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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들의 녹음현장 - 카라얀, 굴드, 음반 프로듀서
이사카 히로시 지음, 최연희 옮김 / 글항아리 / 2010년 6월
평점 :
소감은 향수를 자극하는 책.
내가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저기 등장한 인물들이 다 죽은 뒤 아주 나중에 알았을지 몰라도 대부분 별 의미없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행운이랄지 그래도 카라얀이나 첼리비다케, 솔티는 몇년 정도는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 그들의 궤적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 등장한 레코딩의 상당수는 지구 레코드나 성음 레코드에서 라이센싱한 LP로 또 몇개는 원판으로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돈을 쪼개서 LP나 CD를 사서 음악을 듣고, 저 멀리서 절대 오지 않는 저 명장들의 연주를 그리워했던 경험이 있는 세대들에겐 특별한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것 같다. 두근거리며 들었던 그 음반 뒤에 어떤 얘기가 있었고 그게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결코 초대되지 않았던 그 무대 뒤로 들어가서 현장을 들여다보는 관음증적인 즐거움을 준다.
카라얀의 나르시시즘과 비즈니스적 마인드며 굴드의 기행은 그들의 살아 생전부터 워낙 유명하다 못해 거의 전설적인 수준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첼리비다케가 그렇게 물을 먹은 줄은 몰랐었네. 하지만 카라얀을 선택한 베를린 필 주자들 입장도 이해가 되는 게... 그렇게 날마다 튜닝에 목숨을 걸면 정말 출근하기가 싫었을 것 같다. 그리고 솔티가 빈 필에 와서 쩔쩔 매는 모습도. 그 부드러운 카리스마 넘치는 영감님의 연주와 매치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동안 잠잠했던 음반 구입에 대한 욕구를 다시 스멀스멀 불러 일으키고 있다. 구입할 기회가 있었는데, 음향이나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후배에게 양보했던 솔티의 링 전집 LP가 갑자기 아까워지는 것은 무엇인지. ㅋㅋ 아서라. 갖고 있는 카라얀 거랑 푸르트뱅글러 전집도 아직 다 완파 못한 주제에. 근데 칼 뵘 것은 내 살아 생전에 구할 수 있으려나.
조연으로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오이스트라흐, 리히테르 등 그리운 거장들의 이름들도 속속 등장하는 등. 20세기 후반 클래식 음악계의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독서가 될 것 같다.
내용도 매끄러운 번역도 다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다면 곡 이름 같이 중요한 고유 명사에 간혹 오타가 보인다. 예를 들어 발퀴레의 '비'행인데 발퀴레의 '기'행, 이런 식으로. (바그너가 작곡한 발퀴레의 기행이란 곡이 있다면 내가 무식한 것이니 사과하겠음.) 해당 분야에 지식이 없는 번역자일 경우에 종종 일어나는 실수지만 번역자 프로필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교정이 섬세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 때문에 갑자기 음악이 마구 땡기고 있는데 일착으로 카라얀의 나르시시즘의 극대화라는 베를린 필의 연주 영상을 한번 돌려봐 줘야겠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정말 앵글이 지휘자에게 엄청나게 몰려 있었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