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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ㅣ 지식여행자 8
요네하라 마리 지음, 조영렬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0. 내가 마리 여사를 처음 만난 건 <미식견문록>이었다. 그 뒤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찾아 읽고 본격적으로 마리 여사에게 빠져 <마녀의 한 다스>를 읽던 차에, 이 책을 선물 받아 읽게 되었다.
문화 편력기라는 포괄적인 서명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문화와 언어, 미식,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고루 담고 있다. '문화 탐사기'라는 이름으로 알라딘에 일부 연재되기도 했지만,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문화 편력기'로 이름이 바뀐 듯하다.
이 책은 본래 칼럼으로 연재된 글을 묶어 분량이 어느 정도 일정하고 짧으며, 내용도 주로 가벼운 에피소드 등을 다루고 있다. 본격적인 문화 편력기는 오히려 다른 책들에 펼쳐져 있는 느낌이다.
사실 마리 여사의 글은 크게 봐서 모두 문화 편력기라 불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너르게 담긴 했으나, 각 주제에 집중해 보다 깊이 들어가던 이전 책들보다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읽기는 쉽지 않았는데, 짧은 글에서 더 도드라지던 문화적인 차이 때문이었다.
특히 이 책에서 난해했던 지점은, 일본어의 표기와 발음 문제 등을 다룬 글을 읽을 때였다. (이런 점이 걱정되어 아직 읽지 않고 망설이고 있던 <미녀냐 추녀냐>를 읽게 될 때에도 이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대부분의 우리에게 낯선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정이랄지, 낯선 인물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관계로 깊은 이해가 어렵고 짐작하고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이 책에서는 유난히 많았다.
1. 하지만 여전히, ‘이야기 덕분에 살다’ 처럼 마리 여사의 주장점이 발휘되는 지점에서는 또다시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고 만다. 마리 여사는 정말이지 옛이야기와 (속담!), 요리와 미식 이야기를 다룰 때만큼은 집요하고, 아무리 사견이라 해도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다.
커피 브레이크를 예찬하며 굳이 ‘비물적 관계의 물적 기호’ 와 같은 표현을 쓰고 있는 글에서는 마리 여사의 매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녀의 글이 어렵고 조금은 예스럽게 보이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2. [심장에 털이 나 있는 이유] 부분에서는 통역, 문화 현장 이야기를 통해 각 언어와 문화들 사이의 차이를 쉼없이 다루고, 그를 통해 교육, 정치, 결국 인간에 대한 마리 여사의 애정과 날카로운 안목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아직도 조심스레 언급하는 사회주의자가 보여주는 이 정치적인 균형감과 인간미는 이번에도 우리를 매혹시킨다.
‘애매함의 호용 / 말은 누구의 것인가?’ 같은 글에서는 언어는 늘 변한다는 것, 그 점을 전문적이고도 통찰력있게 잘 알고 있는 통역사, 번역가 마리 여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독서의 T.P.O, 새 소식을 담는 낡은 틀에 대해 쓴 글은 과연, 하는 공감과 함께 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욕망과 그것을 실현하기까지의 거리]에서는 마리 여사가 꾸준히 강조하는 ‘독립적인 인격체’에 대한 이야기가 수없이 변주, 반복 강조된다. (옛이야기에서도 교훈을 끌어오고, 개와 고양이에게 머리가 좋다는 기준이 어떤지, 좀비 같은 젊은이들의 예로 섬뜩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뒷 부분에서는 마리 여사 스스로 그렇게 독립적으로 살아가게 된 좀더 구체적인 이유가 나온다.) 어쨌든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야생을 잊은, 청맹과니 에고이스트’인 나를 조금 더 움직여보기로 결심했다. ^^;
마지막 [드래건 알렉산드라의 심문] 에서는 마리 여사의 비범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 그녀의 유년기 이야기 등이 실려 있어 마리의 기존 독자들에게 애틋함을 선사한다. 여느 때처럼 아련한, 러시아에서 보낸 유년기에 대한 회고는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멀고 낯선 나라 러시아에 대해 동경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3. 독특한 환경과 엄청난 독서량으로 이룩한 탁월한 지식을 발판 삼아, 세상만사를 유쾌하고 쉽게 전달하는 마리 여사의 능력 덕에, 마치 오래 알고 있던 나의 지식처럼 착각하게 되는 독후감은 여전하다. 단지 마리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조금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을 듯하다.
따라서 이 책은 마리를 처음 만나는 이에게보다는, 이제는 세상을 떠나 더 이상의 책이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안타까웠던 기존 독자들에게 후식처럼 권해 드리고 싶은 책이다. 나 역시 생각지 못했던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고맙게 읽었다. 하지만 내게는 마리의 책 중에서 베스트는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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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간추려 말하지 못하고 빙빙 돌리고 줄줄이 나열만 하고 있는 나를 보며, 역시 ‘O/X 모드의 교육’을 받은 나와 나의 조국의 교육 현실을 통탄하게 된다. 드래건 알렉산드라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나여, 아직도 드래건 알렉산드라의 핑계를 대고 있는 나여. 오호, 통재라. 비극이로다, 비극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