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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
앤드류 그로브 지음, 유영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199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러이러하게 살아라 내지 어떻게 해야 한다는 류의 지침서를 아주 싫어한다. 일과 관련되서 혹은 어떤 인물에 대한 자료조사 차원에서 자료비가 나오거나 상대방에서 제공한 것을 제외하고 그런 류의 책은 단 한권도 내 돈으로 사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이 '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는 내게 아주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사본 '지침서'였고 또 후회하지 않고 있으니까. IT산업 열풍이 한창이던 시절 빌 게이츠의 책과 함께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필독서이기도 했고 또 아는 선배의 강권도 있어서 구입은 했다가 뒤늦게 읽었는데 때로는 남의 잘난척(?)을 돈을 내고 읽어주는 것도 보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그 '남'이 확실히 현명하거나 최소한 독자를 속일 만큼 똑똑하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99년 IT벤처 열풍 시절 빌 게이츠의 생각을 속도를 읽지 않고는 어디 가서 대화가 되지 않았던 그 때에 난 그 책 전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 "MS 시스템을 깔아야 성공해"라는 교주같은 메시지가 싫어서 그 책에 대한 인상은 별로 좋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정보나 역사로서의 가치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 이런 류의 책을 얘기할 때 종종 추천까지 하고 있다.
8비트 컴퓨터를 가장 후진 것으로 인식하는 우리에게 8K의 메모리는 정말 태고의 얘기로 들리지만 불과 수십년 사이에 컴퓨터와 인터넷은 경이적으로 발전해왔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앤디 그로브는 그 역사를 함께 해왔고 부침이 심한 그 속에서 생존자로 살아남은 드문 존재이다. 바로 생존자의 생존 보고서이기 때문에 이 책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주장과 지나온 얘기에 동조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기업과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얘기들을 많이 던지고 있는데 특히 주목이 되는 것은 바로 전략적 변곡점.
결국 그 변곡점을 일찌감치 인식한 기업은 살아 남았고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한 기업들은 도태되었다는 부분은 특히 와닿았다. 아마 여러가지 내외적 족쇄에 얽매여 변화하지 못하는 우리 기업들을 보면서 느낀 답답함 때문에 더더욱 크게 그런 느낌을 받은 듯싶다. 하지만 이 전략적 변곡점 얘기는 기업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중요한 교훈인 듯.....
누구의 교지(?)에 들뜨는 성격이 아닌 관계로 디지털 시대의 성경이니 하는 낯간지러운 찬사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한번쯤 읽어봐도 후회는 안할 것 같다. 자신이 가려는 목적지를 알고 있는 -최소한 스스로 확신하고 있는- 사람의 글은 그 자신의 논거만으로도 봐줄 가치가 있다. 앤디 그로브는 자신의 방향에 확신을 갖고 있고 그래서 부럽다...
마지막으로 사족을 하나. 책은 원가를 줄여 싸게 공급되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게 불합리한 감상이지만 이상하게 하드 커버는 괜히 가치있게 느껴진다. 단단한 하드 커버... 이 책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