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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여행을 만나다
동시영 지음 / 이담북스 / 2020년 6월
평점 :
요즘 같은 시기에 여행기가 책으로 나온다는 건 어색하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현재진행형일 수 없고, 어쩌면 추억 이상의 의미가 되기 어려워져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해외나 먼 곳으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관광의 의미 말고, 주체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의미의 여행조차도 지금은 민폐가 될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이 담은 여행 기록은 코로나 이전의 것으로 보이니까 더 이상 시비는 걸지 않겠다.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보자.
인생을 의미 있고 풍요롭게 만드는 두 축으로, 저자는 문학과 여행을 선택했다. 삶이 고달플 때마다 여행은 지친 마음이 가서 쉴 정신의 집 역할을 했고, 여행의 여정은 바로 그 정신의 집을 짓는 과정이었다. 그 재료는 무엇이었나? 바로 저자가 사랑하고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던 작가의 작품들과 작품 속 인물들과 배경들이다. 이 책은 그렇게 저자의 삶으로 편입된 여행의 흔적들 중 특별히 아홉 나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먼저 영국을 여행한다. 저자는 영국 여행을 옛날 없이 옛날을 여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말이 공감되는 것은, 얼마 전 셜록 홈스로 유명한 코넌 도일의 삶과 문학을 다룬 책을 통해, 영국 곳곳에 과거의 유산이 현재와 함께 숨쉬고 있음을 확인했던 기억이 있어서이다. 영국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 등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브론테 가문의 흔적이 있는 하워스라는 곳이다. 브론테 가문의 형제자매들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이모의 성실한 도움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지만 브론테 남매들은 전부 이른 나이에 삶을 마감해 후손이 없다고 한다.
영국에서의 두 번재 여행지는 옥스퍼드이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탄생한 곳이다. 옥스퍼드 역시 현재 속에 실제하는 과거의 감각이 특징인 곳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스’처럼 또 다른 세계, ‘낯설게 하기’에 어울리는 장소였다. 옥스퍼드 하면 학문과 엄숙함의 공간 이미지가 강한데, 앨리스나 ‘해리 포터’ 같은 대표적인 환상성 강한 이야기들이 탄생한 곳이 된 연유를 진지한 학문과 이성적 세계의 무게에 눌린 내면에서 오는, 가벼움에 대한 필연적 요구로 풀이하는 것이 처음에는 흥미롭다가 이내 납득이 될 것도 같았다.
두 번째 여행지는 이탈리아다. 여행기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문에 담긴 괴테의 여정을 따라 이탈리아 각지의 과거와 현재를 음미한다.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항 방황하게 마련이다”란 말을 ‘이탈리에 기행’에 남겼는데, 그 말처럼 여행 속에서 그는 끝없이 예술적 배움에의 방황을 했고,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괴테의 감성에 동참하며 도시를 하나한 여행한다. 얼마 전 EBS 세계테마기행에서 소개된 적 있는 이탈리아에 속한 알프스 산맥인 돌로미테도 언급되어 있어 장면을 떠올리며 읽을 수 있었다. 괴테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눈에 띄는 기록을 남긴 것 같은데, 여행하던 그 시절에도 베네치아는 바다 오염과 치안, 쓰레기 문제가 심했던 모양이다. 로마와 나폴리에서는 더욱 특별한 감동을 느낀 듯, 찬사가 넘친다.
세 번째 여행지인 크로아티아에서는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불리는 두브로브니크가 소개된다. 조지 버나드 쇼는 1929년 이곳을 방문하고는 ‘지상의 낙월 보고 싶다면 두브로브니크로 오라’고 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를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나오는 아름다운 갈색 지붕들과 수정처럼 맑고 푸른 바닷빛이 조화를 이루는 항구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책에서도 그 풍경을 담고 있다. 네 번째 여행지인 루마니아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드라큐라의 실제 모델인 블라드 체페슈라는 인물이 소개된다. 기세등등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진격을 멈추게 할 만큼 잔인한 면모로, 드라큐라 캐릭터에 딱 맞는 인물일 것만 같지만, 실제로는 주변 열강들 틈에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지킨 영웅으로서의 면면을 알 수 있었다. 다섯 번째 여행지인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 푸시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에 대해 ‘그는 예언적인 현상이다. 그의 등장에는 우리 러시아인 모두에게 지극히 예언적인 무엇이 담겨 있다’는 말로 그의 가치를 평가했다. 여섯 번째 여행지인 타히티에서는 고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가 바로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쓰인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달은 이상, 6펜스는 현실을 상징하는데, 고갱은 현실적으로 안정적인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자신이 갈망하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위해 많은 고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곱 번째 여행지인 모로코에서는 프란츠 카프카나 제임스 조이스에 비견되는 엘리아스 카네티라는 인물이 소개된다. 그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성찰을 담은 저서인 ‘군중과 권력’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뛰어난 문인이었다. 모로코는 화가, 소설가, 시인 등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예술혼을 불어넣고 예술적 욕망을 설레게 한 곳으로, 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모로코의 탕헤르라는 지역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또한 마르코 폴로처럼 과거 시대의 대표적 여행기를 기록한 인물인 이븐 바투타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 바로 탕헤르라는 곳이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여행으로 보냈는데, 인상적인 표현이 나온다. ‘그의 여행은 그의 평생이다. 그 안에 평생의 모든 것이 있다’는 문구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올라 있다고는 하지만, 정말 말 그대로 여행하면서 인생을 다 보낸 이븐 바투타만큼 여행으로서의 인생을 보낸 인물은 드물 것이다.
여덟 번째 여행지인 중국에서는 루쉰만큼이나 중요한 문학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곽말약’이라는 인물이 소개된다. 루쉰이 구문화에 대한 비판적 색채가 특징이라면, 곽말약은 중국의 미래를 만들어 갈 새로운 의식의 창조와 실천에 좀 더 중점을 두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시인, 극작가, 고전연구가, 사회운동가, 서예가로서 활약했다고 한다. 중국 곳곳에 그의 필치가 남겨져 있다고 한다. 그밖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현대 중국 문학인들에 대한 소개를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이 장에서는 독서와 길에 대한 인상적인 비유가 나오는데, ‘책은 제자리에서 여기가 아닌 저기로 갈 수 있는 교환공간의 영역’이라는 표현과, ‘길은 공간을 여는 열쇠’라는 표현이었다. 둘 다 저자 자신의 깊은 사색에서 나온 표현인 것 같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표현이라 신선했다.
마지막 장소인 일본에서는 해체적 미학, 즉 허무와 차가움과 슬픔의 정서가 가장 잘 나타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따라 여행한다. 태어나자마자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어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달아 하늘에 보내고, 누나까지 10살 때 죽는 모습을 경험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우울하고 공허함으로 가득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정서를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 바로 ‘설국’이다. 슬프도록 아름답다거나, 시리도록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 인간의 심연, 근본적인 외로움과 연약함에 대한 비극적 통찰이 담겨 있었다. 경계를 허무는 하얀 눈과 안개의 이미지와 작가의 정서, 작품의 배경에 깔린 분위기, 작가의 비극적인 죽음 등이 일련의 주제를 담은 이야기처럼 엮어지고, 과연 인간이 행복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란 물음을 남기며 글을 맺는다.
이렇게 작가의 발걸음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니 코로나 사태가 빨리 해결되어 원하는 곳 어디나 자유롭게 여행하고, 그 경험과 느낌을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마주 보며 즐겁게 나눌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덮이지만, 우리의 여행은 다시 마음 놓고 펼쳐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