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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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소설은 당연하게도 작품 그 자체만으로도 흡인력 있는 스토리와 문장으로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보여주지만,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이 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전하는 작가의 말, 즉 ‘서문’에서 느껴지는 울림도 상당하다는 데 있다.

1997년에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고, 2007년에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번역되어 개정판으로 나온 장편소설의 서문은 개인적으로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당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의 작가서문 부분만 따로 복사해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위화는 “진정한 작가는 영원히 자신의 속마음에 따라 글쓰기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원청』 역시 그런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대외적으로 무너져가는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개인의 기쁨과 비극, 굵직한 선이 느껴지는 인생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제로 역사적 배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중간중간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이 시대가 어느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스쳐가듯 전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꼭 청나라 말기, 근대화로 이끌려 들어가는 중국이라는 배경이 크게 중요한 요소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 나라, 어느 문명마다 격변의 시기는 언제나 있었고, 그 가운데서 수많은 인생들의 비극과 슬픔, 애증, 희망, 기쁨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할 뿐이다. 세상은 늘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다만 글을 쓰는 사람들, 특히 작가들에 의해 한 조각 포착된 삶의 이야기는, 특히 위화 같은 작가들의 마음을 통과한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는 것이고, 이것이 위화를 세계적인 작가 대열에 오르게 한 것이다.

‘원청’은 실제 존재하는 도시가 아니다. 소설 속에서는 ‘시진’이라는 도시가 원청의 탈을 뒤집어쓰고 주인공이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존재한다. ‘원청’이 알려주는 가장 큰 인생의 진리 중 하나는, 인간은 실제하지 않는 것,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것, 그렇지만 정말 중요하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붙잡고 살아갈 명분과 의지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무게감을 더해주는 것은 상징과 현실이 탁월한 조화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정보들, 다시 말해 북양군과 국민혁명군의 전쟁, 그 전쟁 가운데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의지로 꿋꿋이 버티는 백성들, 그리고 체념한 듯 역사의 격랑에 순응하는 빛을 잃은 사람들, 서구식 교육기관이 상하이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 속아서 외국에 노예와 같은 일꾼으로 팔리는 사람 등의 작은 이야기들이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대륙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꼭 특정 나라의 역사가 아닌,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더 많은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진다.

특별히 이 소설에서 크게 비교되는 두 인간상이 있다. 시대의 혼란을 틈타 극악의 잔혹함을 서슴지 않는 도적떼들, 그리고 그들에 맞서 어떻게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더 큰 역사적 흐름에 휩쓸려 숨겨진 본성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두 가지 인간성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위화가 그려내는 인간의 잔혹한 본성이 너무 실감나게 다가와, 인간이 얼마나 비참하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실제로 겪는 것 같아 몸이 떨릴 정도였다. 

저자는 “작가는 아침저녁으로 대하는 현실을 표현해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작품은 거기에서 더 확장되어 구체적 역사 속에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지나갔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 거대한 사건 속에서 일어났던, 혹은 일어났음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가로서 진정으로 찾아야 한다는 ‘진실’의 또 다른 모습을 더 크고 현실적인 세계관에서 구현해낸 저자의 문학적 성과를 동시대에 이렇게 읽어볼 수 있어서 무척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 네이버 「디지털감성 e북카페」 카페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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