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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미국에 살고 싶다. 공부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여기 한국은 무척 안전하고 평화롭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떠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최근에는 회화 학원에 다녔다. 영어를 더 잘하고 싶었다. 그리고 학원을 다니는 동안 내가 이상한 실수를 자주 한다는 걸 알아냈다. 나는 동사 변형을 잘 못시킨다! 복문이거나, 부사가 너무 많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주어와 서술어의 거리가 멀 때 특히 그렇다. 너무나 오랫동안 배우고 써먹어서 전혀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던 문법이 실제로 말할 때는 장애물이 되다니 실망스럽다.


아마도 말할 때는 듣거나 읽거나 쓸 때보다 월등히 빠른 사고 속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어와 시제와 의미와 상황에 맞춰서 동사를 변형시키는 데 드는 수고를 감당할 여력이 없는 것 같다. 수차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나서는 왜 영어가 이렇게 비효율적인 구조를 가져야만 하는지 엄청 짜증스러워졌다. 


영어의 서술어는 한국어의 서술어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인다. be동사가 복잡다단하게 변하는 양태는 독일어나 프랑스어와 비교하자면 무척 양호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한국인 입장에서는 별 이유도 없이 사람 귀찮게 하는 것 이상으로는 평가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왜 3인칭 단수가 주어일 때는 s를 붙여야만 되냔 말이다. 주어가 단수여서 s를 못 붙이면 서술어에라도 붙이고 싶은 그 저의는 s에 대한 편집증이나 스토킹으로밖에 안 보인다. 그리고 또, 3인칭 단수 변화는 과거 시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can이나 would 따위의 조동사가 쓰이는 문장에도 마찬가지도. 그리고 또, 흑인들은 올바른 문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사 변형을 무시하거나 be동사는 is로, 부정형은 ain't로 통일해버리기도 한다. 같은 언어 속에서 서술어가 이렇게 다양하게 취급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는 왜 공통 언어의 사용자끼리도 다른 문법을 사용하는지, 그리고 또 시점이나 문장의 종류마다 새로운 규칙이 적용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고민이 진짜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잘만 하면 논문도 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럴싸한 아름다운 규칙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탐구는 점점 심처까지 뻗어나가 결국에는 문법의 존재 이유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문법이란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 있도록 언어 속의 요소들이 관계를 맺는 규칙이다. 그 규칙이 태초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도저히 자연발생했다고 단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위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 가끔씩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는 일관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을 따르는 것이 특히 그렇다. 설계자나 전능자에 버금가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이 사용자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고 통일된 양상으로 전달되었다면 반드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어떤 강력한 힘이 있어야만 한다. 그 힘은 무엇인가? 언어의 목적이 의사 전달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문법이 탄생하고 전염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의사 전달을 더 쉽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 전달이 쉬우려면 문법은 더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그 문법을 사용하기 위한 비용보다 편익이 커야 하는 것이다. 아,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는 대강 감이 오는 것 같았다. 인간의 삶은 늘 그런 식으로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해 왔다. 말하자면, 영어의 동사 변형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인간 사회가 늘 비용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발전해왔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랐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어는 주어에 따라 서술어를 변형시키지 않고, 영어는 변형시킨다. 서술어 변형에 따른 비용과 편익을 비교하자면, 한국어의 경우 '비용 > 편익'인 반면 영어는 '비용 < 편익'이 성립한다. 한국어는 '들'을 명사 뒤에 붙임으로써 복수 명사와 단수 명사를 구분하므로 발음의 측면에서 무척 분명히 구분이 가능하다. 그러나 영어는 한국어보다 연음도 많고, 명사 뒤에 s만 달랑 붙여서 복수인지 표시하니까 발음이 분명치 않거나 서술어가 s 발음으로 시작하는 경우에는 주어의 단수 여부를 전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한국어는 구태여 서술어 변형이라는 복잡한 문법을 채택할 편익이 비용보다 훨씬 적고, 영어는 편익이 더 컸을 것이다.


시제까지 변형되는 경우(예를 들어 과거동사)에 단수 변형을 시키지 않는 이유 역시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과거시제로 만들려고 이미 서술어를 한 번 변형시켜 놓고 3인칭 단수 여부까지 따지라면 너무 수고롭다. 회화는 읽기나 쓰기보다 뇌가 훨씬 격렬하게 돌아가야 하니까 그런 정도의 작은 복잡성 증가가 대단히 많은 비용 손실을 초래하게 된다. 조동사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흑인 문화권에서 서술어를 최대한 간단하게 사용하려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 그들은 서술어 변형의 편익이 비용보다 크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인어공주를 동화책으로 먼저 봤지만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도 몇 번 봤다. 인어공주의 이름이 애리얼이라거나 꼬리가 초록색이거나 결말에서 물거품이 되지 않는 것은 오리지널 디즈니다. 그러나 디즈니 버전에서 가장 좋은 것은 아무래도 OST다. 나는 OST가 너무 좋아서 어린 나이에도 영어 가사를 홀랑 외웠었다. 특히, 세바스찬이 부른 under the sea에는 지금까지도 나를 설레게 하는 화려함이 있다. 


세바스찬을 연기한 흑인 가수는 이렇게 노래한다.

"Such wonderful things around you, what more is you looking for?"


그땐 몰랐어도 저건 틀린 문장이다. 미국 가수 Aqua는 under the sea를 리메이크하면서 저 부분을 what more are you looking for?로 고쳐 불렀다. 


이토록 놀라운 일들이 네 주변에 가득한데, 대체 뭘 더 원하는 거야?


세바스찬이 춤추고 노래하는 아름다운 바다로부터, 에리얼은 결국 떠난다. 낯선 세계로 손 뻗는 것이 그녀에게 주는 편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 계속 영어를 배우고, 또 새로운 세계를 꿈꿀 것이다. 그것은 is를 are로 고칠 수밖에 없는, 타인을 향해 말을 걸기 위해 내가 들여야 하는 수고의 일부다. 내 주변에 이토록 놀라운 일들이 가득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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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얼마 전 퇴직을 하고 한 3개월 원 없이 놀다가 새 직업을 찾았다.

이만큼 살면서 택시도 꽤 타봤지만 택시 기사의 딸이 될 줄은 몰랐다.

아빠는 노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운전대를 잡고 사회의 새로운 자리에서 새롭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그에게 오히려 더 나아 보인다.


이미 독립할 나이가 되어 나도 나만의 삶을 꾸리고

아빠의 직업이나 수입이 내 삶에 별다른 영향을 기치지 않게 되고

아빠의 딸이 아니라 내 스스로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명함을 갖게 되었어도

이것은 내 삶의 태도를 조금은 바꿔놓았다.


신문의 사회란을 보며 자주 놀란다.

어떤 기사는 분신을 하고 어떤 기사는 동전을 맞는다.

종이 위에서, 옛날에는 활자였을 것들이 지금은 바늘같이 보인다.

점심나절엔 내 사무실 근처를 자주 다닌다고, 이쪽을 문득 올려다 보고

우리 딸 일 잘 하고 있나 생각하곤 한다는 말이 기억나

나도 마음이 답답해져 올 때는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지나가고 있을까, 이 어딘가를..


삶은 누구에게나 도대체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무겁지 않은가

재미있다고 말했던 것을, 어쩐지 신나보이던 표정을 자꾸 돌이키면서 간신히 위안 삼으면서도

생활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인간을 짓눌러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이 불쑥 들고 만다.


쉰 줄을 훌쩍 넘는 동안 아빠의 어떤 부분들이 자꾸만 줄어들고

나는 지금이 되어서야 그게 눈에 밟힌다.


그리고 또

곁으로 빈 택시가 지나갈 때마다 어쩐지 오랫동안 운전석을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도로를 달리는 택시들이 다 아빠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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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9-03-08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로를 달리는 택시들이 다 아빠가 되어버렸다. -> 제가 최근에 본 문장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에요.
 

1. 리어카 목마


어릴 적에, 아마도 유치원 다닐 때거나 더 어릴 때, 일주일에 1회 정도 트럭 아저씨가 리어카 목마를 끌고 아파트 단지에 오곤 했다. 목마는 (사실 목마가 아닌) 플라스틱제로, 색색깔의 것이 한 대여섯마리 리어카에 묶여 있고 느슨한 스프링에 매달려서 위 아래로 튕기는 장난감이었다. 어린애들이 백원인가 이백원인가 내고 십분씩 목마를 타고 있으면 아저씨가 동요를 틀어줬다. 나는 그걸 정말정말 좋아했다. 매일 베란다를 내다 보고, 엄마 목마 언제 와, 라고 묻곤 해서 가여웠던 모양인지 결국 엄마가 1인용 목마를 사줬다. 근데 그건 스프링이 너무 짱짱하고, 노래도 안 나와서 몇 번 안 타고 구석에 쳐박아두게 되었다.


후에 몸이 더 커져서 더이상은 탈 수 없게 되었을 때 엄마는 그걸 갖다 버리려고 현관문 앞에 내놓았는데, 때마침 엄마한테 잔뜩 혼나고 집에서 쫓겨났다가(엄마는 당시 '그럴 거면 나가!' 라는 말을 꽤 자주 했었는데 나는 보통 자존심이 상해서 진짜 나가버리곤 했다) 갈 데가 없어서 말에 앉아 있었다. 근데 그게 너무 재미나서, 내 처지도 잊고 한참이나 그걸 타고 놀아버린 것이다.

한 이삼십분쯤 지났을까 초조해진 엄마가 (초조해할 거면 쫓아내지 말았어야 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빼꼼 문을 열어봤다가 너무나 천진난만하게 말을 타고 바운스 바운스 하고 있는 나를 보고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던 일이 있었다. 왠지 나는 이 기억이 소중하다.



2. 그림 복사기


초등학교 앞에서는 때때로 신기한 것을 팔았다. 핑크거나 초록으로 염색한 병아리도 팔았고, 달고나도 팔았고, 그리고, 그림 복사기도 팔았다. 병아리나 달고나는 꽤 자주 찾아왔지만 그림 복사기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닌 6년 동안 단 한 번만 찾아왔다. 


그림 복사기는 내가 붙인 이름인데, 그 뒤로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정확한 명칭이 뭔지 모른다. 그것은 약간 자바라 옷걸이처럼 생긴 까맣고 가오리연 만한 정체불명의 것이다. 그림 복사기 판매상이 학교 앞에 좌판을 깔아놓고 앉아서, 세일러문 그림 같은 것을 출력한 것과 백지 한 장을 나란히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을 잘 구경하지 않는 편인데, 그 날은 애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어서 나도 휩쓸려 들어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는 세일러문 위에 그림 복사기의 한쪽 발을 고정해놓고, 백지 위에 나머지 발을 놓은 뒤, 세일러문 위에 놓았던 발을 연필처럼 쥐고 그림 위를 트레이싱했다. 그랬더니 글쎄 다른쪽 발이 이 자의 손놀림을 그대로 따라하며 백지 위에 세일러문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로부터 그림을 잘 못 그리는 것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터라 순식간에 그 마법같은 도구에 마음을 빼앗겼고, 주머니에 있던 돈을 홀랑 털어 그것을 사가지고 왔다. 집에 돌아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화책을 펼쳐놓고(아마도 백조의 호수였을 것이다. 엄청나게 예쁜 오데트 삽화가 있는 동화책이었으므로) 판매상이 했던 것과 꼭 같이 그림 복사기를 설치했으나


...


이것이 내가 당한 생애 첫 사기다. 이 기억은 하나도 소중하지 않다. 지금까지도 원통하다.



3. 두부 아저씨


집집마다 저녁을 지을 때 쯤 되면 두부 트럭이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아저씨는 트럭에 매달린 종을 짤랑 짤랑 쳤다. 그 종소리는 귀에 거슬리지도 않으면서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엄마는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 소리를 금방 알아듣고, 두부 한 모 사와, 또는, 콩비지 달라고 해, 라면서 천원을 쥐어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주 초조해졌다. 고정된 주소를 가진 가게가 아니라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 두부 트럭 아저씨한테서 천원과 두부를 맞바꾼다는 것은 아주 불안정한 일로 생각되었다. 이렇게 불확실성이 큰 미션을 내게 주다니! 나는 운동화를 꺾어신고, 복도를 가로질러 들려오는 종소리를 하나 하나 헤아렸다. 백 번 치고 가면 어쩌지, 오십번만 치고 가면 어쩌지, 열번만 치고 가면 어쩌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너무 천천히 오는 것 같으면 나는 죽기 살기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두부를 못 산다고 별 일이 생기는 게 아닌데도, '두부 사오기'는 아주 중요한 도전이 되어 나를 몰아붙인 것이다. 나는 그 어릴 적에도 이미 실패를 두려워했던 모양이다.


두부 아저씨는 신의 깊은 자였다.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내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손에 꼭 쥔 천원을 내밀 때, 서두르는 법 없이 연하늘색 반투명한 봉지를 휙 뜯어 두부 한 모를, 아니면 트럭 옆에 매달아둔 콩비지 주머니를 하나 톡 뜯어 내밀곤 했다. 그 두부가 마트표 두부보다 특별히 더 맛있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한 두부였다. 그래도 나는 그게 더 좋았다. '마트에서 두부 사오기' 보다 훨씬 어렵고 위험천만한 과정을 통해 획득한 성공의 맛이었다. 



4. 분유 도둑질


동생이 태어났을 때, 엄마는 애기가 먹을 분유를 몇통씩 한꺼번에 구매해서 집에 쌓아놓았다. 나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나, 엄마가 애기랑 같이 낮잠잘 적에 몰래 분유를 한 숟갈씩 퍼먹었다. 거의 하루에 두 세 숟갈은 먹었을 것이다. 분유는 약간 프리마 같은 느낌으로, 달달하고 고소하고 부드럽고 풍부한 지방의 맛을 가졌다. 처음에는 그냥 호기심에 먹어 봤다가, 생각 외로 너무나 맛있어서 계속 먹게 된 것이다. 나는 왠지 다 큰 게 분유를 먹는다는 게 부끄러워서, 당당하게 먹을 생각은 못하고-아마 당당하게 먹었다면 제지 당했겠지만-맨날 그렇게 몰래 훔쳐 먹었다. 그래도 속으로는 엄마가 알 거라고 생각했었다. 애기 혼자 먹는데 그렇게 분유가 빨리 줄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최근 엄마랑 얘기를 나누다가 엄마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몹시 경악한 얼굴로, 아니 그럼.. 니 동생은 뭘 먹고 큰 거야..... 라고 놀라했는데, 당시 분유가 소모되는 속도가 육아서적에 나오는 그것과 꼭 같아서 엄마는 애기가 딱 표준치만큼 분유를 먹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만약 동생새끼가 왜소하게 자랐다면 이 사실을 알고 나는 몹시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나, 이 놈은 지금 산적같은 체형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 아마 내가 좀 뺏어먹어서 이 만큼 큰 거지, 안 뺏어 먹었으면 과도하게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5. 팔베개


아빠는 아침에 일찍 나가고 밤에 늦게 들어왔다. 그래서 평일에는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나는 에너지가 넘치는 어린이였는데, 가끔씩 주말에 엄마가 외출을 하면 아빠가 나를 책임져야 됐지만 자꾸 피곤한지 조금만 놀아주다가 꾸벅꾸벅 졸고는, 아빠랑 낮잠 잘래? 하고 꼬시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보통은 그런 제안을 용서치 않았으나, 어느날은 눈에 졸음이 가득한 게 좀 불쌍해서 같이 낮잠을 자주었다. 아빠는 머리를 베개에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는데, 나는 아빠가 내준 팔베개를 하고서 한참이 지나도 전혀 잠이 오지 않아 괴로웠다.


한참 나무토막같이 누워있다가, 더이상은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자 나는 살금살금 아빠의 품을 빠져나왔다. 문득 방을 나서려다 생각해보니 아빠가 혼자 잠에서 깨면 외로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곰인형 하나를 팔 위에 얹어 놓았다. 내 백일 사진에 같이 나온 흰곰돌이를.


평소에 아빠랑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지만 나의 이런 기특한 배려를 기억하고 있는지는 묻지 못했다. 내일 물어봐야겠다. 아마 나 같은 딸이 있다면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6. 델몬트 병


옛날에는 집에서 보리차를 끓여 먹었다. 펄펄 끓여가지고 델몬트 유리병에 넣어서 한김 식혔다가 냉장고에 넣어 놓는 것이다. 평소 보리차를 마시다보면 맹물은 비린내가 나서 잘 못 먹게 된다. 지금은 맹물이 더 좋다.


델몬트 병 밑바닥에 보리차가 찰랑찰랑 깔릴 쯤이 되면 불안해졌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 아주 목이 말라질지도 모르는데 남은 물이 반 컵 분량뿐이 안 될 것 같으니까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냉장고를 열었을 때 델몬트 병마다 새로 끓인 보리차가 꽉 차 있고, 아주 차갑게 식어서 이슬이 겉면에 송골송골 맺혀 있으면 그렇게 안심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델몬트 병은 굉장히 무겁고, 크고, 어린이가 한 손으로 다루기에는 아주 힘든 구조를 갖고 있었다. 어느날 귀가했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고, 나는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었다. 한여름이었다. 차가운 보리차가 세 병이나 꽉 들어차 있었다. 기분이 몹시 좋아서, 서둘러 그걸 꺼내다가 보기 좋게 떨어트리고 말았다. 델몬트 유리병은 아주 잘 깨진다. 장판에 떨어지면서도 와장창 산산조각이 났다. 가득 들어있던 보리차의 물결을 타고 유리조각이 부엌과 거실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내가 발 딛고 선 자리 빼고는 온통 보리차와 유리조각 천지였다. 


나는 충격받아서 한참 가만히 서 있었다. 엄마한테 혼날 거라는 무시무시한 예감과, 당장 몸을 피할 수 없다는 괴로움이 몰려들어 눈물이 비죽비죽 나왔다. 날씨가 더워서 곧 등허리에 땀이 찼는데, 선풍기를 틀러 갈 수도 없었다. 느끼기로는 한 12년쯤 지나서 엄마가 귀가했고, 내가 그러고 서 있는 꼴을 보더니 아이고! 큰 소리를 냈다. 나는 엄마가 곧 신경질을 부리겠지, 생각하면서 계속 울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도 정말 괴로울 만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아주 불쌍해하면서, 얼마나 겁을 먹고 오래 서 있었니, 하면서 나를 번쩍 들어 식탁 의자에 올려놓고서는 금방 거실을 다 치워버렸다. 


엄마는 모르겠지만 그 때 그 사건이 엄마가 나를 말만이 아니라 진짜로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첫번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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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8-07-1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랍도록 선명하고 반짝반짝한 기억들이네요. 리어카 목마가, 두부 아저씨가, 달고나 아줌마가, 찬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델몬트 병이 선연합니다. 향수에 젖어있는데.. 제목을 너무 늦게 봤다. ㅎㅎ 돈 내고 보래도 얼마든지 그럴만큼 값진 추억입니다.

그림 복사기는 뭔지 모르겠지만, 저도 비슷한 사기를 당한 경험이 떠오르는군요. 거짓말 탐지기.. ㅠ_ㅠ
 

"사람은 노욕을 경계해야 돼."


"노욕이 뭐여?"


"늙어서 부리는 욕심이야."


"왜 노욕만 경계해야지 돼? 젊어서 부리는 욕심도 욕심인데."


"노욕은 좀 달라, 성격이. 추해. 젊어 욕심은 열정으로라도 포장할 수 있지만 노욕은 안 그래."


"으응.."


"아빠 회사에 그 저, 삼성 다니던 사람이 임원으로 스카웃 돼 왔었거든."


"응, 근데?"


"아주 사람이 반짝반짝 하더라? 벌써 그게 20년 전 일인데, 허례허식, 꼰대문화, 그런 거 다 잘못된 거라고, 회사를 아주 뿌리부터 바꿔놨었어."


"오..."


"그 사람이 그렇게 첫번째 계약기간을 보내고 나서 회사 매출이 엄청나게 뛰었단 말이야."


"..오..."


"보통은 임기 끝나면 나가는데, 계속 계약기간 갱신하고, 또 갱신하고, 아예 부사장까지 올라갔다가 최근에야 그만 뒀어. 임원으로 20년을 보낸 거지."


"흠."


"근데 그 사람도 종국에는 변하더라구."


"아?"


"눈빛부터 달라져. 사람이 욕심이 생기니까 그렇게 되더라. 이제 자기가 가진 것은 다 구시대의 것들이고 회사에 제공할 수 있는 게 더는 아무 것도 없는데도, 어떻게든 남아있으려다 보니까."


"흠..."


"아빠가 진짜 존경했었거든. 그런데도, 노욕이 그렇게 무서운 거야."


"슬픈 얘기네."


"너는 아직 젊으니까 모르겠지만, 항상 그걸 기억해야지 돼.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고 습관을 만들어야지 된단 말이야."


"왜?"


"왼손잡이는 암만 노력해서 오른손을 쓰게 되더라도.."


"응."


"급할 때는 왼손이 먼저 나가는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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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8-06-07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덕끄덕
 

작년에 ‘신인류의 백분토론’이라는 연극을 봤다. 


“당신은 시각장애인에게 빨간색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언어는 해상도가 아주 낮다는 명제를 이해시키기 위해 등장인물은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오랫동안 인간의 의식이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언어로 정리할 수 있어야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아주 자유로운 상태일 때 마음속을 떠도는 자연스러운 생각이 모두 언어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우리는 벚꽃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동산을 떠올리고자 할 때 ‘벚꽃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동산’하고 생각하지, 마치 동영상을 재생하듯 그런 풍경 자체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더 노력을 투자하여, ‘흩날리는 벚꽃잎은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이고, 날씨는 따뜻하지만 덥지는 않은 섭씨 27도 정도에, 동산의 높이는 그냥 중간 정도로 등산이라는 느낌이 안 들 만큼만 경사졌고, 부드러운 잔디가 촘촘히 돋아 있으며, 바람은 거의 안 부는 상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심상은 더 정교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의식의 장르가 문학에서 영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감고 잠시 집중하면 그런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그리는 과정에 방금 묘사한 것 이상으로 더욱 많은 문장이 투입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다고 해서 그 풍경의 해상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체로 흑백이고, 2차원이고, 선이 적을 것이다. 수많은 문장의 부축을 받아야만 간신히 걸을 수 있는, 인간의 의식이란 그처럼 연약하고 성긴 것이다.


나는 삶의 중반 이후 언젠가 갑자기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기능을 찾아냈다. 이 기능의 이름은 ‘공감각’이며, 나는 최근 어떤 기사를 보고 이게 그거라는 걸 알았다. 공감각자들은 한 가지 감각을 다른 감각과 함께 느낀다. 소리를 색으로 인지하거나, 숫자가 색으로 보이거나, 그림에서 냄새가 나기도 한다. 이 기사를 볼 때까지 나는 내가 가진 기능의 이름을 몰랐기도 하거니와 아주 미약하기 때문에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나서야 비로소 좀 의식해서 살펴보게 되었다.


나의 공감각은 다음과 같이 발현된다.


1. 사방이 고요하고 어두워야 한다.

2. 나는 아주 안정된 상태로 다른 생각(예를 들어 잠들겠다는 생각)에 빠져있어야 한다.

3.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린다(아빠가 물 잔을 식탁에 탁, 내려놓는 소리, 밖에서 들리는 자동차 도난경보음 등).

4. 그 예상치 못한 소리는 꽤 크고 여운 없이 날카로워야 한다(부드러운 소리는 음량이 크더라도 안 됨).


위 네 가지 조건이 만족된다면 나는 소리를 색으로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가 나는 거의 동시에 눈앞이 번쩍! 하는 것이다. 번개 치는 것과 유사한데 소리의 종류에 따라 빛의 색감이 좀은 다르지만 대체로 밝은 하양, 하양에 가까운 분홍, 그런 식이다. 빨강이나 파랑처럼 원색의 뚜렷한 빛은 보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기로 이 기능은 평소에도 발현되고 있을지 모르나 워낙 미약하고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내가 볼 수 있는 색깔보다 더 환한 것(형광등 빛이나 햇빛)이 시야를 밝히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전혀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대체로 자려고 누웠을 때만 발현될 만한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에 평소에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조금 재미있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소리가 눈에 보이는데 재미없기가 오히려 쉽지 않다. 어떤 때는 소리가 들리는 것보다 색이 보이는 게 약간 빠르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청신경보다 시신경이 더 기능을 잘 하는 게 아닐까.. 뭐 그런 잡념에 빠졌다가 잠들고 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어 귀여운 부가기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공감각이 아니라 상상력이 아닐까? 하는.



나한테는 또 다른 부가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공감각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기억력과 상상력이 혼합된 무엇이라고 설명할 만한 어떤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역시 사방이 고요하고 나의 심신이 안정된 상태여야 한다.

2. 어딘가에 구애됨이 없는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어야 한다.

3. 그 상상은 진지한 구석이 전혀 없는 망상이어야 한다.

4. 그 망상을 구체화할 생각이 전혀 없어야 한다. 즉, 이 망상의 흐름이 어떻게 되든지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서, 이 생각 저 생각 아무렇게나 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 다시 말해, 멍 때리는 상태이긴 하지만 아주 생각이 없는 상태는 아닌, 애매하게 멍 때리는 상태, 또는 멍 때리기 위한 준비 상태 정도가 적절하다.

5. 망상의 내용이나 키워드 중 일부가 청각 효과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어야 한다.


위 다섯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나는 망상 도중 소리를 듣는다. ‘..아 나 집에 있는 기타 중고나라에 팔까..’ 정도로 구체적이거나 현실적인 행동과 관련이 있을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고, ‘..기타... 집...’ 정도로 거의 형체 없는 파편형태의 망상일 때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이 예시에서는 기타 소리가 들린다. 내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아주 음량이 커지기도 한다. 이 기타소리는 앞뒤 없는 진짜 기타‘소리’ 그 자체로서, 무슨 곡이 들리는 것은 아니고 기타 소리란 이런 것이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한 노이즈다. 그러나 아주 약간만 의식을 끌어 모아 집중하면 금세 소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별로 불편하지는 않다. 악기 소리만 들리는 것은 아니고 ‘남자 목소리’나 ‘새 소리’ 같은 것도 들리곤 한다. 


나는 일단 이것을 과도한 상상력이라고 정의 내렸다. 나의 상상력이란 구술 형태보다 좀 더 적극적이거나 감각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이 기능을 설명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니까 문득, 꼭 잠들려고 누웠을 때만 나타나는 위 공감각 현상에 대해서도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상태일 때의 나는 어떤 소리를 재빨리 색깔과 연결시켜 상상할 수 있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다만 문제는 소리보다 색깔이 앞서기도 한다는 점인데, 어쩌면 내가 소리를 인지하는 시점보다 귀로 ‘듣는’ 시점이 더 빠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 사소하고, 일상과 완전히 무관한 기능들에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신기해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오랫동안 믿어왔던, 인간의 의식은 언어에 구속된다는 의견에 일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기도 하다.



뜬금없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아빠가 물 잔을 내려놓았다’라고 문장으로서 받아들여 인식하는 과정 전에 색을 본다. 이것은 나의 사고와 감각이 문장의 형태를 빌린 2차원적 구조보다 좀 더 입체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상상에 배경음악이 깔린다. 그것은 특히 상상이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 상태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타의 소리는 낑낑거리고 깡깡거리며, 한 번에 여섯 개의 음까지 소리날 수 있고...’하는 언어보다 더 강력하게 나의 상상에 속도를 더하는 연료다. 보통의 상상은 먼저 언어가 있고 나서야 그것을 구체화하는 뭔가가 있지만, 이 소리 효과는 언어보다 앞서있고 언어보다 해상도가 높다는 게 다른 점이다.



빨간색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빨간색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는 빨간색의 느낌만을 어렴풋이 되짚을 뿐이다. 빨간색이 눈앞에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빨갛다고 판별할 수 있지만, 빨간색이 눈앞에 있지 않은 상황에서 빨강을 실제와 꼭 같이 재생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여태껏 인식은 언어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일지라도 언어로서 구체화하는 방법 외에는 뇌 속 어느 한 구석에라도 빨강의 느낌을 실물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기타 소리를 언어의 힘을 빌리지 않고 듣는다.


인간의 의식은 어쩌면 언어 없이도 기능하는 자립성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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