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신인류의 백분토론’이라는 연극을 봤다. 


“당신은 시각장애인에게 빨간색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언어는 해상도가 아주 낮다는 명제를 이해시키기 위해 등장인물은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오랫동안 인간의 의식이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언어로 정리할 수 있어야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아주 자유로운 상태일 때 마음속을 떠도는 자연스러운 생각이 모두 언어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우리는 벚꽃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동산을 떠올리고자 할 때 ‘벚꽃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동산’하고 생각하지, 마치 동영상을 재생하듯 그런 풍경 자체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더 노력을 투자하여, ‘흩날리는 벚꽃잎은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이고, 날씨는 따뜻하지만 덥지는 않은 섭씨 27도 정도에, 동산의 높이는 그냥 중간 정도로 등산이라는 느낌이 안 들 만큼만 경사졌고, 부드러운 잔디가 촘촘히 돋아 있으며, 바람은 거의 안 부는 상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심상은 더 정교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의식의 장르가 문학에서 영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감고 잠시 집중하면 그런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그리는 과정에 방금 묘사한 것 이상으로 더욱 많은 문장이 투입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다고 해서 그 풍경의 해상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체로 흑백이고, 2차원이고, 선이 적을 것이다. 수많은 문장의 부축을 받아야만 간신히 걸을 수 있는, 인간의 의식이란 그처럼 연약하고 성긴 것이다.


나는 삶의 중반 이후 언젠가 갑자기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기능을 찾아냈다. 이 기능의 이름은 ‘공감각’이며, 나는 최근 어떤 기사를 보고 이게 그거라는 걸 알았다. 공감각자들은 한 가지 감각을 다른 감각과 함께 느낀다. 소리를 색으로 인지하거나, 숫자가 색으로 보이거나, 그림에서 냄새가 나기도 한다. 이 기사를 볼 때까지 나는 내가 가진 기능의 이름을 몰랐기도 하거니와 아주 미약하기 때문에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나서야 비로소 좀 의식해서 살펴보게 되었다.


나의 공감각은 다음과 같이 발현된다.


1. 사방이 고요하고 어두워야 한다.

2. 나는 아주 안정된 상태로 다른 생각(예를 들어 잠들겠다는 생각)에 빠져있어야 한다.

3.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린다(아빠가 물 잔을 식탁에 탁, 내려놓는 소리, 밖에서 들리는 자동차 도난경보음 등).

4. 그 예상치 못한 소리는 꽤 크고 여운 없이 날카로워야 한다(부드러운 소리는 음량이 크더라도 안 됨).


위 네 가지 조건이 만족된다면 나는 소리를 색으로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가 나는 거의 동시에 눈앞이 번쩍! 하는 것이다. 번개 치는 것과 유사한데 소리의 종류에 따라 빛의 색감이 좀은 다르지만 대체로 밝은 하양, 하양에 가까운 분홍, 그런 식이다. 빨강이나 파랑처럼 원색의 뚜렷한 빛은 보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기로 이 기능은 평소에도 발현되고 있을지 모르나 워낙 미약하고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내가 볼 수 있는 색깔보다 더 환한 것(형광등 빛이나 햇빛)이 시야를 밝히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전혀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대체로 자려고 누웠을 때만 발현될 만한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에 평소에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조금 재미있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소리가 눈에 보이는데 재미없기가 오히려 쉽지 않다. 어떤 때는 소리가 들리는 것보다 색이 보이는 게 약간 빠르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청신경보다 시신경이 더 기능을 잘 하는 게 아닐까.. 뭐 그런 잡념에 빠졌다가 잠들고 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어 귀여운 부가기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공감각이 아니라 상상력이 아닐까? 하는.



나한테는 또 다른 부가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공감각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기억력과 상상력이 혼합된 무엇이라고 설명할 만한 어떤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역시 사방이 고요하고 나의 심신이 안정된 상태여야 한다.

2. 어딘가에 구애됨이 없는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어야 한다.

3. 그 상상은 진지한 구석이 전혀 없는 망상이어야 한다.

4. 그 망상을 구체화할 생각이 전혀 없어야 한다. 즉, 이 망상의 흐름이 어떻게 되든지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서, 이 생각 저 생각 아무렇게나 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 다시 말해, 멍 때리는 상태이긴 하지만 아주 생각이 없는 상태는 아닌, 애매하게 멍 때리는 상태, 또는 멍 때리기 위한 준비 상태 정도가 적절하다.

5. 망상의 내용이나 키워드 중 일부가 청각 효과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어야 한다.


위 다섯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나는 망상 도중 소리를 듣는다. ‘..아 나 집에 있는 기타 중고나라에 팔까..’ 정도로 구체적이거나 현실적인 행동과 관련이 있을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고, ‘..기타... 집...’ 정도로 거의 형체 없는 파편형태의 망상일 때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이 예시에서는 기타 소리가 들린다. 내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아주 음량이 커지기도 한다. 이 기타소리는 앞뒤 없는 진짜 기타‘소리’ 그 자체로서, 무슨 곡이 들리는 것은 아니고 기타 소리란 이런 것이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한 노이즈다. 그러나 아주 약간만 의식을 끌어 모아 집중하면 금세 소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별로 불편하지는 않다. 악기 소리만 들리는 것은 아니고 ‘남자 목소리’나 ‘새 소리’ 같은 것도 들리곤 한다. 


나는 일단 이것을 과도한 상상력이라고 정의 내렸다. 나의 상상력이란 구술 형태보다 좀 더 적극적이거나 감각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이 기능을 설명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니까 문득, 꼭 잠들려고 누웠을 때만 나타나는 위 공감각 현상에 대해서도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상태일 때의 나는 어떤 소리를 재빨리 색깔과 연결시켜 상상할 수 있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다만 문제는 소리보다 색깔이 앞서기도 한다는 점인데, 어쩌면 내가 소리를 인지하는 시점보다 귀로 ‘듣는’ 시점이 더 빠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 사소하고, 일상과 완전히 무관한 기능들에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신기해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오랫동안 믿어왔던, 인간의 의식은 언어에 구속된다는 의견에 일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기도 하다.



뜬금없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아빠가 물 잔을 내려놓았다’라고 문장으로서 받아들여 인식하는 과정 전에 색을 본다. 이것은 나의 사고와 감각이 문장의 형태를 빌린 2차원적 구조보다 좀 더 입체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상상에 배경음악이 깔린다. 그것은 특히 상상이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 상태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타의 소리는 낑낑거리고 깡깡거리며, 한 번에 여섯 개의 음까지 소리날 수 있고...’하는 언어보다 더 강력하게 나의 상상에 속도를 더하는 연료다. 보통의 상상은 먼저 언어가 있고 나서야 그것을 구체화하는 뭔가가 있지만, 이 소리 효과는 언어보다 앞서있고 언어보다 해상도가 높다는 게 다른 점이다.



빨간색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빨간색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는 빨간색의 느낌만을 어렴풋이 되짚을 뿐이다. 빨간색이 눈앞에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빨갛다고 판별할 수 있지만, 빨간색이 눈앞에 있지 않은 상황에서 빨강을 실제와 꼭 같이 재생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여태껏 인식은 언어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일지라도 언어로서 구체화하는 방법 외에는 뇌 속 어느 한 구석에라도 빨강의 느낌을 실물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기타 소리를 언어의 힘을 빌리지 않고 듣는다.


인간의 의식은 어쩌면 언어 없이도 기능하는 자립성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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