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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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는 격동의 시기 정중앙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두 가지 커다란 변혁의 흐름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신앙심이 깊었으나 답답한 전통과 형식에 얽매여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그 전통과 형식이 본질을 벗어나 인간적인 욕심과 타락에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깊게 탄식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회색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회색은 그 어떤 색보다 따뜻하고 친절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우신, 즉 어리석은 신은 훌륭하다. 우신은 신들과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얼굴을 밝게 하며 주름을 바짝 펴준다. 우신은 자신의 아버지를 플루토스라고 소개한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서 부와 재물의 신이다. 우신은 플루토스를 ‘신들과 인간들의 유일한 아버지’라고 말한다. 이런 내용을 통해 당대 사람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품고 있었으며 사회가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종교가 사람들에게 참된 만족과 행복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부재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신에게는 두 유모가 있었다. 그들은 요정이었고 각각 ‘만취’와 ‘무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의 시종들로는 ‘자아도취’, ‘아부’, ‘망각’, ‘태만’, ‘쾌락’, ‘경솔’, ‘방탕’, ‘광란’, ‘깊은 잠’ 등이 있다. 이들은 우신으로 하여금 세상을 지배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 중 하나로 세상의 통치자들을 자신의 뜻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도 있다.

우신이 세상을 즐겁게 해준다면서 오히려 그를 돕는 유모들이라는 존재의 속성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런 유모들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우신의 뜻에 복종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즉 지도자나 백성이나 모두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과 같은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당대는 가치관의 부재, 혹은 혼돈 속에서 중심을 잃어버린 팽이와 같은 시대였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것은 종교의 타락 때문이었으며, 이런 흐름과 맞물려 르네상스가 먼저, 뒤이어 종교개혁이 힘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신은 자신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한다. 인류의 생육과 번성이 자기로 인해 성립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인류의 생육과 번성이라는 성경적 개념이 정욕적이고 인위적인 해석으로 변질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이성 vs 분노와 정욕이라는 구도를 볼 수 있는데, 결국 이성은 분노와 정욕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점에서 인간 정신이 조화와 균형을 잃은 시대를 뒤집어 비판하고 있는 내용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책은 계속해서 역설적인 주장을 이어간다. 인생에서 가장 크고 특별한 즐거움은 어리석음에서 나오며, 행복의 원천은 어리석음이라는 것, 또 어리석음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며, 우울한 인생에 빛을 비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우정을 유지하는 진정한 동력도 어리석음에 있다고 억지를 부린다. 나아가 가장 현대적인 가치관이라 할 수 있는 평등과 평화조차 어리석음이 베푼 은혜인 것처럼 포장한다.

책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우신이 어째서 뻔뻔하게 자신을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존재로 자부할 수 있는지, 그런 비상식적인 상황을 누가 유발했는지 그 범인이 나온다. 바로 종교인들이었다. 특히 신학자들에 대한 우신의 평가 하나하나가 농담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뼈가 있는 신랄함으로 가득하다.

흥미로운 것은 신학자들에 대한 이런 농담적인(?) 비판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비대해지고 조직화되고 형식화된 종교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지옥의 문으로, 환란과 고난의 문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대를 넘나드는 진리가 되었다. 너무나 씁쓸한 일관성이다.

이 책의 내용과 그 속뜻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저자인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해와 함께 당대의 학문과 문화예술에 대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수많은 개념과 인용들에 붙은 각주들 역시 그 내용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 당대의 유행, 주류 학문, 시대정신 등을 해석한다는 것과 동일한 작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다.

* 네이버 「문화충전200%」 카페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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