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한겨레 http://www.hani.co.kr/section-001000000/2005/06/001000000200506201804003.html
한류, 자랑스럽기만 한가?
시간은 참 빨리 간다. 채 20년 지나지 않았음에도 문화 수출입을 보는 우리 시각은 거꾸로 변한 것이다. 1980년대 진보파들에게 문화 제국주의는 인기 개념이었고 그 사례는 할리우드 영화의 합법적인 침투나 일본의 ‘삼류’ 문화의 불법적 침투이었다. 대학시절 파농의 <검은 얼굴, 하얀 가면>과 같은 금서를 읽었던 세대들에게 람보·일본만화에 열광하는 이들은 신식민지의 비주체적 우민으로 보였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한류의 아시아 ‘정복’을 이야기하고 ‘진보적’ 논객들마저도 신자유주의와 국가주의가 뒤섞인 어투로 “세계 속으로 뻗쳐가는 한국 문화 위력”에 대해 찬양가를 부른다. 중국·베트남 언론들이 한국의 1980년대를 방불케 하는 어법으로 한류의 아류 제국주의적 본질 등을 거론하면- 팔은 안으로만 굽는 법일까 - 한국 언론에서는 ‘역풍’이라며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람보를 모방하고 싶었던 한국 청소년은 “신식민지의 아들”이었지만, 한국 배우들의 헤어스타일을 모방하고자 하는 베트남 10대들은 우리에게 “코리아 브랜드의 고객”이 된 것이다. 이 주장에 많은 이들이 미·일이 한국을 침략·신식민지 지배하는 반면에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범한 일이 없기에 적절치 않은 비유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런데 베트남의 경우에는 침범한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다가 지금도 현지 노동자들에게 폭언·폭력을 퍼붓는 한국의 사업가나 성매매하러 들어오는 한국 남성 관광객들은 분명히 ‘침범자’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학도로서의 필자에게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만큼 반가운 현상은 없다. 한국 문화 특유의 흥이나 유머·에로티시즘 등이 세계인들을 흥분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문제는 중국·베트남인이 한류에 열광하는 이유는 과연 한국 특유의 미학 덕분만인가 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영상물에서 보이는 중산층의 소비생활, 해외여행, 호화로운 명품 같은 대목들이 이미 자본주의적 욕망에 충만한 옛 공산권의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이 높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을 잘 표현하는 한류 상품들이 과연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악화 일변도의 고용불안, 약자에 대한 살인적 착취·배제 등의 한국적 신자유주의의 가장 절실한 문제인 이면들도 보여주는가? 나아가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수많은 한국인들의 피땀어린 활동들을 약간이라도 담아주는가? 사실 한국 드라마들이 중국이나 베트남 방송에서 상영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내용에 “정치·사상적으로 불온한” 요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국의 대중을 신자유주의적으로 수탈하고 있는 옛 공산권 국가의 지도층의 입장에서는 한국 드라마들의 분위기는 대중들의 신자유주의적 순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아시아와 문화적으로 잘 소통되는 것이 21세기의 주요 화두 중의 하나이겠지만 우리가 과연 아시아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미국의 대중음악과 일본 드라마의 “한국적 변종” 정도인가? 미스 코리아 대회와 싸워온 한국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나 노조 불허를 ‘철학’으로 아는 한 기업가에게의 ‘철학 박사’학위 수여를 반대한 한국 학생들의 멋진 이야기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문제들로 고생하거나 고민하고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분명 호소력이 높겠지만 진작 그런 내용은 한류에서 빠져 있다. 소비주의의 모습만이 아닌, 비판적 지성과 반(反)자본주의적 운동의 나라로서의 ‘코리아’를 문화적 수단으로 알리는 것이야말로, 한류를 아류 제국주의의 수준에서 국제 민중의 연대 방법으로 끌어올리는 길일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