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은 예전부터 보고싶던, 봐야만 했던 책이었다. 교육과정 중 한국사는 필수과목이었고 나는 외우기를 잘하는, 역사를 나름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 암기는 언제나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기위한 수단 중 하나였을 뿐. 현대사에 관한 지식은 그 이후로 모두 증발해버렸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을 때나 시사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근현대사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 제대로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유를 얻기 위한 항쟁들, 권력과 부정부패로 점철된 정치판, 조작된 검찰 수사 등. 커다란 얼개만 갖추어져 있던 나의 역사관에 이 책은 정확하고 안정된 지도를 만들어주었다. 400쪽의 많아보이지만 55년의 유구한 역사를 담아내기엔 비좁은 페이지 속에 현대사를 몸소 겪어낸 유시민 작가의 역사가 녹아있었다.
영화' 변호인'에서는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읽으며 토론하는 학생들을 반공으로 규정한다. 없는 죄를 덧씌우기 위해 경찰들은 중상모략을 일삼으며 잔인한 고문까지 행한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규정한 불합리한 정의는 사람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억압했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죄없는 학살을 자행했다. 모두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개인의 욕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의이다. '주권재민'이라는 헌법의 기초이념을 무시하고 국민 위에 권력이 있음을, 대통령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회였다. 제국주의와 전쟁의 역사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학살에 대한 감각이 무뎠던 것일까. 그들에겐 권력을 쥐고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구분되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진실들은 한참뒤에야 비로소 규명되었지만 그에 대한 희생자들의 보상은 아직도 미미한 수준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과 증거는 소실되어가고 사람들은 생을 마감한다. 그렇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을 뿐더러, 자신이 지은 죗값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되어있다. 사후세계를 믿는 편은 아니지만 죗값을 치루지 않고 안락한 삶을 누리다 평온하게 죽은 가해자들은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지기를 소망한다.
인터넷 사이트의 극우 성향을 띄고 있는 '일간베스트' 사이트가 도를 넘은 인격모독과 비난, 희롱들을 일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제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엄격한 사상 통제로부터 얻어낸 고귀한 표현의 자유이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그 고귀한 자유는 그것을 더럽히는 불결한 사상들을 위해 쟁취되어진 것은 아닐테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한건 그들이 찬양하는 사상의 종식으로부터 얻어낸 권리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렴 그 자유가 왜곡된 방법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은 현대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에 각설하겠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자유가 제약된 사회에서 대중들은 억압에 대해 저항을 하며 권리를 위해 맞서싸웠다. 군 병력을 이용한 일방적인 관계 앞에서도 그들의 투지는 굴복하지 않았고 아주 힘겹게, 그리고 숭고한 희생으로 값진 자유를 얻어냈다.
한국의 현대사는 비슷한 형식들을 반복해왔다. 자유와 사상을 탄압받고 강요당하는 정치에서 힘겹게 얻어낸 자유. 그리고 불과 몇년 전 이어지던 언론 조작과 비리, 부정들. 다행히도 같은 역사를 겪어왔던, 그리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던 수많은 시민들의 의식 덕분에 또 한번 권리를 얻어냈다. 다행히 부정의 반복은 사회에 경각심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반면교사의 역할도 해주기에 수준높은 의식을 함양하게 한다. 물론 그런 사건을 통한 환기보다는 이런 책들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온화한 방법이겠지만. 아직도 대기업 언론의 검색어 조작이나 권력을 이용한 감형 등 그러한 세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난 70년간 힘겹게 쟁취해낸 자유민주주의이기에 정의를 수호하기위한 올바른 시민의식이 형성되었다. 그래도 사회는 진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금의 사회는 불합리와 부도덕에 매우 엄격하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형상이 되어 가차없는 처벌을 요구한다. 난 이것이 억울한 피해자를 낳을 수 있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의 깊숙히 찌들어 있는 부정들을 고발해주고 철저히 들춰내 처벌하는 역할도 해주기에 무작정 배척할 수는 없는 현상이다. 그러한 시민연대는 정책의 오류들을 짚어내고 비판하며 제대로 된 민주사회로 이끌어나갈 것이다. 그 방향 속 중요한 것은 타인의 일방적 주관에 기대어 무조건적인 동의보다는 스스로 합리적인지 판단하고 주체가 되어 생각하는 능력이 우선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철저하게 사회에 박여있는 부정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이제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자긍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수호하고 지켜나가는데 사명을 가져야 한다.
p 27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는 언제나 오래된 것이다. 내일 오는 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이미 들어와 있다.
p 28 빛과 어둠이 공존하지 않는 역사는 없다. 인간 자체가 둘 모두를 가진 존재일진대 역사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드높이 들어야 할 빛이 있고 그 빛으로 인해 차츰 사라져갈 어둠이 있기에, 민족의 역사도 우리들의 인생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p 75 국가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형성된다.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 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는다.
p 119 오늘 우리가 누리는 어느 것 하나도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지 않았다. 청년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원래 거기 있던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한국 경제의 50년 궤적을 몸으로 밀어왔던 사람들은 이런 것으 보면서 꿈을 꾸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p 178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혁명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과 개량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p 189 모든 권력은 집중과 확대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 감시와 견제가 느슨해지면 누구나 권력을 오남용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럴 때 시민들이 참여하고 비판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제도는 껍데기로 전락하고 만다.
p 271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p 280 지금 우리는 그 광장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 우리는 국가의 부속품이 아니며 대통령의 부하도 아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위해 있는게 아니라 대한민국이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그 어떤 위대한 이념이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 때 행복을 느낀다.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존엄한 인간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엄성을 확신하는 것과 똑같은 무게로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자유주의적 각성‘이라고 부른다.
p 417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우리 안에 만들어야 할 좋은 것의 목록에는 역사에 대한 공명도 들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