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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진상 - 인생의 비밀을 시로 묻고 에세이로 답하는 엉뚱한 단어사전
최성일 지음 / 성안북스 / 2021년 11월
평점 :
『단어의 진상』을 읽다가 문득, 요즘도 활동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한때 독특한 시로 유명세를 탔던 하상욱 시인이 생각났다. 짧은 시를 먼저 보여주고, 제목을 밑에 배치하는 식이었는데 내용과 제목의 연결고리가 주는 그 명쾌함과 기발함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좀 억지인지는 몰라도, 그 하상욱 식의 문학 전개 방식이 좀 더 긴 시와 짧은 산문의 형태로 확장된 것 같은 느낌을 이 책에서 받았다.
시를 읽고 제목을 연상해본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 내가 떠올렸던 그 제목이 맞았을 땐 통한다는 느낌이, 그렇지 않고 엉뚱하거나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제목이 나오면 저자와의 공감 지수가 떨어지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한 파트가 끝날 때마다 독자만의 느낌을 남길 수 있도록 공간을 배려한다. 페이지를 메우기 위한 꼼수로 보이지는 않는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읽어야 온전히 자신의 책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문학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 모두 고품격인 것은 아니다. 그런 일류 작가들이 아니라도 언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나 시인이나 에세이스트가 되도록 허용해준다. 일상의 물건이나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들만으로도 인생의 깊이를 드러내는 재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복을 받은 모양이다. 작품마다 사용되는 단어들은 매우 친숙하다. 정수기, 내비게이션, 고구마, 박카스, 타임머신, 불닭볶음면, 길고양이 시내버스... 그리고 좀 더 추상적으로는 꿈, 자존심, 나이, 아버지, 사랑... 이렇게 특이한 삶이 아니라도 맞닥뜨리는 단어들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솜씨가 좋다.
예를 들어 인생이 한 방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것이 일상의 물건 무엇과 연결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겠는가? 언젠가 한 번은 터뜨릴 거라는 기대, 그것이 존재의 의미를, 기쁨을, 가치를 확인해주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 세상에. 그걸 소화기에 연결시킨다. 기발하다. 소화기의 존재 가치와 사람들이 인생 역전 한 방을 기대하는 심리를 연결하다니, 이는 또한 반어적인 언어 유희를 보여주기도 한다.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인 인생에 연결되는 사물은 러닝머신이다. 러닝머신은 공간의 효율과 체형의 관리를 동시에 구현한다. 하지만 곧 옷 등을 걸치게 되는 걸이 대용품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렇게 상반되는 이미지의 단어를 통해 저자는 인생의 모순과 일상의 아이러니를 풀어낸다.
‘단어의 진상’이란 제목도 역설적이다. 언어는 이렇게 무료하고 건조한 삶을 다채롭게 해주는 마법이 있다. 오늘 당장, 빈 노트에 나만의 사전을 채워나가보자. 오늘 경험한 일을 하나의 단어로 완결지어보자. 그리고 조금 흥이 나면 거기에 나만의 해석을 덧붙여보자. 그렇게 하루하루 채워가다 보면 저자처럼 멋진 책 한 권이 내 앞에 와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을 갖게 하는 책이다.
* 네이버 「리앤프리 책카페」 카페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