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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결혼 - 기사, 여성, 성직자
조르주 뒤비 지음, 최애리 옮김 / 새물결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프랑스 아날 학파의 거장... 중세에 관심을 가지면서 오랫동안 조르주 뒤비라는 이름은 들었지만 실제로 책으로 잡고 읽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기대에 부응해준다. 이런 류의 학술서적에 있어선 프랑스 학자들의 깊이는 그 이름이 누가 되건 신뢰할만 하다는 생각의 재확인. 아날이라고 해서 쓸데없는 가벼움이 없다.
책의 시작은 일단 시대를 뛰어넘어 필립왕의 유명한 이혼사건,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건을 던진 다음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중세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얘기를 중심으로 결혼제도 자체와 중세 사회의 가족관계, 상속, 친족 개념 그리고 교회의 역할과 결혼관까지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단순히 중세 왕과 귀족들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소소한 얘기거리를 찾아들었던 내게 만만찮은 텍스트였지만 이 책을 읽어냄으로써 그 부분에 관해 (조르주 뒤비의 시각을 많이 빌린 것이긴 하지만) 일관된 흐름을 머리 속에 넣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 큰 수확.
그리고 교회의 권력이 강화된 이후의 저술과 시각만을 만났던 내게 중세 교회가 중세 사회를 틀어쥐는 엄청난 권력을 갖기까지 정말 대단한 투쟁을 했다는 것도 부수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같았던 결혼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과 권리가 300년에 걸쳐 무시되고 제후들과의 다툼 끝에 성취됐다는 것이 이채로왔다. 결국 결혼제도 하나를 통해 중세의 성숙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할까...?
중세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 빠짐없이 등장하던 엘레아노르의 친족관계를 이유로 한 이혼 소동의 근거를 당시 습속과 제도에 근거해 알게된 것도 재미있다. 단순하게 생각한 결혼 제도가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역사까지 바꾸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이고. 재산의 분할을 막기위해 결혼이 억제되었던 차남들의 에너지. 그것이 십자군 원정을 지탱시킨 한 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제가 결혼에 미치는 그 커다란 영향.... 정말 대단하다. 중세 사회가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서부터야 차남들의 결혼을 허용하고 방계의 확산을 용인했다고 하는데 현대의 피임이랑 뭐가 다르랴...
이런 풍속과 연관된 역사책을 볼때마다 느끼는 것이 인간은 참 변하지 않는 동물이란 사실. 여기에 등장하는 지배계급의 결혼은 철저하게 잇속에 의해 진행된다. (물론 내부로 들어가면 애정이란 예외는 있었을테지만) 당사자들 특히 여성의 의견은 완전히 무시되고 남성 위주의 재산 거래의 한 방편이 바로 결혼. 여성이 당한 강간과 약탈혼, 강제 결혼은 역사 안에서 얘기거리조차 되지 않는듯 하다.
하지만 그 방법과 형태가 다양한 사랑의 이름으로 순화되고 현대의 법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뿐 한꺼풀 아래의 내용과 계산을 보면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 가장 진보된 사회에서조차 결혼의 성립과 유지에 친족의 역할이 크고, 보수적 문화에서 당사자들의 선택권은 중세와 뭐가 그리 다를까? 이것이 내가 인간에게 절망하는 이유.
책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얘기하라면... 그 적은 자료 속에서 이렇게 많은 얘기를 찾아낼 수 있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내지만... 그가 말하려는 결론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나의 솔찍한 인상.
상아탑 안에 살고있는 학자치고는 뒤비는 드물게 여성에게 따뜻한 시각을 갖고 있는듯 하다. 노골적이진 않지만 글의 중간중간에 여성에 대한 그의 이해가 드러난다. 남성으로선 드물게 여성의 역사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학자여서 그런가...? 그의 다른 글들을 읽어보면 이 부분은 착각인지 사실인지 분간이 갈테고... 그런 의미에서 12세기의 여인들이 빨리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번역자를 칭찬해주고 싶다. 프랑스어권 저술을 만날 때 난해한 번역으로 책이 어려워져 원문을 가치를 낮추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 예가 나무의 신화. 문맥이 안맞아서 의미를 모를 부분이 꽤 많았다) 문장이 간결하고 명료해서 읽기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