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도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르's Review

 

  

 책의 소개글을 보면서 불륜 남녀의 연애 이야기라는 말에 씁쓸함이 들었다. 불륜이라니. 그 어디에서도 환영 받을 수 없는 그들만의 사랑이 절절하면 절절할수록 세상이 주는 지탄은 더 깊어질 텐데, 라는 안타까움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S대 사학과를 졸업한 한 여자. 당시 시대상으로만 보아도 고학력자인 주인공 현희는 그저 평범하게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러하듯이 작지만 아기자기한 소소한 행복들 속에서 그들의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것이다.

 옛날에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라는 남성을 저주하고 어머니라는 여성을 못났다고 경멸했을 적에 내겐 혼자서 간직한 꿈의 나라가 있었다. 그 꿈의 나라에는 왕자가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그 한 사람의 왕자를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본문

 바람대로 펼쳐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모두가 로또에 당첨되는 횡재를 누리겠지만, 삶은 흰 도화지에 크레파스를 들고 그리듯,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고학력자라는 명패는 오간대 없이, 어린 시절 운동권에서 함께 했던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사생아를 낳은 여자로만 존재했으며 다방 마담으로만 세상은 기억하고 있다.

 이 여인 앞에 펼쳐진 세상은 한 여인가 아닌 그저 여자의 몸뚱이를 가진 사람일 뿐이었다.

여자란 돈과 폭력이면 정복되는 동물이 아니오?”

저 여자도 돈과 폭력이면 그만인가?”

물론.” –본문

 이런 냉담한 현실에 홀로 떨어진 현희에게 있어서 그럼에도 세상을 따스하게 품어야 한다, 라고 나는 그녀를 종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윤리니 정의니 법이니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이 과연 올바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 모든 것이 합당하게, 올바른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면 우리는 왜 현희를 그토록 깎아 내리기에만 바빴을까  

 꿈나라의 왕자, 나는 사생아를 낳은 파렴치한 여자, 살인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저주스런 죄수, 저 창은 너무나 높은 곳에 있고 햇빛은 나를 위하여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휘어잡아 온 나의 생명과 이를 악 물고 살아온 하찮은 나의 지혜, 어설픈 자존심, 방황하던 진리에의 욕구. 그것이 나에게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본문

 이미 민수는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현희에게 마음을 두었으며 그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하자 마돈나는 없다, 를 외치며 광희를 범하였으며 그 어긋난 사랑의 이정표에 어그러져 버린 광희의 허무한 죽음. 남편이었던 찬수가 살았더라면 이 모든 시작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죽음으로 시작된 엉켜버린 실타래는 이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 누구도 가해자가 될 마음이 없었지만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버린 모순 어린 상황. 이 속에서 과연 나는 누구를 질타하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음악에 눈물 흘린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못 쓸 값싼 감상의 찌꺼기, 그리고 연애를 생각한다는 것은 굴종이다. 통틀어 슬프다는 것은 청승맞고 궁상스럽고ㅡ확실히 청승맞고 궁상스럽다. 거대한 차량 밑에 깔려 죽어야 할 생각들이다. -본문

 처음 소개 글을 읽는 동안 분륜임에도 되려 떳떳한, 죄책감이 없다는 현희에 대한 한 줄의 글을 보면서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람, 이라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그녀를 비난하며 책을 마주했었다.

 아마도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그저 내용만 가늠해 보았다면 자신의 불륜을 꼬집어 이야기 하는 어머니에게 당신의 정절보다 내 배덕이 훨씬 위대하다.”라고 말하는 현희를 미쳤다, 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면서 반문하게 된다. 과연 그녀의 이 담대한 불륜에 대해 오롯이 상현과 현희만을 탓할 수 있을까? 사생아를 낳은 여자이면서 다방 마담이기에 당연히 그럴만한 행동을 했다, 라고 치부하며 그렇기에 그런 여자는 마음대로 주물러도 된다는 사회의 통념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일까.

 현희는 그런 사회에 물병을 던져버리고 싶었을 게다. 한 인간을 향한 분노가 아닌 이 사회의 통속적인 것들에 대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들만의 룰 속에 재단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먹먹하고 서글프지만 어느새 또 끄덕이고 있다. 두둥실 떠다니는 섬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군도를 만들고 다시 해체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과 또 다른 박경리 선생의 소설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보는 내내 주억거리게 만드는 그 묘한 매력이 이 책에도 있으니, 하나의 불륜 소설이 아닌 안타까운 군도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마주했으면 싶다.

 

아르's 추천목록

 

 『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저

 

 

 

독서 기간 : 2013.06.30~07.02

by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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