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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피안
하오징팡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책 제목에서 ‘피안(彼岸)’은 현실 밖의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세계, 깨달음의 공간을 의미한다. 이에 반대 개념으로 ‘차안(此岸)’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태어나고 죽고 고통을 겪는 현실세계를 말한다. 지금 우리가 읽는 SF 장르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나 기술이 실현된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 현실을 비판하거나 성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의 제목이 그런 장르적 특성을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여섯 편의 중단편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분량으로 봤을 때 중편 셋, 단편 하나, 초단편이라고 할 짧은 2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작품인 「당신은 어디에 있지」는 인공지능 복제인간 서비스인 ‘분신’의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 벤처기업인 ‘런이’의 이야기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초기 투자 유치에 성공해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했으나, 치열한 업계에서의 경쟁과 생각대로 진척이 이뤄지지 않아 적지 않은 비판을 받고 있는 자사 제품의 추가 투자 유치의 어려움을 처하면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인물 ‘런이’는 결국 바쁜 생활 속에서 그의 연인 ‘쑤쑤’와의 관계까지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 속에서 인공지능 클론인 ‘분신’은 주인을 대신해 실생활에서 역할 대행을 할 수 있는 제품으로 등장하지만 완성도가 떨어져 아직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초기 인공지능 개발 시대를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기존의 인간관계가 최신기술을 향한 인간의 열정으로 인해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작품인 「영생병원」은 주인공 ‘첸루이’가 병원에서 회복 불능의 죽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바쁜 일상에 쫓겨 다정하게 대해지 못해드렸던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돌아와보니 멀쩡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있는 어머니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회생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던 어머니가 어떻게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이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자신을 포함한 가족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는데... 복제인간과 기억을 소재로 하여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규정되는가를 고찰한 작품이다.
세 번째 작품인 「사랑의 문제」는 비록 상품이긴 하나 고도화한 인공지능 클론이 사회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미래 사회를 그린 작품으로, 이 작품집의 주제 의식이 한층 짙어지는 지점이라 하겠다. 인공지능 알고리즘 개발자로서 AI 업계의 에디슨으로 불리는, 상징적인 인물인 ‘린안’이 어느날 자택에서 흉기에 찔려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의 아들이 용의자로 지목되는데, 이때 그의 혐의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근거를 내놓은 캐릭터가 바로 그아버지의 개발품인 뛰어난 성능의 인공지능 안드로이드 비서인 ‘천다’이다. 작품은 급박하게 진행되는 듯하나 같은 상황을 두고 등장인물들의 시점에서 번갈아 장면들이 묘사되면서, 인간만의 고유한 정서나 가치관이 과연 계량화, 수치화되어 옳고 그름이라는 단순한 결론으로 좌지우지 될 수 있냐를 묻고 있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의 핵심은 최적화된 논리와 연산이고 이것으로 가치가 매겨지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 ‘천다’는 인간들이 왜 비이성적이고 비상적인 선택을 하는지 계속 의문을 제기한다. 감정의 폭발과 정서의 불안정성을 조절하고 제거해야 할 요소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진범이 밝혀지는데 그 전개와 결말도 짧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네 번째 작품인 「전차 안 인간」은 군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인공지능 기술이 탑재된 무기, 장차 인간과 인공지능 기계군단이 군사적으로 대립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다섯 번째 작품인 「건곤과 알렉」은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특성에 대해서 인공지능이 ‘이해할 수 없는 특성’에서 ‘이해가 필요하다’는 인식의 발전이 일어난다면 대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매우 짧은 분량이지만 무거운 주제를 잘 압축하여 긴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 여섯 번째 작품인 「인간의 섬」은 시간적으로 100년이 넘는 우주 탐사를 나갔다가 지구로 돌아온 탐험대원들이 맞닥뜨린 인공지능 시스템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의미의 생성과 가치의 부여조차 모두 논리와 연산, 효율성, 최적화라는 시스템의 통치 속에서 통제되는, 인간에게 있어서 인공지능 기술이 고도로 발전할 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암울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인간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와 의미를 인공지능 기술에 온전히 반영할 수 있겠느냐는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결국 고도의 기술 발전 사회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등의 인문학적, 철학적 질문을 끊임없이 이끌어내며, 인류에게 펼쳐진 중대한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만들 것이다. 이 선택이 인류를 어떤 상황으로 몰고 갈 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제자리에 멈춰서 머뭇거릴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이 작품은 미래를 통해 현실을 성찰하고, 또 현실에 내재된 복잡한 미래성을 탐구하는 연구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