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디자인연구소 홈피 '좋은정치포럼'에서 흥미로운 글이 있어서 모셔왔다.)   

 

 

1930년대생, 그들의 대한민국 / 신동진 (2009.7.15) 

 4.19세대는 1930년대생입니다.  대학을 ‘우골탑’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4.19세대가 대학을 다닐 즈음 생겨난 말입니다.  5급공무원을 시험으로 뽑을 때는 1930년대생이 사회에 진출할 시기였습니다.  육사 11기, 그들은 육사 첫 4년제 정규기수였습니다.  전두환이 1931년생입니다.  신군부의 핵심세력들 육사 11기~18기. 이들이 1930년대생입니다.  MB의 멘토라는 최시중, 이상득 그리고 박희태, 이회창 모두 1930년대생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얘기하고 싶은 1930년대생은 그런 1930년대생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얼마 전 <그들의 새마을운동 - 김영미 지음. 푸른 역사 2009.6.15 刊>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결론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있기 전에 이미 ‘새마을’과 그 ‘새마을’을 만든 ‘새농민’이 있었다”입니다.   그 ‘새농민’들이 바로 제가 지금 얘기하고 싶은 1930년대생입니다.  책의 내용을 좀 더 소개하겠습니다.   

  1930년대생은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적인 고등교육 수혜자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불어닥친 전국적인 교육열로 서울로 올라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도시를 경험한 세대입니다.  이들 중 대학진학이 어려운 이들 또는 의식적으로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둔 이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을 바꿉니다.   

  문맹률이 70~80%인 시절,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이들은 마을의 엘리트였습니다.  이들은 곧 마을리장의 세대교체를 이뤄냅니다.  김영미가 조사한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아미리의 경우를 보면, 1960년에 30대가 리장이 된 후 1976년까지 5명의 리장이 모두 1930년대생입니다. 한 마을의 근 20년을 1930년대생이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새마을운동이 있기 10여년전부터 씨족 갈등 타파, 미신, 문맹퇴치, 도박근절, 폐풍개선, 협동조합 결성 등을 통해 마을개량을 자발적으로 해나갔습니다.  수백년 아니 수천년을 내려왔던 전통을 ‘근대화, 도시화’라는 이름으로 뒤엎은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세대.  그들이 1930년대생이었습니다.   

  1969년 8월4일 박정희는 경북 청도 수해복구 순시 중 넓은 길, 개량된 지붕, 담장을 한 신도1리 마을을 발견합니다. 원인을 파악해보니 앞서 얘기한 그런 지도자, '새농민'이 있었습니다.  이런 선진적인 새 농민을 ‘발견’한 박정희는 전국 33,267개 리.동에 시멘트 335부대를 지원하는 실험적인 조치를 합니다.  건설 경기 부진으로 남아도는 시멘트로 ‘새마을’을 걸러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년 뒤 내무부 조사결과 16,600개의 리, 동이 기대이상의 사업 수행을 했음이 확인됩니다.  전국 농촌의 50%에 이미 ‘새농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도시에서의 취직과 출세의 길을 버리고 농촌사회의 변화를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은 1930년대생들이었습니다.  당시 청년들은 신이 나서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마을 일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하는 등 누구도 막지 못할 정도의 자발성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아무런 대가가 없어도 부지런히 마을 일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경기도 장호원의 이재영이라는 분입니다. 경복고등학교 재학 당시 전교1,2등, 역도부장 그리고 서울시학도연맹회장까지도 역임했던 이재영은 고2때 모친이 변변한 약도 못쓰고 고향에서 돌아가시자, 농촌계몽운동가로서 삶을 선택합니다.  졸업 후 애향청년회(전국회원 3천여명)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강연을 다닙니다.  그러나 이상촌 건설 등을 문제삼는 정치적 탄압으로 군에 입대하고, 애향청년회는 해체됩니다.  제대 후 농협에 들어가 농협 개혁에 앞장서고, 그가 만든 장호원구판장은 전국 최초 농협연쇄점이 됩니다. 조합장 선거과정에서 공화당 후보와 맞서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매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새마을 지도자를 찾는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1972.3.6 박정희와 국무위원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합니다. 박정희는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국민포장을 주고 청와대에 신설할 새마을추진실 실장직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이재영이라는 분, 조합원을 배신할 수 없다며 그 자리를 고사합니다.  이후 1981년까지 장호원의 조합장으로서 마을발전에 주력했습니다.   

  1930년대생의 의미.  제 경험세계 속에서 좀 더 생각을 진전시켜 봤습니다.  서울로 와서 공부를 하든, 돈을 벌든 해서 자리를 잡으면 시골의 동생, 조카 등 친지들을 서울로 불러올려 공부든, 돈 벌이든 지원해주는, 씨족공동체를 책임지는 역할을 했던 분들의 모습은 제 또래의 부모세대들 모습이었습니다.  모두 1930년대생들이었습니다.  경상남도와 충청남도에서 나고 자라 서울에서 만나 결혼을 하고 자수성가를 하고 친가, 외가를 서울로 불러올렸던 제 부모도 1930년대생이십니다.    

  1930년대생의 자식세대는 소위 386세대입니다.  ‘386’이라고 따로 특정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세대들이 갖고 있었던 애국, 애족, 희생의 민주화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주력세대인 386세대는 진보적 세대의 대명사로 불려집니다.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1930년대생과 그 자식세대인 386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70대에 해당하는 1930년대생에 대한 386의 평가는 어떨까요?   

  386과 시대정신을 공유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선언에 등장하는 386 부모는 ‘얘야 나서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라며 비겁할 것을 종용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 표현이 그리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큰 반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386세대의 그 부모세대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독재’, ‘비겁’, ‘반칙’, ‘기회주의’ 뭐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자기 부모에게 대놓고 이렇게 얘기를 하지는 않겠으나 공적인 영역에서 내려지는 집단적 평가는 그렇다고 봅니다.   

  가장 호평을 받고 싶은 자기 자식들에게서 1930년대생들은 가장 악평을 받은 꼴입니다. 그렇다면 1930년대생들의 386에 대한 감정은?  한마디로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감정을 극대화 시켜서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이 바로 ‘정동영의 노인 폄하 발언’ 사건일 것입니다.  지난 총선 때인가요?  정청래 전 의원도 이 비슷한 경우로 곤혹을 치른 기억이 납니다.   ‘386 정권’이라고도 불렸던 참여정부 때 특히 이념갈등이 세대갈등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은 이런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그들의 새마을운동>의 작가 김영미씨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주로 구술에 의존해 사회사를 새로 구성하는 그의 말에 의하면, 1930년대생들은 매우 건강한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치 얘기만 나오면 바로 싹 경직된 태도를 보인다고 합니다.   소위 꼴통보수의 태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임근준이라는 문화평론가는 최근 “현재 한국사회는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의 갈등 속에 있는 듯 뵈지만, 사실 이는 이념의 탈을 쓴 세대갈등에 가깝다” (주간한국 2009.6.22) 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1930년대생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면서, 저도 그런 주장에 동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몇 가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o 1930년대생들은 꼴 같지 않은 나라의 꼴을 세운 세대, 즉 국체(國體)를 만든 세대다.  그 자식세대인 386세대는 나라의 품격, 즉 국격(國格)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세대다. 지금의 이념갈등화한 세대갈등은 나라(國)를 사이에 둔 양보할 수 없는, 물러설 수 없는 애국(愛國)의 충돌이다.  이것은 공화주의적 애국의 충돌이다.  대한민국이 나라의 체격(體格)을 함께 키워야할 이 시점에 이 이념갈등은 두 세대가 서로의 애국심을 서로 신뢰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o 1930년대생들과 그 자식세대인 1960년대생들의 갈등은 엄마(母國)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아들의 외디푸스 콤플렉스, 그리고 집안 내 부모자식 간 소통부재, 소통단절이 사회정치현상화된 것은 아닐까?   

o 1960년대에 '새농민'들이 지키고 만들었던 그 공동체는 자본주의적 공동체일까? 사회주의적 공동체일까? 이런 이념적 잣대로 그들의 농촌계몽운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이 만든 것은 이념이 무색한, 더 나은 삶을 위한 공생의 공동체이지 않았을까?  그들의 그 건강한 공동체의식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남아있을까?    

 오바마를 미국의 스타로 만들었던 2004년 대선 찬조 연설. 그 때 오바마는 연설의 시작을 자신의 부모로부터 시작합니다.  아프리카에선 온 아버지의 꿈, 그 꿈을 후원한 할아버지의 꿈, 그리고 대공황을 겪고 2차대전에 참전했던 외할아버지와 폭탄제조공장에서 일을 하며 어머니를 키운 외할머니의 삶과 그들의 꿈을 얘기하고, 그 꿈의 실현을 가능케 한 위대한 미국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청중을 감동시키는 이 통합의 메시지를 날립니다.    

"There is not a liberal America and a conservative America : There i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re is not a black America and white America and latino America and asian America : There i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대한민국의 1930년대생들도 오바마의 부모처럼 그런 꿈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그 자식세대들이 사회적, 집단적,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칭찬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폄하하고 부끄러워했던 적은 많은 것 같습니다.       

 국가가 뭘 해주는 것도 없던 1960년대, 자발적으로 가족과 마을을 살려냈던 1930년대생들, 박정희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하는 1930년대생들,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1930년대생들. 이들은 서로 다른 1930년대생들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 그런 부분부분들이 혼재해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면서 그분들의 애국적인 청춘을 우리 사회가 기억하게 하는 일, 그래서 그 분들이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의 몫을 국가가 아니라, 박정희가 아니라 그 분들께 정당하게 돌려주는 일. 그들을 품어 안고, 세대간 통합을 통해, 이념 갈등의 감정의 골을 해체해버리는  일. 이 일이 제가 공화(共和)를 생각하면서 요즘 도모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끝.   

 

 

 

http://www.goodpol.net/discussion/progress.board/entry/210  

 

* 결론은, 어머니아버지한테 효도해야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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