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소개글을 보면서 불륜 남녀의 연애 이야기라는 말에 씁쓸함이 들었다. 불륜이라니. 그 어디에서도 환영 받을 수 없는 그들만의 사랑이 절절하면 절절할수록 세상이 주는 지탄은 더 깊어질 텐데, 라는 안타까움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S대 사학과를 졸업한 한 여자. 당시 시대상으로만 보아도 고학력자인 주인공 현희는 그저 평범하게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러하듯이 작지만 아기자기한 소소한 행복들 속에서 그들의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것이다.
옛날에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라는 남성을 저주하고 어머니라는 여성을 못났다고 경멸했을 적에 내겐 혼자서 간직한 꿈의 나라가 있었다. 그 꿈의 나라에는 왕자가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그 한 사람의 왕자를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본문
바람대로 펼쳐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모두가 로또에 당첨되는 횡재를 누리겠지만, 삶은 흰 도화지에 크레파스를 들고 그리듯,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고학력자라는 명패는 오간대 없이, 어린 시절 운동권에서 함께 했던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사생아를 낳은 여자로만 존재했으며 다방 마담으로만 세상은 기억하고 있다.
이 여인 앞에 펼쳐진 세상은 한 여인가 아닌 그저 여자의 몸뚱이를 가진 사람일 뿐이었다.
“여자란 돈과 폭력이면 정복되는 동물이 아니오?”
“저 여자도 돈과 폭력이면 그만인가?”
“물론.” –본문
이런 냉담한 현실에 홀로 떨어진 현희에게 있어서 그럼에도 세상을 따스하게 품어야 한다, 라고 나는 그녀를 종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윤리니 정의니 법이니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이 과연 올바르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 모든 것이 합당하게, 올바른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면 우리는 왜 현희를 그토록 깎아 내리기에만 바빴을까
꿈나라의 왕자, 나는 사생아를 낳은 파렴치한 여자, 살인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저주스런 죄수, 저 창은 너무나 높은 곳에 있고 햇빛은 나를 위하여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휘어잡아 온 나의 생명과 이를 악 물고 살아온 하찮은 나의 지혜, 어설픈 자존심, 방황하던 진리에의 욕구. 그것이 나에게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본문
이미 민수는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현희에게 마음을 두었으며 그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하자 마돈나는 없다, 를 외치며 광희를 범하였으며 그 어긋난 사랑의 이정표에 어그러져 버린 광희의 허무한 죽음. 남편이었던 찬수가 살았더라면 이 모든 시작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죽음으로 시작된 엉켜버린 실타래는 이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 누구도 가해자가 될 마음이 없었지만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버린 모순 어린 상황. 이 속에서 과연 나는 누구를 질타하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음악에 눈물 흘린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못 쓸 값싼 감상의 찌꺼기, 그리고 연애를 생각한다는 것은 굴종이다. 통틀어 슬프다는 것은 청승맞고 궁상스럽고ㅡ확실히 청승맞고 궁상스럽다. 거대한 차량 밑에 깔려 죽어야 할 생각들이다. -본문
처음 소개 글을 읽는 동안 분륜임에도 되려 떳떳한, 죄책감이 없다는 현희에 대한 한 줄의 글을 보면서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람, 이라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그녀를 비난하며 책을 마주했었다.
아마도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그저 내용만 가늠해 보았다면 자신의 불륜을 꼬집어 이야기 하는 어머니에게 “당신의 정절보다 내 배덕이 훨씬 위대하다.”라고 말하는 현희를 미쳤다, 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면서 반문하게 된다. 과연 그녀의 이 담대한 불륜에 대해 오롯이 상현과 현희만을 탓할 수 있을까? 사생아를 낳은 여자이면서 다방 마담이기에 당연히 그럴만한 행동을 했다, 라고 치부하며 그렇기에 그런 여자는 마음대로 주물러도 된다는 사회의 통념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일까.
현희는 그런 사회에 물병을 던져버리고 싶었을 게다. 한 인간을 향한 분노가 아닌 이 사회의 통속적인 것들에 대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들만의 룰 속에 재단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먹먹하고 서글프지만 어느새 또 끄덕이고 있다. 두둥실 떠다니는 섬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군도를 만들고 다시 해체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과 또 다른 박경리 선생의 소설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보는 내내 주억거리게 만드는 그 묘한 매력이 이 책에도 있으니, 하나의 불륜 소설이 아닌 안타까운 군도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마주했으면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