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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당신을 구할 철학 수업 ㅣ 서가명강 시리즈 18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평점 :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생, 즉 사는 것은 고통이며 그 고통은 욕망과 권태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이런 현상을 바탕으로 사물과 인간의 욕망을 관찰한 끝에 발견한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우주의 근원”이 기본적으로 맹목적인 욕망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에서는 이러한 고통과 욕망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 입장에서 이성은 욕망의 노예에 불과할 때가 많으며, 따라서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파악한다. 이성의 가치를 중시했던 시대에 주류를 거슬러 이성의 본질을 욕망 아래에 두었다는 점만 봐도 쇼펜하우어가 얼마나 다른 차원의 철학 지평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통의 문제가 어떤 형태로든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며, 설사 좀 더 오랜 지속 효과를 갖는 해결책을 거쳤다 하더라도 새로운 문제가 떠오른다. 바로 “권태”다. 왜냐하면 인간을 만족을 모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충족되면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새로운 욕망이 생기거나 아니면 충족된 욕망의 바탕 위에 권태라는 새로운 형태의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결국 인생의 본질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죽는 것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인생은 물거품과 같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다. 자기보존을 위한 식욕, 종족보존을 위한 성욕,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미를 추구하는 탐욕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합해 ‘살려는 의지’로 정의했다. 고통은 바로 이 ‘살려는 의지’라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저서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의지는 바로 이 욕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욕망의 총체적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서두에 언급했던 “우주적 의지”인 것이다. 저자는 이를 물방울과 바다로 비유했다. 즉 “개체가 물방울이라면 우주적 의지는 바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촉발하는 우주적 근원에서 비롯되는 욕망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문제 때문에 결국 염세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이다. 내적 갈등과 고통에 시달리는 비합리적 세계와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한계는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가치와, 인간이 시도하는 모든 행위의 의미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가지게 했다. 그런데 그의 철학이 여기서 결론이 났다면 그는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하나의 해답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쇼펜하우어의 해답은 그가 부정했던 이성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물론 그가 발견한 해결 수단으로서의 이성은 그가 비판했던 욕망의 도구로서의 이성이 아니라,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완전한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수단으로서의 이성을 의미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표상”은 객관적 실체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 실체로서의 세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정신 수준에 따라 세계의 모습이 다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의 풍요, 높은 정신이 고통을 넘어선 행복의 단계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논증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서 예술의 의미과 가치를 이야기한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은 매우 주관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우주적 근원이 제아무리 욕망의 속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을 고통이 아닌 정신적 안정과 평안의 상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 또한 인간인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신랄한 비판은 우리에게 내재된 그 숨겨진 능력을 일깨우는 죽비소리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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