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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생활 4년째. 거칠어진 것은 성격만이 아니다, 라는 기막힌 카피의
피부관리실 광고를 받아들고 킥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회사생활 4년째, 나에게는 겨울을 감지하는 또 하나의 리트머스 종이가 생겼다.
별다방 커피의 빨간컵, 그리고 크리스마스 블렌드다.

요새는 계속 간당간당한 출근 때문에 여유있게 커피를 사들고 오지 못한다.
-시간관념이 그렇게 엄한 회사는 아니건만, 커피를 들고 5분 늦는 것은
왠지 작은마음클럽의 명예회장격인 나에게는 남의 시선이 의식되는 일이다
얼마전 자유게시판에 나이 지긋한 팀장님이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커피 쪽쪽 빨면서
올라가는거 별로 안좋아보인다..어쩌고 하는 글을 읽고 난후로.. 젊은직원들의
여론탓인지 그 글은 금방 자삭됐는데 난 운없게도 어려서부터 우리나라는 유엔지정
물부족 국가 이런 슬로건만 접해도 바로 물절약을 해야겠구나!! 주먹을 불끈쥐었던
규칙준수형 인간이었다. 하물며 그글을 삭제전에 봐버렸으니...어떻겠는가-
부서 다탁에 잔뜩 꽂혀있는 <부드러운 블랙> 을 가지고 마음을 달래곤 하는데
얼마전 빨간컵을 들고 다니는 광교 일대의 사람들을 보면서
아, 이젠 겨울이구나. 하고 감지해보게 된다.

아이스커피에서 오늘의 커피로 넘어가는 계절의 스산함 역시 내게도 즐거움이었지만
당연히 오늘의 커피가 어울리는 계절, 겨울을 알리는 빨간컵을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내 머릿속에 "겨울이다!! 크리스마스다!!" 라면서
시간의 종이 재잘거린다.

늘 그렇게 살갑지도 않은 엄마에게, 결혼을 하겠다고 말해놓고 나서
왠지 시한부 인생을 남겨놓은 것 같은 애틋한 마음으로 그러나
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리미티드 에디션이라길래 샀어...라면서
툭 하고 던져놓았던 스타벅스의 크리스마스 블렌드.
1년이 가까이 지나돌아와 나는 결혼을 하고
또다른 크리스마스 블렌드가 나왔음에도
엄마는 아직도 크리스마스 블렌드를 특별한 날에만 내리신다.

오늘 저녁은 정말 크리스마스 블렌드를 사서 돌돌돌 소리를 내며 갈아

주일날 방문하는 엄마에게 드려야겠다. 여전히 다감한 딸은 못되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내 마음을.
알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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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보직을 하는 업무특성상(전문성이라곤 애써 찾아봐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현재 와있는 부서는 종이를 많이 만지는 부서다. 그러다 보니 종이에 늘 손을 베곤 한다. 학생때라봐야 만지는 종이라고는 책, 이지만 여기 와서는 교정지부터 감수볼 원고, 서류봉투, 각종결의서와 기안문... 하루에 프린트를 몇장이나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은 문득 이렇게 안아깝게 종이를 막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에 인용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백지장에 베이면 의외로 그 여파가 세다.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아얏!!" 하는 소리. 가장 약하다고 평소에 여겨온 것들에 한방을 맞을 때의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니 난 고개를 박고 서류철을 넘기다 넘어가는 종이에 눈이 베인적도 있다(프하하) 안과에서는 동공을 비껴가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이주일간 병원에 올 것을 처방했다. 남편은 종이에 눈이 베었다고 하자 걱정보다는 예의 황당한 웃음을 먼저 지어 부상자를 체휼하지 못하는 비정함을 보여주었다.

애니웨이, 손가락을 종이에 베어 피가 찌익, 하고 배어나는데 반창고는 없고(우리부서의 거의 대부분의 사무원들이 다 종이에 손을 잘 베는데 반창고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 역시 백지장을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 갑자기 생각난 <봄날은 간다> 에서 상우가 은수에게 처방해 준 피 멎게 하는 민간의학, 심장보다 높은 위치에 손을 두고 팔래팔래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억이란 건 내 짐작보다 강력해서 은수가 상우를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이른 봄날 손을 다치자 손을 위로 들고 흔들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했듯이, 그 은수와 그 상우를 지켜본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손을 위로 향하고 흔들고 있었다.

손을 베었을 때 그 망연함 가운데서도 떠오르는 기억이었다면. 은수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상우를 더 많이 좋아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잠시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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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1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날 제가 종이에 손을 베이고 이 페이퍼가 기억나면 어쩌죠? 훗.
(어쩌면 종이에 눈을 베었다는 일화가 가장 먼저 떠오를지도요.)
 

와호장룡을 보았다. 나와 남편은 결혼식날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도 신부화장에 신랑 머리 다 한채로,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 을 보러갔었는데. 그러나 그보다도 더 사실 내가 좋아하는 이안의 영화는 와호장룡, 이다.

주인공 장쯔이의 이름이 룡(龍)이지만 사실 그녀는 숨어있는(藏) 용이 아니었기에, 영화의 제목과는 연결시키기가 뭣하고, 그저 영화의 제목을 생각해 보자면 누운 호랑이와 숨어있는 용, 즉 영웅과 전설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다. 는 뜻이다.  

전설의 보검 청명검의 행방을 둘러싸고, 가장 조신한 귀족 아가씨로 보였던 룡이, 사실은 푸른여우라는 고수의 사사를 받아 마침내 그녀를 넘어서는 무림의 고수가 되어가고 그녀의 승한 기재(氣才) 가 스스로를 어떻게 망가뜨려 갔는지를 다시한번 흥미롭게 볼 수 있는 계기였다.

자신을 얽매고 있던 모든 신분과 관습을, 결혼식 행렬에서 과감하게 깨 부수어 버리고, 남장을 하고 주막에 들린 그녀는 그간 눌려왔고 숨겨와야만 했던 자신의 무공비급을 수많은 고수들 사이에서 드러내며 현란한 검사위 속에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천하제일 보검 청명검의 주인, 검의 여신, 오늘은 아미산에서 노닐며 내일은 무당산을 밟으리라!!

억눌려왔다가 이제 드러낼 수 있게 된 스스로의 재능에 도취된 그녀의 막무가내의 검술행진은 결국 미향에 중독되고 자신의 스승 푸른여우에 의해, 그녀를 뒤쫓던 리무바이를 죽게 함까지 질주해가고, 결국 이 모든 것이 허망함을 깨달은 그녀는 한 청년이 간절한 소망으로 뛰어내려, 그 소원을 이루었다는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어쩌면 가장 대단한 것은, 가장 위대한 영웅과 전설은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나고자 하는 욕망들과 나를 과시하려고 하는 욕망들은 언제나 부글부글 끓고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려 하지만 가장 위대한 영웅과 전설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지 모른다. 

푸른여우가 죽어가면서 용에게 남긴 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독은 여덟살 아이의 거짓말과 같은 것이다"

나 한사람만을 지키고 드러내려는, 여덟살 아이의 치기어린 거짓말이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는 것. 내가 읽은 책 단 한 권으로 세상을 안다 생각하고, 내가 경험한 단 한가지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량하는 그 독으로부터 벗어나

누운 호랑이, 숨은 용의 미덕을 배우라고 하는 현명한 경고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요즘이다.

쓸데없는 이야기 하나. 장쯔이의 또박또박한 보통화 발음이 아주 듣기 좋았다. 장쯔이의 발음 외에는 이제 자막이 없으면 들리지도 않는구나...

 쓸데없는 이야기 둘. 로맨스로도 읽기에 충분한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끝끝내 펼치지 못하고, 이제서야, 중년의 나이에 와서야 가까스로 손을 맞대어 본 사형을 그대로 보낼수밖에 없었던 수련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쓸데없는 이야기 셋.  펼쳐지는 중국의 풍경들을 보면서. 2001년 이후로 밟지 못한 중국에 대한 새삼스러운 그리움이 생겨나다. 언제 갈수 있을까..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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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1-1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명검을 두고 생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영화 같아요. 근데 파란달님, 결혼 하신지 얼마 되지 않나봐요. 신부화장 한 채로 브로크백 마운틴을 남편분과 함께 보러가셨다니요. ^^ 왜 제가 다 기분 좋지요! 종종 뵈요^^
 



그간 벼르고 별렀던 <카포티>를 보았다. 중간중간 자막이 안나오고 따로놀고 pdp 업그레이드해준다고 서비스 와서 중간에 끄고 하는통에 5장의 cd 를 버려가면서 보고나니 한시였지만

그래도 정말 이 영화를 안봤다면, 혹은 중간에 포기해버리고 나중에 보지..했다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영화는 둔중하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화제의 살인범 페리 스미스를 소설로 쓰기 위해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불행했던 유년시절을 돌이키게 되고, 그와 자신이 한집에서 자라다가, 마치 그는 뒷문으로 나오고,  자신은 앞문으로 나온 것 같다는 고백을 할 만큼, 그와 가까워지고 심적으로 깊은 애정을 느끼지만

자신의 성공과, 4년간의 피땀을 쏟아온 역작의 발간을 위해서 그가 죽기를 간절히 바래야만 하는. 그의 사형을 손꼽아 기다릴수밖에 없는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나와,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내가 빚어내는 아이러니,

쿠당탕거리며 불화하는 두 명의 나 사이에서 성공과 명예와 인정을 좇아갔지만 결국은 파멸하고 말았던 불행한 한 천재의 모습을 영화에서 보았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어요, 라고 사형을 앞둔 페리 스미스에게 눈물지었지만, 그렇다. 오랜 친구 넬의 지적처럼 "그것은 당신이 원했던 것" 이었다. 카포티는 그를 사랑했지만 결국 자신의 작품의 성공을 위해서, 결말을 어서 내고 4년간의 세월을 부와 명예로 보상받기 위해서 그의 죽음을 고대하고 갈망했다. 그의 사형을 매일 기도했을 것이다.

 마지막 자막에서 카포티는 그의 어떤 미발간 작품의 에필로그에 그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응답받지 않은 기도보다도, 응답된 기도로 인하여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그후로도 오랫동안. 알코올중독 합병증으로 죽어가기 전까지 카포티는 몇번이고 되뇌었을 것이다. 응답받은 기도에 대한 쓰라린 후회를. 자기와는 달리 뒷문으로 나갈수밖에 없었던 한집에서 자란 소년을. 떠밀어 버린 것에 대한 오랜 참담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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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샤 2007-12-10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자막이 중간중간 안 나와서 그 안 나온곳을 찿을려다가 님을 만났습니다 늘 즐거운 날들이 되길 빕니다 
 

사람이 슬플때가 많지만, 내 마음을 몸이 배반할 때, 혹은 내 몸을 마음이 배반할때 슬퍼지곤 한다. 예를 들면, 마음으로는 그 녀석을 잊었다고, 이제는 다시 떠올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꿈에서 그녀석이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밝게 웃는다든지, 나도 모르게 친구한테 전화한다고 했는데 그 녀석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다든지. 꼭 연애사에 국한하지 않는다면 머리로는 이건 안돼!! 라고 생각을 하면서 몸으로는 자학적인 습관을 반복(폭식이라든지;;)하고 있다든지. 어쩌면 김유신이 천관의 집으로 향한 말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버렸던 것 역시, 그런 맥락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그런 때는 참 슬프다. 왜 내 마음과 몸이 따로 노냔 말이지. 마음과 몸은 하나라고 하면서도, 왜 그렇게 내 맘대로 안되는 것들이 많냐는 말이지.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그들의 옥상 애송이 땐쯔도 귀여웠지만, 그리고 마지막 결승전의 어이없는 결과도 재밌었지만, 또 정말 나이를 무색하는 이상아의 아름다움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으면서 마음에 사무쳤던 장면은 바로, 동구의 꿈 신이었다.
 
좋아하는 일본어 선생님(초난강은 진지한 역을 해도 웃긴다 "그래쿠나 무서운 꿈을 꾸엇던 것이쿠나"의 오마주.. 귀여운 감독들 같으니) 에게 "선생님 기뻐해 주세요, 저 드디어 멘스를 시작했어요" 라고 말하는 행복한 꿈을 꾸는 동구는 깨어나서 가만히 이불을 들쳐보고, 그리고 울면서 빨래판에 박박 팬티를 빤다. 카메라는 가만히 낮은 조명으로 동구의 울먹이는 등을 비춘다.
 
동구는 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멘스를 시작했어요" 라는 행복한 바램이 아닌, 남자로서의 육체를 엄정하고 날카롭게 드러내는 그의 육체의 반응 앞에, 너는 남자야, 라고 단정지어 보여주는 그의 육체의 반응 앞에..
동구는 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음을 배반하는 몸. 나는 여자야, 남자의 몸 속에 갖힌 여자야, 라고 생각하며 꿈꿔왔던 바램을 그의 몸이 냉정하게 배반하고 웃기지 말라는 듯... 그렇게 코웃음치는 그 순간에, 빨래를 벅벅 빨면서 흐느껴 우는 동구는.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발로 걷어차 주고 싶은 등짝, 이라는(맞나?-_-;;) 일본소설 제목도 있지만, 동구의 등이야 말로, 어루만져 주고 싶은 등이었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동구는 말했다. 마지막까지 예쁜 여자가 되지 못한 동구야, 그렇지만, 잘 살아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 자체는, 정말 작지만 행복한 일이 틀림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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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1-1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 영화 개봉할 때 못 보고 지나갔는데 빌려서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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