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거슬러 자연을 꿈꾸다


  관련기사

  • 유전자학 발자취
  • 우주론에서 ‘창조신화’를 만나다

  •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

    ①신화와 우주론
    ②유전자복제
    ③뇌는 마음을 얼마나 알까
    ④인간, 동물 그리고 진화
    ⑤인간과 로봇, 몸의 철학
    ⑥동양철학의 디지털문명답사
    ⑦수학과 미술의 물음, 아름다움이란
    ⑧우주개척시대, 지구 밖 인간의 존재
    ⑨나노과학과 미시역사의 눈
    ⑩세계와 입자의 근원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철학)

    ·근대성과 탈근대성 등 연구, 문화론 연구
    ·저서: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노마디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

    황우석 서울대 교수(수의학)

    ·생명복제와 줄기세포 연구, 장기이식용 무균돼지 연구
    ·2004년 2월 치료 목적의 인간 복제배아 줄기세포를 세계 처음 확립
    ·1999년 2월 젖소 복제 성공(영롱이)

    20세기 들어와 과학은 더욱더 우리의 일상에서 먼 곳으로 ‘도망쳤다’. 생물학도 그렇다. 이제 그것은 우리가 아는 생물들을 우리가 친숙한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분자생물학, 유전학, 화학의 분석 기호들로 분해하여 다룬다. 그리곤 놀랄 만한 힘과 능력을 갖고 우리가 사는 세계로 되돌아온다. 알 수 없는 곳에 사는 놀라운, 또는 무서운 힘의 소유자, 그게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생물학의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황우석 서울대 교수와 함께 들어간 실험실이 바로 그 이미지가 사는 장소일 게다. 방진복을 입고 쑥스런 모자를 쓰고 공기 샤워로 세상 먼지를 털어내고 들어가는 곳. 우리가 사는 세계와 그런 식으로 분리되고 격리된 세계다.

    그곳에선 돼지난소에서 미성숙한 난자를 추출하여 체세포의 핵을 이식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난소에서 난자를 채취하는 큰 탁자에는 외국인 유학생도 두 명 있었다. 난자를 기구로 붙잡아 핵을 떼내고, 체세포의 핵을 밀어넣는 모습이 액정화면으로 생중계된다. 그것은 복제된 돼지가 되어 우리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 생명과학자 황우석 교수와 철학자 이진경 교수가 서울 신림동 서울대학교 안 황 교수의 실험실에서 만나 유전자복제에 담긴 생물학과 철학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인공생명은 기계경계 못넘고
    다친 몸 자연상태화 기여뜻
    원본중요성 시대 초월

    ● 사실 20세기 후반의 과학사에서 ‘유전자’라는 개념만큼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념이 있을까? 최근에는 ‘우울증 유전자’, ‘비만 유전자’, 심지어 ‘불륜 유전자’까지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범죄수사나 친자감별에 사용되는 유전자 감식도 그렇다. 어떤 것도 유전자 개념을 들이대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유전자는 이제 다른 개념들을 침묵 속에 가두는 거대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다.

    황 교수는 이런 ‘유전자 담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지금까지 유전자 연구를 통해 우리가 알아낸 것은, 언어로 치면 한글 자모음을 알게 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생명의 비밀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오만이고 과장이라는 것이다. 유전자 만능론 식의 생각이 대중매체를 통해, 그리고 유전자라는 개념 자체가 함축하는 ‘개념적 환상’을 통해 유포되고 부풀려진 것은 분명하다. 가령 유전자만 있으면 공룡도 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턱없는 상상이다. 살아 있는 공룡알(난자)이 없으면 복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은 복제본의 편
    또다른 진화 시작된건 아닌가

    ● 그렇지만 분자생물학이나 유전공학은 생명과 기계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던 오래된 통념을 깨부순 게 아닐까? 노벨상 수상 생물학자 자크 모노는 세포를 “화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라고 정의한 바 있고, 그의 동료 프랑소아 자콥은 생명을 특별한 실체로 보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며, 생명과 기계가 근본적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나 황 교수는 유전학의 발전이 생명에 대한 고정된 통념으론 또 다른 생명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알게 해주지만, 생명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볼 순 없다고 말한다. 생명이란 ‘물질+정신+알파’여서 기계적으로 볼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그게 생명이 숭고한 이유라는 것이다. 세간의 상식 안에 있는 것일까, 그것과 화해하려는 것일까?

    “공룡복제 영화에서나 가능”

    그래서인지 생명과 기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또 하나의 지점인 인공생명에 대해서도 그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유전학이나 인공생명 연구가 그런 바람의 범위 안에, 생명과 기계의 넘을 수 없는 선 안에 머물러 줄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유전자 복제가 필경 함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원본과 복제의 관계에 대한 것일게다. 단순화하면, 복제된 것이 원본보다 우월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실 원본의 우월성에 대한 관념은 서양의 경우 플라톤 이래 오래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철학이 플라톤주의를 비판하면서 원본으로 회귀하는 길을 끊어버린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원본 없는 복제, 또는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복제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표적 징후 아닌가! 더구나 유전자를 조작하고 변형하는 것은 좀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황우석 교수는 원본의 중요성은 시대를 초월해서 강조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적어도 지금 수준에서는 변형된 복제본은 원본과 비교하자면 자연환경에 대해 아주 열악한 능력을 지녀, 기형이나 원인모를 급사, 비자연적 발육 등이 빈번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면 원본은 수천년 동안 환경에 적응한 것이어서 안정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수준의 문제라면, 장기적으로는 어떨까? 이에 대해 장기적으로는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시간은 복제본의 편인 셈이다.




    ● 그는 줄기세포를 이용한 세포치료나 장기이식용 복제동물의 생산은 “좀더 나은 것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손상된 (인간의) 신체를 자연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임을 역설한다. 물론 병이 없는 상태, 결함이 없는 상태가 자연상태인가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여전히 남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개량이란 동식물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개량이지만 자연(‘당사자’)의 관점에서 보면 개악”이라는 인상적인 말을 덧붙인다. 지나치게 젖이 많이 나오게 된 젖소나, 너무 이삭이 많아 바람만 좀 세게 불어도 꺾어지는 벼가 그런 경우다.

    이런 점에서 그는 개량이란 이름의 “반자연적이고 인위적인 노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여기서도 그는 세인의 ‘양식’에 훨씬 가까워보인다. 그의 ‘철학’이 그래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감수해야 했던 많은 비판적 시선 속에서 그렇게 보게 된 것일까? 세인의 양식(‘여론’)을 거슬러서는 실험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생물학 자체가 충분히 정치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병 없는 상태가 자연일까

    유전자 복제가 형질전환을 위해 상이한 종의 유전자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탄생한 것은 종의 벽을 넘어서는 것은 아닐까? 거미줄 원료를 생산하는 염소, 인간의 신장을 생산하는 돼지 등. 좀더 나아간다면 말의 발을 가진 개나 아가미를 가진 고양이 등이 탄생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자연교배되고 대를 이어 재생산된다면 하나의 독립적 형질로 굳어질 것이다. 물론 아무 것이든 섞을 순 없으며, 수용 가능한 유전자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다. 수용 가능한 것이란 상이한 유전자가 ‘공생’하는 것을 뜻하며, 그렇게 해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생태계에서 수용 가능한 것임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종의 벽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순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 하지만 다른 박테리아에게 잡아먹혔지만 ‘소화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박테리아가, 그를 잡아먹은 박테리아와 공생하게 되면서 핵이 있는 진핵생물이 탄생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세포 속의 미토콘드리아나 식물 세포의 엽록체는 이처럼 다른 생물체 안에 살며 공생하게 된 박테리아에서 기원한다. 그렇다면 유전자의 ‘공생’ 역시 새로운 종의 탄생이나 종의 벽을 넘는 진화의 선을 그리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자연적 진화와는 다른 또 하나의 진화의 경로가 존재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이는 아마도 유전자 복제와 변형을 통해 생물학 자체가 변형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일 게다.

    유전자 변형은 이미 생물학의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 식으로 말해보자. “자, 어디로 갈까? 변이의 바다는 넓고도 광대해!”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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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론에서 ‘창조신화’를 만나다


    △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왼쪽)와 신화학자 정재서 교수가 서울 홍릉 고등과학원 연구실에서 우주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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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대 ‘빅뱅뒤 진화’ 무게

  •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

    과학의 상상력과 인문학의 상상력은 얼마나 가깝게 만날 수 있을까. 철학·역사·문학으로 본 현대과학은 어떤 풍경일까. <한겨레>는 인문학자와 문화인사들이 연구현장의 과학자들을 직접 만나 단절됐던 인문학과 과학의 담론을 소통하는 기획연재를 10차례에 걸쳐 매주 싣는다. 미리 만난 인문학자와 과학자들은 ‘우리의 생각이 이토록 다르고 이토록 가까울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①신화와 우주론
    ②유전자복제
    ③뇌는 마음을 얼마나 알까
    ④인간, 동물 그리고 진화
    ⑤인간과 로봇, 몸의 철학
    ⑥동양철학의 디지털문명답사
    ⑦수학과 미술의 물음, 아름다움이란
    ⑧우주개척시대, 지구 밖 인간의 존재
    ⑨나노과학과 미시역사의 눈
    ⑩세계와 입자의 근원

    ● 깊은 산 속의 천문대에서 세상의 시비와 담을 쌓고 별을 보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 천문학자. 그리스 시대였던가? 별만 보며 걸어가다가 웅덩이에 빠지자 바로 눈 앞의 일도 모르면서 하늘의 일을 논한다고 비웃음을 당했다는 어느 철학자.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박창범 교수를 만나러 고등과학원으로 가는 차 속에서 문득 이 두 인물의 이미지가 겹쳐 떠오른다. 신화학자도 천문학자와 비슷하지 않을까? 현실과 까마득하게 동떨어진 일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좀 별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반갑게 맞이하는 박 교수를 따라 연구실로 들어섰다. 칠판에는 막 계산을 끝낸 듯 어려운 방정식과 숫자들이 어지럽게 씌여져 있다. 실험실 안내를 부탁했더니 우주론은 수학적 해석이 중요한 작업이기에 복잡한 실험장비보다는 성능 좋은 컴퓨터가 필수라고 한다. 그리고 추론을 위한 사색 작업 역시 중요하다고 한다. 우주론은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과 아울러 철학, 종교학 등의 인문학적 지식이 요청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컴퓨터를 참관하는 일은 그다지 긴요하지 않을 것 같아 그만 두고 우주론에 관한 ‘고담준론’을 시작했다.

    무·혼돈 정의된 우주기원설
    성경·중국신화 태초와 유사

    ● 현대과학에서 우주론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우주의 생성과 진화를 설명하는 시나리오인데, 그 내용으로는 시공간과 물질의 생성에 관한 ‘우주기원론’(cosmogenesis)이 있고, 천체 생성에 관한 ‘우주구조기원론’(cosmogony)이 있으며 현재 우주의 구조와 미래 우주의 운명에 대한 추정도 한다고 한다. 정의를 듣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였다. 다름 아닌 신화 중의 신화로 일컬어지는 창조신화, 그 중에서도 우주창조신화의 내용과 흡사했다. 원시 인류는 바로 똑같은 주제의 시나리오를 신화로 남기지 않았던가?




    우리 역시 별들의 잔해

    현대 우주론에서는 우주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우주는 137억년 전 무(無) 또는 혼돈 상태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 가설은 세계 각 민족 신화에 나타나는 태초 우주의 모습에 대한 묘사와 일치한다. <성경>에서는 혼돈과 어둠의 상황으로, 중국신화에서는 흰자와 노른자가 뒤섞여 있는 계란 속과 같은 상태라고 표현한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무’가 ‘유(有)’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단 생겨난 우주는 어떠한 진화 원리를 따르는가? 우주론자들은 그것을 ‘빅뱅(대폭발) 우주론’과 ‘정상우주론’ 등으로 설명한다. 현재 통설처럼 되어 있는 빅뱅 우주론은 우주의 모든 물질이 먼 과거에 매우 밀도 높은 상태에서 터져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고 정상우주론은 우주가 시작도 종말도 없이 영원히 같은 꼴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또 양자를 절충한 듯한 ‘혼돈 급팽창 가설’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가설에 의하면 우주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우주가 진행하고 있는 다중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적용하면 우리 인생은 시공간 개념이 다른 여러 우주에서 여러 개의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나뭇꾼이 산 속에서 웬 노인 둘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고 돌아와 보니 도끼 자루가 썩어 있더라는 이른바 ‘립 밴 윙클’형 민담은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시간여행을 다룬 설화는 다중적 우주론의 예증이 될 법도 하다.

    우주 벗어나 우주관찰 훈련
    바로 고대 인문학 명상방식

    ● 고대의 천문학 또는 우주론이라 할 점성술에 대해 박 교수에게 물었다. 별자리의 기운과 인간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점성술의 입장에 대해, 그는 별자리가 인간에 끼치는 영향력이 과장되긴 했지만 별과 인간의 공감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그런 사유는 근거가 있다고 답한다. 즉 지구는 아득한 옛날 초신성이 폭발했을 때 나온 원소들의 잔해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지구의 산물인 우리의 몸 역시 별들의 잔해로 이뤄진 셈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니 문득 유년 시절 밤하늘의 별을 우러러 보았을 때 벅찬 느낌으로 가슴이 뛰었던 일이 생각났다. 왜 가슴이 뛰었을까? 막연한 신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 별과 우리 몸에는 무언가 서로 끌리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어서였을까? 동양의 도교에는 서양의 점성술과 비슷한 ‘성수설(星宿說)’이라는 숙명론적 관념이 있다. 즉 사람은 태어난 순간에 속한 별자리로부터 원초적 기운을 부여받는데 그 별자리의 속성이 어떤가에 따라 그 사람의 재능과 인생, 운명 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강감찬 장군의 탄생 전설은 완전히 성수설에 의거한다. 별이 떨어지면서 장군이 태어났고(그 자리가 낙성대다), 나중에 중국의 사신이 고려에 와서 장군을 보고 ‘문곡성(文曲星)’이라는 별의 화신이라고 경배를 드렸다는 얘기이니 말이다.

    강감찬 장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박 교수는 서양의 첨단 우주론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대 한국의 천문학에 대해서도 두툼한 책을 한 권 썼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라는 책에서 그는 정통 사학자들이 ‘위서’라고 경멸하는 재야의 사서 <단기고사>에 기록된 고조선 시대의 오행성 결집 현상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도 하고 고인돌에 새겨진 북두칠성 등 별자리를 찾아냄으로써 우리 민족의 천문 관측의 수준과 역사가 만만치 않음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어리석은 질문인지 모르겠으나 다시 그에게 묻는다. 이러한 관심은 우주론 탐구의 목적인가, 아니면 학문적 외도인가? 빙긋이 웃는 그로부터 예상치 않은 대답이 나왔다. “우주는 모두에게나 같은 연구대상입니다. 대상이 동일하다면 관점은 달라야 하겠죠. 그렇다면 나에게 관점은 한국적이어야 합니다.” 객관주의를 신봉하는 과학자로부터 ‘한국적’이라는 말을 들으니 그가 엄청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수학·물리 바탕 천문학 가설이
    직관·상상 바탕 신화학과 소통

    ● 현대 우주론이 지닌 한계는 우주라는 연구 대상이 객관적 관찰과 실험의 완전한 대상일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연구 주체인 인간이 생래적으로 연구 대상인 우주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우주를 완전히 객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신화는 결정적으로 우주론과 길을 달리한다. 신화창조자들, 즉 고대 인문학의 고수들은 우주 속에 있으면서 우주를 관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주를 객관화함으로써가 아니라 우주와 하나가 됨으로써 우주의 본질을 나의 몸을 통해 느껴냈던 것이다.

    ‘한국적’눈으로 연구

    우주론과 신화는 과연 이 간극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주론의 물리학적 통찰이 감성의 철학을 동반한다면 그 결과는 보다 우주의 본질에 근접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우주론은 과학과 인문학 양쪽에 대해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신화학자로서 현대의 첨단 우주론자를 만나는 일, 그것은 극단과 극단의 만남일 수도 있겠다. 왜냐 하면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신화는 이미 폐기된 원시 인류의 자연에 대한 지식이거나 실증을 결여한 공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화는 다시 귀환하고 있고 과학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화와의 조우를 모색하고 있다. 정교한 수학적 계산과 치밀한 물리적 통찰에 의해 추출된 우주론의 가설들이 직관과 상상력, 그리고 감수성에 의해 터득된 신화적 진리와 만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우주론을 현대 과학에 의해 다시 씌여지고 있는 ‘창조신화’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사진 (왼쪽으로부터) ▶박창범 고등과학원교수(물리학부)-우주거대구조와 우주론연구, 국제우주탐사 ‘슬론 디지털 스카이 서베이(SDSS)’의 한국그룹 책임자, 저서:<인간과 우주>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등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신화 연구/ 저서:<동양적인 것의 슬픔>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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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진원오빠 블로그 http://spin.yonsei.ac.kr/solwind/rserver.php?mode=tb&sl=185

    [정이현의 해석남녀] <조제...>의 조제와 츠네오

    마법의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서서히 부식하고 또 한뼘씩 커지고‥

    어떤 연인은 헤어지고 나서 친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사이도 있다. 여자친구 조제와 작별한 다음 츠네오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우리가 헤어지기까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니다. 사실은 한가지다. 내가 도망친 거다. 나는 다시는 조제를 보지 못할 것이다.”

    우정은 거리조절이 가능한 관계에서만 이루어진다. 걷지 못하는 소녀 조제, 할머니가 주워 오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는 소녀 조제, 사강의 소설 주인공 이름을 따 스스로를 조제라고 부르는 소녀 조제. 그 아이는 자신의 전 존재를 남자친구 츠네오에게 기댄다. 아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츠네오는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시작되는 사랑은 반짝반짝 빛난다. 그러나 신비로운 마법의 시간은 곧 지난다. 일상 속에서 사랑은 더디게 부식한다. 전동 휠체어를 거부하고 어디든 자신의 등에 업혀서 다니고 싶어 하는 여자친구를 보면서 츠네오는 조금씩 지쳐가고, 표정은 차차 짜증스러워진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드물게 선량하지만 평범한, 고작 스물세 살짜리 남자아이일 뿐이니까. 조제가 자신에게 아주 많은 것을, 어쩌면 전부를 의지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츠네오는 조제를 떠난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없는 조제의 삶을 멀리서조차 지켜 볼 용기가 없다.

    이 지점에서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은 세상 모든 첫사랑에 대한 은유가 된다. 생애 처음으로 타인과의 내밀한 친밀감을 경험한 사람은, 미처 아무 것도 ‘계산’하지 못한다.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의 거리를 조정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이기적으로 투정부린다. 자신의 장애와 결핍을 상대방이 온전히 채워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를 맡김으로써 사랑이 성립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 때문에 사랑은 붕괴되고 문득 이별이 찾아온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이성복, <이별1>중에서)


    혼자 남은 뒤 전동휠체어를 타고 자전거들과 나란히 거리를 달리는 조제는, 더 이상 할머니의 낡은 유모차에 웅크리고 있거나 남자친구의 등에 업혀 칭얼거리는 예전의 조제가 아니다. 가장 무서우면서 동시에 가장 행복한 ‘호랑이의 순간’을 지나 왔으므로 조제는 스스로의 밥상을 위해 ‘물고기’를 구울 수 있게 되었다. 바짝 구워져 접시에 담긴 물고기처럼 그 아이는 이제 담백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츠네오의 후일담은 나오지 않지만 그 쾌활하고 쿨한 소년 역시 시끄러운 길가 한 구석에 주저앉아 터뜨린 울음을 통해 한 뼘 자랐을 것이다. 두고 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 청춘의 한 시절이다. 그들은 각각 그 시간을 통과해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현실적인 성장영화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정이현 소설가

    [2004-11-12]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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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ice 2004-11-16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었는데... 흑. 대전엔 개봉관이 없었던 듯.

    로드무비 2004-11-16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신문으로 읽은 건데요.

    친구들 보라고 퍼갑니다.

    추천하고요.^^

    Choice 2004-11-17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좋은 글이죠? :)
     


     

     

     

     

     

     

     

     

     

     

     

     

     

     

     

     

     

     

     

     

     

     

     

     

     

     

     

     

     

    사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평온하다. 슬픈 건, 기억되지 못하는 사람이지.

    사랑,과 같은 감정은 영원한게 아니니까 이별 후에 잘 잊는 건 재주가 된다. 미움,과 같은 감정도 영원한 건 아니니까 기억하면서도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이 사랑,은 아닌걸.

    사랑,은 말하자면 Time Dependent. 시간이 흐르면 따라 흐른다. 과거완료,라든가 미래 시제의 문장에서는 효력을 잃는 단어. 사랑한다,는 말에는 미래의 슬픔도 함께 하겠다는 결심이 들어 있지만 그 결심도 지금 이순간의 결심일 뿐이다. 그러니, 사랑의 기억과 사랑은 참 다르네.

    PS. 1. 압도적인 표정연기를 보여준 김영하님이 인상적이었다.

    PS. 2. 두 남녀배우가 다정하게 나온 스틸컷도 많건만, 난 저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배트는 홀로 휘두르는 것. 인생도 혼자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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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trushka, a burlesque in four scenes, was completed in May 1911 and first staged in Paris a month later under the musical direction of Pierre Monteux. Stravinsky had at first considered a concert piece for piano and orchestra, with the former as an uncontrollable puppet, eventually defeated by the orchestra. Discussion with Dyagilev led to the composition, instead, of a ballet, based on the Russian puppet Petrushka, who here comes to life, to be killed by his rival for the hand of the Ballerina, the Blackamoor. Choreography was by Fokin and decor by Alexandre Benois, with Nijinsky in the title role. In 1947 Stravinsky re-scored the work for a smaller orchestra, with triple instead of quadruple woodwind and a single harp.

    The opening scene shows the Shrovetide Fair in St. Petersburg. There are holiday crowds in Admiralty Square. On one side a man plays a hurdy-gurdy, the sound rivalled when another appears with a musical box. The Showman draws back the curtains of his puppet theatre to show Petrushka, the Ballerina and the Blackamoor, puppets that he brings to life with his flute. In the second scene, in his cell, Petrushka suffers at the cruelty of his master, hoping to find relief in the love of the Ballerina, who rejects him. The Blackamoor, however, succeeds in charming the Ballerina, but their dalliance is interrupted by the jealous appearance of Petrushka. Outside at the fair groups of revellers dance, the wet-nurses, followed by a peasant with a performing bear, the appearance of a drunken merchant, and a dance of the coachmen. From the puppet theatre a noise is heard, and Petrushka emerges, pursued by the Blackamoor, who kills his rival with his scimitar. The Showman reassures the crowd, showing them that Petrushka is only a puppet, but as night comes on and the people disperse, the ghost of Petrushka is seen above the booth, mocking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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