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자전거 여행
생각의나무, 2000

2004년 9월 27일 포천 8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씀.
2004년 11월 12일 싸이월드에 올리면서 수정.

페일레스 peilles@gmail.com



山河의 美와 아날로그의 힘

  세상의 어떤 것이든 그것을 두 가지로 나눠버린다는 것은 일종의 억지이다. 하지만 그런 억지를 부려서 세상의 문장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소설가의 문장'과 '기자의 문장'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의 문장은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사실을 과장하며 감정을 드러낸다. 반면 기자의 문장은 다르다. 단순명쾌한 문장을 최고로 치고, 육하원칙이라는 사실에 매달리며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설가의 아름다움과 기자의 단순명쾌함이 합쳐지면 그 문장의 힘은 단순히 배가 되지는 않는다. 그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며 아름다움을 뽐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자가 뛰어난 작가가 되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유명한 미국의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종군기자로 일했었고, 우리글을 아름답게 쓰기로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고종석은 현재도 한 신문의 논설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자전거 여행>을 쓴 김훈 역시 이러한 '기자-작가' 계보에 속할 것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던, 한국일보 기자 시절의 '문학기행'에서부터 뛰어난 문재(文才)를 드러낸 김훈은 전업 작가로 삶의 방향을 바꾼 뒤에도 장편 <칼의 노래>와 단편 [화장]으로 각각 동인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이라는 명예를 거머쥐며 '한국 문학의 새로운 희망'이라는 다소 거창한 칭호를 듣기에 이르렀다.
  <자전거 여행>은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풍륜(風輪)'이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끌고 전국을 여행한 김훈의 여행 에세이다. 이 책의 종류가 기행문이 아니라 에세이인 이유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여행한 궤적을 따라 날짜순으로 재배열하는 일반적인 기행문의 구성을 취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각각의 토막글들은 큰 강의 흐름처럼 봄('흙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가을('가을빛 속으로의 출발')로 이어진다. 이러한 구성의 치밀함은 책 자체가 프롤로그에서는 단단한 산문으로 시작하여 에필로그에서는 유유한 흐름의 시로 끝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단단한 기반 아래서 김훈의 우리 산하(山河)에 대한 애정은 꽃을 피운다. 그에게 있어 우리 산하는 단순한 고적명승이 아니다. 보통의 여행객이라면 별다른 관심 없이 스쳐지나갈 군산 옥구의 염전에서 여수에 있는 바닷가의 무덤들까지, 그의 관심사는 우리의 산하를 넘어 이 땅 위에 사는 우리 삶 전체에 뻗어있다.
  관심사가 다양하다고 해서 그저 주마간산으로 돌아본 산천경개의 감상을 뱉어놓는 것은 아니다.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김훈의 깊은 통찰은 책의 곳곳에서 빛난다. 그는 술마신 다음날 숙취 뒤의 배설로 고생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전남 승주에 있는 선암사의 3백 년도 넘은 화장실을 주제로 끄집어낸다('그리운 것들 쪽으로').
  식영정과 면앙정 등의 이름있는 정자들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는 그 순간에도 그의 감상은 단순히 정자의 아름다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정자에서 '시선의 일방성'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것이 '근대성의 일종'이라는 평도 빼놓지 않는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정자가 세워질 당시의 역사 속으로 걸어들어가 남도 선비들이 잔혹한 당쟁과 사화가 휩쓸었던 조선 중기의 지옥 같은 정치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귀향하여 세운 '작은 낙원'이 바로 정자임을 말한다('지옥 속의 낙원').
  이 책은 그의 출세작인 <칼의 노래>가 나오기 전에 나왔다. 그러나 대학시절 '난중일기'를 읽고 나중에 꼭 이순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순신에 대한 그의 애착은 강렬하다. 진도대교를 다룬 책의 한 꼭지에서 그는 현충사에 보관된 이순신의 칼에 새겨진 검명을 이야기하며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격언이 '펜을 쥔 자들의 엄살이거나 자기 기만이기 십상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그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또 그것은 이 책의 종류가 기행문이 아니라 에세이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요즘 세상은 너무나도 복잡하다. 덮쳐오는 파도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것들이 등장한다. '과학과 현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그의 '가엾은 수사학을 조롱하'는 21세기 초엽의 세상에서 김훈은 묵묵하게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이 세상에 도전하고 있다. 이 때문일까. 디지털 세상에서 김훈의 아날로그는 아름답다.
  '김훈 아날로그'의 밑바탕은 '기자 김훈'이다. 이를 다른 말로 '사실'이라고 해도 좋겠다. 엄청난 정보가 전세계를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오늘날이라도 기자는 취재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발로 뛰어 확인해야만 한다. 말 그대로 그의 문장은 사실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책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눈에 띈다. '에세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이 책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지명과 인명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임실리 덕치면 회문리 덕치 마을 앞 정자나무 밑을 흐르는 섬진강', '조정심(50세) 씨가 가장 젊고 고연기(75세) 할머니가 최고령자'와 같은 문장에서 아날로그의 간결한 힘은 꿈틀댄다.
  그렇다고 이런 기초적 사실에서만 그의 아날로그가 힘을 얻는 것은 아니다. 섬진강 상류의 여우치 마을을 다룬 한 꼭지에서는 IMF 위기로 고향을 떠난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가슴 아픈 현실을 너무나도 객관적이고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다. 읽는이가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은 맨 마지막의 '이틀 동안 이 마을에 머물렀다' 밖에 없다. 이런 감정의 생략은 사실을 좀 더 가슴에 파고들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렇게 보면 싸늘한 그의 아날로그이지만 그것이 꼭 차갑지만은 않다. 마을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놀았는데 아이들이 김훈의 산악 자전거를 너무 부러워했다는 내용의 한 꼭지에서 김훈은 자신의 심정을 '늙은 기자는 무참했다'고 표현한다. 이처럼 언뜻언뜻 드러내는 감정을 통해 그의 아날로그는 인간적인 따뜻함을 회복한다.
  김훈은 아직도 연필을 직접 깎아서 쓴다. 한겨레 기자 시절에 카페 구석에서 한 손에 연필을 쥐고 한 손은 이마에 대고 고뇌하며 글을 쓰던 그의 모습에 카페 여주인이 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연필이 닳고 닳아 손에 쥐고 쓰지 못할 정도로 짧아지면 볼펜대를 꽂아서 쓴다. 그가 소위 '아날로그적 글쓰기'를 고수하고 있다는 증거는 이것뿐이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온몸으로 글을 '밀어내며' 써내려간다. 기자 시절 그는 '오후에 갑자기 취재지시를 받을 때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큰 산처럼 밀려온다'고 말했다. 이런 고뇌 끝에 '몸으로 써낸' 그의 문장들은 한 조각 한 조각이 각기 아날로그의 힘을 지니고 시퍼렇게 살아 번쩍인다.
  거의 모든 것이 그렇지만 특히 요즘 세상에서는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을 밀어내고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공들여 쓴 글보다는 대중의 취향에 맞는 달콤하고 가벼운 글들이 판을 친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우직하게 써내려 간 김훈의 이 글들이 더 반갑게 느껴지는 것은.

목차

프롤로그

1. 꽃피는 해안선 - 여수 돌산도의 향일암
2. 흙의 노래를 들어라 - 남해안 경작지
3. 지옥 속의 낙원 - 식영정.소쇄원.면앙정
4. 망월동의 봄 - 광주
5. 만경강에서 - 옥구 염전에서 심포리까지
6. 도요새에 바친다 - 만경강 하구 갯벌
7.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 안면도
8. 다시 숲에 대하여 - 전라남도 구례
9. 찻잔 속의 낙원 - 화계면 쌍계사
10. 숲은 죽지 않는다 - 강원도 고성
11. 땅에 묻히는 일에 대하여 - 여수의 무덤들
12. 그리운 것들 쪽으로 - 선암사
13.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 도산서원과 안동 하회마을
14. 무기의 땅, 악기의 바다 - 경주 감포
15. 복된 마을의 매맞는 소 - 소백산 의풍 마을
16. 고해 속의 무한강산 - 부석사
17. 태양보다 밝은 노동의 등불 - 영일만
18. 원형의 섬 - 진도 소포리
19.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 진도대교
20. 길들의 표정 - 덕산재에서 물한리까지
21. 산간마을 사람들 - 도마령 조동 마을
22.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 - 하늘재, 지름재, 조소령, 문경새재
23. 가마 속의 고요한 봄 - 관음리에서
24. 가을빛 속으로의 출발 - 양양 선림원지
25. 마지막 가을빛을 위한 르포 - 태백산맥 미천골
26. 노령산맥 속의 IMF - 섬진강 상류 여우치 마을
27. 시간과 강물 - 섬진강 덕치 마을
28. 꽃피는 아이들 - 마암분교
29. 한강, 흐르지 않는 세월 - 암사동에서 몽촌까지
30. 강물이 살려낸 밤섬 -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31. 조강에 이르러 한강은 자유가 된다 - 여의도에서 조강까지

에필로그 - 자전거 타는 사람 : 김기태

책 속에서

  벗들아, 과학과 현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이 가엾은 수사학을 조롱하지 말아다오. 나는 마침내 내 자신의 생명만으로 자족할 수 없고, 생명과 더불어 아늑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 부자유만이 나의 과학이고 현실이다. 나는 나의 부자유로써 나의 생명을 증거할 것이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만경강 저녁 갯벌과 거기에 내려앉는 도요새들의 이야기를 쓰던 새벽 여관방에서 나는 한 자루의 연필과 더불어,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의 절벽 앞에서 몸을 떨었다. 어두워지는 갯벌 너머에서 생명은 풍문이거나 환영이었고 나는 그 어두운 갯벌에 교두보를 박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 것도 만질 수 없었다. 아무 곳에도 닿을 수 없는 내 몸이 갯벌의 이쪽에 주저앉아 있었다.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전국의 산천으로 끌고 다닌 내 자전거의 이름은 풍륜(風輪)이다. 가을의 마지막 빛 속에서 풍륜은 태백산맥을 넘었다. 눈 덮인 소백·노령·차령산맥 들과 수많은 고개를 넘어서 풍륜은 봄의 남쪽 해안선에 당도하였다. 거기에 원색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제 풍륜은 늙고 병든 말처럼 다 망가졌다. 2000년 7월에 풍륜을 퇴역시키고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 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 하는가. 사랑이여,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 -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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