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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도둑
마크 레비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엔 누구에게나 초능력 같은 것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특수능력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처럼 너와 내가 진실한 우리가 되는 능력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명이 발전할수록 태어난 순간부터 그 능력이 상실되는 시점 사이의 시간 간격이 급격히 짧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장 지난 90년대 초중반만 생각해보더라도 세상은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개인차는 있을 수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세상은 지금보다 더 따뜻했다. 하지만 지금은 위에 언급한 능력이 재생되더라도 순수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대부분 경쟁과 이해득실의 도구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 같다.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소설이 그저 즐기고 지나치는 것을 넘어 세상을 향한 하나의 문학적 치유도구라고 봤을 때 현실에 얼마만큼 그 효과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서였다.
"네가 누군가의 그림자를 뺏어올 때마다 그 사람의 인생을 비춰줄 수 있는 한줄기 빛을 찾도록 해. 그들에게 숨겨져 있던 추억의 한 부분, 그걸 찾아달라는 거야. 그게 우리가 바라는 바야."/ "우리라니?"/ "그림자들." (p.103)
마크 레비의 장편소설 ‘그림자 도둑’은 그림자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과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한 소년이 청년이 되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진실한 사랑을 찾아 한 걸음 내딛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긴 하지만 독자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쯤 꿈꿔보았을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에 대한 메시지를 더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를 통해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읽을 수 있게 된 주인공 소년은 그 능력을 이용하여 아픈 기억을 가진 주변인물의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하면 자기를 괴롭혔던 덩치 큰 동급생이 왜 그렇게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되어 이해하고 마음으로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의대에 진학한 후 거기서 만난, 여러 명의 전문의가 나서도 쉽게 해결하지 못한 한 소녀의 마음속 깊은 고민의 원인을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알아내고 상태를 호전시키는 일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능력이 있다 하여 주인공의 인생이 잔잔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한편 자기 자신에게는 아쉬움과 아픔으로 돌아오기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 뤼크의 재기 넘치는 격려와 위로의 장면은 상당히 돋보이며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 소설은 한 편의 동화와도 같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환상적인 설정과 아름다운 전개는 다소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내가 한국 독자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남겨놓고 오는 작은 일들이 있다. 시간의 먼지 속에 박혀버린 삶의 순간들이 있다. 그걸 모르는 척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소했던 그 일들이 하나씩 모여 사슬을 이루고, 그 사슬은 곧 당신을 과거로 이어준다. (p.263)
처음에 언급했듯이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원래부터 있었던, 특히 대부분 유년기에 그 기능을 상실해버리는 소중한 능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나아가 성장하면서 완성시켜야 할 성숙한 ‘순수함’에 대한 갈증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이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나’로만 드러나는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 부득이하게 감춰진 그 능력을, 최소한 그 순수함을 다시 되찾길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아무튼 이 소설은 존재를 한숨짓게 하는 어떤 그리움,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 친구와의 소중한 우정, 알 수 없는 사랑의 힘 등을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풀어낸 좋은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