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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권력이다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미디어의 발달은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 곳곳에 그물망처럼 펼쳐진 네트워크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도 손쉽게 소통할 수 있고 교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세계 속, 또 하나의 세계가 생산된 것이다. 그 공간은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사용자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는 회원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하며 그에 맞는 취향들을 분석해낸다. 그것도 모자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아예 일기장처럼 자발적으로 기록된 개인의 행동, 생각 등의 정보가 축적되어진다. 바야흐로 데이터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일상과 현실에 지친 현대인들은 이런 문명활동을 통해 조금의 안정을 누린다. 안식처가 되는 네트워크 공간은 대량의 정보를 결집시켜 편의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무언가의 편리함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희생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그 편의를 누릴 수 있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특별한 영향이 없는 것처럼 보여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벌써 CSI 같은 정보기관에서는 SNS를 이용해 사용자들의 개인정보들을 손쉽게 수집한다고 알려져있다. 그만큼 근처에 흩어져 있는 정보들처럼, 나의 정보도 흩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들은 나에 의해서, 타인에 의해서 감시가 가능해진다.
미셸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는 권력이 '보여지는 자'로부터 '보이는 자'에게 이동되었다고 말한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죄수들의 공개 처벌을 통해 왕정의 권력을 과시하며 민중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심었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민중들의 결속을 다지게 하며, 범죄자와 집행자의 역할이 전도됨에 따라 죄인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진 않을까 우려하게 만들었다. 그 후 처형은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죄수들을 가두는 방식에 있어서도 형식이 바뀌게 되었다. 사회에서 격리시키기위한 칠흑의 어둠으로부터 그들의 모든 행동을 파악할 수 있는 빛의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죄수들은 감시자들에게 보여지는 대상이 되었고 모든 권력에 순순히 복종하게 되었다. 그러한 감옥의 형식은 합리적인 규율과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체제들은 지금의 군대, 병원 심지어 학교에서까지 적용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이로써 누군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타인으로 하여금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권력을 선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으려 했지만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내용은 아니었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비슷한 책을 찾다가 또 박정자 교수님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푸코의 주장의 요점들을 압축해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책이 출간되어진 것은 2008년.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이다. 책에는 'SHOW를 하라'와 같은 머나먼 과거의 통신사 광고를 최신의 사례로 들고 있다. 그만큼 책이 예전에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이루어진 통찰은 지금의 SNS가 만연한 현대사회에 더욱 잘 맞닿는다. 일상에 없어서는 안되는 미디어들이 우리의 삶을 점령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로써 타인은 나를 쉽게 감시할 수 있고, 나 또한 타인을 쉽게 감시할 수 있다. 나는 타인을 대상으로 만들 수 있고 타인도 나를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보여지는 사람들은 권력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그들을 보는 자인 우리들은 노예들을 맘껏 휘두를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권력은 냉철한 판단에 의거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 근거없는 낭설에 잘못 휘둘러져 엄한 사람에게 휘둘려지면 안된다. 그것은 극심한 사회적 고통을 생산해내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는 권력의 유대를 더욱 강하게 결속시켜 놓았다. 그리고 누군가를 꼭두각시로 만들기도 한다. 강해지는 힘 만큼 우리의 판단력도 충분한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P 30 타자는 이처럼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하는 필요불가결의 매개자이다. 나는 남에게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을 때만 나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남의 시선이 없다면 인간에게 수치심은 없다. 단순히 수치심만이 아니라 존재의 기초자체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까지 우리는 유추해 볼 수 있다.
P 62 노예는 자연의 사물을 가공하는 노동을 통해 주인이 없이도 얼마든지 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를 통해서만 자연과 관계를 맺었던 주인은 노예가 사라지면 단 하루도 생며을 유지할 수 없다. 노예가 서서히 자기 도야를 통해 자립성을 획득해 가는 동안 역설적으로 주인은 의존 상태에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주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노예의 노예로 드러나고, 노예는 주인의 주인으로 드러난다.
P 81 물리적 강제 대신 자유가 들어섰는데, 이 자유는 고독과 맞닿아 있다. 착란과 공격의 대화 대신 독백의 언어가 들어섰다. 그리고 광인의 독백은 사람들의 침묵 속에 묻혀버렸다. 예전에 광인들을 모욕하던 사람들의 거만함은 무관심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쇠사슬에서 풀려난 광인은 이번에는 과오와 수치에 억매였다. 자기와의 관계는 과오의 차원이고, 타자와의 관계는 수치의 차원이다. 과거에 육체적 처벌을 받았을 때는 그 처벌을 통해 자신이 결백해졌음을 느꼈다. 지금 육체적 징벌에서 해방된 그는 도저히 벗어날 방법이 없이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느낀다.
P 126 무기를 사용하지도 않고 공포를 주는 것도 아니면서 신체를 복종시키는 것이 더 훌륭한 방법일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신체에 대한 지식과 체력의 통제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 지식과 통제가 신체의 정치적 테크놀로지이며, 그 기술의 요체는 다름 아닌 규율이다. 규율은 복종되고 훈련된 신체,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 낸다.
P 167 가시성이야말로 예속을 극대화시킨다. 규율의 대상인 개인을 예속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이고, 또 항상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캄캄한 어둠이 아니라 밝은 빛 속에 들어왔으므로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상식과는 달리 어둠은 사람을 편안하게 감추어주고 빛은 잔인하게 그를 드러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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