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아들
데니스 존슨 지음, 박아람 옮김 / 기이프레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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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아들>이라는 제목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책의 맨 앞에 있는 글들로 짐작할 수 있다.

본문의 <응급실> 챕터에 보면 나오는 이 문장들...

잠시 후 하디가 조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을 하는데요?"

그러자 조지가 말했다.

"생명을 구해요."

그리고 속표지를 넘기면 다시

황홀한

기운이

밀려들면

내가

예수의 아들

된 기분이야

- 루 리드, <헤로인> 중에서

라는 단어들이 흩어져 있다. 그다지 질서는 보이지 않는다. 내(독자)가 생각해본 제목의 의미는 이 글의 맨 뒤에 남겨보려고 한다.

띠지에는

세기말 미국이 세계 문학사에

영원히 남긴 흉터

출간된 지 25년이 지난 지금, 이 소설집이 미국 전역의 글쓰기 워크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의 목소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정신,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정신 그 자체다.

- 케빈 잠브라노(문학 비평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 소설가가 '쓰고 싶은',

'써야만 하는' 소설로 늘 상상하는 어떤 책이 있다고 하자.

<예수의 아들>은 그 상상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일 것이다.

이 소설이 구현하는 영광은 작가들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높은 구역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강덕구(문화 비평가)

시작하기에 앞서 이 띠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책은 장편(혹은 중편)소설이 아니다. 케빈 잠브라노는 이 책을 '소설집'이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집은 "여러 편의 소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실제로 이 책은 분량이 제각각인 글들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공통되게 화자는 '나'이고 무책임하고 방탕한 인물이다. 내용 역시 분량처럼 제각각이다. 연결되는 듯 보이지만 죽었던 사람이 버젓이 살아나(?) 다음 챕터에 등장하고, 시간의 흐름상 예전 시간대에서 진행된 이야기인 듯 한데데 버젓이 현재진행형처럼 서술된다. 이 책을 다읽고 깨달은 것은 시간의 흐름으로 사건들을 재배치하고 인과관계를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독특함은 형식에도 있다. 우선 각 글들의 제목이 글의 맨 뒤에 위치해있다. 마치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구성이다. 일반적으로 제목은 글의 맨 앞에 위치하지만 그런 질서나 법칙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마치 순행적 흐름을 역행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자꾸 뒷문장을 읽고 앞문장을 읽고, 다시 그 앞문장을 읽는 방식으로 맨뒤에서부터 문장들을 읽어나가봤다. 말이 되는 거 같으면서도 안되는, 눈도 혼란스럽고 머리도 아팠다. 이걸 의도한 걸까? 이런 구성 때문인지 차례도 책의 맨 뒤에 위치해있다.

11개의 챕터로 되어있고 글의 사이사이에는 각기 다른 어지러운 패턴들이 인쇄되어있다. 이런 식이다.


눈을 감고 손끝으로 눈 부위를 지긋이 누르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빛과 어둠이 이지러지며 묘한 패턴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묘한 기분이 들고는 한다. 마치 어디론가 날아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혼란스럽고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 패턴은 '나'라는 화자의 정신 상태와 글과 글 사이의 시간과 거리를 의미하는 거 같다. 그리고 그 의미는 패턴의 모양처럼 제각각으로 짐작하기 어렵다.

유일하게 언제인지를 알 수 있는 건 '응급실' 챕터에 나오는 1973년이다. 1973년의 미국은 전후 낙관이 완전히 무너지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이 동시에 흔들리던 '전환기'였다. 베트남전이 종결 국면에 접어들며(미국의 패전) 정당성이 대중적으로 부정되었고,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본격화되며 정치 불신의 시대를 열었다. 소련과의 긴장 완화로 "세계의 도덕적 리더"라는 이미지는 붕괴되었다. 오일 쇼크는 끝없는 성장의 믿음에 찬물을 끼얹었고 68세대의 이상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공동체적 이상보다는 개인의 생존과 냉소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민권운동은 계속되어 전통적 권위 전반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그런 시절이었다.

한 마디로 혼란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혼란한 시기를 대변하듯 소설 속 이야기는 분절되어있고 시간은 뒤죽박죽이다. 인과가 부서져있다. 읽은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때 설명하거나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독자의 무시하는 적합하지 않은 연결을 서슴지않는다. 감각도, 표현도 제멋대로다. 아래의 내용을을 보자.

"환자분 얼굴이 컴컴해요. 뭐라고 하시는지 안 보여요."

“조지.”

내가 끼어들었다.

“뭐라고 하시는 거죠? 안 보여요. "

간호사가 오자 조지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분 얼굴이 컴컴해요.' "

<예수의 아들>, 98쪽

목소리는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얼굴은 낯빛이 어두울 수는 있어도 컴컴할 수는 없다. 감각과 표현도 제멋대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 대화라고 하고 있지만 서로 자기 말만 한다. 서로 맞지 않는, 어울리지 않는 질문과 대답만을 할 뿐이다. 허세에 찬 인물들이 정말로 큰 일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작은 일에 전전긍긍한다. 뻔번하기까지 하다. 이 글의 맨 앞에서 이야기한 인물인 조지는 자신이 병원에서 일한다는 것을 근거로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뻐기며 한다. 그러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화자인 '나'도 다르지 않다. 무언가 제대로된 일을 해야지 하면서도 약에 취해 제멋대로 한다. 의무와 책임은 인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위해 행위하지는 않는다. 해야할 일이 많을 거 같은데 "고가 열차를 타고 달리는 거 말고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다"고 한다. 겁도 많고 걱정도 많지만 헤로인, 아편 같은 마약에 취해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못하는, 나중에는 할 수 없는 인물이다. '나'는 분절적인 경험들을 통해 고양된 기분에 취한다. 다음의 문장은 그의 기분을 잘 드러낸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다음 날 이른 아침 앞 유리에 덮여 있던 눈이 녹고 햇살이 나를 깨웠다는 것이다. 안개가 모든 것을 뒤덮더니 햇살이 비추면서 날카롭고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토끼 사건은 그 이후에 일어난 걸지도 모르겠다. 혹은 ユ 전에 일어났지만 이미 다 잊은 걸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때 내 머릿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아침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이 문득 극심한 갈증이 해소됐다고 느낄 때와 비슷한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혹은 노예가 자기 주인과 친구가 되었을 때.

<예수의 아들>, 111쪽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결과론적인 끼워맞춤일지라도),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한다(망상일지라도). 그러면서 그는 점차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첫 번째 챕터, '히치하이킹 도중에 일어난 사고"에 보면 '나'는 뭔가 나사가 하나 빠져있는 거 같은 모습을 보인다.

나는 올즈모빌 한 대가 속도를 늦추기도 전에 그게 내 앞에 서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 안에 탄 가족들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는 우리가 이 폭풍우 속에서 사고를 겪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상관없었다. 그 가족은 나를 목적지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했다.

<예수의 아들>, 24~25쪽

'나'는 그 사고를 막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사고가 난 후에는 어떤 구호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저 배회하며며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뿐이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냉소한다.

그런 숨조차 많이 남지는 않은 듯했다. 나는 알았지만 그는 몰랐고, 그렇기에 나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이 지상에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측은한지 절감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결국 죽는다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내게 말할 수 없고 나는 현실이 어떤지 그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 그 점이 내게는 지독히도 측은하게 느껴졌다.

<예수의 아들>, 30쪽

그리고 당신들, 당신들은 어이없게도 내가 도와줄 거라 기대하겠지.

<예수의 아들>, 33쪽

맨 뒤의 챕터에서 앞으로 올 수록 '나'는 겁 많고 철 없는 동네 양아치의 모습에서 뭔가에 초탈한 듯한 모습으로 바뀐다. <예수의 아들>이라는 제목은 신의 신성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권능을 이어받은 한 명의 자녀라는 망상을 드러낸다. '나'는 약에 취해 뭐든 할 수 있는 고양감에 빠져있다. 하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물일 뿐이다. 허세를 부림과 동시에 무력함에 빠져있다. 추천사에서 케빈 잠브라노가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정신'이라고 말한 것은 결국 약에 취해 있는 상태를 기반하여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나(독자)는 그것이 어떤 위대함을 담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강덕구 평론가가 말한 '위대한 경지'에 올랐다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영미소설을 유독 읽기 어려워하는 나의 탓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나라면 시도도 못할 거라는 점에서 <예수의 아들>은 대단하다. 형식과 장치도 재미있었다. 다만 이런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한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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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2-20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하루살이님, 패턴 위의 음영이 마치 살아서 상승하는 듯한 착시를 주는군요. 좌우로 움직이는 듯 하기도 하구요. 제 시력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그렇게 의도된 디자인일까요... 갑작스런 댓글이라 쓸까말까 하다가 제 느낌을 그냥 써봅니다. 좋은 저녁 되십시요. 그리고 방문해주시어 고맙습니다.

하루살이 2026-02-20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화자의 상황과 감정을 표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오로라 (리커버) -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위픽
최진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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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셋째 날 오후, 너는 제주공항에 내려 102번 버스를 탄다."(8쪽)

소설의 미덕은 흔히 간접체험(경험)이라고 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 인물의 상황을 보고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것이다. 다른 존재가 되어 생각해보고 혼자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일종의 몰입이자 사고실험이다. <오로라>는 독특하게 2인칭을 쓴다. 2인칭 소설은 <엄마를 부탁해> 이후 오랜만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을 보자. '너'라는 단어를 보며 읽고 있는 주체, 즉 독자 자신을 호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하지만 왜 그래야하는가. 좀더 적극적으로 '너'가 되어보자. 제주공항에 내려 102번 버스를 타는 나를 상상해보자. 보이는 풍경은 어떻고 귀밑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은 어떠하며, 코를 간질이는 냄새는 무엇인지를 머리 속에 쌓아왔던 데이터들을 끄집어내보자.

때론 문장과 부딪히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좀처럼 몰입되지 않고 그래서 상상할 수 없는 지점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되어 보기'에서 이런 상황을 '견뎌 보기'로 전환된다. 이것 역시 재미있는 경험이다. 나로 읽고 있으나 내가 되지 못하는 경험. 나를 자꾸 튕겨내려고 하지만 버티고 참아보는 흥분.

<오로라>를 읽는 독자는 '너'가 되고, 너는 오로라가 된다. 오로라가 아니지만, 아니어서 너는 오로라가 될 수 있기도 한다. 새로운 긴장감을 느끼며 믿음과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네 친구는 말했다.
그땐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 믿었지. 동기 부여가 필요했던 것 같아. 일단 저질러놓고 그걸 계기 삼아서 더 힘을 내려고 했던 걸까. 아무튼 난 정말 열심히 했어.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했거든. 이제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해야겠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실패하더라도 그 방법뿐이겠지. 중요한 건 결과니까.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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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타임 여행자
반수연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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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 #반수연 #소설 #문학동네



​제목 : 파트타임 여행자

자 : 반수연

출판 : 문학동네

발행 : 2025-9-30

띠지 :

반수연의 소설에는 논픽션의 우직한 근육이 있다.

그 힘을 신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 하성란(소설가)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가 반수연 신작 소설집

"애나는 미국에도 없고 한국에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뒷표지 :

"집을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은 아무리 오래 여행해도

파트타임 여행자라 부른다."

영영 떠나온 한국, 여전히 이방인일 뿐인 이국

그 사이에서 떠도는 파트타임 존재들의 생생한 로드 트립

2020년대가 요청하는 이민자 서사의 뉴노멀

반수연 소설집 <파트타임 여행자>에는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각각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

애나는 빛의 입자를 피워올리며 반짝이는 이스트강을 바라보고 있다.

(...)

애나는 찰리에게 커피 주문서를 내민다.

<조각들>

금요일 저녁 혼자 족발에 소주를 한 잔 하고 있을 때 벽에 붙여둔 종이의 한쪽 모서리가 떨어진 걸 발견했다.

(...)

출입문의 나사를 조일 때 손으로 전해지던 그 맞춤한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파트타임 여행자>

사막의 평원은 풀도 땅도 연갈색으로 바짝 말라 있었다.

(...)

오늘은 부서진 것이 부서진 채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이 해안에 차를 세우고 밤새 파도 소리를 들어볼까 했다.

<춤을 춰도 될까요>

깜빡 잠이 드는 순간이면 정신이 외투처럼 몸에서 분리된다.

(...)

정목수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사이 죽그릇을 든 은주는 이미 방으로 들어와 있다.

<프레살레>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

풀을 뜯는 한 무리의 양들이 초원에 내려앉은 구름처럼 몽글몽글해 보였다.

<빅터 아일랜드>

빅터 브리지를 건너 첫번째 출구로 빠져나오니 납작한 상자를 여러 개 엎어놓은 모양의 공단이 보였다.

(...)

피곤해서인지 규는 그것이 오로라의 빛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긴 하루였다.

<화분의 시간>

정희는 동쪽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혼자 나흘을 보냈다.

(...)

옷장 안에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엄마의 취향대로 울긋불긋한 옷이 빈틈없이 빼곡했다. 베란다를 가득 메운 꽃의 색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단편을 읽을 때 첫 문장은 인상, 마지막 문장은 분위기(정서)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첫 문장보다는 마지막 문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문장이 전체적인 감정의 흐름을 납득할만하게 정리하고 있는가'로 마음 속에 남는지 아닌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중년(적어도 50대 중반 이상)이고 가족(특히 자녀)과의 사이가 좋지 않고 낯선 어딘가에 있다. 양로원이든 산속이든, 여행지든. 주된 공간에서 벗어난, 던져진, 낯선 공간에 주인공들은 놓여 있다. 마치 이민자의 처지가 이러하다는 듯.

반수연 작가는 "통영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원하지 않는 이주였지만 작가가 과연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정착의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으리라.) 작가의 말을 보면 "책으로 묶기 위해 지난 사 년 동안 쓴 소설들을 모아보니 길 위의 여행자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어는 순간부터 이국의 이방인이라는 이름이 너무 서글퍼서 나를 여행자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 같다."(272쪽)라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상황과 외모는 제각각이지만 아마도 작가의 분신들일 것이다. 소설들 전반에는 고립감, 억울함과 같은 감정들이 묻어있다. 도망치거나 내쳐진 외로운 존재, 주변으로부터의 부당한 공격들은 "어떤 적의의 세계"에 빠져있는 주인공은 고단하다.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간 그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희망이 아닌 지독한 현실 뿐이다. 젊었을 때는 불안, 늙어서는 애환.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도 견디며 살아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건 부당한 평판 위에 서있다. 있을 곳을 찾지 못한 주변인의 서사는 작가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는지도...

(돌아갈 곳이 있는) 파트타임 여행자이기를 꿈꾸지만 이민자는 어쩌면 (있어야할 곳을 찾지 못한) 풀타임 여행자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밑줄 그은 문장 하나를 소개한다.

"민은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늙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죽는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산다는 건 애가 타는 일이었다. 민은 그 길을 살아남아 여기에 이르렀다."(106쪽)


민은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늙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죽는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산다는 건 애가 타는 일이었다. 민은 그 길을 살아남아 여기에 이르렀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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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어둠
조승리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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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리는 수필가이자 소설가이다. 30대 후반이고, 후천적 시각장애인이고, 안마사라는 직업을 거쳤다. 앞서 나온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달, 2024)를 먼저 읽었고 팬이 되었다.

그녀의 순도 높은 분노는 기분을 나쁘게 하기 보다는 뭐랄까, 공감되는 슬픔을 일으킨다. 나는 겪어보지 못한 사건들이지만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저 밑의 감정을 흔든다. 이번 연작소설은 에세이인 듯, 에세이 아닌, 에세이 같은 소설이다. 현실적인 타협안 말고는 미래를 꿈꿀 수 없었던 아이가 수필가, 소설가가 되었다.

눈이 먼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작가는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심하지 않았던 삶이 산산히 부서진다는 것, 그래서 작가에게 세상은 부조리가 만연한 부당하고 불합리한 곳이다. 그래도 이건 에세이가 아닌데. 에세이가 아니니까 좀 행복한 모습을 그려주면 안되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의 첫 번째 단편 <네가 없는 시작>은 그래도 좀 달달하고 가슴 뛰고, 그러다 다시 가슴 저리고, 안타깝고 그런 소설이다. '너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어떤 안심이 들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현실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거리는 길었지만 우리의 시간은 항상 짧았다."(14쪽)

감정을 나눌 시간도, 서로를 더 알아갈 시간도 부족했던 어린 연인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과 나의 실명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잠시동안 그의 '연인'이라는 역할에 몰두하지만... 자신이 도달하지 못할 미래를 직감하고 이내 다 버려버린다. 나(독자)는 그 절망과 결심을 헤아릴 수가 없다.

"도망친 건 나인데 쫓겨난 것처럼 기분이 처참했다."(30쪽)

다시 말하지만 <나의 어린 어둠>은 소설이다. 그런데 마냥 소설로만 보기 어렵다. (그건 아마 내가 작가의 에세이를 읽어서일 것이다) 추천의 글에서 윤성희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를 둘러싼 외부 세계와 작가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내부 세계가 합쳐지는 순간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현실 세계의 무 엇이 내 마음을 건드린다. 그러면 파장이 생기고 그 파장을 나 의 내부로 가지고 와서 지켜본다. 작가는 밖과 안이 끈끈하게 이어질 때까지 섬세하게 지켜보고 유연하게 대화를 한다. 그리고 정확한 문장으로 써나간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소설은 '자전'이 된다. 쓰는 동안은 인물이 곧 내가 되니까. 그러니 '자전적 소설'이란 명칭은 사실 필요 없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책을 읽는 동안 모두 '자전'이 되는 매직을 경험하는 일이다.

나는 이 글을 오감으로 읽었다. 열여섯 중학생이 되어 옆 집 할머니가 내어준 수박을 먹으며 울었다. 먹지 않았는데도, 달콤한 수박 맛과 짠 눈물 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호박 부침개를 게걸스럽게 먹으며 속없는 농담을 하다 보면 어둠은 영원히 '어린' 상태로 남을 것만 같았다."

"다 똑같은 그림자였다."(112쪽)

그렇다. 오브제가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하여도 그림자는 그렇지 않은 것들과 같다. 검다. 그 안에 화려함과 찬란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누구나 그늘진 모습이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존재의 본질은 모두 같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은 착취당할 수 없다. 자신의 행복만이 먼저이고 우월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행복을 무기로 휘두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 사람은 입으로는 행복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행복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본적은 없을 것이다.

<브라자는 왜 해야 해?>에 나오는 중증장애를 가진 부희 언니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부당하지만 부희 언니 역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당한 일을 겪는다. 결국 그 사람의 사정은 잘 들여다보지 않은 채 내 사정만을 앞에다가 잔뜩 늘어놓을 뿐이다. 나라고 다를까...

이것이 소설이라면 완전 말도 안되는 판타지 같은 행복을 자신에게 선사해도 될텐데... 허구의 세상에서조차 작가의 소설은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현실적이라는 말도 모자람이 있다. 현실이 오히려 소설 같다는 말이 있다. <나의 어린 어둠>은 모두 에세이처럼 읽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이 가지는 소설 같은 상황이 작가의 에세이 같은 소설에 '소설의 위상'을 갖게 만들어준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서,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거 아닐까."(111쪽)

<나의 어린 어둠>은 소설이라 주인공은 누나(내 안의 검은 새)가 되기도 하고 부장(브라자는 왜 해야 해?)이 되기도 하고 성희(나의 어린 어둠)가 되기도 한다. 모두 1인칭이다. <나의 어린 어둠>에서 주인공이 '성희'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소설에서 주인공은 역할적 명칭이나 대명사로 지칭된다. 이름을 불러주는 존재는 엄마, 혹은 그녀를 사람하는 아주 일부의 사람들이다. 달달하고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를 담은 <네가 없는 시작>에서조차 주인공은 이름으로 불려지지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일들이 작가가 겪었거나, 보았거나, 들었던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나(독자)는 모든 소설에서 주인공이 절망에 빠지는 시점(눈이 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늘 함께 통과해야한다. 이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마음 한 편으로 그 때를 내(독자)가 함께 하고 있음이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

쓰겠다고 하는 작가에게 힘이 되는 말만 하고 싶다.

당신은 써라. 나는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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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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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히 상식의 편도 아니었는데, 이 사회 상식의 수 준이 무너져가는 걸 지켜보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103쪽)

<작은 일기>는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발표부터 2025년 4월 4일 탄핵 선고일까지 작가가 경험한 사건과 감정들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에세이이다. 대한민국을 마음대로 하고 싶었던 윤석열이 가장 쉬운 방법으로 택한 '계엄'때문에 발생한 불안과 혼란, 분노와 박탈감 같은 것들은 많은 국민들에게 '내란성 위염'을 선사했다. 힘들지만 살아낼 수 있었던 일상이 망가질 수 있고, 그것이 회복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위기감을 전국민이 공감했고, 일상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던 지난 날. 윤석렬이 탄핵된지 이제 4개월이 넘게 지났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아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난 표정으로 돌아보는 앞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평화롭게 하자고 거듭 소리 지르는 그에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외치다가 뒤쪽을 향한 말로 들릴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말투로 평화를 요구할까. 수많은 시민을 담은 이 자리가 왜 저 정도 입장과 말을 담지 못할까."(12쪽)

"페미당당 심미섭 활동가가 페미니즘과 성소수자를 주제로 발언하는 동안엔 사람들 호응이 거의 없었다. (...) 내게 망고를 나눠준 여성이 혀를 찼다. 여기서 저런 얘기를 왜 하느냐고 중얼거리더니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러지 마시라고, 여기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고 무슨 얘기든 할 수 있는 자리라고 말했다. 주변이 조용해 이 정도 말을 하는데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씩이나 필요할 일인가. 겁인지 분노인지 심장이 너무 뛰어서 외롭고 서러웠다. 내 자리가 아닌 곳에 않았다는 감각, 그보다는 김보리와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20쪽)

나 역시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노동자의 이야기,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 세월호 이야기, 이태원 이야기... 광장에 있는 동안에도 사건은 계속 발생했다. 무안공항 비행기 추락 사고, 싱크홀 사망 사고, 산불 피해 등등. 다수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사라지는 수많은 소수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다수들은 소수들의 발언으로 다수가 원하는 중심 주제가 흐트러질까 두려웠고 그래서 그들의 발언을 불편해했다. 소수들은 다수들에게 '우리도 있다'고 연대를 요청했다. 소외는 서럽다.

전과는 다르게 이번 광장의 주역으로 떠오른 젊은 여성층의 조명 한 편에는 묵묵하게 자리를 지킨 중장년 여성들이 '우리도 있는데...'라고 쓸쓸하게 읖조린 부분을 보며 우리는 우리 안에서도 계속된 소외를 만드는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모두를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말하지 않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해졌다.

"초반 몇 차례 집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되짚고 개선하려는 노력도 분명 있는 것 같다. 광장에 앉아 타인의 말을 듣는 사람들 태도에 변화가 있다. 부당과 불편과 불쾌를 말하는 용기를 내준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불편이 맥락 있는 불편이며 모두의 고민이어야 한다고 말 꺼낸 사람들이 있어 이뤄낸 변화."(36쪽)

사회의 인정은, 입법으로 공인된다. 법은 다수를 대상으로 만들어지며, 선고 역시 이전의 심판의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굴러왔다는 그 단단한 무책임의 영역은 외침을 무음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우리의 인지범위 바깥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내 앞에 있는 것 먼저, 내 주변에 있는 것은 그 다음'으로 관리한다. 일상은 특별하게 되짚지 않아도 향유되고 영위된다. 윤석열의 오판은 어쩌면 계엄이 그렇게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거라는 나이브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추운 밤을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 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 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그건 나 라에서 받은 것이 없어도 위기가 닥치면 들불같이 일어난 다는 어느 민족의 성격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곤경과 고립을 모르는 척 내버려두거나 차마 두고 갈 수는 없는 마음들 아닐까. 남의 고통을 돌아보고, 서로 돌볼 줄 아는 마음들."(58쪽)

일상의 언어가, 추운 날씨에 서로 모여 나눈 온기가 내란성 위염에 시달리던 우리를 보듬었다. 우리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방해하는 무수히 많은 오염된 것들을 목도했고 말(언어)까지 오염시키려는 그들의 행태에 몸서리쳤다. 다양성이라는 말 뒤에 숨어 폭력은 저항의 다른 모습이라고 말하는 뻔뻔한 자들의 감수성을 보며 과연 우리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 의심했다. 악은 우리에게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악을 표출하지 않는다. 발화하려는 악을 누르거나 발화한 악을 통제하면서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있다며 자신이 정당하다는 듯 말하는 것은 악에 자신이 굴복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지난 두달은 아름답고 좋은 것 들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그보다 내 게는 오염의 시간이었다. 뭐가 오염되었느냐면. 매일 갱신되는 새로운 사건과 경악과 한계가 없는 것 같은 질 낮음으로, 어제의 경악이 오늘의 경악으로 무던 해지는 일이 반복되어서, 그런 식으로 세상을 향한 감귤이 오염."(106쪽)

삶은 한 번이기 때문에 가급적 이 번 삶에서 좋은 것들을 누리고 마치고 싶다. 그럴 때면 나는 5.18 때 한 청년이 남긴 말을 곱씹아본다.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윤상원 열사(1950~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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