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그 지글러 지음, 이구용 옮김 / 큰나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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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공과 실패 그리고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지극히 원론적이며, 다른 누군가에게 그리고 어느 책에선가 듣고 읽어보았을 내용이지만
너무나도 잘 잊어버리는 내용들이 책에 가득하다.
짧지만 의미있고 내용을 깊이 씹어보게하는 많은 이야기들이다.
 
일흔을 넘긴 노신사의 경험은 성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실패를 어떻게 디딤돌로 놓을 것인가를 조근조근 이야기해주고 있다.
특히 가족에 대해, 자녀들과의 관계에 대한 짧은 지적들은 다른 무엇보다
강렬한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의 인생에서 진정한 승리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부모가 되는 것이다."(p.38).
 
나는 과연 인생을 승리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실패자로 살아가고 있는가?
물론 지금 그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책 제목에서 처럼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아주 작은 것부터 시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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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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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당연한 나에게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책 제목은 상당히 도전적이었다. 또한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지게 했다(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마치 작품성보다는 상업적인 흥미 위주의 작품일 것이라는 막연한 판단이지만....).
하지만 워낙 저자에 대한 유명세가 강하게 작용해서일까, 아니면 무엇 때문이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책을 들게 되었다.
한 사람이 신호를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그 눈먼 사람(그는 이 책에서 첫번째로 눈먼 사람이라고 지칭된다)은 한 사람의 인도를 받아 집에까지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곧 도움의 손길은 인간의 욕심의 본성을 누르지 못하게 했고,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자동차를 훔쳐 달아나는 사람이 되었다(그는 자동차 도둑으로 지칭된다). 첫번째로 눈먼 사람은 다음날 아내와 함께 안과를 찾아가 원인과 치료를 받으려 했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차츰 차츰 사람들은 백색 실명으로 인해 눈이 멀어간다. 안과 의사도 그 안과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왔던 환자들도, 그리고 그 환자들과 접촉했던 모든 사람들이 눈멀게 된다(도움을 주기 위해 안내하던 경찰도...). 결국 그 눈먼 사람들은 임시로 지정된 정신병동에 격리수용되게 되는데...그들 중에 단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멀지 않고 볼 수 있었다(왜 그런지 이 책은 그 이유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남편과 함께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정신병동에 늘어난 약 삼백명의 눈먼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인간의 본성들은 차마, 그것이 인간의 본성일까하는 의구심이 들만큼, 리얼(사실적으로)하게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백색 실명은 단지 그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도시 그리고 나라 전체로 확산되는 양산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동을 빠져나온  안과 의사의 아내 일행은 무참하게 변해버린 도시 안에서, 눈먼 자들 나름대로의 생존을 보게 되고, 그리고 그들 역시 생존을 위한 삶을 연명해 간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볼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다른 눈먼 사람들과의 현격한 차이였던 것이다...
 
이유 없이 발생한 실명은,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눈이 보이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어쩌면, 나는 이러한 결론을 예상했는지 모르지만, 이 책은 읽는 내내 "내가 만약 이 상황이었다면..."이란 질문을 하게 되었다.
눈이 보이기 때문에...가려진 나의 본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나 역시 책에 나온 사람들과 같은 상황이 된다면, 아마도 '나만은 다르다.'고 확언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 책은 많은 질문을 하는 것같다.
['눈이 멀었다.'라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눈이 멀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 소유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 양식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일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해설|p.467)
 
우리 주변에는 지금도 수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일들은, 눈먼 자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일으켰던 일들보다, 더 악한 일들이 눈 뜬 자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눈먼 자들은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한 가지 변병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과연 눈을 뜨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은 어떤 변명꺼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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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정재영 지음 / 풀빛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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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그러면 왠지 고상하며 무언가 생각하고 사고하는 능력이 남다른 사람들의 학문으로 여겨졌던 적이 있었다. 마침, 고교시절 존경했던 선생님이 철학을 전공했던 분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 선생님이 더 멋져 보이고, 무엇인가 더 깊이 있는 ‘그 무엇’인가를 전달해 줄 수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한 번은 철학의 결론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 때의 대답은 나의 ‘철학’에 대한 선입견을 구성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었다.
“철학의 결론은 모르겠다. 라는 것이 결론이다.”라고 답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부터인가, ‘철학’은 너무나도 멀고 먼 단어가 되었고, 그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되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서평 대상 목록에 제시되었을 때, 왠지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제목에 ‘철학’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정재영)는 딱딱한 철학 수업보다는 잔잔한 이야기처럼 다가와서 그런대로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철학 이야기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철학적 ‘정의’와 그 설명들 특히 무슨 무슨 주의(-ism)는 보통의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부분들도 없지 않았지만, ‘철학’이란 단어를 첫 장에서 보았음에도, 이 책을 들었다면, 그 정도의 도식적인 나열은 참고 머리에 집어넣어도 될듯하다.

이 책은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그 도시들을 도시로써 존재 가치의 맛과 향기를 발산하게 했던, 시대의 철학사조들을 자연스럽게 버무려 주는 책이라 하겠다.

첫 번째 도시는 비엔나에서 출발한다.
비엔나라는 도시에서 유래된 비엔나 커피와 비엔나 쏘시지에 대한 설명에 작은 미소를 머금게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만큼 여러 가지가 섞일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서의 비엔나의 특수성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철학에 대해서 설명한다. 비엔나라는 도시는, ‘비엔나 서클’이라는 모임을 통해서 ‘논리경험주의’가 발화된 도시다. 저자는 비엔나라는 도시에서 논리경험주의 또는 논리 실증주의라고 불리는 철학사조가 어떻게 시작되고 구성되었고 발전하게 되었는지 조근 조근 설명한다. 또한 저자는 비엔나 서클의 구성원들의 이름, 그들의 철학적 영향력 등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한다. 마치 알려지지 않은 그들을 감추어진 보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사람처럼...
물론 저자는 비엔나 서클의 과학적 세계관이 환원주의의 전형이라며 “모든 철학은 상식에서 출발할 때 생명력을 갖지만, 그 상식을 절대화할 때 생명을 잃는다. 비엔나 서클의 철학도 그 덫에 빠졌다. 과학을 절대화하고, 경험을 절대화하고, 환원을 절대화하면서 상식과 멀어졌다....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만능은 아니다. 모든 것을 과학으로 만들 수도 없다. 또 과학이 절대화된 지식을 꿈꾸는 학문도 아니다. 하나의 틀 안에 가둘 수 도 없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철학은 더 열려 있어야 하고, 더 소통해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비엔나에 대한 결어를 마무리하고 있다.

두 번째 도시는 파리 근교에 잇는 낭테르 대학에서 시작한다. 현대 사회의 흐름을 바꾼 68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낭테르 대학이기 때문이란다. 사실 나는 ‘68 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바로 이 책을 통해서, ‘68 운동’이란 이름을 들어 보았고, ‘68 운동’의 시작과 과정, 의미 그리고 파급 효과 등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새 시대의 징후가 68 운동을 계기로 포착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저자는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잘근잘근 설명한다.

3장에서는 하나의 도시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점,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해되고 인식하는 실재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오스트레일리아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 있는 지도를 실재적인 예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저자 자신이 지지하는 철학적 입장을 밝힌다.
“나는... 객관적 진리를 옹호라는 객관주의 입장에 서 있다. 여기서 ‘객관적’이라는 말은 진리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각과 문화의 상대성에 대칭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에서 지지하는 ‘객관적 실재’의 개념처럼 주관적 인식과는 독립적이라는 뜻이다. 나는 시각과 문화의 상대성을 지지한다. 그러나 시각과 문화의 상대성이 진리의 개념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시각과 문화의 생대성이 진리를 국지화하고 상대화한다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보편주의자들처럼 어렵고 힘들게 파편화된 진리의 조각을 맞추어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저자는 “버려야 할 것은 과학을 절대화하고, 진리를 절대화하고, 이성을 절대화한 ‘절대주의’다.”라고 주장하며 ‘절대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저자는 상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한다)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제3의 세계관을 ‘철학적 리얼리즘’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 도시 피렌체
저자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미술 작품을 소개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 사조를 설명한다. 저자는 르네상스의 진정한 기초는 ‘선 원근법’이라고 주장한다. 신의 시각에서 인간의 시각으로 이동한 것이야말로 르네상스의 진정한 의미라면,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바로 선 원근법을 통해서 르네상스의 이념을 진정으로 실현했다고 설명한다(물론 미켈란젤로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을 한다).
저자는 자연스럽게 르네상스 시대가 완성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로 메디치 가문의 수훈을 든다. 메디치 가문이 종교, 철학, 예술 등등의 많은 분야에서 끼친 영향력은 그야말로 대단했었나 보다, 어쨌든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대부’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이런! 책에 대한 서평이 책의 요약이 될 판이다. 요약이 아닌 간단한 평으로 전환해야겠다.

암스테르담의 근대 합리주의 철학, 에든버러의 근대 경험주의 철학이 제 1권에서 다루어진 도시와 철학의 이야기라면, 제 2권에서는 쾨니히스베르크를 처음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쾨니히스베르크는 얼마 전에 읽은 <세상을 삼킨 책>에서 칸트의 도시로 알려지면서 왠지 다른 어느 도시보다 친근함이 배어있는 듯 했다.
그리고 베를린은 탈근대를 준비한 헤겔 철학의 도시로, 런던은 자본주의의 출발점에서 준비된 마르크스주의의 출현으로, 바젤은 니체 철학의 도시로 설명되어 지고 있다.
그리고 아테네는 철학의 기초와 출발로써, 로마는 서양의 사고의 틀을 만든 중세 철학의 도시로 설명하고 있다. 대략 그 도시의 특징적인 철학이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 지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철학과 역사와 기행의 절묘한 조화라고 하겠다.
물론 철학 자체의 무거운 주제만 책에 등장한다면, 특정한 연구자들만의 책이 되었을 것이지만, 그 무거움을 도시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으로 적절히 조합함으로, 특정한 사람들만의 책으로 취급될 수 있는 위험을 모면한 것 같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철학의 무거움을 완전히 벗겨주지는 못했지만(아마도 어떤 철학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무거움을 독자의 어깨 위에 떡하니 올려놓고,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어떻게든, 독자와 함께 지고 싶어 한 듯 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완전하게 도시와 철학의 관계를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 이 도시에는 이런 역사와 내용들이 있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책이 된 것 같다.

‘서울’ 그러면, 어떤 철학의 도시로 불릴 수 있을까,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면서, 우리나라에는 어떤 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까, 철학적인 기초가 있기는 한 것일까, 깊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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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삼킨 책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 지음, 신혜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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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접해 보지 않은 장르의 책을 접했다. 추리소설은 홈즈나 루팡 류의 소설로 약간은 그 맛을 느낀바 있지만, 18C(17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많이 낯설었다(줄거리는 책 뒤표지에도 약간 나와 있어서 생략).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란 책의 출간과 연관되었을 법한, 가상의 스토리는 충분이 흥미를 끈다.
물론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주인공과 연관된 모든 사건들이 어떻게 한 권의 책과 이어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한 권의 책을 통해 '생각'(사상)이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에 대한 암묵적인 경고는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그리고 책의 중후반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막달레나의 절규는, 아마도 지금 나의 신념과도 많이 유사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막달레나처럼 '침묵주의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 세상에는 침묵해야만 했던 '생각'(사상)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진지한 철학적 깊이의 소설을 읽은 기분은, 가슴의 무거운 만족감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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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지음, 이영진 옮김 / 진명출판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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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6천만 독자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는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책에 대한 소문은 여러 경로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상황에서 책을 늦게 접하게 되어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내용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있어서 일까? 아니면 기대가 너무 큰 탓일까?
두 마리의 쥐(스니프, 스커리)와 두 명의 꼬마 인간(햄과 허)이 펼치는 흥미로운 치즈 텀험기(?)...
 
추천의 글도 많고, 이 책에 대한 너무나도 많은 서평과 격찬에
시샘이라도 난 듯이, 나의 평가는 왠지 냉냉하다.
 
물론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대응이나 두려움에 대한 대처 방법,
앞으로에 대한 기대가 미치는 좋은 영향들은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모두 "긍정"의 깃발 아래 모일 때, 그 긍정의 무리에 끼지 못하는 어쩔 수 없이
'부정'의 무리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마치 무능력하거나 변화에 소극적이어서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는
무리처럼 몰아가는 것은, 또 다른 시대의 희생양을 양산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온통 세상이 변화의 대류에 들어 섰다. 그 변화를 인정하고 익숙해 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도 너무나도 많다.
 
아마도 이러한 나의 모습은 변화 주동자(?)들과 치즈 텀험가(?)들에게는 꼬마 인간 '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고 지켜져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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