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9.12.15 01:58 인쇄하기

모든 사건에는 바로 이 분이 계셨더랬다!



2009.12.17.목요일

화성

 

현재 검찰내에서 한명숙 전총리에 대한 수사를 담당하고 있는 부서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권오성 부장검사)이고, 이 특수2부를 이끄는 수장은 서울중앙지검 김주현 3차장 검사다. 1차장도, 2차장도 아닌 3차장이라고 하니까 왠지 한직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이 3차장이야말로 이론의 여지조차 없는 승진 0순위 자리다.

상대적으로 수사의 규모나 내용 면에서 화려할 수 밖에 없는 특수부(1,2,3부)가 배속되어 있고, 지근거리에서 중앙지검장을 수행하는데다, 서울중앙지검 대언론 브리핑을 전담하다시피 하므로 비교적 유명세를 타기도 쉽기 때문이다.(지금까지 서울중앙지검 3차장을 거친 검사들은 대부분 검사장으로 승진했다.)

 



서울중앙지검 3차장 김주현 검사

 

그런데, 김주현 검사의 경력을 보면(대검 기획과장- 법무부 감찰과장 - 중앙지검 형사 1부장 - 법무부 대변인)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라는 요직중의 요직을 차지하기엔 뭔가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3차장이 된 인물들은 주로 일선 현장의 수사를 활발히 지휘하여 뭔가 큰 껀수를 건져올린 특수부 출신들이 맡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접한 내가 모르는 특출한 능력이 있었기에 현명하신 가카의 눈에 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가 그동안 어떤 사건을 맡아서 어떻게 수사를 해 왔는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살펴봤다. 혹시라도 고매하신 김주현 검사 영감님의 명예에 작은 해라도 끼칠까 심히 염려되어(사실 졸라 쫄아서) 사적인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뉴스화 된 기사로만 배열하고자 한다. 

 




서울중앙지검은 22일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유족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사건을 형사1부(김주현 부장검사)에 배당하고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검찰 수사팀은 고소인 조사, 남 전 사장의 변사(變死)기록, 당시 수사기록 등을 먼저 검토한 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직접 조사가 필요한지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서울중앙지검의 A부장검사는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남 전 사장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는 없어도, 전 국민이 보는 TV 기자회견에서 한 사인(私人)을 비방조로 언급한 것은 명예훼손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밝고 바른 인터넷신문 자유로포럼 2008/12/23 )  --->  2009. 6.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사건 종결.



 

서울중앙지검의 A부장검사는 ... 설마 김주현 부장검사?

만약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으셨더라면... 명예훼손으로 구속이 되셨겠군... 

 

 

 



 






이동관 대변인, 춘천 땅 보유 농지법 위반 시인… 대국민 사과

"땅 팔겠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김주현 부장검사)는 24일 불법 농지 취득 혐의로 민주당이 고발한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이 대변인과 명의자인 부인이 구체적으로 토지 취득 과정에 관여한 바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 불법으로 농지를 취득했다는 농지법 위반 부분은 지난 2007년 12월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고 그 과정에서 허위서류를 작성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본인 명의의 서류여서 허위로 보기 어려워 문서위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2008/12/25 인터넷 한국일보) 


 


'구체적으로' 토지 취득에 관여한 바가 없는 것으로 확인 됐다? 

그럼 '구체적으로' 관여한 부동산 중개업자를 처벌해야 하는거 아냐?

 

 

 



 






'화해'와 '용서'를 강조했던 故 김대중 전 대통령도 생의 끈을 놓는 순간까지도 끝내 용서하지못한 인물이 바로 이주성영 의원이시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장검사 김주현)는 김 전 대통령 측이 출판물 등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주 의원을 고소한 사건과 관련, '주 의원이 CD가 김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라고 믿을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보고 명예훼손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릴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2009.2.5 아침신문)







 

그러니까... 주 의원이 CD가 김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라고 '믿을 만한' 사정 의 그 사정이 대체 무슨 사정이냐고?

 

(앞의 기사에서... 고 노무현 전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명백한 비리 사실은 '믿을만한' 사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거지?)

 

 



 

2009년 2월 법무부 대변인으로 인사발령... 난지

단 6개월 만에

 



 

 

 

2009년 8월 25일 서울중앙지검 3차장으로 인사발령

 

 

그리고...

 

 

 



 




검찰이 지난 2009년 4월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인 조석래(74) 효성그룹 회장을 ‘효성건설 비리’ 등과 관련해 비공개 소환 조사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러나 검찰은 조 회장을 상대로 국외법인을 이용한 비자금 조성 의혹 등은 조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부실 수사’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민주당 박지원·박영선 의원은 15일 서울중앙지검에서 노환균 지검장과 김주현 3차장을 면담한 뒤 기자들에게 검찰의 설명 내용을 전하며 이렇게 밝혔다. 박영선 의원은 “검찰이 조 회장을 어떤 자격으로, 얼마 동안 조사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참고인 자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그동안 조 회장의 소환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으며, 검찰이 조 회장을 조사한 시기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수사에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던 때였다. .......

 



사돈인 이명박 가카와 환담하는 조석래 효성 회장


박영선 의원은 “(검찰은 핵심 의혹을 수사하지 않은 이유가) ‘단서가 없어서, 찾을 수 없어서’라고 했다”며 “(조 회장의 큰아들인 조현준 ㈜효성 사장의 미국 부동산 구입에 대해서는) 사실 여부를 확인중이고, 단서가 잡히면 수사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검찰에 압수수색을 안 한 이유를 물으니 ‘효성이 미리 자료를 다 제출해서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며 “해외 자금 유출과 관련해선 핵심 인물인 (효성아메리카의) 유아무개 상무도 소환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2009.10.15 한겨레신문)

 



서울 중앙지검을 상대로 한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장에서 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효성그룹과  관련한 5대 의혹 사건에 대해 검찰이 축소 수사를 했다고 질타하고 있다.




 

누구는 명백한 혐의와 증인,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공개 소환조사를 하고(그것도 6개월 후에나 어쩔 수 없이 슬며시 밝히고) ... 누구는 오락가락하는 진술 하나만 가지고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소환장을 발부하면서 전 언론에 떠들어 대고...  

 

 



 




최욱경 화백의 그림 ‘학동마을’을 둘러싼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그림로비 의혹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있다. 한 전 청장의 측근이었던 장모씨가 검찰조사에서 그림을 한 전 청장이 직접 구입했으며 구입비도 지급했다는 진술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 그림을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해온 한 전 청장의 주장과는 배치된다. 한 전 청장은 지난달 26일 미국 뉴욕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도 학동마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어물쩍 넘겼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권오성)는 장씨의 진술을 바탕으로 한 전 청장에 대한 직접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한 전 청장에 대한 범죄인인도청구 여부를 놓고 검토 작업을 벌이고 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3일 “그림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한 전 청장에 대한 직접 소환조사를 해야 한다”며 “그를 귀국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2009.12.03. 21:39 국민일보 쿠키뉴스) 

 



사건을 접하고나서 작품을 대해서 그런지 이 작품의 제목이

학동마을이 아니라 '학똥마을'처럼 느껴진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권오성)...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혹시?


 

 



 




대한통운 비자금 조성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권오성)는 3일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기소된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게 2007년 무렵 수만달러를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 대가성 여부를 수사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곽 전 사장이 2007년 4월 한국전력공사의 자회사인 한국남동발전 사장으로 선임된 점에 주목, 이 돈이 사장 선임을 도와주는 대가로 준 것인지 아니면 불법 정치자금인지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9.12.04 02:19 조선닷컴)




역시나 ... 두 사건 모두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를 이끄는

김주현 3차장 검사님의 작품이군.

혹시... 한청장, 한총리... 두사람 모두 같은 성씨이기 때문에

한사람이 수사를 하는 건가.

  

근데 더 놀라운 건 기사가 입력된 날짜와 시간이다.

2009년12월3일 저녁 21:39에 국민일보 쿠키뉴스에서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그림로비 의혹이 한청장 측근의 진술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쓰자...

 

그로부터 몇 시간 뒤인 2009년 12월 4일 새벽 2시 19분 조선닷컴에선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뇌물 수수 기사가 처음으로 나온다.

설마... 우연이겠지. 

 

한명숙 전총리 사건과 한상률 전청장 사건을 김주현 3차장 휘하의 특수 2부가 맡고 있는 것도, 한 전청장의 비리혐의가 까발려지자마자 곧바로 한 전총리에 대한 조선일보의 특종이 나온것도...

그래, 다 우연일 것이다.

.

.

 

.... 한편 서울중앙지검 김주현 3차장검사는 한명숙 전 총리 사건과 관련해 "피의사실을 공표하거나 절차에 위배되는 일은 한 적이 없다"며 "검찰이 수사를 흘릴 이유가 눈꼽 만큼도 없다"고 했다.

 

난 김주현 검사의 이말을 믿는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동안 그가 걸어온 행적을 볼 때 그것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삽질을 한다는 가카의 말씀 만큼이나 신빙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가 만약 검찰의 수사를 조선일보에 은밀히 흘린 거라면 저렇게 완벽한 시간차(?) 공격이 나올 수가 없다고 본다. 저건 단순히 오줌 몇 방울 흘린게 아니라 둘의 치밀한 계획 하에 정조준하여 싸주시고 마지막 한방울까지 정성스레 털어 준 합작품인 것이다.

 


검사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오줌만이 아니다. 

 

내년 지방선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조선일보 한 귀퉁이에는 분명 이런 기사가 뜰 것이라는데 100원 건다. 

 

'김주현 3차장 검사, 검사장으로 영전...'

  

크리스마스도 다가오고 하니 김주현 검사님께 미리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영감, 착한 일 많이 하셨으니 복 받으실게요. 부디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졸라 오래 사시길...

 

 

입력:2009.12.15 01:58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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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골의 '외투'가 말해주는 것

 5:55부터 나오는 눈보라 소리 러시아 가면 정말로 들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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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9-12-19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9년작은 26년작보단 그래도 친숙합니다.^^

Sati 2009-12-19 14:32   좋아요 0 | URL
26년작 무성영화라서, 이거 찾았어요. 오늘은 이걸로 소일을 할까봐요.^^
그런데 감독이 알렉세이 바탈로프...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의 옴므파탈 '고가'네요!

로쟈 2009-12-19 22:59   좋아요 0 | URL
설마요?^^

Sati 2009-12-19 23:45   좋아요 0 | URL
찾아봤는데, 맞아요^^

http://ru.wikipedia.org/wiki/%D0%91%D0%B0%D1%82%D0%B0%D0%BB%D0%BE%D0%B2_%D0%90.

Режиссёрские работы
1959 — Шинель
1966 — Три толстяка
1972 — Игрок
 

* 늙었나부다... 이런 이야기 들으면 눈물이 난다. 혼자 소주라도 한 잔 해야하나. 할 일은 태산이고...



입력:2009.12.12 17:34 

노무현 아래서 군생활을 한다는 것



2009.12.14.월요일

정치불패 강호의주윤발

 

부모님의 눈물과 여자친구의 떨리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보무 당당히2004년 시작의 그 때 강원도로 입대를 했다. 나는 좀 돌아이 기질이 있어서 내가 군인이 된다는 사실에 너무 뿌듯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근데, 어라. 이러저러 하다보니 난 충주의 경찰학교에서 전투경찰로 만들어 지고 있었다. 그래. 착출된거다 ㅡ.ㅡ;;

 

진압중대에 배치받고 정신없이 얻어 맞고, 정신없이 욕 먹고, 정신없이 갈굼 당하다가 보름 만에 첫 시위진압에 나섰다. 그 닭장차 안에서 이뤄지는 수 많은 구타들과 분위기에 감상 따위는 없이 그냥 악몽을 꾸는 것 같은 느낌으로 첫 시위현장에 도착했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쇠파이프로 얻어 맞는 고참들을 지켜보며 다리가 후들후들 거리는 '죽음의 공포'를 대면했다. 저 멀리 방송차에서 들려오는

 

"철의 노동자~~" 

 

눈 앞에는 마스크 쓴 아저씨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런 지옥불 같은 상황에 내가 왜 서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첫 시위현장을 경험하고 부대로 복귀하면서 닭장차 안에서는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풀어 주니까 긴장을 안한다"는 말로 고참에서 중간으로 중간에서 막내로 계속 퍽퍽 소리가 났다. 부대에 도착하니 바로 훈련..

 

말이 훈련이지 몇 시간을 연병장 뛰면서 고참들에게 얻어 맞는게 훈련이다.

 

대략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대부분의 전의경들은 노동권, 진보에 대한 적개심이 커 진다.

 

나도 초반에는 그랬다. 우리가 먼저 때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 가만히 서 있는데 와서 몽둥이 찜질을 하고 조금이라도 정당방위하면 "폭력경찰 물러가라"며 난리가 난다.

 

중대장도 소대장도, 무전으로 듣는 그 높은 현장지휘자도 대부분

 

"시위대한테 말하지 말 것", "인내진압", "성추행 시비 붙을 모든 진압 금지" 등등..

 

지휘부는 전의경에게 일방적 인내를 지시했고 거기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경찰이 시위대를 조심하는..

 

한 두달에 한번은 경력(군대의 병력)보다 시위대의 숫자와 폭력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안전하게 막을 수 없는 데모가 발생했다. 이런 날도 많은 경우

 

"공격적 진압"을 할 수 없었고 출동할때 120명이 복귀하면 80명 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의 부상은 다뤄지지도 않고 시위대 몇명의 입원은 크게 보도 되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경찰은 맞아도 관심 받지 못하는..

 

짬밥이 안될때는 군기에 숨도 못 쉬고 새벽부터 밤 까지, 때로는 숙영을 하면서 때로는 닭장차 안에서 몇일을 보내는 일이 계속 되니까 시위대에 대한 적개심만 가득했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나도 고참이란게 되고 두명이 나를 쇠파이프로 때려도 방패로 거뜬히 막을 수 있는.. 써먹지 못할 경력이 쌓이고 나니 슬퍼지기 시작했다.

 

 "왜 진보는, 왜 노동권은 아직도 쇠파이트와 죽봉을 흔들어 대는가??"

 

어떤 날은 시위가 너무 격해서 현장 지휘부에서 시위대에 공격적 진압을 하고 흩어버리고 몇명을 연행하라는 지시가 떨어 졌다. 옆에서 피흘리며 주저 않은 동료와 장시간의 폭력에 독이 올라버린 대원들은 "공격 앞으로"를 외치며 튀어 나갔고 결국 5명 정도를 잡아서 경찰서로 보냈다.

 



 

시위대도 해산되고 우리는 부대로 복귀하는 닭장차에서 눈을 감았다.

 

무전기 : "띠리리~ xx중대 xx경찰서 정문 상황 출동"

 

닭장차에서 씨바씨바 욕이 튀어나오고 현장에 도착했다. 아까 그 민주노총 깃발을 흔들던 그 무리가 그대로 경찰서 앞에 와서 닫혀있는 철문을 부수고 있었다. 폭력경찰 물러가고 연행자 석방하라며 경찰정문을 부수고 페인트를 뿌리고 불을 붙이고 난장판이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경찰서 정문에 방화 해도 문제가 안되는..

 

늦은 밤이 되자 시위대가 박수를 치면서

 

"민주노동당 누구누구 의원님이 지금 내려 오신다"며 우리에게 조롱을 보내고 정말 거짓말 처럼 우리는 닭장차에 타서 사람들 눈에 안보이는 곳으로 이동하고 연행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민노당 국회의원 온다고 하면 경찰이 바로 꼬리내리는..

 

제대를 얼마 안남기고 여의도에서 농민대회가 있었고

이전과 비슷한 지옥의 하루를 보냈다. 쇠파이프 돌맹이 각목을 막아 가며 그 수 많은 농민과 전문 데모꾼들에게 둘어 쌓여 후임병들이 쓰러져가는 걸 봐야했다.

 

그 넓은 공간에서 벌어진 "활극"은 전의경 수백명이 부상당하고 시위대는 두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사건으로 번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는 나중에 알았다.

 

과연 사과할 일인가?  아니다. 사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누구도 경찰을 그렇게 죽도록 때려도 된다는 권리도 없고 우리가 죽을때 까지 맞고만 있어야할 의무도 없었다.

 

당시 전경인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제대후 읽은 대통령 사과전문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만.

 

근데 노무현 대통령은 사과를 했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했던 박준형 경찰총장은 사퇴하게 된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어떤 상황이라도 사고가 생기면 대통령이 사과하는..

 

농민대회 다음 날이던가 .. 우리는 중대원 30여명을 병원에 두고서 나머지를 끌어 모아 부산으로 갔다. 삼국지 "장판교"의 대결처럼 에이펙 정상회의 장소로 들어가는 다리를 막아섰고 시위대와 우리 사이에는 컨테이너가 막고 있었다. 컨테이너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공포와도 같은 소리가 계속 들려왔고 컨테이너 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압중대들은 각자 고유의 구호를 외치며 서로 기죽지 않겠다는 긴장감을 표현했다.

 

결국 컨테이너는 시위대가 준비한 갈고리에 바다로 떨어졌고.

 

컨터이너가 바다에 떨어지는 소리 들어 본적 있는가? 꽤 무섭다.

 

눈 앞에서 컨터이너 위에서 물을 쏘던 대원이 아스팔트로 추락하는 것을 봤다. 곧 죽봉이 날아들었고....

 

이렇게 전쟁터에서나 자주 등장한다는 아드레날린의 흥분을 실컷 겪고나서 나는 제대를 했다.

 

나는 왜 나의 군생활을 이야기 하는가?

 

너무도 명예롭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안그랬는데 지나보니까 그렇더라. 우리는 인내했고,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게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둔 공권력 최말단의 비극이었고 이 비극은 나에게 명예로 남아 있다.

 

권력이 극단적인 물리력으로 대드는 세력에 대해서 인내하고 관용한다는 것.

세상에 이것 만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는가?

 

'약자에게 약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의로운 행동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한다. 그걸 때로는 정신승리법이라도고 부른다. 지금은 아무도 쇠파이프를 들지 않는다. 아무도 중앙매체에 나와 대통령을 조롱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들만의 골방같은 매체에 갇혀 자신을 기만한다.

 

"이명박 정권이 불쌍하다"

 

"2년을 못넘길 것이다"

 

노무현정부에 쇠파이프를 들고 저항했을때는 분명 대의가 있었을 것이다.

대의가 살아 있으면 권력의 탄압이 강해지면 저항도 같은 강도로 강해져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쇠파이프들고 노무현퇴진을 외치고 노무현을 조롱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자신들끼리 토론회랍시고 모여서 정신승리의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이명박은 노무현 시즌2일 뿐이다" 이렇게..

 

내가 지옥같았지만 명예스러운 군생활의 끝에 내린 결론은 진보, 보수의 옳고 그름이 아니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 이게 결론이다.

 

세상을 가진 권력은 약자에게 약해야 한다.

세상을 바꿀 진보는 강자에게 강해야 한다.

 

이 원칙만 있으면 민주주의, 개혁은 자동으로 이루어 진다.

 

우리 자기기만은 그만하자. 현실적인 권력의 방향은 한나라당의 장기집권을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데 겨우 세상에 한 발짝 나온 유시민을 표적 삼아 

"다시 노무현으로 돌아가는게 옳은거냐?"

라며 개꿈 꾸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은 한 없이 나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적으로는 이명박에게 가혹해도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를 막지 않는다. 왜냐면 "강자한테 약하"거든.. 그걸 또 인정하기 싫으니까 자기들끼리 모여서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똑 같다" 며 서로 공감하고 등 두드린다.

 

기만적인 이런 부류들이 다시 "약자에게 약한" 관용의 정권이 들어서면 다시 양지로 나와 쇠파이프를 들고, 모욕의 펜대를 들고 "관대한 권력"을 조롱할 인간들이다.

 

사회를 발전시키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건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그건 각 개인의 인간적 성숙, 인격이다.

 

먼저 우리의 격이 얼마나 낮아서 강자에게 약하면서 또 그걸 기만하는 자기연민에  흠뻑 빠져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이명박정권의 억압에 행동으로 항거하지도 못하는 지금,  나는 내가 너무 부끄럽고 처참하다" 

 

여러분들은 안 부끄러운가?

다들 어찌 그리 당당하신가 모르겠다.

 

난 부끄럽고 처참하다.

입력:2009.12.12 17:34 강호의주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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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계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세계와 사람의 조화를 꿈꾼다. 세계인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지구촌, 인간과 자연을 한몸으로 엮는 생태 마을,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을 키워서 보다 풍요로운 삶으로 이끌려는 영적 공동체, 그리고 숙명과도 같은 빈곤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도록 격려하는 금융시스템…. 구 소련 붕괴 후 10년이 넘도록 휘몰아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본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폭력적인 반(反) 세계화운동 속에서도 이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의 이상주의적 열정은 인간의 역사만큼 연원이 오래된 것이며 앞으로 오래 지속될 꿈이다. 동아일보는 세계 곳곳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이들의 꿈의 현장을 찾아가 보았다." 

인도의 육중한 데칸고원이 남동쪽으로 뻗어가다 벵골만에 잠기기 직전의 끝자락에 오로빌(Auroville)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인도 남부의 거점도시 첸나이 국제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해변도로를 따라 3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다. 서울에서 그곳까지 가는 데는 거의 하루가 걸린다.

인도에서도 외진 곳이다. 이곳에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세계 36개국에서온 세계인 1683명이 모여 산다.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한번꼴로 수준 높은 연주회가 열리고 세계 건축가들이 맘껏 상상력을 발휘한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

34년 전인 1968년 2월28일 이 마을의 착공식이 열렸을 때 124개국에서 2명씩의 대표들이 참석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가져 온 흙을 묻었다. 이에 앞서 유네스코는 1966년 오로빌의 탄생을 지지하는 총회 결의문을 채택했다.

오로빌이 문화 종교 인종의 차이를 극복하고 인류의 단합을 추구하는 유엔의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빌의 정신적 뿌리는 인도의 사상가 스리 오로빈도(1872∼1950)와 ‘마더(Mother)’로 불리는 그의 정신적 동반자 미라 알파사(1878∼1973)에 있다. 스리 오로빈도는 인류 최대의 적은 인간의 내부에 있으며, 자기성찰에 정진하면 인간의 의식도 신성을 향해 진화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마더’는 사방을 둘러봐도 초목이라고는 벵골보리수 한 그루밖에 없던 척박한 이 땅을 오로빌의 터로 지정했다. 

화려한 착공식이 끝나고 남은 사람은 고작 7명. 이들은 아열대의 태양에 덴 것처럼 붉은 대지를 손으로 파헤쳐 씨를 뿌리고 여린 묘목을 심었다. 이것이 지금은 기적처럼 빽빽한 숲으로 바뀌었다. 착공식 이듬해에 오로빌에 온 초창기 멤버 베르날은 “개척자들은 세계 최초의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열사병과 굶주림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사람들도 뿌리를 내렸다. 오로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오로빌을 좀처럼떠나지 않는다. 베르날씨는 “아이들에게 바깥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주지만 80%가 다시 오로빌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태어난 우샤(28·여)는 91, 93년 두차례 프랑스로 유학했지만 이곳으로 돌아와 인도인과 결혼, 오로빌 3세대를 낳았다. 우샤씨는 “바깥은 너무 추웠다”고 말했다. 역시 이곳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목다(28·여)는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무슨 이유가 있느냐”고 말했다.

오로빌은 마티르만디르라는 명상의 성소를 중심으로 한 직경 5㎞의 원형 도시다. 밀림의 그린벨트가 외곽의 원주를 이루고 그 안에 주거지대 문화지대 산업지대 국제지대가 마티르만디르를 향해 물결치면서 전체적인도시가 은하수를 닮았다. 

이 원형의 도시에서 유기농법과 환경친화적 적정기술 연구, 대체의학, 에너지 재활용, 토양과 수자원 보존, 내면교육 등 다양한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은 인간과 인간의 실험이다.

4월 26일 오후 5시 원형극장에서 주민총회가 열렸다. 이날 안건은 투표의 도입 여부. 총회의 의장은 따로 없다. 안건 제안자가 사회자다. 오로빌은 지금까지 만장일치제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인구가 불어날수록 만장일치는 어려워졌고 의사결정이 지연돼 발전이 정체되고 있다는 게 제안자의 주장. 그러나 이날도 의견이 엇갈린 채 총회가 끝났다.

래스트 스쿨(중학교 과정)의 교사 딥티는 투표도입에 대한 거부감을 이렇게 설명했다. 

“투표는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소수의 마음 속에 미움이 싹트고 이것이 단단해지면 폭력으로 나타난다. 단적인 예가 9·11테러다. 신속과 효율, 발전과 같은 가치는 서구식 실용주의에 입각해 있다. 무엇을 결정하는 것보다 어떻게 결정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직접 민주주의에 만장일치를 결합한 초유의 의사결정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장(長)’을 두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학교, 공장, 농장 어디에도대표가 없다. 모두 동등한 자격에서 문제를 풀어나간다. 성(姓)도 모른다.

여기서는 이름만 쓴다.

모두가 참석해야 하는 공동체 의식도 없다. 누구에게도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한다. 만약 기술이나 지식이 부족하면 일을 가르쳐준다. 그래도 농사일 취사 전기공급 전화 도로보수 의료의복 미용 등 공동체의 필수기능이 마비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급자족의 도시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 오로빌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면서 유엔과 유럽연합(EU),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프랑스 벨기에 캐나다 독일 미국 등으로부터 매년 400만달러(약 52억원)에 가까운 기금을 지원받는다. 오로빌의 연간순익은 100만달러에 불과하다. 오로빌에서는 소비하는 과일의 80%, 야채 20%, 곡식 10%밖에 자체 생산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오로빌은 물질적 세계화를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사적 이기심의 추구를 무조건적으로 허용하는 것이 결국 사회적 조화로 이어진다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서는 정신적 대안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는 소의 천국이지만 오로빌은 개의 천국이다. 개들은 오가는 스쿠터에 신경쓰지 않고 거리를 쏘다닌다. 사람들이 얘기를 나누는 벤치 아래에도, 심지어는 주차해놓은 차 밑에서도 버젓이 낮잠을 즐긴다. 주인이 있는 개도 있지만 주인없는 개가 더 많다. 그러나 개들은 먹고 잘 걱정을하지 않는다. 안이라는 중년부인이 있기 때문이다. 안의 일은 개들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일이다.  

오로빌에 사는 19종의 뱀은 라지브가 돌본다. 러셀스독사와 서스케일독사 그리고 크레이트와 코브라는 독을 품고 있다. 그러나 독사를 봐도 죽이지 않는다. 라지브에게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 라지브는 독사가 나오면긴급 출동해 잡았다가 다시 놓아준다. 1638명의 주민들은 이처럼 오로빌에 필요한 일들을 스스로 즐기면서 한다. 

나무를 돌보는 것은 패트릭의 일이다. 그는 원형 도시의 원주를 이루는그린벨트에 산다. 패트릭은 강수량이 적어 걱정이다. 비는 연간 130∼135㎜로 우기에 집중적으로 내린다. 때문에 사람들은 지하수를 끌어다 쓰고있는 데 해가 갈수록 깊이 파야 물이 나온다. 지금은 땅속으로 50m까지 들어갔다. 오로빌은 해발 45m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바닷물이 침투할 우려가 있다. 식수나 농경용수로 쓸 수 없다는 얘기다. 패트릭은 “사람들은 교육이나 경제나 명상에만 신경쓰고 물은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그러나 카리트가 있다. 네덜란드 초등학교 교사출신의 카리트는 수원을보호하기 위해 계곡에 물막이댐 32개를 만들었다. 자신의 퇴직금에다 끌어 모은 기금을 모두 댐 건설에 투입했다. 엔지니어들에게 자문하면서 댐건설 공법을 독학했다. 그의 오랜 꿈은 초등학교 건설. 집 근처에 교실 3개를 갖춘 학교건물이 완성돼 가고 있다. 

오로빌 주민들의 출신 배경은 다양하다. 크리시나는 인도군에서 소장을지낸 장군출신. 올해 80세가 넘은 그는 76년 중장 진급을 마다하고 오로빌에 정착했다. 그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문서보관에 관심을 쏟아 문서는 물론 비디오 오디오 자료를 총망라한 기록보관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컴퓨터 전문가인 울리는 이곳에서 소프트웨어 회사를 만든 뒤 98년 미국의 SCM에 회사지분을 팔아 100만달러를 오로빌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곳에서도 인기 직업은 있다. 축구코치나 교사직을 선호하는 반면 공동체의 행정은 기피한다. 

오로빌의 행정과 재정의 책임을 맡고 있는 기는 벨기에 사업가 출신이다. 그는 대안기술연구까지 지원하고 있다. 기는 “10세 때 바다를 보면서 지구와 하늘이 만나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꿨다. 왜 그런 동경을가졌는지 모르겠다. 그 꿈이 44세에야 오로빌에서 이뤄졌다. 오로빌은 바로 그런 곳이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분주한 일상을 보내는 것에대해 그는 “명상과 일은 분리된 게 아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영혼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오로빌 인근 퀼라팔래얌 마을 출신의 인도청년 조티(36)의 사례는 오로빌의 노동관을 잘 나타내준다. 

그는 장학금을 얻어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노스필드 마운틴 허먼이라는 사립고교를 졸업한 뒤 귀국, 오로빌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인쇄술에 관심을 가졌다. 버려진 인쇄소에서 1년 동안 6가지 기계와 씨름한끝에 기계를 자신있게 다루게 됐다. 그러나 인쇄에 싫증이 났고 심리학에 마음이 끌렸다. 대학의 성인교육과정에서 3년간 심리학을 공부한 뒤 오로빌의 병원에서 카운슬링을 했다. 그의 취미는 농구. 아이들에게 농구를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던 조티는 다시 농구코치 연수과정을 1년 만에 이수, 코치 자격증을 땄고 농구팀을 만들었다. 

이 팀을 이끌고 폰디세리주(州) 챔피언전에 출전, 처음엔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불과 몇 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오로빌 내 농구팀 수는 6개로 불어났고 소녀팀도 2개나 생겼다. 이 팀들은 지금 모두 주대항 경기에서 우승을 넘보고 있다. 

새로운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그는 도시계획위원회에 들어가 오로빌의 지형을 연구하고 지도를 만드는 일을 했다.

컴퓨터를 활용해 복잡한 전화선의 설치지도를 그려냈다. 조티는 “오로빌은내가 사는 길이며 미래”라고 말했다. 

오로빌은 조티의 경우에서처럼 사람들에게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를 주는 곳이다. 대입에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났다고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교육의 목적이 다르다.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라스트 스쿨(Last School)의 교사 딥티는 “우리는 아무에게도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을 발현하도록 도울 뿐”이라고 말했다. 학급당 학생 수는 15명 안팎. 학비는 무료다. 정해진 교과과정은 없다. 졸업 후 진로는 스스로 선택한다. 오로빌은 직업 현장에서 일을 배울 기회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학교를 나와선 대학에 진학할 수 없기 때문에 일부 학부모들은폰디세리주에 있는 사립학교에 아이를 보낸다. 교사 매리의 두 아들처럼스탠퍼드대와 하버드대 같은 명문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 아이들도있다. 첫째 딸 해바라기를 사립학교에 보낸 이현숙씨는 “오로빌의 교육철학을 이해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학업을 뒷받침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로빌에서는 직업선택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는 반면 월급은 생활이 안될 만큼 적다. 교사 월급이 보통 3000∼3500루피(약 7만∼8만원), 병원인 힐링센터 종사자는 4000루피(약 9만원)선. 한 달에 공동체에 내야 하는 돈은 1200루피. 이 돈으론 도저히 생활이 안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외지에 가서 돈을 벌어온다. 이씨의 남편 이봉은 얼마 전에도 프랑스에 건너가 마사지일로 생활비를 벌어왔다. 

대신 하루 노동시간은 다섯시간 정도다. 아열대의 더위에 목이 자주 마르고 쉽게 지치기 때문에 오래 일하기도 어렵다. 나머지 시간은 명상에 바친다. 오후 5시가 되면 거대한 돔 마티르만디르는 명상의 성소로 바뀐다. 돔 안에서 명상하는 동안 내뱉은 기침소리가 마치 총성처럼 울려 퍼질 만큼 고요한 곳이다. 동행한 홍보담당 마우나는 명상하는 방법에 대해일러줬다. 

“지나가는 생각을 붙잡지 않는 것이다. 여러 가지 상념을 하는 자신을가만히 지켜본다. 지켜보는 자신이 고양된 의식(high consciousness)이다. 명상할수록 의식은 강해진다. 강해진 의식은 점차 신성을 닮아간다.” 

그러나 오로빌은 명상마저 강요하지 않는다. 가끔 전체가 모여 함께 명상할 기회가 있지만 참석 여부는 개인에 달려 있다. 오로빌은 모든 신념과 종교 그리고 국적을 초월, 진보하는 조화와 평화 속에서 세계인이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다. 

▼오로빌리언 되는 길

오로빌리언이 되는 길은 쉽지만 어렵다.

우선 특별한 자격이 요구되지 않는다. 일단 오로빌에서 3개월을 거주한뒤 엔트리 그룹에 인터뷰를 신청해야 한다. 인터뷰 결과 계속 거주할 수있다고 인정되면 한국인의 경우 오로빌에서 한국주재 인도대사관에 추천서를 보내 1년짜리 거주비자를 발급받도록 한다. 그 다음부터는 1년 단위로 비자를 갱신할 때마다 엔트리 그룹의 심사를 받는다. 심사가 까다로운것은 아니다. 연령과 인종,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없다.

2년을 거주하면 오로빌리언이 될 자격이 주어진다. 먼저 1년 비자가 나오면 신입 주민 거주지인 뉴커머 콤플렉스로 옮긴다. 하지만 자리가 쉽게나지 않기 때문에 하우징 그룹에 미리 알아봐야 하다. 2년이 지나면 집을 구해야 하는데 집터가 따로 없기 때문에 새로 땅을 사서 오로빌 재단에 기부하고 사용허가를 얻어야 한다.(상세한 정보는 www.auroville.org) 

오로빌리언이 되려면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 사는 데 드는 한달 생활비는 4인 가족 기준으로 대략 2만루피(약 50만원) 정도. 전기료와 전화료 부식비 그리고 스쿠터 연료비 의복비 등이다. 교육비는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따로 들지 않는다. 오로빌에서 얻는소득은 부부가 모두 일해도 1만루피가 안 되기 때문에 매달 생활비를 바깥에서 조달해야 한다. 처음 집을 구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진정한 오로빌리언이 되기가 쉽지 않다. 오로빌리언은 사회적도덕적 문화적 인종적 유전적 차이라는 외견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오로빌이 요구하는 오로빌리언의 첫째 필수 조건. 

둘째 조건은 도덕적 사회적 인습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지만 에고(자기)와 욕망 그리고 야심의 노예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 

소유의 물질적 개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는 것이 셋째 조건이며 넷째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일하지 않으면 자신의 의식을 물질세계에 투사하지 못하게 되고 의식은 진보하지 못한다. 다섯째는 새로운 인간으로 진화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며, 여섯째는 점차 새로운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스스로 신성에 가까워짐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오로빌리언 이현숙씨 “이상적 마을 꿈꾸며…”

오로빌에는 아이를 포함, 10명의 한국인이 산다. 이현숙씨(39)는 최초의 오로빌리언. 한국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프랑스를 거쳐 오로빌로 왔다.

처음엔 몇 개월만 살아보려고 했는데 18년을 내리 살았다. 두 딸과 두 아들 등 모두 네 자녀를 두고 프랑스인 남편 이봉(37)과 살고 있다. 다음은 그의 오로빌 정착기. 

“네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증조할머니 밑에서 홀로 자라났다. 이혼 후프랑스로 떠났던 어머니가 초청해 프랑스에서 1년간 살았다. 

곧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반드시 언어의 장벽만은 아니었다. 이미 스리 오로빈도와 마더의 사상에 심취했던 어머니가 인도에 가자고 해서 따라나서 오로빌까지 왔다. 

그때가 84년 21세였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내 두 다리로 굳건히 설 수있는 곳을 찾아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로빌에 혼자 남았다. 집에는 문도 없어 뱀이 무시로 드나들었고 물리기도 했다. 야자수 잎으로 가린 지붕에서는 비가 샜다. 

수중에 300루피(약 8000원)밖에 없어 밥을 굶었다. 학교에서는 점심을 공짜로 주기 때문에 교사가 되겠다고 했다. 가르칠 게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받아줬다. 나는 아이들과 뛰어 놀면서 한국동요를 가르쳤다. 그랬더니 학교에서 고맙다고 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이다. 이미 아이 엄마가 된 제자들이 지금도 나를 보면 산토끼를 부른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살았으면 뭐가 됐을까. 미스코리아의 용모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며 공부도 못했다. 집안배경까지 어지럽다. 나는 한국에선없었던 희망을 이곳에서 찾았다. 자신을 표현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어디든 내가 일하고 싶은 곳에서는 나를 받아줬다. 

지금은 행정을 맡고 있다. 프랑스어, 영어, 현지어인 타밀어도 하게 됐다. 말을 배우면서 사람들의 사연을 알게 됐다. 나보다 지독히 어려운 삶도 있다는 걸 깨닫자 부모 없이 자라난 상실감이 사라졌다. 내 힘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면서 부모를 이해했다. 부모가 나를 버린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문제였다. 

내 안의 질곡에서 벗어나면서 이상적인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오로빌리언들의 이상에 흠뻑 취해 청년기를 불태웠다. 지금은 인구도 많이 늘고 마을도 커져 과거의 이상이 희석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과거의 오로빌을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http://widechina.net/bbs/view.php?id=read&no=149  

* 생활비를 밖에서 조달해야하는 공동체라... 그냥 은퇴하고 산토리노에 가서 살면 편치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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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의 구조는 지구 위에서 오랜 기간 동안 진화를 거듭해 온 결과물로 그 자체가 자연의 정보를 담고 있는 하나의 ‘문학작품’이며 ‘위대한 역사적 텍스트’다.

 
   

로버트 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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