/전지구적 문제의 복합체임이 드러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두번째는 존재론적으로 20세기 후반에 실제로 수많은 새로운 잡종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새로운 잡종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가장 놀랄 만한 잡종은 인간과 기계의 잡종이다. 인간이 안경이나 의수와 같은 기계를 몸의 일부로 사용 하고,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돕는 것은 오래됐지만,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싸이버네틱스는 유기체를 이해하듯 복잡한 기술씨스템 (technological system)을 이해하고, 기계의 정보전달, 통제 씨스템에 적용되는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과 인간의 사회를 이해하 기 시작했다. 싸이버네틱스에서 생명체는 스스로 복제가능한 부(負)엔트로피(negative entropy)의 씨스템으로 새롭게 정의되 었으며, 19세기 열역학의 산물인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생명체의 정의뿐만 아니라, 20세기 중엽 커뮤니케이션 씨스템의 정보(inf ormation)를 정의하는 데도 원용되었다. 정보의 전달(communication)과 메씨지를 통한 통제(control)는 생명체와 유기체의 사회, 그리고 컴퓨터나 통신체계 같은 기술씨스템을 관통하는 개념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러블럭( Lovelock)의 지구 유기체, 즉 가이아(Gaia) 같은 개념은 유기체와 기술씨스템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이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 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유기체와 무기물, 인간과 기계 사이의 장벽은 이렇게 허물어졌다.
이러한 일군의 흐름은 생물학자들로 하여금 생명의 진수가 세포 내의 정보 전달에 있고, 생명과학의 역할은 암호화된(encoded ) 정보의 전달을 독해(decode)하는 것이라고 생각케 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장 단순한 콜리(Coli) 박테리아의 DNA 를 조작·분석함으로써 알 수 있다고 믿었던 일군의 학자들(주로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전향한 사람들)의 노력은 DNA에 담겨 진 정보가 RNA를 매개로 아미노산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20세기 생명과학의 최대 성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이해와 유전자 재조합 같은 실험 기술의 발달은 1970년대에 실험실의 과학자들이 DNA조작을 통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데 까지 이르렀다. 분자생물학자들은 기름을 분해하는 박테리아 같은 원시적인 생명체를 시작으로, 하버드 쥐(Harvard Mouse) 같 은 새로운 동물들을 DNA조작을 통해 만들었고, 이를 ‘인간이 만든 인공물’로 인정받았다.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체세 포 복제를 통한 고등동물의 복제도 현실화되었다. 몇년 전부터 인간의 DNA의 순서를 전부 해독하려는 인간게놈계획(Human Genom e Project)이 전세계적으로 진행중이고, 다른 한편에선 인간의 DNA를 동물에 이식한 뒤에 그 동물의 장기를 인간에게 이식함으 로써,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장기를 바로 이식할 때 생기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진행중이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 인간과 동물의 생물학적 경계가 거의 무너졌는데, 장기이식 연구는 인간의 장기를 지닌 동물들, 동물의 장기를 지닌 인간들 과 같은 새로운 잡종을 만들어내기 일보직전의 상황에 와 있으며, 이런 얘기는 더이상 공상과학의 환상만이 아닌 것이다. 혹자는 이런 경향에 대해 인간이 신(神)인 양하며 이것이 계속될 때에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도 하나, 나는 정말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는 수많은 잡종들이 만들어지는 속도에 비해 우리가 잡종과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아니 우리 스스로가 잡종임을 인식하는 속도가 너무나 느리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후반부에 나타난 대표적인 잡종, 즉 인간과 기계의 잡종, 생물과 무생물의 잡종, 자연과 인공의 잡종, 인간과 동물의 잡종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이것들 외에도 수많은 새로운 잡종들이 있다. 근대과학도 17세기에 만들어진 일종의 잡종이다. 과 학혁명 이후 과학자들은 기구를 사용해서 실험실에서 자연을 해부·조작·‘고문’하기 시작했고, 근대 ‘자연’과학의 눈부신 성과는 실험실에서 기구를 통한 자연의 인공적인 전환·확장에 근거한 것이었다(올해가 톰슨의 전자 발견 100주년인데 우리가 ‘자연’ 어디에서 전자를 볼 수 있는지, 아니 경험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과학기술’도 최근에야 생긴 잡종이다. 고대부터 별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하던 과학과 기술은 지난 3,4백년간 밀접하게 상호작용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과학 따로 기술 따로라기보다 과학기술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종을 형성했다. 공학 또는 엔지니어링은 이런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 용이 빚어낸 잡종학문이며, 때문에 아직도 엔지니어들 사이엔 과학적 이론을 중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술의 장인적·실질적 전 통을 중시해야 하는가를 놓고 논쟁과 갈등이 있다. 대학에서 공학이 그렇듯이, 기업의 연구소 역시 최근에야 뿌리를 내린 잡종 공간이다. 개별학문 분야로 내려가면, 생화학은 생물학과 화학의, 분자생물학은 물리학과 생물학의, 물리화학(또는 화학물리) 은 물리와 화학의, 해양과학은 해양생물학·해양물리학·해양지질학·해양기술의 잡종학문으로 이 모든 예들은 기존의 학문체계 에서 훌륭하게 자리잡은 것들이다. 인공지능 연구는 컴퓨터공학·수학·사회학·심리학의 잡종으로 시작했고, 싸이버네틱스는 통 신공학·생리학·심리학·정신분석학·인류학·사회학의 ‘짬뽕’이었다. 요즘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인터넷은 심리학과 컴퓨터 공학을 함께 공부한 릭라이더(J. R. C. Licklider)가 쓴 논문 「인간과 컴퓨터의 공생」(1960)에 자극받아 컴퓨터를 슈퍼 계산기가 아닌 인간에게 친숙한 통신기기로 사용하려는 엔지니어들의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파지 분자생물학과 모델만들기(mode l building)에 관심이 있었던 왓슨(J. Watson)과 X선 결정학을 전공한 크릭(F. Crick)의 만남은 DNA 구조의 규명이라는 개가를 올렸다. 20세기 미국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한 이유 중 하나가 두 과학분야의 경계에 존재하는 간(間)과학(interdiscipl inary science)분야의 지원과 발전에 있었다는 사실은 과학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개별 잡종학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잡종의 하나는 학문의 방법에 대한 잡종(메타잡종)이다. 지난 몇백년간 사람들은 자연과학과 기타 다른 학문의 방법론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과학은 사실에 기초하고 실험과 수학을 사용하며 가설연역적이고 법칙예측적임에 반해, 다른 학문은 그렇지 않기에 주관과 편견이 들어갈 소지가 많다는 것이 그 주요 골자였다. 다른 학문들, 특히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자연과학을 모델로 하여 다시 세워야 한다는 노력은 뉴튼 과학의 영향력하에 있던 계몽사조부터 시작되었다. 꽁뜨의 사회학은 뉴튼의 물리학 같은 경험과학을 모델로 세워졌고, 18세기 말엽부터 확률론과 통 계이론이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경제학이 수학화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 몇몇 철학자들은 이런 자연과학지상주의가 인문학·사회과학의 비판적 기능을 앗아갔다고 역설하면서, 역으로 인문학에 자연과학과는 다른, 고유 한,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더 객관적이고 근본적인 방법론이 있음을 강조했다. 간단히 말해서 인문학의 방법론은 텍스트를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데, 이는 자연과학의 방법에 비해 더 보편적이고 비판적이며 반성적(reflexive)이라는 것이 었다. 이러한 대립은 극히 최근에 들어서 양 방향에서 깨지기 시작했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사에 바탕한 철학적 연 구를 시발로 사람들은 자연과학이 문화의 일부분임을, 과학이 이상적으로 객관적·보편적인 것만도 아님을, 과학에도 사회적·문 화적 요소가 녹아들어 있음을, 과학자들의 실천에는 인문학적인(literary) 전통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인문학의 방법도 단순히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마치 자연과학자들이 하듯이 끊임없이 가설을 세우 고 이를 검증하는 과정이, 문제를 던지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에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이는 잡종성의 인식이 양극화된 세계의 싸움을 싱겁게 만들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잡종의 비극적·창조적 존재론을 위하여
양극화된 세계는 단순히 대립하는 두 범주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범주 사이에 철저한 위계가 존재한다. 백/흑, 남 성/여성, 제국/식민지, 제1세계/제3세계, 과학/기술, 자연과학적/인문학적 방법, 영혼/육체, 이데아/현실세계…… 이 범 주들에서 전자는 후자에 비해 더 좋고 고상하며, 따라서 후자를 규정·지배한다. 후자는 전자가 되길 원하나, 결코 될 수 없다. 이런 존재적 조건은 전자의 후자에 대한 지배를, 그리고 후자의 전자에 대한 투쟁을 정당화한다. 이런 이분법적 범주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잡종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기존의 양분화된 체계에 위험스런 존재이고, 따라서 배척의 대상이 된다. 우리 는 육체나 심성이 여자 같은 남자나, 거꾸로 남자 같은 여자가 거의 모든 사회에서 사회적인 터부의 대상으로 (심지어는 화형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금 다른 예이지만, 우리는 제국/식민지, 1세계/3세계, 개발/저개발, 중심/주 변과 같은 범주들이 한국이라는 잡종의 경험을 설명하는 데 얼마나 규정적이었는지를, 한국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인가 또는 신식민 지 종속자본주의 사회인가에 대한 사구체 논쟁에서 보았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런 공고한 이분법적 범주가 한국사회의 설명 에 잘 들어맞지 않는만큼 한국사회 그 자체가 이러한 범주들을 불완전한 것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그리고 인위적인 것으로 만들 었다고 볼 수 있다. 북미나 유럽에 살고 있는 우리의 교포 2세들은 그들이 서구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서구인들의 서구 /비서구, 백인/유색인의 뿌리깊은 인종주의에 도전장을 내고 있다. 몸은 남에 있지만 가족은 북에 있는 (또는 그 반대인) 이 산가족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남북한을 칼로 두부 자르듯이 자를 수 없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잡종은 양극화된 범주에 이론이 아 닌 몸으로 저항한다.
잡종을 강조한다고 해서 나는 우리 사회에, 예를 들어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대립구조가,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남과 북의 긴 장이, ‘식민지 조선’과 제국주의 미국의 지배와 피지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이런 갈등에 대해 눈 을 감자고 말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 싸움은 실재하며, 현실적이고 또한 무척 심각함을 모르고 하는 얘 기도 아니다. 잡종은 아직도 괴물(monster)에 불과하다. 진보와 보수는 물과 기름이며, 한총련과 공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끝장 내야 싸움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다. 벌써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까지 잡종(잡종인간, 잡종학문, 잡종개념)이 만들 어지는 과정이 대립하는 개체가 공존하고 화해하는 과정과 밀접히 관련이 있음을, 다시 말해서 갈등의 해소가 혁명·투쟁·전쟁 ·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자 했다. 대신 나는 두 대립적인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대화의 어려움의 인식, 잡 종을 매개로 한 대화, 다른 언어와 문화에 대한 번역, 그리고 매개공간을 만들거나 경계에 구멍을 냄으로써 대립물의 경계를 흐 리는 것을 통한 갈등의 완화의 가능성들을 생각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 얘기는 갈등의 깨끗한, 근본적인 해소나 소멸을 전제로 하기보다는 갈등의 완화, 그것을 덜 파괴적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동안 갈등에 익숙해지고 함께 살기를 배우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잡종의 또다른 다이너믹스는 잡종이 다른 잡종들을 낳는다는 데 있다. 작은 잡종공간은 잡종인간들을 낳고, 이 잡종 인간들은 잡종문화와 언어를 낳고, 이는 다시 새로운 잡종문제들을 잉태해내면서 기존의 오래된 갈등을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듯 이.
이 글은 다양한 독자에게 읽힐 수 있겠지만, 나는 잡종 같은 사람들(잠재적 잡종을 포함해서)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썼다. 이과와 문과 어느 하나로 자신의 적성을 맞출 수 없는 고등학생, 남과 북 모두에 애정을 가진 젊은이들,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들, 이성보다 동성에게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 철학과 도시공학을 함께 전공하고픈 대학생,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노동자의 편에 서는 경영자,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성장을 함께 이루고자 고민하는 경제학자들…… 나는 한국사회 의 다양한 잡종들이 자신들을 어느 한 범주에 쉽게 귀속시키기보다는, 잡종의 중요성과 창조성을 스스로 인식, 자신들의 잡종성 을 더 강화하고, 그럼으로써 양극화된 집단에선 만들어내기 힘든 새로운 언어와 세계관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다. 이 러한 잡종적 세계관은 두 대립적인 공간 사이에서 완충기·번역기의 기능을 할 것이며, 궁극적으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잡종문제 를 완화하고 우리에게 이런 문제들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한가지 방법을 가르칠 것이다. 잡종은 잡종일 때에 창조적이다. 잡종이 순종인 척할 땐, 그 결과는 별볼일없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홍성욱 -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철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