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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 예술의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 지음 / 한권의책 / 2013년 3월
평점 :
우리의 탐구는 인간에 대한 것이지,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세계란 ‘우리에게 비쳐진 세계’일 뿐이고, 우리는 단지 인간에게 투영된 바의 세계를 볼 뿐이다. 굴절된 영상이 세계라고 가정하는 것은 오만이거나 순진함이다. -P 10
책의 서문을 읽는 순간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 책 만만치 않겠구나. 미술도 모르는데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철학까지 섞여있다니. ‘형이상학적’이라는 한 단어를 만나는 순간부터 긴장과 한숨이 한대 섞여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저자의 우스갯소리처럼 좋은 책은 칭찬받지만 읽는 이가 거의 없고 인기 있는 책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기는 하나 그 잔상을 오래지 못한다는 말마따나 이 책은 양서이면서도 대중의 선택을 받는 책처럼 이 안의 내용을 고이 간직 할 수 있을까? 라는 안타까움이 먼저 베어나게 된다. 나와 비슷한 독자들이 있다면, 꼭 하나 일러주고 싶은 점이 있는데,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고 얽매여 있지 말고 다음으로 넘어가면서 계속 읽어 내려가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앞에서 갸우뚱하는 것들도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고 있을 테니 말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바라보게 되는 것은 스테인드글라스다. 다양한 빛깔의 유리로 구성되어 있는 창을 보면 바깥 쪽의 햇살이 드리우는 일반적인 창과는 다른,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은 중후한 느낌이 들곤 한다. 일전에 다큐멘터리에서 이러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 장인의 공방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하나하나 색깔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떠오르곤 했지만, 스테인드글라스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찾지는 못했다. 아마 이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때마다, ‘멋있다’ 와 ‘얼마나 손이 많이 갔을까’ 이 두 가지의 생각에서만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
고딕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성하는 새로운 빛과 분위기는 그 존재 의의를 탐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고딕 시대에 시작된 새로운 세계관과 신앙관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이해는 이 학구적 난제를 간단히 해결한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조성하는 빛은 자연주의적인 빛이 아니다. 이 빛이 부유하는 듯한 성당 내부의 분위기가 결합되면 갑자기 초자연주의적인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고딕의 빛은 신비주의적이다.–P112

이전 시대인 로마네스크의 예술이 천상과 지상은 함께하며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예술이었다면 고딕 예술은 이러한 천상과 지상의 합체를 분리하여 보는 새로운 시도이다. 그러므로 이전과는 다른 예술양식이 필요하게 되고 그 결과 고딕 예술에서는 지상에서의 인연들은 모두 내려놓고 천상인 하늘로 향하려는 욕망이 담겨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성당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품은 성당의 모습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샤르트르 대성당을 바라보면 이전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들도 하게 된다. 그 시대에 어쩜 이러한 건축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그 안에 고딕이니 르네상스니 이런 것들은 잠시 안착해 가는 버스정류장들처럼 금새 희미하게 사라져버리고 언제나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아름답구나 라고 만 생각했다면 고딕의 탄생 배경을 보고 나서는 그 이전의 예술 양식과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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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 나름의 양식대로의 특성과 그 아름다움 때문에 찬사 받고 있는 고딕이, 고딕만큼이나 획기적이고 전면적인 양식이 없었다는 이유로 등장만으로도 이전 시대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 반감을 불러일으키며 비난 역시 면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사진만으로도 이전의 그리스 신전과는 다른 느낌이긴 하다. 그리스 신전은 기둥과 벽이 고르게 분포되어 편안하면서도 그 안에서 주변의 분위기와 함께 한다는 느낌이라면 고딕 성당은 뾰족하니 하늘을 향해 솟아나 있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좀 더 섬세하면서도 고풍스러우면서도 주변과의 관계에 있어서 독보적인 건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유명론은 이러한 자신감에 대한 전면적인 의문에서 출발한다. 유명론은 인간에게 실체란 단지 유사성에 기초한 집합명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 결국 실재에 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에 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실재, 즉 보편자라 믿었던 것은 결국은 우리 언어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념에 대한 예술적 대응이 고딕이다. 유명론에 입각할 경우 보편자인 ‘신’은 우리 인식상에 맺히지 않는다. 이제 신은 더 이상 우리 지성에 의해 포착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 시대의 로마네스크 예술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연속선상에 있다는 믿음을 표현했다. 그러나 고딕 예술은 천상과 지상을 분리해버린다. 이제 성당은 더 이상 지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천상과 지상은 이중진리설로 분리되며 따라서 새로운 성당은 천상적인 것이어야 한다. - P82~83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들은 구석기시대의 예술과 신석기시대의 예술에 대해 주창한 부분이다. 중고등학교의 교과 내용 중에 배웠던 내용이라고는 구석기 시대, 하면 돌도끼를 사용했으며 동물을 사냥하거나 채집 생활을 하며 무리 지어 살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등장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생활로 인해 정착된 생활을 하게 되고 곡식을 얻게 되면서 그를 보관할 만한 그릇인 토기들을 만들었다. 이 정도가 대략 떠오르는 것들로 대체 이 곳에서 무슨 예술을 논한다는 말인가, 돌도끼를 보며 돌의 모양에 대해? 아니면 빗살무늬 토기의 빗살의 각도와 무늬에 대해? 무슨 예술이야, 라며 어이 없다는 듯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또 한 번 깨달았다. 어디서 안다고 함부로 이야기하고 다니면 안되겠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되는구나. 파편을 보고서는 전부를 안다는 듯 또 그래왔구나, 라고 말이다.

구석기시대에 그린 벽화들을 보면 동물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아무래도 사냥을 통해 주식을 해결해 왔기에 그들이 주로 다루는 것들을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겠지, 라는 생각이 1차원적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어떠한 세계관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박진감 넘치고 자신만만하며 아름다운 동굴벽화를 가능하게 하였을까? 그리고 신석기시대 인들은 새로운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왜 추상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예술을 택했을까? –P21
그 당시를 가늠하여 바라보고 있기에 무엇이 정답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구석기 시대의 예술 양식은 구석기인들 스스로 이 온 우주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벽화로 남겼다고 한다. 낙서처럼 보이는 벽화라 할 지라도 그들이 그린 동물 그림은 밖으로 나가 사냥을 하면 바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기에 물론 지금과 같이 쉽사리 잡을 수는 없었겠지만, 어찌되었건 그들이 생각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신격화 하거나 형상화 하는 것 없이 고스란히 그려 놓은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이들이 남긴 그림들을 보노라면 구석기 시대와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그도 그럴 것이 농경사회로의 진입이 되게 되면서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연을 통해서 그러니까 자연의 도움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들의 노력이 빛을 바라게 된다. 땅 속에 씨를 뿌려 두었으나 비가 오지 않으면 그대로 메말라 버릴 테고 혹은 적절한 땅이 아니라면 씨앗은 발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손을 떠나버린 자연이라는 영역을 인지하게 되면서 신석기시대의 인간들은 물질적인 풍요는 누렸을지 언정 언제나 불안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자연세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자신감은 사실은 휘황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세계의 작용은 그들이 이해할 수도 조작해낼 수도 없는 신비스러운 것이 된다. 이제 그들의 항해는 더 이상 목적지를 향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게 되었다. 단지 망망대해를 표류하면서 그 자신이 도저히 파악해낼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멋대로 조종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P33

시간이 흘러 아름다운 것들, 그러니까 신과 그들의 세상에 대해서만 화폭에 담기던 때를 지나 이제는 일반적인 인간의 평범한 모습들도 등장하게 된다. 이전의 고전적인 화가들이라면 생각지도 못한 장면들이 이제는 들어나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의 이성이 천체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은 우주의 운행을 포괄적으로 해명한 것으로 보였으며 이제 이 자연법은 인간 이성의 궁극적 개가로 보였다. 이제 사회와 도덕과 정치에서조차도 자연법을 발견하기만 하면 모든 궁극적 이상이 실현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한마디로 인간 이성의 기계론적 사유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 낙관주의가 유럽의 계몽사회를 물들였다. –P199
철학과 미술의 상관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대체 얼마나 어렵게 이야기를 하려고 이 두 가지의 카테고리를 엮은 것일까, 라고 초반에는 생각했다. 여전히 철학에 대해 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을 통해 느낀 바로는 철학을 기반으로 해서 그 당시의 사상이며 예술이며 문화 등이 발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렇기에 저자는 철학과 미술을 엮어서 설명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 책 어때? 라고 묻는다면, 쉽지 않아, 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아직 나에게도 여전히 표면에 두둥실 떠다니며 흡수되지 않은 부분이 많기에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읽어봐, 라고 말하기도 우습겠지만 그럼에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나와 같이 두 분야 모두 문외한의 눈으로 이 책을 마주한다면 쉽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기에 한 권으로 구석기부터 현대까지의 전반적인 흐름을 배워본다는 일념으로 마주하면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