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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무리하며-
이탈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 등 지중해 연안에 남아있는 로마 유적지 사진을 보면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어 온 사람들의 사상, 정서와 영혼의 상태를 보는 듯하다. 지붕과 벽은 온데간데 없다. 기둥 몇 개가 이곳 저곳 허물어진 기초 위에 휑뎅그렁 서 있다. 주춧돌도 세월에 풍화된 채 어지러이 뒹굴면서 옛 로마의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진보를 열망하는 사람들 상당수에게는 한때 인류의 지혜와 양심의 총화로 여겨지던 사상이 있었다. 이는 청년 시절 조직적, 체계적 학습과 실천을 통해서 정립한 것이다. 이 장엄한(?) 사상 체계가 맞닥뜨린 20세기 후반의 세계사적 격변과 한국의 경제사회적 위기와 이십 년의 일상은 로마 유적에게 닥친 수 차례의 강진과 이천 년의 세월과 같은 것이었다. 한 때 거대한 신전처럼 여겨지던 사상 체계는 부서지고, 무너지고, 날라가고, 풍화되어 로마 유적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당연히 새로운 경험, 지식, 지혜를 받아들여 사상, 정서체계를 보수하고 재건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거대담론 자체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고, 같이 토론하던 조직도, 학습하던 문화도 사라져서 제대로 되지 않았다. 생활인들은 개별적으로 벌인 생존투쟁 중압 때문에, 학자들은 세분화 전문화 중압 때문에, 정치인과 시민운동가들은 정치공학으로 승승장구한 역사와 정치적(물질적) 이해관계 때문에 과거의 거대담론 체계를 기초부터 지붕까지 전면적으로 재건축 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 시장경제, 개방, 미국, 대한민국 등 우리가 서 있는 기본 질서와 역사를 과거처럼 전면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로마 유적으로 치면 남아 있는 몇 개의 기둥이자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가지고 있는 정서와 집착의 기둥에는 사회주의나 북한 식 자주. 자립 경제라는 지붕과 벽체가 붙어야 모양이 나오는데, 이는 어불성설! 그래서 소련, 중국, 북한이라는 대안이 있을 때는 만악의 근원으로 자본주의와 개방(대외의존) 경제를 지목하다가 이제는 신자유주의와 과도한 개방을 지목하게 되었다. 이런 주장은 당연히 대안 모델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한국 현실에서 작동가능성을 따져보지 않고 과거 사회주의의 이상을 가장 많이 간직한 북유럽 모델이나 독일식 사회적시장경제 모델을 대안으로 믿고 싶어한다. 미국과 교역의 확대로 인한 위험(대미 종속)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예민하지만, 중국, 유럽과 교역 확대로 인한 위험에 대해서는 너무 대범하고 둔감하다. 20~30년 전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종말이라고 했을 법한 경제금융 위기에 대해서 이제는 30년 신자유주의 체제의 종말이라고 소리친다. 마르크스, 케인즈, 하이에크와 대립각을 세운 사상가(칼 폴라니 등)에게서 혹시 뭐가 있나 해서 귀를 기울인다. 초기의 건강성을 잃은 지 오래인 북한과 노조운동에 대한 호감과 기대도 버리지 못한다. 이런 사상, 정서의 부조화가 낳은 진보의 기형아들이 바로 신자유주의 타령, 종북주의 논란,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가짜 진보를 망가뜨리면 진짜 진보가 뜬다’는 진보좌파들의 황당한 신념 등이다. 물론 보수의 기형아들의 모습은 지난 2년간의 문명역주행과 노무현 고문치사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들의 정서는 해방공간에서 서북청년단의 피해의식과 증오에서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내가 사십이 넘도록 꿈조차 꾸어본 적이 없는 사회디자이너(사상가, 정치가, 정책가)의 길을 가는 것은 사상, 정서 체계의 부조화와 폐허가 낳은 소모적 갈등을 2000년 전후한 시기의 대우자동차에서 보았기 때문이다.(이는 2009년 쌍용자동차에서도 보고 있다) 더 결정적으로는 2007년을 전후하여 참여정부와 범진보의 동반 몰락 과정에서 그 지독한 패악을 보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생전에 진보의 사상, 정서 체계와 그에 입각한 진보의 정치적, 정책적 행보의 문제점을 가장 선명하게 인식한 사람처럼 보인다. 대통령이 된 직후까지는 많은 386들처럼 자본주의, 시장경제, 개방, 미국, 대한민국을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 본 징후가 뚜렷하다. 북유럽사민주의와 노조운동과 (대화와 타협으로 굴러가는) 사회적 조합주의 등에 대한 호감과 집착도 강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80년대에 형성된 사상, 정서 체계가 현실과 심각하게 부딪히는 것을 보고 빠른 속도로 과거와 결별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체계를 세우지는 못했다. 그 위치상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퇴임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은 386과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어 온 사람들의 사상, 정서적 진화의 선봉 내지 정화(精華)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변절자 내지 얼치기로 비판해 온 진보좌파들도, 그를 떠 받드는 사람들조차 사상, 정서적으로는 노무현의 발치에도 아직 못 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지적인 고뇌와 갈증과 한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진보가 역사적 주도권을 쥐려면 노무현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발치에도 못 온 자들과 노무현 안에 머무는 자들이 진보의 주도권을 놓고 다툰다면 진보의 미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노무현이 학습 능력이 탁월했고, 아는 것은 대통령직을 걸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고 실천하는 사람이었기에 누군가 바른 길을 제시했다면 그 길을 갔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과문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정치 원로나 차세대 정치인이나 정치적 반대자 중에도, 참모나 지인 중에도, 석학과 고명한 종교인 중에도 그 길을 제시한 사람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저러한 소소한(?) 결점을 지적한 사람은 무수히 많았겠지만, 참여정부의 운명을 반전시킬만한 지식과 지혜를 가르쳐 준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바보 노무현과 바보 전태일의 이미지가 자꾸 겹쳐 보인다. 대단한 진정성과 실천력을 가진 전태일에게 노동법과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줄 대학생 친구가 없었듯이, 탁월한 진정성과 실천력을 가진 노무현에게도 그의 국가경영 안목을 확 깨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지식사회와 범진보는 전태일과 노무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개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를 충실히 수행한 정치세력이 국민의 외면을 받는다면, 그 한계와 오류는 그 중심에 있는 사람들 보다는 그 주변에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지켜본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는 경우가 많다. 국민들이 몽땅 치매에 걸렸나 의심할 정도면 확실히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 이력과 현재의 위치는 대체로 한국 산업, 사회, 정치의 ‘약한 고리’ 였던 만큼, 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핵심적인 모순. 부조리를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상대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던 사람으로서, 뒤늦게라도 노무현에게 진 빚을 일부라도 갚는다는 심정으로 썼다. 그가 가졌을 법한 의문과 본의 아니게 남긴 많은 숙제에 대해 내 나름대로, 아는 대로 답을 썼다.
지중해 연안의 로마 유적 사진을 볼 때 내게 보이는 것은 진보의 사상, 정서 체계의 부조화와 폐허만이 아니다. 나를 정말로 비감하게 하는 것은 폭압과 몰상식에 맞서 분연히 떨쳐 일어난 자랑스런 ‘데모 세력’의 초심과 영혼의 폐허이다. 대다수 386들과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행복한 중년을 보내고 있지 않는 것 같아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다. 특히 여의도(현실 정치권)에는 원래 권력 의지가 강하고, 정치공학과 한탕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의 농도가 높아서 그런지, 사막과 같은 한국 특유의 정치생태계가 그 속에 오래 산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어 버려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정신과 행태에서 매력이 넘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오히려 한국 정치 특유의 ‘고위험 저수익’이라는 장벽 아닌 장벽에 기대어, 허접한 사람들의 정치 독점을 즐기려는 듯한 분위기도 느껴진다.
386과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젊은 혈기에 ‘욱’하는 심정으로 ‘데모’를 잠깐 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정방향으로 굴리기 위해 온갖 유혹을 떨쳐내고 시대의 어둠과 장기간 조직적으로 싸웠던 사람임을 감안하면 중년이 되어 별로 행복해 뵈지 않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가방 끈이 짧고, 물질적으로 곤궁하고, 세속적 성취가 적은 것이야 우리의 숙명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지적으로 게으르고, 이념적으로 경직되고, 정신적으로 의연하지 못하고, 생활조차 건전치 못하다는 세평을 듣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세평이 오해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대로 가면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던 사람들은 모순.부조리에만 유달리 예민한, 분노와 고집이 센 사람들로 대중적으로 각인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역사의 주도권은 반역의 시대에도 제도권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일찍 출세하여 편안하게 살아 온 사람들(주로 보수)이 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는 개인의 위기를 넘어, 정치의 위기이자, 민족사적인 위기이다. 한국은 오랜 고정 관념과 제도를 뒤집어 업는 대담한 정치적 상상력과 혁명적 열정과 희생정신이 수 십 년은 더 필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보수에게는 그런 상상력과 열정과 희생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1980년대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휘저은 진보적 사상, 이론 체계는 과학적으로도 엉성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문학적 깊이랄까, 영적인 깊이가 없었다. 성경, 불경, 중국고전 등 동서양 고전의 지혜와 담을 쌓아도 너무 쌓았다. 지난 몇 년 동안 형편없는 보수에게 당하고, 아직도 그 원인 조차도 모르고, 중년이 되어서도 행복하지도 않고, 앞 세대에서도 뒤 세대에서도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한국 진보와 386의 사상이론적, 영적 내공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물론 오늘날 북한의 참담한 모습도 마찬가지다.
분명한 것은 보수의 자기 정당성의 근거가 진보의 지독한 시대착오성이고, 진보의 자기 정당성의 근거가 노무현을 고문치사시킨 보수의 지독한 몰상식이라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는 나라이다. 나는 보수든 진보든 반사이익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매력으로 역사의 주도권을 쥐려면 자신의 성공신화 이면에 있는 크고 짙은 그늘을 직시하고 이를 상대방 보다 먼저 시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대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눈에 있는 굵은 나무 들보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독특한 이중구조를 감안하면 진보는 ‘좌파신자유주의’ 2.0 버전을 실천하고(노무현의 그것이 1.0 이라면) 보수는 ‘우파사민주의’ 1.0 버전을 실천하는데서 희망이 시작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이념 이전에 튼실한 인문학적 내공 내지 영적 내공을 갖춰야 할 것이다. 이념 이전에 매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노무현이 가진 그런 매력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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