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피갈피 삶길 숨길 꿈길‥불황속 더 빛났다


한겨레가 뽑은 상반기 10권의 책

출판시장은 끝이 안 보이는 불황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출판사들은 개성이 뚜렷하고 주장이 분명하며 완성도 높은 책들을 상당수 내놓았고, 더러는 독자의 따뜻한 공감을 얻었다. <한겨레>는 올해 상반기에 나온 수많은 책 가운데 내용이 풍부하고 편집이 정갈한 책 10권을 골라 한자리에 모았다. ‘책과 사람’에 칼럼을 쓰고 있는 도서평론가 이권우·최성일씨가 책을 고르는 작업에 함께 참여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질 높은 책들 가운데 국내 필자의 작품을 고른 것은 번역서보다는 창작물로 승부하는 것이 한국의 문화적 토대를 다지는 데 더 긴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출판사가 겹쳐 여러 종의 좋은 책 가운데 한 종만 뽑히는 바람에 빠진 책도 있다. 다른 해에 비해 올해 상반기에는 과학 분야의 국내 창작물이 많지 않았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왼쪽부터) 문익환 평전/사다리 걷어차기/서구의 중심주의를 넘어서/ 숲의 생활사/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


20세기 한국사 비춘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1만8000원

남들이 쉽게 굴복해버리는 거대한 모순과 악 앞에서도 문익환은 결코 몸을 사릴 줄 몰랐다. 독재권력이 아무리 흉포하고 분단장벽이 아무리 높아도 포기를 모르고 정면으로 돌진했던 이였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20세기 한국사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고, 그의 평전인 이 책은 지난 세기 한국사를 되돌아보는 좋은 창이 된다. 전쟁의 수렁속에서 남쪽을 택했던 신실한 청년이 목회자가 되고, 1976년 3·1 구국선언을 계기로 사회의 최전선에 뛰어들어 재야의 구심이자 ‘통일 할아버지’가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그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경제선진국의 위선·부도덕 고발
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형성백 옮김 부·키 펴냄·1만2000원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가 쓴 <사다리 걷어차기>는 2003년 경제학 저술의 금메달에 해당하는 군나르 뮈르달 상을 받은 저작이다. 지은이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개발도상국에 강요되는 경제자유주의 정책이 어떻게 선진국들의 역사적 경험과 대치되는지를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입증함으로써, 선진국들의 위선과 부도덕을 고발한다. ‘사다리 걷어차기’란 19세기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영국을 비판하면서 쓴 용어인데, 산업혁명 초기에 국내 산업 보호정책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에 오른 영국이 자유경제정책의 전도사가 돼 다른 나라의 사다리를 걷어찬다는 것이 이 용어의 내용이다. 그런 표변은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등 모든 경제선진국이 다 보여준 태도다. 선진국에 속지 말자는 주장이 통렬하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서구를 둘러싼 저항과 해체의 전략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 강정인 지음 아카넷 펴냄·2만5000원

정치학자 강정인 서강대 교수의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한국 사회의 학문 풍토를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서구중심주의’를 해부한 저작이다. 서구 중심주의란 유럽과 미국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그들의 역사·문화·정치·경제·사회를 정상·모범·표준으로 설정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이 서구 중심주의는 서구의 경험을 특권화하여 격상시키는 서구 예외주의와 비서구 문명을 서구인의 잣대로 재단해 비정상·일탈·표준 미달로 인식하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전의 양면처럼 거느리고 있다. 지은이는 국내 학계가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이 서구 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감염돼 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입증하고, 그 대안으로 서구의 장점을 받아들이되 그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철거하는 저항과 해체의 전략을 내놓는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위대한 생명의 요람, 그대 이름은 숲
숲의 생활사 차윤정 지음 웅진닷컴 펴냄·1만3500원

숲이란 공간이 얼마나 치밀한 작동원리로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죽살이를 되풀이하는지, 그런 생명체들이 모여 어떻게 숲이라는 하나의 생명체가 되는지, 그저 지나쳐가며 숲을 만나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책은 숲이 사계절 살아 숨쉬는 자연의 놀라운 힘과 정교한 생명 순환의 원리를 보여주는 거대한 무대이자 다양한 생명체들의 공동체임을 일깨우는 자연 다큐멘터리다. 수려한 문체와 풍성한 사진을 통해 숲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뭇 생명들을 아우르며 어떻게 그 속에서 뭇 생명들이 고귀한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꾸밈·치장 뺀 있는 그대로의 풍경들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 글·사진 이지누 샘터 펴냄·1만2000원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은 ‘우리땅밟기’라는 답사 모임을 이끌고 있는 사진작가 이지누씨가 쓴 사진에세이집이다. 그가 이 책에서 찾아간 곳은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 언저리다. 중년 고개에 이른 그는 지금껏 100번은 찾아간 이 변산에서 ‘새로 사귄 풍경’을 필름에 담고 소회를 글로 썼다. 이 책의 특징은 예쁜 것을 뒤쫓는 탐미주의나 특이한 것을 찾는 소재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데 있다. 꾸밈과 치장을 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은 쓸쓸하고 서글픈 작가의 내면과 포개져 잔잔한 울림을 그려낸다. 통상의 사진에세이집에서 보이는 ‘이미지 사냥’을 거부하고, 인문학적 정신으로 낯익은 사물을 낯설게 만나는 작가의 태도는 사진 찍기의 한 독특한 경지를 넘겨 보게 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 (왼쪽부터)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22 / 자본을 넘어선 자본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2 /한 잔의 붉은 거울/ 현의 노래


생활·문화 아우른 역사 '10년 역작'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22 이이화 지음 한길사 펴냄·각권 1만원

지은이 이이화씨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4년, 그리고 첫 권이 나온 것이 1998년, 그리고 마지막 22권이 올해 나왔다. 꼭 10년 세월이 투입된 것이다. 시리즈의 규모와 투입된 공력만큼이나 그 의미면에서도 이 거질은 두드러진다. 강단이 아닌 재야에서 홀로 역사학에 매진해온 한 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정치·경제·문화사를 모두 아우르는 통사를 22권으로 펴낸 것은 일찌기 유례가 없었다. 왕조나 정치 중심 역사 서술이 아닌 생활과 문화중심의 역사, 그리고 ‘역사에서의 평등’이란 원칙에 따른 글쓰기의 미덕 또한 그 의미에 뒤처지지 않아 보인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자본'의 불온한 숨결을 다시 벼리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진경 지음 그린비 펴냄·1만5900원

그린비 출판사의 ‘고전 다시 쓰기’(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이진경씨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은 카를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을 이진경적 관점에서 다시 읽은 책이다. 지은이는 여기서 <자본> 해석의 전통적 권위를 깨뜨리는 방식의 도전적 읽기를 감행한다. 전통 좌파는 마르크스를 일종의 정치경제학자로, <자본>은 정치경제학 교과서로 이해했지만, 지은이는 <자본>에 나타난 마르크스는 고전 정치경제학의 결함을 극복함과 동시에 그 경제학의 근원적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정치경제학을 해체하고 이와 함께 정치경제학의 토대인 자본주의 체제의 해체를 지향했음을 읽어낸다. 통설이 만들어낸 익숙한 결을 거슬러 솔질을 함으로써 고전이 본디 지녔던 불온한 숨결을 현재적 맥락에서 되살려 내고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신념과 의지로 우뚝선 다산 삼형제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 이덕일 지음 김영사 펴냄·각권 1만2900원

한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형제로는 단연 ‘실학의 완성자’인 다산 정약용, 그리고 <자산어보>를 남긴 그의 형 손암 정약전, 천주교사에 길이 남은 순교자였던 정약종 형제를 꼽을 수 있다. 책은 기구한 운명으로 역사속에서 짓밟히고 거꾸러지면서도 굳은 신념과 탁월한 학문적 업적으로 한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이들 형제의 삶을 역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보인다. 이들 삼형제는 교과서속 한 줄 이름 나오며 지나갔던 박제된 역사인물이 아니라 가혹한 시대속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신념과 의지로 우뚝 섰던 생동감 넘치는 위인들로 되살아나 오늘의 독자들과 만난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잊지 말아줘, 붉은 사랑의 열망
한 잔의 붉은 거울 김혜순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6000원

김혜순씨의 여덟 번째 시집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다. 사랑의 열망이 빚어낸 붉음이다. “빨간 피톨의 시간”(<붉은 장미꽃다발>), 열망은 부풀어오르고 마침내 뻥, 폭죽처럼 터진다. 붉은 물감을 넣은 풍선처럼 그것은 터지면서 사방을 빨갛게 물들인다. 대답을 얻은 사랑은 벌써 사랑의 자격을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관심과 비정의 차가운 벽 앞에 좌절한 여자는 “이제 그만 이 몸의 붉은 벼랑에서 뛰어내릴래”(<저 붉은 구름>) 위협도 해 보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다. 진심은 시집의 마지막 행에 담겨 있다: “김혜순을 잊지는 말아줘”(<날마다의 장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삼국사기 기록 몇줄로 '대단한 상상'
현의 노래 김훈 지음 생각의나무 펴냄·9500원

<현의 노래>는 무엇보다 작가적 상상력이 빛나는 소설이다. <삼국사기>에 몇 줄 기록되었을 뿐인 악사 우륵의 이야기를 장편 한 권 분량으로 되살려 낸 것. 음악을 포기하고 망해 가는 조국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냐, 조국의 상황에 눈감고 음악을 붙잡을 것이냐 하는 선택이 우륵의 앞에 놓여 있다. 역사에 기록된바, 멸망한 나라 가야의 악사는 조국을 무너뜨린 신라 왕을 위해 노래를 짓고 현을 뜯는다. 예술의 논리를 좇을 따름인 예인(藝人) 우륵은 다만 ‘칼의 현실’에만 충실했던 무인(武人) 이순신(김훈씨의 전작인 <칼의 노래>의 주인공)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2004.7.2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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