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마 유의 <슈크림 러브> 를 읽다가 찔끔 촉촉해진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금세 먹어버린, 하지만 남아있는 양이 많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싱글컵사이즈 아이스크림처럼.

결혼, 별거를 거쳐 이혼한 젊은 부부. 그남자 시치로는 이혼을 했지만 아내를 전처라고 부르지 않고 아내라고 부른다. 이혼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새로 시작한 연인이 아직 없어서다. 남자의 친구 츠다는 정력적인 사업가에 호색한 기질이 다분하다. 여러 여자들을 전전하고 원성을 듣고 결혼할 뻔한 순간에 이르지만 정작 결혼은 하지 못한다. 여자들 역시 츠다와 결혼할 생각은 없다. 사랑이나 결혼에 능수능란한 듯 논리를 펴는 츠다는 결혼에 대한 책임, 현실이 두렵다. 고요한 일상 속에서 츠다와 시치로는 아내와 여자들, 일에 녹아들었다 스스로 빠져나오기를 반복한다. 벼랑 끝에 서야 위기가 아니다. 벼랑으로 가는 동안도 위기의 순간이다.

시치로의 아내 역시 시치로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 애인이 있긴 하지만 어쩐지 그녀는 그 사랑에 안착하지 못한다. 시시때때로 시치로에게 문자를 보내고 안부 전화를 건다.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시치로는 아내와 연락이 닿지 않자 긴장하기 시작한다. 혹시 무슨 변을 당한 것이 아닐까 싶어 시치로는 그 밤에 아내의 아파트로 향한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문은 꿈쩍하지 않는다. 결국 아내에겐 별 일 없었다는 걸 알게 된 시치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돌아선다. 시치로는 혹 아내가 죽었을까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아내의 불륜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의 편협함을 탓하며 아내의 아파트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어떤 해방감에 젖어 아내에게서 한발짝 물러났다. 그후로 아내와 연락이 닿지 않아도 긴장하지 않으며, 아내의 문자가 와도 바로 답하지 않는다. 서서히 아내와 분리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

이혼한 후에도 친구로 지낸다는 말을 나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와 가슴이 혼연일체가 되려면 달팽이가 백미터 달리기를 20초 안에 끊는 것과 같은 궤에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가 시키는 일을 단박에 자르거나 유지시키지 못하는 것도 실은 머리 탓이지 가슴 탓은 아니다. 머리와 가슴의 부조화는 사랑, 결혼... 같은 청춘의 건널목에선 유독 심하다. 결혼은 시작이었지만 이혼은 끝이 아니다. 한번 맺은 인연 어찌 쉽게 끝내리... 같은 구구절절한 대목이 나가시마 유의 건조하고 메마른 문체로 정제되어있다. 인연이란 서정적이고 운명적인 말보다는 일상에서 주체적이지 못하고 나약한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슈크림처럼 달콤한 사랑과 결혼, 애인을 기대하지만 현실의 슈크림은 재료 배합이 문제인지 잘 녹지도 않고 맛있지도 않다. 하지만 결국 시치로와 아내에게도 (시치로는 맨 마지막에서야 아내의 이름을 부른다. 이름은 책 속에 있다 ^^ ) 마지막장면 같은 순간이 온다. 그런데 난 그게 마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부르는 처음으로만 보였다. 이를테면 이혼 후 시즌2, 같은.

 

 <낯선 여인과의 하루>
헬레나 본햄 카터 양의 부스스한 머리가 인상적인 영화. 아무리 분장이고 설정이라도 그렇지, 머리가 헝클어졌는데도 어쩜 그리 이쁜지. 며칠전 한밤중, 알러지가 생겨 붉은 드레스를 입은 눈을 하고도 또랑또랑하게 읽어내린 영화다. 이 영화는 보는 재미가 아니라 읽는 재미가 있다. 화면을 분할해 놓아서 조금 어지럽기도 한데 상징적인 의미로는 그럴듯하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언젠가는 저 화면이 하나로 합쳐지겠지 하는 망상이 죽어도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것. 감독은 보기좋게 배신하지만.

어느 행복한 결혼식장. 담배 피울 장소를 찾아 헤매는 여자. 그 여자를 매우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자. 알고보니 그들은 12년만에 해후한 전남편, 전처사이. 어린 시절에 결혼한 그들. 그리고 헤어짐. 이 남자에게선 요즘 우리세대의 '전남친' 의 후광이 보인다. 새벽 한 두시에 문자를로 '뭐해?' 라고 보내는 전남친들, 니가 행복하면 됐다고 썩소의 문자도 날려주시는 전남친들의 후광이 이 남자에게도 살아있다. 남자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를 질투하고, 여자의 남편을 질투하고, 여자에게 다시 돌아오라며 애원한다. 그러나 여자는, 보기좋게 아웃을 날린다.

연인들이 헤어지고 난 후, 여자는 금세 현실을 직시하려고 노력한다. 손가락이 전남친 휴대폰 번호를 누르고 있을지라도 마음 먹기에 따라서 순식간에 현실 탑승이 이뤄질 수 있다. 어떤 남자들은 다시 그 현실을 환상으로 재창작한다. 전남친들은 밤이면 전여친들 휴대폰을 향해 행진곡을 울린다. 전남친에게 전화 걸고 싶다는 여자들을 뜯어말리는 또다른 여자들은 그래봤자 너만 다친다는 야멸찬 경고를 날린다. 헤어지고난 후, ex가 되버린 연인에게 다시 한번 로그인 할 기회를 달라고 말하는건 익숙한 질문 유형이다. 잘되면 세계 평화를 찾게 될 지언정 잘 안되면 나 혼자만 자폭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 그 질문의 답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찔러보고 싶은 유혹, 뭔가 그때 완벽하고 충만한 사랑을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미련. 아마도 남자들은 구면이 있는 여자에게는 엄청난 자만감과 자신감을 품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번 끝난 사랑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는 감수성과 지금 생활의 리듬을 깨는 게 귀찮은 (하기 싫은 것도 있지만, 귀찮은이 더 우세가 아닐까) 여자의 마음을 모르면 늘 씁쓸한 남자가 될 여지가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6-29 0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