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르's Review

얼마 전 다녀왔던 짧은 여행에서 들렸던 통영에서 박경리 선생이 잠들었다는 곳을 바라보면서 왠지 모를 정겨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가고 없지만 나는 지금 그녀가 남긴 이야기들을 읽고 또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있다.

600페이지 남짓한 두께를 보면서 그리고 초반의 구도가 정해지지 않은 듯한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렇게 막연한 걱정을 안고 읽기 시작한, 100여 페이지를 넘기게 되면 정신 없이 책장이 넘어가게 된다. 역시 나의 초반의 걱정은 기우였으며 이 책 역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토영과 부산. 사투리인지 그 당시에는 그렇게 부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통영이 아닌 토영과 부산이 이 소설의 무대이며 6.25전쟁 발발 당시가 배경이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며 문득 든 생각은, '전쟁'이라 단어를 마주하며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만 박혀 있었구나, 라는 것이었다. 살기 위해 피난을 가는 행렬 속에서 자신의 아이를 주검으로 보내야 했다는 외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내가 그린 6.25전쟁은 회색조에 핏빛이 가득한 죽음의 시간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안에는 오롯이 죽음만이 아닌 삶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이가? 머 전쟁이 밤낮 있건데? 내사 아무리 바빠도 응주 학생 결혼식에는 갈 기고 아이 돌잔치 때도 날 불러야 할기고....."

"태평성대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주머닐 보며 세상에 살맛 납니다만." -본문

물론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찬란한 희망 가득한 날들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삶 아니면 죽음, 이 두 가지의 선택 용지가 아닌 그럼에도 살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시나 전쟁이라는 배경 탓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만나온 박경리 선생이 그려온 삶이 그러하듯이 평이하고 쉬이 살아 갈 수 있는 자들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혼을 꿈꾸는 명화와 응주는 응주의 아버지, 박의사의 반대로 일그러지고 있었으며, 피난 중에 겁탈을 당한 수옥은 서영래에 의해서 또 다시 감금생활을 하게 되고 학수를 만나 그나마 다시금 웃으며 그녀가 살다 싶다가도 전쟁 때문에 헤어지게 된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일본에서 밀수를 해서 사는 이들의 모습이나,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전쟁의 땅에서 여색을 탐하며 정신 없이 살아가는 문성재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던져버린 학자까지.

"피곤할 뿐이다. ! 모두 죽어 자빠지는 판국에 뭐가 되겠다고 공부를 하고 여자를 좋아하고..... 시시한 이야기다." -본문

전쟁 통에서 그 누구도 평이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듯이 모두들이 반쪽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 반쪽 짜리 인생마저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오롯한 하나로 만들어 살면 좋으련만, 어긋난 마음들과 시간의 이정표는 남아있는 자들끼리 서로 생채기를 내고 있다.

그 와중에 신기한 것은 나는 보는 내내6.25라는 배경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기고 이 부분에 대해 집착하듯 상황을 엮어내려 했지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그다지 피난 상황이나 전쟁이라는 현실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것보다는 지금 당장의 자신의 삶이 더 애틋하고 중요하기에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만 치중하고 있다.

마지막, 전쟁의 발발로 인해 그들이 생 이별을 해야 하는 장면에서야 그들이 전쟁 통에 있었구나, 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할 뿐이다.

표류도도 그렇고 김약국의 딸들고 그렇고.이번 파시도 그렇고, 읽고 나면 먹먹해지는 것이 아련함이 남는다. 그 어디에도 평이한 삶이 허락되지 않는 그들을 보면 대체 왜 이렇게 매번 힘든 고난 속을 걸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원망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계속 되야 한다는 듯이 마지막 순간에 늘 하나의 빛을 남겨두고 있다.

"산 사람은 어디서라도 만난다.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만날 수 없다는 것보다는 낫거든."-본문

자신의 아이를 밴 수옥을 두고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학수와 단 하루의 결혼 생활을 남기고 일본으로 떠난 명화, 그런 명화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군대로 들어가야겠다는 응주까지. 그들이 다시 재회하며 얼싸안는 장면은 마지막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그저 서로 각자 뿔뿔이 흩어지는 것으로 하여 이 소설은 마무리가 된다. 박경리 선생은 어디까지를 염두하고 이 소설을 이 곳에서 멈추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이 소설이 마냥 슬프다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전쟁을 지나고 나서도 우리나라가 이토록 성장하고 그 안에 나름대로의 삶이 계속 이어져왔듯이 수옥, 학수, 명화, 응주 이들에게도 계속 삶은 이어졌을 테고 그렇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는 있을테니, 비록 마지막은 아련함으로 끝났다고는 하나 다시 미소 지을 날이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와 바람으로 갈무리해본다.

아르's 추천목록

마당깊은 집 / 김원일저

독서 기간 : 2013.07.23~07.27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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