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미워서 죽여버리고 싶을 때 조차도.. 그런 순간에도 당신을 사랑해. 그래서 아직 여기 있어... 그래서 결국 나한테 남는 거 아무것도 없을 거 알면서도..... 내가 움켜잡으려 했던 행복이라는 것이 공기나 물 같은 것이었을뿐이라는 결론일 거 다 알면서도... 나 아직 여기 있어... ("내 남자의 여자" 에서 화영의 대사)
김수현 작가의 모든 작품을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양반께서 집필하신 대본은 다 본다(불꽃이라든지, 눈꽃이라든지 사랑과 야망이라든지.. 실제로 보진 못했으나 대본만 탐독한 사례). "우리시대의 신화 김수현 홈페이지(www.kshdrama.com)" 물론 본인께서 "나는 이시대의 신화야!!" 라고 앙칼진 일성을 지르신 것은 아니겠으나 암튼 홈페이지에서도 도도한 기운이 작렬하는 김수현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대본을 보곤 한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온 중간에 방영을 시작했기에 실제 드라마로는 한번도 보지 못했으나 대본을 보면서 숨을 꼴깍꼴깍 넘기곤 한다. 김희애는 완전한 사랑 - 아버님 전상서 - 눈꽃 - 내 남자의 여자까지 김수현 작가의 또다른 페르소나가 되어가는 것인가.. 김수현 작가의 대본들에는 샴쌍둥이같은 인물들이 드라마를 바꾸어가면서 등장하곤 하고, 또 편애하는 배우들을 거기에 아낌없이 기용해서 비교분석하는 재미가 있는 게 사실이다. 각설하고,
이 드라마는 상당히 진부한 내용인데(아마 그래서 모 작가가 김수현 작가가 자기 작품을 표절, 도용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워낙에 진부한 플롯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양반이 그 꼬장꼬장하고 도도한 성품에 "도용" 내지는 "표절" 을 과연 존심상해서 했을까? 내 생각은 "never"다) 그 진부한 내용을, 때로는 영락없이 진부한 대사를 끝까지 힘있게 끌어가는 능력이 바로 김수현 작가의 진정한 메리트가 아닐까 생각한다(감히 누가 누구에게 메리트를 논하는 거야!! 라면서 칼침을 맞을것 같다;;). 화영의 캐릭터는 아주 연극적이면서도 아주 서럽고 쓸쓸하기까지 하다. 미워서 죽여버리고 싶을 때 조차도, 그럴 때조차도 한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독백하는 여자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이 대사는 아주 낯익은 대사였다. 왜냐면... 내가 그러니까. 여행 중에 싸우고 화내고 발을 쾅쾅 구르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리고 잠들 때 조차도... 한순간도 곁에 있는 이 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 길고 지리한 냉전 끝에 "혼자서는 나갈 독기도 없지?" 라면서 빈정대는 사람에게 보란 듯이 혼자 바람부는 찬 밤거리로 나와서 내게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이방인들로 가득한 작은 커피숍에 앉아서 30분 정도를 버티다가 지루해 못견디고 들어가는 비위상하는 마음에서조차도...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 그런 말을 다 하지 못하는 어떤 소심한 캐릭터에 비해, 화영은 화라락 타버리고 재로 남았을지언정 솔직한 사랑을 하고 돌아서는 미워할 수 없는 여자니까. 둘도없는 친구 화영에게 남편을 하루아침에 빼앗긴 지수가 "납뿐년 너 정말 납뿐년이구나(김수현 작가의 대본상 표현이 종종 이런거다 "납뿐" 이런 ㅎㅎ 진정한 구어체의 활용자라고나)" 라고 부르르 떨면서도 결국에 그녀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은 지수가 천사표여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화영이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둘이어도 외로울 때, 세상에 둘밖에 없는 이 여행 중에서도 둘이어서 외로울 때 이 대본을 읽는다. 같이 살았고, 살고, 앞으로 같이 살 사람이기에 그러다가도 또 헤헤거리면서 함께 사진을 찍고 또 농담을 주고받고 손을 잡고 거리를 걷겠지만 그럼에도 늘 좋을 수만은 없고, 때로는 함께 있어도 깊은 우물 속에 잠긴 듯이 외로울 때가 있다는 것은 아주 슬픈 "당연지사" 다. 사람이니까.