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
과학의 상상력과 인문학의 상상력은 얼마나 가깝게 만날 수 있을까. 철학·역사·문학으로 본 현대과학은 어떤 풍경일까. <한겨레>는 인문학자와 문화인사들이 연구현장의 과학자들을 직접 만나 단절됐던 인문학과 과학의 담론을 소통하는 기획연재를 10차례에 걸쳐 매주 싣는다. 미리 만난 인문학자와 과학자들은 ‘우리의 생각이 이토록 다르고 이토록 가까울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①신화와 우주론
②유전자복제
③뇌는 마음을 얼마나 알까
④인간, 동물 그리고 진화
⑤인간과 로봇, 몸의 철학
⑥동양철학의 디지털문명답사
⑦수학과 미술의 물음, 아름다움이란
⑧우주개척시대, 지구 밖 인간의 존재
⑨나노과학과 미시역사의 눈
⑩세계와 입자의 근원
● 깊은 산 속의 천문대에서 세상의 시비와 담을 쌓고 별을 보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 천문학자. 그리스 시대였던가? 별만 보며 걸어가다가 웅덩이에 빠지자 바로 눈 앞의 일도 모르면서 하늘의 일을 논한다고 비웃음을 당했다는 어느 철학자.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박창범 교수를 만나러 고등과학원으로 가는 차 속에서 문득 이 두 인물의 이미지가 겹쳐 떠오른다. 신화학자도 천문학자와 비슷하지 않을까? 현실과 까마득하게 동떨어진 일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좀 별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반갑게 맞이하는 박 교수를 따라 연구실로 들어섰다. 칠판에는 막 계산을 끝낸 듯 어려운 방정식과 숫자들이 어지럽게 씌여져 있다. 실험실 안내를 부탁했더니 우주론은 수학적 해석이 중요한 작업이기에 복잡한 실험장비보다는 성능 좋은 컴퓨터가 필수라고 한다. 그리고 추론을 위한 사색 작업 역시 중요하다고 한다. 우주론은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자연과학과 아울러 철학, 종교학 등의 인문학적 지식이 요청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컴퓨터를 참관하는 일은 그다지 긴요하지 않을 것 같아 그만 두고 우주론에 관한 ‘고담준론’을 시작했다.
무·혼돈 정의된 우주기원설
성경·중국신화 태초와 유사
● 현대과학에서 우주론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우주의 생성과 진화를 설명하는 시나리오인데, 그 내용으로는 시공간과 물질의 생성에 관한 ‘우주기원론’(cosmogenesis)이 있고, 천체 생성에 관한 ‘우주구조기원론’(cosmogony)이 있으며 현재 우주의 구조와 미래 우주의 운명에 대한 추정도 한다고 한다. 정의를 듣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였다. 다름 아닌 신화 중의 신화로 일컬어지는 창조신화, 그 중에서도 우주창조신화의 내용과 흡사했다. 원시 인류는 바로 똑같은 주제의 시나리오를 신화로 남기지 않았던가?
우리 역시 별들의 잔해
현대 우주론에서는 우주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우주는 137억년 전 무(無) 또는 혼돈 상태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 가설은 세계 각 민족 신화에 나타나는 태초 우주의 모습에 대한 묘사와 일치한다. <성경>에서는 혼돈과 어둠의 상황으로, 중국신화에서는 흰자와 노른자가 뒤섞여 있는 계란 속과 같은 상태라고 표현한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무’가 ‘유(有)’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단 생겨난 우주는 어떠한 진화 원리를 따르는가? 우주론자들은 그것을 ‘빅뱅(대폭발) 우주론’과 ‘정상우주론’ 등으로 설명한다. 현재 통설처럼 되어 있는 빅뱅 우주론은 우주의 모든 물질이 먼 과거에 매우 밀도 높은 상태에서 터져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고 정상우주론은 우주가 시작도 종말도 없이 영원히 같은 꼴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또 양자를 절충한 듯한 ‘혼돈 급팽창 가설’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가설에 의하면 우주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우주가 진행하고 있는 다중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적용하면 우리 인생은 시공간 개념이 다른 여러 우주에서 여러 개의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나뭇꾼이 산 속에서 웬 노인 둘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고 돌아와 보니 도끼 자루가 썩어 있더라는 이른바 ‘립 밴 윙클’형 민담은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시간여행을 다룬 설화는 다중적 우주론의 예증이 될 법도 하다.
우주 벗어나 우주관찰 훈련
바로 고대 인문학 명상방식
● 고대의 천문학 또는 우주론이라 할 점성술에 대해 박 교수에게 물었다. 별자리의 기운과 인간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점성술의 입장에 대해, 그는 별자리가 인간에 끼치는 영향력이 과장되긴 했지만 별과 인간의 공감적 관계라는 측면에서 그런 사유는 근거가 있다고 답한다. 즉 지구는 아득한 옛날 초신성이 폭발했을 때 나온 원소들의 잔해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지구의 산물인 우리의 몸 역시 별들의 잔해로 이뤄진 셈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니 문득 유년 시절 밤하늘의 별을 우러러 보았을 때 벅찬 느낌으로 가슴이 뛰었던 일이 생각났다. 왜 가슴이 뛰었을까? 막연한 신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 별과 우리 몸에는 무언가 서로 끌리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어서였을까? 동양의 도교에는 서양의 점성술과 비슷한 ‘성수설(星宿說)’이라는 숙명론적 관념이 있다. 즉 사람은 태어난 순간에 속한 별자리로부터 원초적 기운을 부여받는데 그 별자리의 속성이 어떤가에 따라 그 사람의 재능과 인생, 운명 등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강감찬 장군의 탄생 전설은 완전히 성수설에 의거한다. 별이 떨어지면서 장군이 태어났고(그 자리가 낙성대다), 나중에 중국의 사신이 고려에 와서 장군을 보고 ‘문곡성(文曲星)’이라는 별의 화신이라고 경배를 드렸다는 얘기이니 말이다.
강감찬 장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박 교수는 서양의 첨단 우주론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대 한국의 천문학에 대해서도 두툼한 책을 한 권 썼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라는 책에서 그는 정통 사학자들이 ‘위서’라고 경멸하는 재야의 사서 <단기고사>에 기록된 고조선 시대의 오행성 결집 현상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도 하고 고인돌에 새겨진 북두칠성 등 별자리를 찾아냄으로써 우리 민족의 천문 관측의 수준과 역사가 만만치 않음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어리석은 질문인지 모르겠으나 다시 그에게 묻는다. 이러한 관심은 우주론 탐구의 목적인가, 아니면 학문적 외도인가? 빙긋이 웃는 그로부터 예상치 않은 대답이 나왔다. “우주는 모두에게나 같은 연구대상입니다. 대상이 동일하다면 관점은 달라야 하겠죠. 그렇다면 나에게 관점은 한국적이어야 합니다.” 객관주의를 신봉하는 과학자로부터 ‘한국적’이라는 말을 들으니 그가 엄청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수학·물리 바탕 천문학 가설이
직관·상상 바탕 신화학과 소통
● 현대 우주론이 지닌 한계는 우주라는 연구 대상이 객관적 관찰과 실험의 완전한 대상일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연구 주체인 인간이 생래적으로 연구 대상인 우주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우주를 완전히 객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신화는 결정적으로 우주론과 길을 달리한다. 신화창조자들, 즉 고대 인문학의 고수들은 우주 속에 있으면서 우주를 관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주를 객관화함으로써가 아니라 우주와 하나가 됨으로써 우주의 본질을 나의 몸을 통해 느껴냈던 것이다.
‘한국적’눈으로 연구
우주론과 신화는 과연 이 간극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주론의 물리학적 통찰이 감성의 철학을 동반한다면 그 결과는 보다 우주의 본질에 근접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우주론은 과학과 인문학 양쪽에 대해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신화학자로서 현대의 첨단 우주론자를 만나는 일, 그것은 극단과 극단의 만남일 수도 있겠다. 왜냐 하면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신화는 이미 폐기된 원시 인류의 자연에 대한 지식이거나 실증을 결여한 공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화는 다시 귀환하고 있고 과학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화와의 조우를 모색하고 있다. 정교한 수학적 계산과 치밀한 물리적 통찰에 의해 추출된 우주론의 가설들이 직관과 상상력, 그리고 감수성에 의해 터득된 신화적 진리와 만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우주론을 현대 과학에 의해 다시 씌여지고 있는 ‘창조신화’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사진 (왼쪽으로부터) ▶박창범 고등과학원교수(물리학부)-우주거대구조와 우주론연구, 국제우주탐사 ‘슬론 디지털 스카이 서베이(SDSS)’의 한국그룹 책임자, 저서:<인간과 우주>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등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신화 연구/ 저서:<동양적인 것의 슬픔>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