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노인들이나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의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실망시키는지 알 수 있다.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모두 써버리게 만드는것이다. 많은 환자들이 요양원이나 중환자실같이 고립되고 격리된곳에서 치료를 받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엄격히 통제되고 몰개성화된 일상을 견뎌 내면서 말이다. 늙어 가다가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정직하게 살펴보기를 꺼려하는 경향 때문에 우리는 환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더 많아졌고, 환자들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위로와 안식을 거부당해 왔다. 우리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의학, 기술,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손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 P20
영양, 위생, 의료 시스템이 나아지면서 1900년에만 해도 50세 미만이었던 평균 수명이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60세 이상으로 올라갔다. 가족 구성원 수도 현저히 줄어들어 1800년대 중반에 평균 일곱 명의 자녀를 두던 것이 1900년 이후에는 세 자녀 정도가 됐다. 여성이 막내를 낳는 평균 연령도 낮아졌다. 폐경이 될 때까지 출산하던 추세에서 30세 이전에 출산을 마치는 식으로 감소한 것이다. 그 결과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는 부모의 수가 대폭 늘었다. 20세기 초반 가장 어린 자녀가 21 세 되는 해의 여성 기대 연령은 50세였지만, 그보다 100년 전에는 60세였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가 성년에 이른 후에도 자신이나 자식이 그들의 노후 문제를 걱정하기까지 10년 이상을 보내게 됐다. - P41
최근 수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유전인자는 놀라울 정도로 작은요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독일 로스토크에 위치한 막스플랑크 인구 통계 연구소의 제임스 보펠James Vaupel은 평균 수명에 비해 한개인이 얼마나 오래 살지를 결정하는 요인 중 부모의 수명이 차지하는 비중은 3%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키가 얼마나 클지는부모의 키로 90% 이상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동일한 유전자를 지난 일란성 쌍둥이마저도 수명은 굉장히 달라서 보통 15년 정도 차이가 난다. - P60
노화는 우리의 운명이고,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우리 몸속의 마지막 예비 장치마저 모두 고장 날 때까지 어떤 의학적 도움을 받느냐에 따라 그 과정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가파르게곤두박질치는 길이 될 수도 있고, 각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을 좀 더 오래 보존하며 사는 완만한 경사길이 될 수도 있다. 의료계종사자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 P75
운이 좋고 꼼꼼하게 자기 관리-건강한 식습관, 운동, 혈압 조절, 필요할 때 의학의 도움을 적절히 받는 것ㅡ를 한 사람은 오랫동안그럭저럭 잘 살아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나이가 들면서 점점많은 것들을 잃어 가다 보면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충족하기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버거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 경우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삶의 상당 기간을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로 보내게 될 것이다. 언젠가 벌어질 일임에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그 결과 대부분 아무런 준비 없이 그 단계 도달한다. 도움을에필요로 할 때 어떻게 살 것인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지내다가 뭔가해 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 P94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육체적인 고통은 근본적으로 혼자 견뎌 내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주로 자연과 운명, 그리고 가족과 종교의 보살핌에 기댔다. 의술은 그 외에 시도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도구일 뿐이었다. 종교적인 치유 의식이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민간요법과 별 차이가 없었고 더 좋은 효과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의학이 더욱 강력해지면서 현대식 병원은 완전히 다른 개념을 도입했다. - P114
연금 덕분에 노인들이 은퇴 후 가능한 한 오래 독립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연금 제도에는 언젠가 죽게 되어 있는 생명의 마지막 단계, 즉 노쇠해지고 허약해지는 국면에 대한 고려가 들어 있지 않았다. - P115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도록 되어 있고,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상황과 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유를 더 갖는 것이 덜 갖는 것보다는 나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양이 삶의 가치와 비례하는 것은아니다. 안전이라는 게 공허한 데다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목표가되기도 하는 것처럼 자율성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 Ronald Dworkin 은 이와는 다른, 그러나 더 중요한 자율성 개념이 있다고 설파했다. 우리가 직면하는 한계와 역경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삶의 주인으로서 자율성-자유-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핵심적 가치다. 드워킨은 1986년에 발표한 놀라운 논문에서 이문제를 이렇게 쓰고 있다. "자율성의 가치는 그것이 만들어 내는 책임감 체계에 달려 있다. 자율성은 우리가 일관성 있고 분명한 각자의개성, 확신, 관심 등에 따라 자신의 삶을 구체화할 책임을 지도록 만든다. 자율성은 우리가 남에게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끌며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그러한 권리 체계가 허용하는 한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 P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