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구판절판


1900년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영국으로 여행을 와서 자신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에 영국 사람들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한번은 눈 구경을 하자고 어떤 사람을 초대했다가 비웃음을 샀다. 또 한 번은 일본인의 감정이 달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고 이야기했는데, 듣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스코틀랜드에 초대를 받아 궁궐 같은 집에 머물게 되었다. 어느 날 주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다가 줄지어선 나무들 사이의 작은 길에 이끼가 두텁게 덮인 것을 보았다. 나는 칭찬을 하면서, 그 길들이 멋지게 나이를 먹은 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인은 곧 정원사에게 이끼를 모두 긁어 내게 할 생각이라고 대답했다."-280쪽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만한 실행 가능한 모범을 제시하는 데는 보통 건물 몇 동과 책 한 권이면 충분했다. 보통 '이탈리아 르네상스'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알려진 발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참가자들이 이루어낸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니체는 그것이 실제로는 불과 백 명 정도가 해낸 일이라고 말한다.
(...)
이 모든 건축적 변화에서 처음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의 끈기는 그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자원만큼이나 중요했다. 건축의 위대한 혁명가들은 예술적인 면과 실용적인 면을 겸비했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고 생각할 줄도 알았지만, 의뢰인과 정치가들을 달래고, 유혹하고, 괴롭히고, 또 끈기와 조심성을 잃지 않고 그들과 오랫동안 게임을 할 줄도 알았다.-283쪽

우리는 감정 때문에 부패하고 사회에서 교제하는 바람에 길을 잃고 방황할 위험에 빠진다. 따라서 외부의 가치들이 내부의 갈망을 고무하고 강조해줄 장소가 필요하다. 우리는 벽이나 천장에 표현된 것 때문에 신에게 가까워질 수도 있고 신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의 가장 신실한 부분에 늘 진실하려면 금과 청금석으로 칠해 놓은 판벽, 색깔을 칠해 놓은 유리창, 흠 하나 없이 갈퀴질을 해 놓은 자갈 정원이 필요하다.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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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7-23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랭 드 보통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뛰어난 예지가 빛나는 문체를 가졌다는... ~~

Sati 2009-07-23 23:18   좋아요 0 | URL
저도 참 좋아요^^.
 

 

2009.7.22 국회 

 

 

 

* '날치기'의 사전적 정의 

1) 다음 국어사전

3 법안을 가결할 있는 의원 정족수 이상을 확보한 당에서 법안을 자기들끼리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
개정 법안의 날치기 통과

http://search.daum.net/search?w=tot&t__nil_searchbox=btn&nil_id=tot&top_sp=0&stype=tot&q=%B3%AF%C4%A1%B1%E2 

2) 성안당 국어사전 (남영신 엮음) 

2. 규정된 방법에 따라서 정상적으로 처리하지 아니하고 상대를 속이며 감쪽같이 불법적으로 처리해 버리는 짓. [우리 나라 여당은 전통적으로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데 탁월한 기량을 가지고 있다.] ('었'에 취소선은 내가 근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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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평가의 종착역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장) (2009.7.15)

 

개인적으로 2003년부터 여태까지, 거의 매년 참여정부를 평가하는 글들을 써왔다. 그 때마다 '참여정부의 핵심 문제는 이것이었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짧으면 몇 개월 길면 1~2년이 지나면 '어 그게 아니네!'하는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정보를 접하고, 새로운 시각이 생기면서, 내가 여전히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자신 있게 내 놓았던 직관과 통찰이 실사구시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깨지고 재구성되면서 참여정부의 다양한 면모를 비교적 균형 있게, 꼼꼼히 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하는 평가는 그렇게 몇 차례나 진화, 발전한 내 총론적 평가(통찰)의 종착역이다. 물론 이제는 이것이 참여정부의 성과, 한계, 오류라는 거대한 코끼리의 전체상이라고 자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또 헛짚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이번에 발간하는 책 <노무현 이후(가제)>에 들어가는 내용이기에 심하게 헛짚었다면, 책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내 무딘 통찰의 기념비가 될 것이다.   

문제는 2002년의 계약 100% 완수 의지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깊은 사람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참여정부가 자신을 출범시킨 다수 국민들의 요구와 기대에 성과적으로 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중후반기 이후의 평가가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열린우리당에 과반 의석을 몰아 준 표심이 요구한 것은 경제성장, 양극화 해소, 총체적 구조개혁과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의 구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반칙과 특권이 통하지 않는 세상, 힘센 자가 힘 약한 자를 마구 짓밟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노무현도 자기를 지지한 표심을 그렇게 이해했다. 

 

사실 노무현의 인생 역정으로 보나, 선거과정으로 보나, 그가 숱하게 한 발언으로 보나 노무현이 국민(역사)과 한 계약의 핵심은 ‘원칙과 상식의 회복’ 혹은 ‘무원칙과 몰상식’의 세상을 확 바꾸는 것이었다. 이는 반칙과 특권의 타파, 정경유착. 권언유착 폐절, 법 앞의 평등, 기회주의. 지역주의/학벌주의/권위주의 타파,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화, 당내 민주주의 정착, 국가기관에 대한 도덕적 신뢰 회복과 억울하게 빼앗기고 짓밟히고 죽어간 자들의 명예 회복(伸寃)(의문사, 과거사 진상 규명) 등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본적으로 준법, 존법, 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원칙과 상식 혹은 준법, 존법, 정상화가 한 발짝 더 나간다면 국가보안법 등 냉전의 잔재 청산, 남북 화해. 협력 체제 정착을 바탕으로 한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 대등한 한미관계와 협력적 자주국방까지도 포괄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노무현은 참여정부를 만들어 준 표심에 충실히 부응했다. 정말 사심 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이 표심을 받들었다. 뿐만 아니라 역대 정부들이 전통적으로 중시하는 성과 지표(수출, 경상수지, 성장률, 주가지수 등)도 탁월하다. 참여정부의 양지와 음지가 뚜렷하기에 성과에 관한 한 이견이 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 자신과 국민이 맺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한 대통령은 전무후무 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이 바로 참여정부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의 원천이다. 
 

그런데 문제는 참여정부 집권 중반쯤에 국민들이 2002년의 만족하거나, 계약 자체를 잊거나, 경시하고 새로운 계약서, 아니 요구서를 들이밀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노무현은 2002년의 계약서를 결코 가벼이 하지 않고, 100% 이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을 기본으로 하고 양극화 해소, 민생 문제 해결, 동반성장이라는 새로운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려고 하였다.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2002년의 계약은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70~80%가 이행된 것이 다름없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힘센 자가 힘 약한 자를 마구 짓밟을 수가 없다. 그 누구도 법을 함부로 어길 수가 없다. 정경유착, 권언유착, 반칙과 특권 등의 고질병들도 깊이 잠수(潛水)를 하거나, 후미진 뒷골목 밤거리를 경관(노무현) 눈치를 보면서 배회하는 불량배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기회주의, 지역주의, 학벌주의 역시 이들과 정면으로 싸워왔던 노무현의 당선과 더불어 무색해 질 수 밖에 없다. 제왕적 대통령의 패악은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범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존법, 준법, 정상화 사안인 것이다. 물론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점에서 준법, 존법=원칙, 상식을 앞세운 노무현의 당선 자체가 노무현이 정치 인생을 걸고 추구해 온 많은 가치의 승리이자 완성이라고 볼 근거가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조기극복(김대중)’ 이나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박정희)’ 이나 ‘7%성장, 1인당 소득 4만 불, 7대 강국(일명 747)’ 같은 계약(비전)이라면 권력을 장기간 행사하여 이행해야 하지만, 노무현의 계약(비전)은 그가 최고 권력자로 앉아 있기만 해도 상당부분 달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이 가진 비전의 특수성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사회운동가의 비전이다. 
 

권위주의 청산, 국민참여 활성화, 사정기관의 정치적 중립화, 냉전의 유산 청산(국가보안법 철폐), 과거사 진상규명 등은 2002년에 맺은 계약의 남은 20~30%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남은 20~30%는 기본적으로 정신과 문화 개혁 사안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율적이고 창조적이며 상호 헌신과 관용에 기초한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정착’과 이를 위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축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은 과제는 상당한 시간, 어쩌면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참여정부 시기에 무원칙과 몰상식의 선봉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언론과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 일부 보수 세력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국정의 발목을 잡아 온 한나라당은 이 ‘반칙 왕’ 내지 ‘몰상식 왕’의 후견자였다. 노무현은 한국 사회에 무원칙과 몰상식(편파, 왜곡, 거짓, 야비, 기회주의)이라는 오물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보수 언론에 대해, 그냥 무시해도 될 것도 같은데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많은 정치적 자원을 동원하여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다. 그것은 아마도 무원칙과 몰상식의 본산을 고립시키거나 정상화시켜야 2002년의 계약을 완전히 이행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상호 헌신과 관용에 기초한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정착’과 ‘사회적 자본축적’을 위해서는 이 전쟁은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참여정부가 엄청난 정치적 자원을 투입한 곳은 공무원 마인드 혁신을 포함한 정신, 문화 개혁이었다. 이는 대를 이어가면서 추진해야 할 장기적 과제이다. 따라서 건강한 정신, 문화를 체현한 매체, 정치세력, 경제사회세력이 필수불가결하다. 바로 그래서 언론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구태여 임기 말에 기자실 폐쇄를 강행한 것은 ‘언론이 변해야 한다’ 메시지를 언론과 국민들에게 보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참여정부는 그런 정론지나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한 정치세력이나 사회세력을 만들지 못하였다. 또한 그런 맹아들이 커 올라 올 수 있는 생태계도 만들지 못하였다. 
 

어쨌든 ‘빠’소리를 듣는 열성 지지층은 ‘무원칙과 몰상식 섬멸 전쟁’에 엄청난 화력을 동원하는 노무현의 전략적 판단에 동의했을지 모르지만, 다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002년의 계약에 관한 한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 해결을 내심 바란 사람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국민들의 노무현에 대한 짜증은 바로 여기 시작되었다. 동시에 사상 유례없는 추모 열기도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국민들은 노무현이 치열하게 추구하던 가치(2002년의 계약)를 기본 중의 기본으로 생각했지, 불필요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2007년 이후 근 2년여에 걸쳐서 이명박 정부와 보수 세력은 이런 민심을 망각하고 ‘잃어버린 10년’ 운운 하면서 2002년의 시대정신과 그 상징이 무참히 짓밟았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동시에 참여정부 기간 동안 후미진 뒷골목 밤거리를 배회하던 무원칙, 몰상식, 기회주의, 위선, 부적절한 유착, 야비함, 치졸함 등 온갖 깡패, 양아치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대한민국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여기던 2002년의 시대정신을 벌떼처럼 달려들어 때려 죽였다. 당연히 깡패, 양아치들이 설칠수록, 세상이 혼탁하고 위선적일수록 그들과 가장 대비되는, 소탈하고, 서민적이고, 상식적이고, 원칙적인 노무현이 미치도록 그리워질 수밖에 없었다. 또 그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도 폭풍처럼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기 말의 왕 짜증과 저조한 지지율, 그리고 사상 유례없는 애틋한 추모 열기의 뿌리는 바로 진보와 보수 이전에, 성장과 복지이전에, 또 총체적인 국가구조 개혁 이전에 대한민국에 절실히 필요한 상식과 원칙을 세우기 위해서 노무현이 모든 것을 걸었다는데 있다.    
 

시대정신의 대전환: 총체적 구조 개혁
참여정부의 비극의 뿌리는 참여정부 기간에 급격하게 바뀐 시대정신이다. 시대정신의 대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은, 2002년 당시 자타가 공인하던 시대정신이 불과 몇 년 뒤인 2007년~8년의 대선과 총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과문해서인지 이런 일은 현대 정치사에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치사회적 대격변이나 환경적 대재앙이 휩쓸고 간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분명한 것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국민들이 참여정부와 범 진보세력을 싸잡아 외면한 것은 범 진보의 대표 격인 참여정부가 2002년의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당초 공언한 성과가 적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당선과 더불어 계약의 70~80%가 이행되어 버리는 상황에서, 국민들은 참여정부가 계약의 100% 완수에 너무 치열하게 매달렸기 때문에 외면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참여정부의 불운은 집권 중반기에 시대정신의 대전환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급격한 전환이 일어났을까? 이유는 네 가지다. 
 

첫째, 노무현과 국민이 맺은 2002년의 계약-사실상 준법, 존법, 정상화- 자체가 노무현 당선으로 인해 70~80%가 이행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과거의 계약이 이행되면 새로운 계약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둘째, 불법, 탈법, 무원칙, 몰상식 같은 후진국형(전근대적) 문제가 해결되면 합법적, 제도적 불의와 새로운 원칙과 상식의 문제 같은 중진국형(근대적) 문제가 급부상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의 법, 제도, 원칙, 상식이 선진국 수준으로 잘 완비되어있지 않는 한…….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어떤 법, 제도, 정책은 한 때는 유효했지만 급변한 환경과 맞지 않았다. 또 어떤 것은 애초부터 힘 있는 집단의 농간이 짙게 배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법적, 제도적 불의가 심각한 정치사회적 현안으로 떠오르지 않았던 것은, 이것이 오랫동안 (대통령을 포함한) 힘센 자들의 불법, 탈법, 편법, 변칙 관행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법, 탈법 관행이 참여정부 출범으로 인해 급속히 퇴조하자, 합법적, 제도적 불의가 수면 위로 급 부상했다. 탄핵 사태를 초래한 공직 선거법 9조의 문제, 관습헌법을 제정하는 괴력을 발휘한 헌법재판소의 문제, 대통령 5년 단임제의 문제, 검찰의 비대한 권력 문제, 사학재단의 전횡이 가능한 허술한 규제. 감독 문제, 부동산 관련 규제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가치 측면에서 보면 공정성(기회, 조건, 출발선의 평등) 문제에 가려있던 공평성(경쟁 결과의 합리적 불평등, 특권. 특혜의 적정화)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했다. 토건 분야에 대한 지나친 재정 할당 문제, 민자 유치 사업 등을 통한 재정 약탈 문제, 거대한 부동산 불로소득 문제,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원청대기업과 하청중소기업 문제,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문제, 조직된 손노동에 의한 지식노동에 대한 약탈 문제, 국민연금 사각지대 문제와 공무원 연금 적자 문제, 사교육 문제 등이 그런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17 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상정된 4대 개혁 입법(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문화적 완성(준법, 존법, 정상화)의 범주에 속하는 과제(국가보안법, 과거사진상규명법)와 새로이 부각된 합법적 제도적 불의 혁파 범주에 속하는 과제(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4대 개혁 입법 투쟁은 시대정신의 전환점 근처에서 일어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보수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국가보안법과 과거사법이었다.  보수 세력의 물질적 기득권에 실질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법안은 사립학교법과 언론관계법 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과 과거사법이 범 보수 세력의 공포심을 자극하여, 싸우기 좋았기 때문이다. 한편 국가보안법과 과거사법은 내 식으로 표현하면 2002년에 맺은 계약 중에서 미 이행한 20~30%이자, 중장기 과제(정신, 문화 개혁)이기에 국민적 지지가 그리 튼실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범 보수의 전술적 판단은 옳았고, 범 진보의 그것은 틀렸다. 4대 개혁 입법의 지지부진으로 인해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타격은 컸다. 그래서 4대 개혁 입법 추진 과정에서의 혼선, 분열, 좌절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4대 개혁입법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혼선이 일어난 것도 근원적으로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과 범 진보가 시대정신의 대전환을 눈치 채지 못 한데서 일어난 필연적인 오류와 실패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원내 전술의 오류가 아니라 커다란 역사적 통찰력(감각)의 오류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범 진보 진영에 속한 정치인 중에서는 그래도 시대정신의 대전환을 가장 빨리 눈치 챈 사람의 하나이다. 유효성을 다한 법, 제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원포인트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한 대연정을 시도했다. 또한 검찰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 마련을 위해 공수처 설립과 검찰. 경찰의 수사권 조정을 시도했다. 국가의 중장기적 비전, 전략(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비전2030’을 만들었다. 낡은 진보의 문제를 절감하고 유연한 진보, 새로운 진보주의를 역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정신의 대전환에 늑장 대응하고, 관료적 감각과 상상력으로 안이하게 대응했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어떤 철학적 문제(정의관, 인간관)와 역사. 현실에 대한 통찰력의 문제가 참여정부를 포함한 범진보 세력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참여정부 집권 기간에 잠복하던 각종 모순. 부조리들이 국내외 여러 요인들이 중첩되어 화산처럼 폭발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열거한 공평성 문제 외에 신용카드 대란, 자살률 급증, 출산율 급감, 영세자영업의 피폐, 양극화 심화, 청년인재의 국제 비경쟁 영역으로의 쏠림(고시. 공시족 폭증), 청년실업 문제, 벤처 창업율 감소 문제, 수도권 집중 문제 등 수많은 모순들이 그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1948년, 1961년, 1987년, 1997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제반 질서(시스템)의 모순의 폭발이다.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이 문제들은 기본적으로 급변하는 국내외 환경과 굼뜬 시스템(법, 제도, 재정 등)과 무능하고 사익추구적 공공 리더십과 전 세계에서 위기 및 기회에 가장 역동적으로 대응하는 경제사회 주체간의 대충돌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외 환경의 충격이 큰 것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대외의존도가 높고, 세계 경제의 지각변동의 진앙인 중국에 인접해 있고, 미국과 긴밀히 연계되어있기 때문에 세계 경제의 변화에 심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제사회 주체들이 역동적인 것은 학력 수준도 높고, 세속적 욕망도 강하고, 정보도 많고, (웹 공간에서) 결사도 쉽고, 국가 및 사회지도층에 대한 불신도 높고, 4.19, 광주항쟁, 유월항쟁, 촛불시위 등으로 주체적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틀어 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이 모든 문제들이 참여정부에 와서 뚜렷하게 부각된 것은 객관적으로도 심각하긴 했지만, 주류 보수 언론도, 진보 언론도, 진보 지식사회도 공히 참여정부에 적의를 가지고-보수 언론은 친북좌파라고, 진보 언론은 신자유주의자라고, 진보 지식사회는 얼치기 운동권이라고- 모든 문제를 정도 이상으로 침소봉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무현의 약간 튀는 말은 입방아 찧기에는 너무 좋은 소재였다. 단적으로 ‘반미면 어떠냐?’라는 말, ‘좌파신자유주의’라는 농담, ‘시장으로 권력이 넘어갔다’는 말 등 대수롭지 않는 말 가지고 얼마나 입방아를 찧었던지!!!  또 하나 국민들이 참여정부에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화산처럼 폭발한 민생 문제들은 노무현의 말대로 참여정부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만들어져서 참여정부에 와서 터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성은 당시 정부와 집권 세력으로 날아올 수밖에 없다. 이는 기본적으로 참여정부의 불운이긴 하지만 그 못지않게 경제사회적 재난 경보 체계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집중 호우나 태풍은 불운이지만 그 피해의 수준은 재난 경보, 대처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합법적, 제도적 불의의 문제든, 자연 재해처럼 밀어닥친 민생 문제든 이것을 해결하는 데는 4대 국정원리도, 참여, 균형, 민주주의 같은 핵심 가치도 별 쓸모가 없었다. 참여정부를 좌파신자유주의로 비아냥대던 진보 좌파 세력의 핵심 가치, 즉 고용안정, 비정규직 철폐, 최저임금 대폭 인상, 부자 증세와 복지 재정 대폭 확대 등도 역시 쓸모없긴 마찬가지였다.

너무 빠른 변화에 당하다
참여정부는 과거 패러다임의 대성공자들이 그랬듯이 너무 빠른 패러다임의 변화에 당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패러다임에서의 주적(무원칙, 몰상식, 반칙, 특권, 기회주의)의 잔존(?) 부대(조중동, 사학재단, 불건전한 문화 풍조)를 소탕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어느덧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새롭고 강력한 적들이 뒤에서 덮친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들은 잔존 부대라기보다는 빙산의 일각이었던 것이다.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진보 언론 등 범진보의 동반좌절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하고 이전처럼 행동했다는데 있다. 지진과 화산 활동을 조기에 포착하지 못한 것은 단지 둔감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철학적, 역사적 통찰력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 지진과 화산은 지각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어떤 균열이나 충돌로 인해 엄청난 에너지가 장기간 축적되면서 생겨난다. 화산과 지진은 대개 일어나기 전에는 잘 모른다. 막상 지진과 화산이 일어나면 그 이전의 모든 문제들이 뒷전으로 밀리는 법이다. 시대정신의 대전환이 일어나 버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민심이라는 화산은 진짜 화산 보다는 터지는 시기나 양상을 비교적 쉽게 예측할 수가 있다. 민생 현실을 알려주는 각종 계기판을 잘 들여다보고,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실물 현장을 많이 누비고, 서로 다른 분야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조직하고, 좋은 인식 틀(프레임)로 세상을 관찰하면 지각 깊숙한 곳에 엄청난 에너지가 축적되는 양상을 조기에 감지할 수 있다. 잘만 하면 제도, 정책을 통해 고통, 불만 에너지를 사전에 해소하여 지진과 화산을 예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참여정부나 범진보는 세상을 보는 프레임이 낡았고, 민생 현실을 알려주는 계기판도 시원치 않았고, 주요 인사들은 실물과 다소 유리되어 있어서 문제인식은 대체로 둔하고 흐릿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레임 문제, 계기판 문제, 실물과 유리 문제, 소통 부족 문제 등과 관련하여 범진보는 참여정부에 비해 얼마나 나아졌을까? 참여정부를 돌아볼 때 진짜 걱정스러운 것은 바로 이것이다. -끝-

 

http://www.goodpol.net/discussion/progress.board/entry/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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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디자인연구소 홈피 '좋은정치포럼'에서 흥미로운 글이 있어서 모셔왔다.)   

 

 

1930년대생, 그들의 대한민국 / 신동진 (2009.7.15) 

 4.19세대는 1930년대생입니다.  대학을 ‘우골탑’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4.19세대가 대학을 다닐 즈음 생겨난 말입니다.  5급공무원을 시험으로 뽑을 때는 1930년대생이 사회에 진출할 시기였습니다.  육사 11기, 그들은 육사 첫 4년제 정규기수였습니다.  전두환이 1931년생입니다.  신군부의 핵심세력들 육사 11기~18기. 이들이 1930년대생입니다.  MB의 멘토라는 최시중, 이상득 그리고 박희태, 이회창 모두 1930년대생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얘기하고 싶은 1930년대생은 그런 1930년대생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얼마 전 <그들의 새마을운동 - 김영미 지음. 푸른 역사 2009.6.15 刊>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결론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있기 전에 이미 ‘새마을’과 그 ‘새마을’을 만든 ‘새농민’이 있었다”입니다.   그 ‘새농민’들이 바로 제가 지금 얘기하고 싶은 1930년대생입니다.  책의 내용을 좀 더 소개하겠습니다.   

  1930년대생은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적인 고등교육 수혜자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불어닥친 전국적인 교육열로 서울로 올라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도시를 경험한 세대입니다.  이들 중 대학진학이 어려운 이들 또는 의식적으로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둔 이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을 바꿉니다.   

  문맹률이 70~80%인 시절,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이들은 마을의 엘리트였습니다.  이들은 곧 마을리장의 세대교체를 이뤄냅니다.  김영미가 조사한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아미리의 경우를 보면, 1960년에 30대가 리장이 된 후 1976년까지 5명의 리장이 모두 1930년대생입니다. 한 마을의 근 20년을 1930년대생이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새마을운동이 있기 10여년전부터 씨족 갈등 타파, 미신, 문맹퇴치, 도박근절, 폐풍개선, 협동조합 결성 등을 통해 마을개량을 자발적으로 해나갔습니다.  수백년 아니 수천년을 내려왔던 전통을 ‘근대화, 도시화’라는 이름으로 뒤엎은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세대.  그들이 1930년대생이었습니다.   

  1969년 8월4일 박정희는 경북 청도 수해복구 순시 중 넓은 길, 개량된 지붕, 담장을 한 신도1리 마을을 발견합니다. 원인을 파악해보니 앞서 얘기한 그런 지도자, '새농민'이 있었습니다.  이런 선진적인 새 농민을 ‘발견’한 박정희는 전국 33,267개 리.동에 시멘트 335부대를 지원하는 실험적인 조치를 합니다.  건설 경기 부진으로 남아도는 시멘트로 ‘새마을’을 걸러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년 뒤 내무부 조사결과 16,600개의 리, 동이 기대이상의 사업 수행을 했음이 확인됩니다.  전국 농촌의 50%에 이미 ‘새농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도시에서의 취직과 출세의 길을 버리고 농촌사회의 변화를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은 1930년대생들이었습니다.  당시 청년들은 신이 나서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마을 일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하는 등 누구도 막지 못할 정도의 자발성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아무런 대가가 없어도 부지런히 마을 일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경기도 장호원의 이재영이라는 분입니다. 경복고등학교 재학 당시 전교1,2등, 역도부장 그리고 서울시학도연맹회장까지도 역임했던 이재영은 고2때 모친이 변변한 약도 못쓰고 고향에서 돌아가시자, 농촌계몽운동가로서 삶을 선택합니다.  졸업 후 애향청년회(전국회원 3천여명)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강연을 다닙니다.  그러나 이상촌 건설 등을 문제삼는 정치적 탄압으로 군에 입대하고, 애향청년회는 해체됩니다.  제대 후 농협에 들어가 농협 개혁에 앞장서고, 그가 만든 장호원구판장은 전국 최초 농협연쇄점이 됩니다. 조합장 선거과정에서 공화당 후보와 맞서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매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새마을 지도자를 찾는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1972.3.6 박정희와 국무위원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합니다. 박정희는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국민포장을 주고 청와대에 신설할 새마을추진실 실장직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이재영이라는 분, 조합원을 배신할 수 없다며 그 자리를 고사합니다.  이후 1981년까지 장호원의 조합장으로서 마을발전에 주력했습니다.   

  1930년대생의 의미.  제 경험세계 속에서 좀 더 생각을 진전시켜 봤습니다.  서울로 와서 공부를 하든, 돈을 벌든 해서 자리를 잡으면 시골의 동생, 조카 등 친지들을 서울로 불러올려 공부든, 돈 벌이든 지원해주는, 씨족공동체를 책임지는 역할을 했던 분들의 모습은 제 또래의 부모세대들 모습이었습니다.  모두 1930년대생들이었습니다.  경상남도와 충청남도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만나 결혼을 하고 자수성가를 하고 친가, 외가를 서울로 불러올렸던 제 부모도 1930년대생이십니다.    

  1930년대생의 자식세대는 소위 386세대입니다.  ‘386’이라고 따로 특정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세대들이 갖고 있었던 애국, 애족, 희생의 민주화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주력세대인 386세대는 진보적 세대의 대명사로 불려집니다.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1930년대생과 그 자식세대인 386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70대에 해당하는 1930년대생에 대한 386의 평가는 어떨까요?   

  386과 시대정신을 공유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선언에 등장하는 386 부모는 ‘얘야 나서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라며 비겁할 것을 종용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 표현이 그리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큰 반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386세대의 그 부모세대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독재’, ‘비겁’, ‘반칙’, ‘기회주의’ 뭐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자기 부모에게 대놓고 이렇게 얘기를 하지는 않겠으나 공적인 영역에서 내려지는 집단적 평가는 그렇다고 봅니다.   

  가장 호평을 받고 싶은 자기 자식들에게서 1930년대생들은 가장 악평을 받은 꼴입니다. 그렇다면 1930년대생들의 386에 대한 감정은?  한마디로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감정을 극대화 시켜서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이 바로 ‘정동영의 노인 폄하 발언’ 사건일 것입니다.  지난 총선 때인가요?  정청래 전 의원도 이 비슷한 경우로 곤혹을 치른 기억이 납니다.   ‘386 정권’이라고도 불렸던 참여정부 때 특히 이념갈등이 세대갈등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은 이런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그들의 새마을운동>의 작가 김영미씨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주로 구술에 의존해 사회사를 새로 구성하는 그의 말에 의하면, 1930년대생들은 매우 건강한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 얘기만 나오면 바로 싹 경직된 태도를 보인다고 합니다.   소위 꼴통보수의 태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임근준이라는 문화평론가는 최근 “현재 한국사회는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의 갈등 속에 있는 듯 뵈지만, 사실 이는 이념의 탈을 쓴 세대갈등에 가깝다” (주간한국 2009.6.22) 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1930년대생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면서, 저도 그런 주장에 동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몇 가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o 1930년대생들은 꼴 같지 않은 나라의 꼴을 세운 세대, 즉 국체(國體)를 만든 세대다.  그 자식세대인 386세대는 나라의 품격, 즉 국격(國格)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세대다. 지금의 이념갈등화한 세대갈등은 나라(國)를 사이에 둔 양보할 수 없는, 물러설 수 없는 애국(愛國)의 충돌이다.  이것은 공화주의적 애국의 충돌이다.  대한민국이 나라의 체격(體格)을 함께 키워야할 이 시점에 이 이념갈등은 두 세대가 서로의 애국심을 서로 신뢰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o 1930년대생들과 그 자식세대인 1960년대생들의 갈등은 엄마(母國)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아들의 외디푸스 콤플렉스, 그리고 집안 내 부모자식 간 소통부재, 소통단절이 사회정치현상화된 것은 아닐까?   

o 1960년대에 '새농민'들이 지키고 만들었던 그 공동체는 자본주의적 공동체일까? 사회주의적 공동체일까? 이런 이념적 잣대로 그들의 농촌계몽운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이 만든 것은 이념이 무색한, 더 나은 삶을 위한 공생의 공동체이지 않았을까?  그들의 그 건강한 공동체의식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남아있을까?    

 오바마를 미국의 스타로 만들었던 2004년 대선 찬조 연설. 그 때 오바마는 연설의 시작을 자신의 부모로부터 시작합니다.  아프리카에선 온 아버지의 꿈, 그 꿈을 후원한 할아버지의 꿈, 그리고 대공황을 겪고 2차대전에 참전했던 외할아버지와 폭탄제조공장에서 일을 하며 어머니를 키운 외할머니의 삶과 그들의 꿈을 얘기하고, 그 꿈의 실현을 가능케 한 위대한 미국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청중을 감동시키는 이 통합의 메시지를 날립니다.    

"There is not a liberal America and a conservative America : There i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re is not a black America and white America and latino America and asian America : There i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대한민국의 1930년대생들도 오바마의 부모처럼 그런 꿈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그 자식세대들이 사회적, 집단적,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칭찬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폄하하고 부끄러워했던 적은 많은 것 같습니다.       

 국가가 뭘 해주는 것도 없던 1960년대, 자발적으로 가족과 마을을 살려냈던 1930년대생들, 박정희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는 1930년대생들,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1930년대생들. 이들은 서로 다른 1930년대생들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 그런 부분부분들이 혼재해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면서 그분들의 애국적인 청춘을 우리 사회가 기억하게 하는 일, 그래서 그 분들이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의 몫을 국가가 아니라, 박정희가 아니라 그 분들께 정당하게 돌려주는 일. 그들을 품어 안고, 세대간 통합을 통해, 이념 갈등의 감정의 골을 해체해버리는  일. 이 일이 제가 공화(共和)를 생각하면서 요즘 도모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끝.   

 

 

 

http://www.goodpol.net/discussion/progress.board/entry/210  

 

* 결론은, 어머니아버지한테 효도해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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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에 대한 이러저러한 세평자 가운데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사회디자인연구소 김대호 소장의 신간이 곧 나온다고 한다. 홈피에 올려놓은 신간의 에필로그를 모셔왔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탈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 등 지중해 연안에 남아있는 로마 유적지 사진을 보면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어 온 사람들의 사상, 정서와 영혼의 상태를 보는 듯하다. 지붕과 벽은 온데간데 없다. 기둥 몇 개가 이곳 저곳 허물어진 기초 위에 휑뎅그렁 서 있다. 주춧돌도 세월에 풍화된 채 어지러이 뒹굴면서 옛 로마의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진보를 열망하는 사람들 상당수에게는 한때 인류의 지혜와 양심의 총화로 여겨지던 사상이 있었다. 이는 청년 시절 조직적, 체계적 학습과 실천을 통해서 정립한 것이다. 이 장엄한(?) 사상 체계가 맞닥뜨린 20세기 후반의 세계사적 격변과 한국의 경제사회적 위기와 이십 년의 일상은 로마 유적에게 닥친 수 차례의 강진과 이천 년의 세월과 같은 것이었다. 한 때 거대한 신전처럼 여겨지던 사상 체계는 부서지고, 무너지고, 날라가고, 풍화되어 로마 유적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당연히 새로운 경험, 지식, 지혜를 받아들여 사상, 정서체계를 보수하고 재건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거대담론 자체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고, 같이 토론하던 조직도, 학습하던 문화도 사라져서 제대로 되지 않았다. 생활인들은 개별적으로 벌인 생존투쟁 중압 때문에, 학자들은 세분화 전문화 중압 때문에, 정치인과 시민운동가들은 정치공학으로 승승장구한 역사와 정치적(물질적) 이해관계 때문에 과거의 거대담론 체계를 기초부터 지붕까지 전면적으로 재건축 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 시장경제, 개방, 미국, 대한민국 등 우리가 서 있는 기본 질서와 역사를 과거처럼 전면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로마 유적으로 치면 남아 있는 몇 개의 기둥이자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가지고 있는 정서와 집착의 기둥에는 사회주의나 북한 식 자주. 자립 경제라는 지붕과 벽체가 붙어야 모양이 나오는데, 이는 어불성설! 그래서 소련, 중국, 북한이라는 대안이 있을 때는 만악의 근원으로 자본주의와 개방(대외의존) 경제를 지목하다가 이제는 신자유주의와 과도한 개방을 지목하게 되었다. 이런 주장은 당연히 대안 모델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한국 현실에서 작동가능성을 따져보지 않고 과거 사회주의의 이상을 가장 많이 간직한 북유럽 모델이나 독일식 사회적시장경제 모델을 대안으로 믿고 싶어한다. 미국과 교역의 확대로 인한 위험(대미 종속)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예민하지만, 중국, 유럽과 교역 확대로 인한 위험에 대해서는 너무 대범하고 둔감하다. 20~30년 전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종말이라고 했을 법한 경제금융 위기에 대해서 이제는 30년 신자유주의 체제의 종말이라고 소리친다. 마르크스, 케인즈, 하이에크와 대립각을 세운 사상가(칼 폴라니 등)에게서 혹시 뭐가 있나 해서 귀를 기울인다. 초기의 건강성을 잃은 지 오래인 북한과 노조운동에 대한 호감과 기대도 버리지 못한다. 이런 사상, 정서의 부조화가 낳은 진보의 기형아들이 바로 신자유주의 타령, 종북주의 논란,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가짜 진보를 망가뜨리면 진짜 진보가 뜬다’는 진보좌파들의 황당한 신념 등이다. 물론 보수의 기형아들의 모습은 지난 2년간의 문명역주행과 노무현 고문치사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들의 정서는 해방공간에서 서북청년단의 피해의식과 증오에서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내가 사십이 넘도록 꿈조차 꾸어본 적이 없는 사회디자이너(사상가, 정치가, 정책가)의 길을 가는 것은 사상, 정서 체계의 부조화와 폐허가 낳은 소모적 갈등을 2000년 전후한 시기의 대우자동차에서 보았기 때문이다.(이는 2009년 쌍용자동차에서도 보고 있다) 더 결정적으로는 2007년을 전후하여 참여정부와 범진보의 동반 몰락 과정에서 그 지독한 패악을 보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생전에 진보의 사상, 정서 체계와 그에 입각한 진보의 정치적, 정책적 행보의 문제점을 가장 선명하게 인식한 사람처럼 보인다. 대통령이 된 직후까지는 많은 386들처럼 자본주의, 시장경제, 개방, 미국, 대한민국을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 본 징후가 뚜렷하다. 북유럽사민주의와 노조운동과 (대화와 타협으로 굴러가는) 사회적 조합주의 등에 대한 호감과 집착도 강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80년대에 형성된 사상, 정서 체계가 현실과 심각하게 부딪히는 것을 보고 빠른 속도로 과거와 결별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체계를 세우지는 못했다. 그 위치상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퇴임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은 386과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어 온 사람들의 사상, 정서적 진화의 선봉 내지 정화(精華)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변절자 내지 얼치기로 비판해 온 진보좌파들도, 그를 떠 받드는 사람들조차 사상, 정서적으로는 노무현의 발치에도 아직 못 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지적인 고뇌와 갈증과 한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진보가 역사적 주도권을 쥐려면 노무현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발치에도 못 온 자들과 노무현 안에 머무는 자들이 진보의 주도권을 놓고 다툰다면 진보의 미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노무현이 학습 능력이 탁월했고, 아는 것은 대통령직을 걸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고 실천하는 사람이었기에 누군가 바른 길을 제시했다면 그 길을 갔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과문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정치 원로나 차세대 정치인이나 정치적 반대자 중에도, 참모나 지인 중에도, 석학과 고명한 종교인 중에도 그 길을 제시한 사람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저러한 소소한(?) 결점을 지적한 사람은 무수히 많았겠지만, 참여정부의 운명을 반전시킬만한 지식과 지혜를 가르쳐 준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바보 노무현과 바보 전태일의 이미지가 자꾸 겹쳐 보인다. 대단한 진정성과 실천력을 가진 전태일에게 노동법과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줄 대학생 친구가 없었듯이, 탁월한 진정성과 실천력을 가진 노무현에게도 그의 국가경영 안목을 확 깨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지식사회와 범진보는 전태일과 노무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개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를 충실히 수행한 정치세력이 국민의 외면을 받는다면, 그 한계와 오류는 그 중심에 있는 사람들 보다는 그 주변에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지켜본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는 경우가 많다. 국민들이 몽땅 치매에 걸렸나 의심할 정도면 확실히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 이력과 현재의 위치는 대체로 한국 산업, 사회, 정치의 ‘약한 고리’ 였던 만큼, 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핵심적인 모순. 부조리를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상대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던 사람으로서, 뒤늦게라도 노무현에게 진 빚을 일부라도 갚는다는 심정으로 썼다. 그가 가졌을 법한 의문과 본의 아니게 남긴 많은 숙제에 대해 내 나름대로, 아는 대로 답을 썼다. 

지중해 연안의 로마 유적 사진을 볼 때 내게 보이는 것은 진보의 사상, 정서 체계의 부조화와 폐허만이 아니다. 나를 정말로 비감하게 하는 것은 폭압과 몰상식에 맞서 분연히 떨쳐 일어난 자랑스런 ‘데모 세력’의 초심과 영혼의 폐허이다. 대다수 386들과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행복한 중년을 보내고 있지 않는 것 같아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다. 특히 여의도(현실 정치권)에는 원래 권력 의지가 강하고, 정치공학과 한탕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의 농도가 높아서 그런지, 사막과 같은 한국 특유의 정치생태계가 그 속에 오래 산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어 버려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정신과 행태에서 매력이 넘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오히려 한국 정치 특유의 ‘고위험 저수익’이라는 장벽 아닌 장벽에 기대어, 허접한 사람들의 정치 독점을 즐기려는 듯한 분위기도 느껴진다.  

386과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젊은 혈기에 ‘욱’하는 심정으로 ‘데모’를 잠깐 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정방향으로 굴리기 위해 온갖 유혹을 떨쳐내고 시대의 어둠과 장기간 조직적으로 싸웠던 사람임을 감안하면 중년이 되어 별로 행복해 뵈지 않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가방 끈이 짧고, 물질적으로 곤궁하고, 세속적 성취가 적은 것이야 우리의 숙명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지적으로 게으르고, 이념적으로 경직되고, 정신적으로 의연하지 못하고, 생활조차 건전치 못하다는 세평을 듣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세평이 오해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대로 가면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던 사람들은 모순.부조리에만 유달리 예민한, 분노와 고집이 센 사람들로 대중적으로 각인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역사의 주도권은 반역의 시대에도 제도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일찍 출세하여 편안하게 살아 온 사람들(주로 보수)이 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는 개인의 위기를 넘어, 정치의 위기이자, 민족사적인 위기이다. 한국은 오랜 고정 관념과 제도를 뒤집어 업는 대담한 정치적 상상력과 혁명적 열정과 희생정신이 수 십 년은 더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보수에게는 그런 상상력과 열정과 희생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1980년대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휘저은 진보적 사상, 이론 체계는 과학적으로도 엉성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문학적 깊이랄까, 영적인 깊이가 없었다. 성경, 불경, 중국고전 등 동서양 고전의 지혜와 담을 쌓아도 너무 쌓았다. 지난 몇 년 동안 형편없는 보수에게 당하고, 아직도 그 원인 조차도 모르고, 중년이 되어서도 행복하지도 않고, 앞 세대에서도 뒤 세대에서도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한국 진보와 386의 사상이론적, 영적 내공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물론 오늘날 북한의 참담한 모습도 마찬가지다.  

분명한 것은 보수의 자기 정당성의 근거가 진보의 지독한 시대착오성이고, 진보의 자기 정당성의 근거가 노무현을 고문치사시킨 보수의 지독한 몰상식이라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는 나라이다. 나는 보수든 진보든 반사이익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매력으로 역사의 주도권을 쥐려면 자신의 성공신화 이면에 있는 크고 짙은 그늘을 직시하고 이를 상대방 보다 먼저 시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대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눈에 있는 굵은 나무 들보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독특한 이중구조를 감안하면 진보는 ‘좌파신자유주의’ 2.0 버전을 실천하고(노무현의 그것이 1.0 이라면) 보수는 ‘우파사민주의’ 1.0 버전을 실천하는데서 희망이 시작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념 이전에 튼실한 인문학적 내공 내지 영적 내공을 갖춰야 할 것이다. 이념 이전에 매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노무현이 가진 그런 매력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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