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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
마가렛 조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7월
평점 :
'당신이 만약 게이라면 졸업생 파티에 처음으로 데려간 여학생이 누구였는지 생각해보라. 그녀가 바로 당신의 첫 번째 패그해그다.' 내게는 '보코논서' 만큼이나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책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마가렛 조라는 한국계 여자 코미디언이 쓴 '내가 되고싶은 사람은 바로 나'라는 '패그해그 입문서'이다. 지난밤의 음주가무가 남긴 두통으로 지독한 숙취에 시달릴 때면 나는 종종 이 버릇없는 여자의 책을 꺼내읽곤 한다.
여기서 '패그해그'란 단어는 '게이 남자와 어울리기 좋아하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세상에서 가장 심한 경멸의 대상인 남자 동성연애자와 여자의 결합을 상징'하고 있는데, 패그해그 로 자처하고 있는 마가렛 조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내가 남자 동성연애자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의 첫 느낌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미국 이민 1세대인 한국인 부모님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오줌을 참지 못 하고 스니커즈에 지린 것을 시작으로 지독한 왕따에 시달렸고, 미국 한인사회의 사교계 필수코스인 한인교회에서도 아이들의 놀림과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모란(牡丹)이라는 예쁜 한국이름은 어느새 모론(moron 저능아라는 뜻)이라는 무시무시한 미국이름으로 불려지고 그 이름은 평생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젊은 나이에 쓴 이 자서전은 성경의 묵시록처럼 무시무시하지만 매혹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13살 어린 나이에 첫경험은 데이트 강간이나 다름없었고,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다 올 F학점으로 고등학교를 쫒겨났다. 보수적인 부모님은 꼴 보기 싫은 딸을 지하실로 내쫓고 한동안 한지붕 두가족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연애생활은 어떤가. 평생 '뚱보 콤플렉스'에 시달린 그녀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을 거절하는 데 죄책감까지 느껴야했고 그 지저분한 손길을 뿌리치지 못 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들을 만나고 술에 취해서야 함께 침대로 갈 수 있었다. 연인과 헤어질 때는 오히려 깊이 감사했을 정도다. (한때의 연인 쿠엔틴 타란티노도 그랬을까?)
마지막으로 직업생활이라도 만족할 만 해야하는데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는 순회공연 생활 중에 동양인 최초로 시트콤 '올 아메리칸 걸'의 주연자리를 따내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잡지만, 스크린 테스트를 받고 살이나 빼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 후 새 모이처럼 먹고 개인 트레이너와 함께 강도 높은 운동으로 일관한 끝에 2주 만에 14kg 감량에 성공하지만 그 결과 신장이 망가졌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운동만으로는 되지 않아 다이어트 약에 의존하면서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고 시트콤이 중도하차하면서 자신의 모든 불행이 이 놈의 살 때문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내 인생은 오직 살빼기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살아 있는 것보다 날씬해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결국 밥을 먹지 않으려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알코홀릭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루종일 술과 동시에 마약을 하고 외로움에 아무 남자와 사랑을 하는 생활이 몇 년동안 계속되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바람만 불어도 꺼질 거 같은 가냘픈 체구에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동양여성이었다면 그런 폭력적인 삶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렛 조는 그녀가 주연한 시트콤 '올 아메리칸 걸'처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올 아메리칸 걸'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행히 그 모든 비극적인 상황을 자신의 유머감각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무시무시한 책에는 무엇보다 그녀만의 펑크적인 유머와 불손하기 짝이 없는 위트가 폭우 뒤의 무지개처럼 반짝반짝 빛이 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코미디 예술가이자 작가이자 여신인 이 작가의 책을 넘길 때마다 훔쳐오고 싶은 구절이 하나 둘이 아니라 손이 근질근질했을 정도다.
그리고 이제 게이를 친구로 가진 이민 2세대 뚱뚱한 동양인 여자라는 핸디캡은 주류 사회가 가지지 못한 독특한 아우라를 그녀에게 부여한다. 그녀는 다시 일어선다. 클럽을 통해 코미디 쇼 '내가 되고싶은 사람은 바로 나(I'm the one that I want)'가 연일 매진행진을 계속하고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배경에는 '패그해그'로 살아온 그녀의 지난 삶이 있다.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인 미국 사회에서 힘들 때 마다 함께 울어주었던 같은 2류 계급의 친구들이 있다. '전세계 남성 동성연애자들에게 약속의 땅과 같았던' 70년 대 폴크 스트리트 거리의 수많은 게이 남성 사이에서 성장한 그녀는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패그해그로 살아왔다는 점에서 감히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 수호천사들로 나를 돌봐주었으며 그 사실에 행복해했다. 그들로 인해 나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하느님은 게이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마가렛 조의 코미디를 한번도 본 적이 없고 지금까지 영화조차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3년 전에는 게이 남자친구를 가지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 내 친구들이 열광하는 게이 로맨스 드라마 QAF에는 관심도 없다. 그러나 국적과 성별과 취미를 떠나 우리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너와 나 우리는 평생을 주류에 영입하지 못 하는 패그해그로 살아온 것이다.
'만약 우리의 관계가 당신에게도 익숙하게 들린다면 아마 당신 역시 패그해그일 것이다. 패그해그는 신분과 계층, 나이, 인종을 초월한다.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혹은 그 중간이건 상관없다. 패그해그는 그 숫자만큼이나 다 제각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패그해그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경우 패그해그가 되려고 작정했던 사람은 없다. 어느날,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이 그렇게 되어있음을 깨달은 것 뿐이다.'
'여성과 게이 남성은 사회의 지배문화에 의해 오랫동안 2류 계급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힘을 유지해야 할까? 우리를 억압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씹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비서의 날처럼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패그해그 데이' 창설을 위한 로비스트로 활동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다면 함께 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좋다는 이 샌프란시스코 풍의 자서전을 통해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신의 '패그해그' 교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 유혹은 모든 이단 종교처럼 두렵지만 너무 유혹적이고 치명적이다. 그러나 마가렛 조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찾아냈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우선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함께 나누고, 거기에 빛을 비춰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마치 그림자가 사라지듯 그것 역시 빛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