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드무비 > 빈 들 - 강연호 詩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혼자 쌀을 안치고 국 덥히는 저녁이면

인간의 끼니가 얼마나 눈물겨운지 알게 됩니다.

멀리 서툰 뜀박질을 연습하던 바람다발

귀기울이면 어느새 봉창 틈새로 기어들어와

밥물 끓어 넘치듯 안타까운 생각들을 툭툭 끊어놓고

책상 위 쓰다 만 편지를 먼저 읽고 갑니다.

서둘러 저녁상 물려보아도 매양 채우지 못하는

끝인사 두어 줄 남은 글귀가 영 신통치 않은 채

이미 입동 지난 가을 저녁의 이내 자욱이 깔려

엉킨 생각의 실꾸리 풀 듯 등불 풀어야 합니다

그래요, 이런 날에는 외투 걸치고 골목길 빠져나와

마을 앞자락 넓게 펼쳐진 빈들에 가지 않으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

웅크린 집들의 추위처럼 흔들리는 제 가슴 속

아 이곳이 어딥니까, 바로 빈들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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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날의 시를 읽는 방식은 이렇다.
시가 읽고 싶다.
그러면 시집이 꽂힌 두 개의 책꽂이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이상하게 눈길이 제일 오래 머무는 시집을 빼어든다.
그리고 아무 장이나 펼쳐본다.
그 시가 만약 괜찮으면 자리에 앉아 시집을 처음부터 꼼꼼히 읽는다.
오늘은 강연호 시인의 <비단길>이 걸려들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그립지 않은 날들,
마흔 중반의 나이에 독신이라 혼자 밥을 끓여 먹고 국을 데워 먹었을 한 농민을 생각한다.
그는 지난 15일 시위 도중 경찰의 폭력에 희생되었다.
전용철 열사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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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이끄는 삶 (양장)
릭 워렌 지음 / 디모데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이 곳에서의 삶이 일종의 시험이고, 찰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이유없이 벌어지는 괴로운 일들을 초연하게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의 괴로움, 아픔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어도 나를 다 이해하는 분이 내 편이라는 건 그래서 큰 힘이다. 내가 의지하기를 소홀히 할 때도 내 손을 놓지 않고,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으켜 주시는 분.

직업적인 성공, 부, 명성과는 별개로, 내가 중요하고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것, 내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무엇을 이루는지 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들을 이 책이 다시 일깨워주었다.

이 책이 말하는 선교의 방법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가장 낮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건 맞다. 크리스찬 이라면서 총들고 나대는 사람이 없도록 기도해야 겠다는 생각도 더불어 했다.

표준새번역 혹은 새번역 성경을 한 권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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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3-1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찬이라면서 총들고 나대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곧 악마지요.

Choice 2006-03-17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넴 맞습니다
 

http://h21.hani.co.kr/section-021007000/2005/10/021007000200510050579090.html

누구나 더러운 빨래감을 지녔다

미국 중산층 마을에서 온 도덕적 위기에 관한 절박한 보고서 <위기의 주부들>…공화당원 작가가 구현한 미국적 캐릭터,브리에게서 드러나는 속죄 의식의 모순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주의: <위기의 주부들>에 대한 스포일러 있음.
<위기의 주부들>을 보면 인간성을 고민하고, 미국의 위기를 이해하게 된다. <위기의 주부들>의 배경인 미국 교외의 중산층 마을 위스테리아는 완벽한 외관을 지녔다. 거리는 깔끔하고, 정원은 가지런하고, 집들은 단정하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올 것 같은 마을의 겉모습과 달리 마을 주민의 일상은 음습한 비밀로 가득 차 있다. “누구나 더러운 빨랫감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Everyone has a little dirty laundry) <위기의 주부들>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내레이션은 드라마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죄를 은폐하라" 늘어가는 조바심과 비밀

<위기의 주부들>은 인간에 대해 비관적이다. <위기의 주부들>을 휘어잡는 정서는 단연코 죄의식이다. <위기의 주부들>은 마치 ‘친절한 금자씨’의 금언을 복창하듯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하는 것 아냐?”라고 외치지는 않지만, 끝끝내 죄의식을 버리지는 못한다. 묘하게 창세기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위스테리아에서 우리는 모두 죄지은 자들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속죄는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을 밀어가는 힘은 죄의식이 아니라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이기 때문이다. 카인의 후예인 위스테리아 주민들은 속죄를 하는 대신 은폐를 선택한다. 그들의 근본 심리는 죄의식이 아니라 조바심이다. 나의 죄를 남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는 조바심. 다시 한번 내레이션을 떠올린다. “나는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 정말로 역겹더군. 사람들에게 폭로해버릴 거야.” 첫 회에 자살한 메리 앨리스 영이 받은 협박문은 회를 거듭할수록 모두에게 보내는 경고문이 된다.


여기, 위기의 주부들이 있다. 수잔(테리 헤처)은 “사랑밖에 난 몰라”, 리네트(펠리시티 허프먼)는 “직장을 돌려도”, 브리(마르시아 크로스)는 “완벽한 가정을 원해”, 가브리엘(에바 롱고리아)은 “애인도 필요해”. 주부의 고민을 빈틈없이 구비한 캐릭터 구성이다. 수잔은 로맨스에 중독된 여성성을, 리네트는 좌절당한 성취욕의 불안을, 브리는 위기에 처한 가족의 가치를, 가브리엘은 물질만능주의의 한계를 상징한다. 매우 미국적이면서 꽤나 세계적이다. 위기의 주부들은 무언가를 잃었다. 수잔은 남편과 이혼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고, 리네트는 네명의 아이를 키우느라 직장을 잃었고, 브리는 자신의 위선 때문에 가족의 사랑을 잃었고, 가브리엘은 남편의 다이아몬드를 좇느라 진정한 사랑을 포기했다. 물론 그들은 잃은 것을 되찾고 싶다. 하지만 잃은 것을 되찾으려다 가진 것마저 잃을 위기에 놓인다.

<위기의 주부들>은 파국의 순간에 뒤통수를 때린다. 자포자기의 순간에 뜻밖의 구원이 찾아온다. 예컨대 가브리엘은 정원사와의 외도를 시어머니에게 들킨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가브리엘의 남편에게 외도를 알리지도 못하고 브리의 아들이 운전하는 차에 치여 식물인간이 된다. 엄격한 기독교도인 브리는 종교적 신념을 깨고 아들의 뺑소니 사고를 덮어준다. 이처럼 한 사람의 비밀은 다른 사람의 비밀로, 꼬리를 물면서 연결된다. 여기서 교훈 하나. ‘나의 근심은 남이 풀어준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운이다.’ 이처럼 <위기의 주부들>에서 하나의 사건은 대개 두개의 맥락을 지닌다. 비밀의 연쇄고리는 메리의 자살을 매개로 마을 전체로 번진다.


△ 수잔과 마이크. 수진은 진정한 사랑을 찾은 걸까? 잘못된 남자를 고른 걸까?

하느님의 법이냐, 가족의 가치냐

<위기의 주부들>에서 가정은 가족들의 결투장이고, 마을은 주민들의 전쟁터다. 위스테리아 주민들은 영화평론가 심영섭씨의 표현대로 “관음증이 아니라 관청증”에 중독됐다. 이웃은 이웃의 비밀을 알아내고, 약점을 파고들고. 대가를 요구한다. 참견쟁이 후버 부인은 메리의 비밀을 훔쳐들은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가브리엘의 외도를 우연히 알게 된 이웃집 꼬마는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자전거를 요구한다. 교훈 하나 더. ‘네 이웃의 비밀을 탐하지 말라.’ 엿들은 비밀은 때때로 엉뚱한 오해로 이어진다. 수잔은 정원사 존의 외도 상대로 오해받아 존의 어머니에게 봉변을 당한다. 정작 미성년자 존과 바람을 피운 가브리엘은 폭행을 당하지 않는다. 때로 가벼운 협박은 끔찍한 불행을 부른다. 후버 부인의 장난 같은 협박문은 메리의 자살을 불렀다. 비밀을 은폐하려는 시도는 또 다른 비밀을 낳는다. 폴은 아들 잭의 생모를 살해한 아내 메리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른다. 화사한 위스테리아는 한 꺼풀 벗기면 암울한 디스토피아다. 강명석 문화평론가는 “위기의 주부들의 새로움은 미국의 진정한 위기는 저 빈민의 슬럼이 아니라 여기 중산층의 교외에 있다고 말하는 데 있다”고 요약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는 “인간성이 산뜻하지 않기 때문에 위스테리아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 가브리엘과 그의 남편, 정원사 존, 이디(왼쪽부터 시계 방향). 누구나 비밀은 있지만 아무도 속죄하지 않는다.

사랑을 갈망하는 수잔, 아이들에 시달리는 리네트, 다이아몬드를 좇는 가브리엘의 캐릭터가 미국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녔다면, 기독교적 보수주의자 브리는 가장 미국적인 캐릭터다. 브리는 성경을 끼고 살고, 총기를 사랑하며, 레이건을 존경한다. 대학시절 공화당 집회에서 남편의 사형제도에 대한 연설에 감동받아 연애를 시작했다. 브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가 아니라 성경적으로 올바른 용어를 사용한다. 아들이 동성애(자)를 “게이”(gay)라고 하면 “소도미”(Sodomy)라고 ‘바로’ 잡아준다. 그는 빈민들을 믿는다. 빈민들의 부도덕을 믿는다. 브리는 완벽한 주부이자 살림의 여왕이다. 음식 만들기부터 정원 가꾸기까지, 집안일에 만능이다. 위스테리아의 마사 스튜어트다. 하지만 브리가 완벽할수록 가족들은 숨막힌다. 털끝만큼의 흐트러짐도 참지 못하는 브리의 완벽주의 강박증과 한치의 도덕적 일탈도 용납하지 못하는 브리의 엄숙주의는 가족들의 숨통을 옥죈다. 기독교적 도덕으로 무장한 완벽한 가정을 꿈꾸는 브리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친다. 남편은 외도하고, 아들은 커밍아웃하며, 딸은 순결서약을 깨려 한다. 콘돔, 마리화나, 사도마조히즘, 동성애…. 미국의 보수주의가 적으로 삼는 모든 것이 보수주의자 브리의 가정에 침투한다. 브리는 미국 중산층의 악몽을 죄다 현실로 경험한다. 이제 브리에게 선택이 남는다. 하느님의 법이냐, 가족의 가치냐. 보수주의자들이 조화로운 가치로 여기는 하느님의 법과 가족의 가치가 브리의 내면에서 충돌한다. 브리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딜레마를 온몸으로 떠안고 갈등한다.

그리하여 브리는 가족을 위할수록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다. 뺑소니 사고를 내고 도주한 아들의 죄를 덮어주고, 외도를 하고 사도마조히즘적 성행위를 요구하는 남편을 받아들이려 한다. 브리는 가족을 선택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만, 끝끝내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다. 브리의 어정쩡한 선택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온다. 아들은 갈수록 엇나가고, 남편은 끝끝내 죽게 된다. 그 모든 비극이 브리의 실수와 관련된다. 만약 브리가 한국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면, 어쩌면 바람직한 주부상일지도 모른다. 가족의 죄를 용납하지 못하는 내면의 갈등만 없다면, 브리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주부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강명석 평론가는 “한국에서 가족은 절대선이고, 가족 앞에서는 공사의 구분도 없다”며 “하지만 미국에서는 죄의식이 더욱 근본적이고, 가족의 죄도 죄로 여겨지는 모습이 브리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했다. <위기의 주부들>은 브리를 둘러싼 현실을 통해 미국의 이중성을 이야기한다. 강 평론가는 “교회와 학교에서 도덕적인 당위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미국 사회의 이중성이 브리의 현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분석했다.


△ 브리(왼쪽)와 리네트. 리네트의 역할 모델은 브리지만 브리의 가정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철저히 조롱당해도 끝끝내 이해받는 브리

고지식한 청교도 브리는 도덕이 무너진 자리에서 도덕을 지키려고 몸부림친다. 공화당원인 (아마도 극우는 아니고 중도일 것 같은) 작가는 브리의 바로 왼쪽에서 브리를 비판하고 브리를 동정한다. 덧붙이자면, 동성애자인 브리의 아들은 작가의 초상 같다.

브리는 철저히 조롱당하지만 끝끝내 이해받는다. 브리야말로 가장 처절하게 죄의식으로 고통받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해해. 그리고 용서해.” 브리의 남편이 남긴 유서에는 브리에 대한 드라마의 태도가 요약돼 있다. 강명석 평론가는 “위기의 주부들에서 브리는 근본적으로 순수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여자로 그려진다”며 “결국 그런 브리가 점점 불행해지니까 더욱 안타깝다는 시선이 느껴진다”고 분석했다. <위기의 주부들>은 브리를 통해 미국인의 일상을 비판하지만, 결국은 미국적 가치를 옹호한다. 하지만 그것은 부시의 가치와는 조금 다른 것이다. <위기의 주부들>의 화자는 메리 앨리스 영이다. 죽은 자인 메리는 전지전능하다. 산자들을 내려다보며 말씀을 전하신다. 속죄를 넘어서는 것은 연민이라고. 이렇게 <위기의 주부들>은 메리의 입을 빌어 따뜻한 위로의 말도 건넨다. 하지만 절박한 위기에 대한 긴 보고서 끝에 한마디 덧붙인 위로는 왠지 허약하게 들린다. 그래도 <위기의 주부들>은 속삭인다. 신이시여, 아메리카를 긍휼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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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kisa/section-005002000/2005/08/005002000200508161713212.html

헉. 단관개봉이라니. 기다리고 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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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http://www.guardian.co.uk/comment/story/0,,1542015,00.html#article_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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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isation is an anomaly and its time is running out

Cheap energy and relative peace helped create a false doctrine

James Howard Kunstler
Thursday August 4, 2005
The Guardian


The big yammer these days in the United States is to the effect that globalisation is here to stay: it's wonderful, get used to it. The chief cheerleader for this point of view is Thomas Friedman, columnist for the New York Times and author of The World Is Flat. The seemingly unanimous embrace of this idea in the power circles of America is a marvellous illustration of the madness of crowds, for nothing could be further from the truth than the idea that globalisation is now a permanent fixture of the human condition.

Today's transient global economic relations are a product of very special transient circumstances, namely relative world peace and absolutely reliable supplies of cheap energy. Subtract either of these elements from the equation and you will see globalisation evaporate so quickly it will suck the air out of your lungs. It is significant that none of the cheerleaders for globalisation takes this equation into account. In fact, the American power elite is sleepwalking into a crisis so severe that the blowback may put both major political parties out of business.

The world saw an earlier phase of robust global trade run from the 1870s to a dead stop in 1914. This was the boom period of railroad construction and the advent of the ocean-going steamship. The great powers had existed in relative peace since Napoleon's last stand. The Crimean war was a minor episode that took place in backwaters of Eurasia, and the Franco-Prussian war was a comic opera that lasted less than a year - most of it the static siege of Paris. The American civil war hardly affected the rest of the world.

This first phase of globalisation then took off under coal-and-steam power. There was no shortage of fuel, the colonial boundaries were stable, and the pipeline of raw materials from them to the factories of western Europe ran smoothly. The rise of a middle class running the many stages of the production process provided markets for all the new production. Innovations in finance gave legitimacy to all kinds of tradable paper. Life was very good for Europe and America, notwithstanding a few sharp cyclical depressions and recoveries. Trade boomed between the great powers. The belle époque represented the high tide of hopeful expectations. In America, it was called the progressive era. The 20th century looked golden.

It all fell apart in 1914. Historians are still baffled about what really brought on the first world war. What did France or Britain really care about Austrian archduke Franz Ferdinand, heir to the throne of a country already in deep eclipse? There were no active contests over territory at the time, not even in the Asian or African colonies. And yet the diplomatic failures of that fateful summer led to the great slaughter of the trenches, the death of a substantial portion of the younger generation, and a virtual nervous breakdown of authority in politics and culture. It would take a depression, fascism, and a second world war to resolve these issues and a new round of globalisation did not ramp up again until the mid-1960s.

It may be significant that the first collapse of globalisation occurred as the coal economy was transitioning into an oil economy, with deep geo-political implications for who had oil (America) and those who might seek to control the other major region closest to Europe that possessed it (then the Caspian, since Arabian oil was as yet undiscovered). The first world war was settled by those nations (Britain and France) that were friendly with the greatest producer of oil most readily accessed. Germany was the loser and again in the reprise for its poor access to oil. Japan suffered similarly.

We are now due for another folding up of the periodic global trade fair as the industrial nations enter the tumultuous era beyond the global oil production peak, which I have named the long emergency. The economic distortions and perversities that have built up in the current era are not hard to see, though our leaders dread to acknowledge them. The dirty secret of the US economy for at least a decade now is that it has come to be based on the ceaseless elaboration of a car-dependent suburban infrastructure - McHousing estates, eight-lane highways, big-box chain stores, hamburger stands - that has no future as a living arrangement in an oil-short future.

The American suburban juggernaut can be described succinctly as the greatest misallocation of resources in the history of the world. The mortgages, bonds, real estate investment trusts and derivative financial instruments associated with this tragic enterprise must make the judicious goggle with wonder and nausea.

Add to this grim economic picture a far-flung military contest, already under way, really, for control of the world's remaining oil, and the scene grows darker. Two-thirds of that oil is in the possession of people who resent the west (America in particular), many of whom have vowed to destroy it. Both America and Britain have felt the sting of freelance asymmetrical war-makers not associated with a particular state but with a transnational religious cause that uses potent small arms and explosives to unravel western societies and confound their defences.

China, a supposed beneficiary of globalisation, will be as desperate for oil as all the other players, and perhaps more ruthless in seeking control of the supplies, some of which they can walk to. Of course, it is hard to imagine the continuation of American chain stores' manufacturing supply lines with China, given the potential for friction. Even on its own terms, China faces issues of environmental havoc, population overshoot, and political turmoil - orders of magnitude greater than anything known in Europe or America.

Viewed through this lens, the sunset of the current phase of globalisation seems dreadfully close to the horizon. The American public has enjoyed the fiesta, but the blue-light special orgy of easy motoring, limitless air-conditioning, and super-cheap products made by factory slaves far far away is about to close down. Globalisation is finished. The world is about to become a larger place again.

· James Howard Kunstler is the author of The Long Emergency: Surviving the Converging Catastrophes of the Twenty-First Century

kunstler@a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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