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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2 (20주년 기념판) - 마그리트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ㅣ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2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월
평점 :
비트겐슈타인이 제창한 '언어게임' 이론과 모든 텍스트는 사회집단 속에서 그 의미를 달리한다는 구조주의의 형식. 그리고 예술 작품으로부터 보여지는 객관적 텍스트가 수용자 내부의 세계에서 자신에 맞게 해석된다는 이야기. 어떻게 보면 언어와 그림, 그외 모든 예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은 다 같은 맥락에 이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전부 우리의 외부로부터 형성된 우리의 내면 속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내면으로부터 또 다른 예술이 형성되고, 그 굴레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도 모르는채 무한히 반복한다. 에셔와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이토록 정과 반의 내용들이 지속적으로 대립되다가 마지막 챕터에서 해겔의 휴일을 이용하여 마무리짓는 작가의 센스에 책 자체가 무척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텍스트를 수정하고 싶다해도 내용의 짜임새가 상당히 밀도있어 하나를 수정하면 전체를 수정해야 된다고 하더라..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미학의 세계로 발을 진전시키기 위한 입문도서로 아주 만족스러웠다.
p 69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지각의 주체는 ‘사유‘가 아니라 혼탁한 ‘신체‘다. 따라서 지각이 데카르트의 ‘사유‘처럼 맑고 투명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투명한 지각이야말로 모든 지식의 근원이다. 유리처럼 투명한 논리적 사유, 의기양양한 과학의 세계도 사실은 이 근원적인 지각 위에 세워진 가건물일 뿐이다. 근원적인 것은 데카르트식의 명석판명한 ‘사유‘가 아니다. 근원적인 것은 오히려 불투명한 인식 주체인 ‘지각하는 신체‘다.
p 79 예술은 상상력을 이용한 ‘직관적‘ 인식이다. 그건 지성을 이용한 ‘논리적‘ 인식과 구별된다. 어떻게? 논리적 인식(학문)은 보편자를 인식하지만, 직관적 인식(예술)은 개별자를 인식한다. 논리적 인식이 ‘개념‘을 생산한다면, 직관적 인식은 개개 사물의 ‘이미지‘를 산출한다. 하지만 ‘직관‘이 도대체 뭔가? ‘지각‘? 아니다. 지각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파악하는 걸 말한다. 가령 책을 지각했다는 건, 곧 눈 앞에 책이 있다는 걸 안 거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는 지각될 수 없다. 하지만 직관에선 실제와 허구가 구별되지 않는다.
p 82 표현은 머리속에서 완성되며, 머리속에 그려지는 이 그림(표현)이야말로 어떤 외적인 찌꺼기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예술 작품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아름다움이다. 미가 다로 있는 게 아니다. 직관은 표현이며, 표현은 예술이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p 111 예술 작품은 한갓 사물이다. 고흐의 그림은 한 조각의 아마포에 화학 물질(물감)을 발라놓은 거다. 그럼에도 이 물질 덩어리는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작품은 알레고리, 즉 비유다. 작품은 사물적인 것을 넘어서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하고, 다른 세계를 열어준다. 고흐의 <구두>는 농부의 삶의 세계를 열어주지 않았던가. 이처럼 예술 작품이 표현하는 의미 내용 혹은 작품이 열어주는 세계, 이게 바로 ‘세계‘다. 그리고 ‘대지‘란 대강 작품의 밑바탕이 되는 소재와 질료를 말한다. 결국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란 작품이 열어주는 세계와 작품의 질료 사이에 팽팽한 대립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p 164 작품은 더 잘 이해되어야 할 ‘객관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의미의 이해란 곧 독자가 작품을 자신에게, 말하자면 그의 현재와 미래에 관련시키는 거다. 따라서 그건 매번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작품의 의미는 시대마다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탄생한다. 예술 작품은 완제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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